율곡과 밤나무


율곡과 밤나무

 

이이는 자신의 호로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등을 사용했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율곡이다. 이이가 호를 ‘율곡’이라 정한 것은 고향인 파주 율곡리에서 따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율곡 이이는 밤나무와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에는 ‘너도밤나무’, 또는 ‘나도밤나무’에 관한 설화가 여러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다. 내용은 거의 비슷비슷한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율곡선생과 나도밤나무의 설화이다. 그 설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원수 공이 늦은 나이에 율곡을 낳아 애지중지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지나가던 도사가 어린 율곡의 얼굴을 보고는 관상이 좋기는 하지만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사주를 타고 났다면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호환(虎患: 호랑이의 습격으로 인한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이원수 공은 도사의 말대로 뒷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 정성껏 가꾸었다. 마침내 율곡이 스무 살쯤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율곡을 내놓으라고 하자, 이원수 공은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 정성을 다했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 사람과 함께 밤나무 수를 세어 보니 한 그루가 모자랐다. 그때 옆에 있던 나도밤나무가 나서서 자기도 밤나무라고 하니 그 사람은 호랑이로 변해 죽었다. 그 후 율곡은 호식을 면하고 훌륭한 인재가 되었다.

 

나도밤나무는 아이가 타고난 호환 운명을 예언하는 사람에 따라 시주승이나 도사가 예언하는 경우와 주모가 예언하는 경우로 나뉜다. 시주승이나 도사가 등장하여 예언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인 형태이며, 주모가 예언하는 경우는 율곡을 잉태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판관대(判官垈: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위치) 전설과 연관이 깊다. 결말도 호환을 막는 데 성공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나도밤나무의 유래담이나 율곡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많고 많은 나무 중에서도 하필 밤나무였을까? 갈잎큰키나무 참나뭇과의 밤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독특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바로 밤나무의 열매인 밤송이다. 밤송이는 다른 나무에서 볼 수 없는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다. 밤나무가 엄청난 가시를 가진 밤송이를 만든 것은 밤 알맹이 자체가 씨방이기 때문이다. 밤송이의 가시는 씨방을 보호하는 장치이다.

밤송이는 유교를 믿었던 중국과 한국의 문화에 아주 특별하다. 제사 때 반드시 올리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원래 예(禮)의 어원적 의미는 신들에 대한 제사에서 찾을 수 있다. 예는 보일 시(示)와 풍성할 풍(豊)이 합해진 글자이다.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놓고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이다. 인격적인 유일신 사상이 없었던 우리 민족의 제사 대상은 하늘과 조상이었다. 먹을 것을 새로 수확할 때마다 하늘과 조상에게 먼저 바쳤던 것은 비록 자신이 땀 흘려 얻은 결과라고 하더라도 하늘과 조상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사 때 밤을 이용하는 것도 밤의 특성과 관련 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종자에서 싹을 틔워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오지만, 밤나무는 종자의 껍질이 뿌리가 내려가고 줄기가 올라오는 경계 부근에 아주 오랫동안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밤나무를 자신의 근본, 즉 선조를 잊지 않는 존재로 여겼다. 아울러 밤은 자식과 부귀를 상징한다. 혼례에 밤이 빠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갑골문에 등장하는 율(栗)은 나무 위에 밤송이가 달린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가시가 달린 밤송이를 율자(栗刺)라 부른다. 율(栗)은 가시 때문에 ‘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밤송이의 특징 때문에 생긴 한자가 바로 전율(戰栗, 혹은 戰慄)이다. 전율은 두려워서 떠는 모습을 말한다.

중국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로 신주(神主)를 만들었다. 밤나무로 만든 신주를 ‘율주(栗主)’라 한다. 조선시대 왕가의 제사 때도 밤나무로 만든 신주와 신주를 모시는 궤를 사용했다. 가시를 지닌 밤송이를 통해 경건한 자세를 갖추기 위함이며 밤나무가 단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주에는 제사를 모시는 분의 이력을 모두 적어야 하고, 오랫동안 보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씨를 적을 만큼 결이 고와야 하고,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단단해야 한다. 신주의 재료인 밤나무의 길이는 한 자 두 치, 너비는 네 치, 두께는 팔 푼이다. 위쪽은 반달 모양이고, 나무의 면은 희게 해서 글씨는 먹으로 썼다. 글씨를 쓴 다음에는 옻을 두 번 칠했다. 후손들이 조상의 신주를 밤나무로 만든 것도 조상에 대한 공경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