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구곡가와 은병정사


고산구곡가와 은병정사

 

율곡은 29세가 되던 1564년(명종 19)에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좌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후 율곡은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할 때까지 3년간 호조좌랑,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이조좌랑을 지냈다. 이 벼슬은 모두 정6품직이지만, 가장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이른바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이었다. 육조의 낭관(郎官)은 요직이고, 사간원 정언은 청직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를테면 엘리트 코스의 벼슬길에 오른 것이다.

32세의 장년에 들어선 율곡은 16세의 선조를 새 임금으로 만났다. 선조는 비록 후궁의 소생이지만 품성도 바르고 공부도 많이 하여 그가 임금이 되자 신민의 기대가 자못 컸다. 선조를 새 임금으로 모시게 된 율곡도 이제야말로 횡포를 부리던 척신(戚臣: 왕비 집안 권력자)들이 모두 제거되고 선비가 꿈꾸는 왕도정치가 꽃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선조 또한 율곡의 해박한 지식과 경륜을 인정했다. 율곡은 18년간 조정과 향리를 오가면서 간헐적으로 벼슬살이를 이어갔는데, 율곡이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파주, 해주의 석담 등지로 은거한 것은 선조가 율곡의 말을 옳게 받아들이면서도 실천을 게을리 하고 개혁을 두려워하여 율곡을 실망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율곡이 비록 충성스럽고 똑똑한 선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언사가 너무 과격하고 개혁에 대한 열망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그를 견제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음)의 관계를 가지면서 숨바꼭질을 하듯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다시 말해 율곡을 불러들이면 골치 아프고, 율곡이 물러나 있으면 그의 경륜이 필요한 것이 선조의 입장이었고, 임금을 만나면 직언으로 정치를 비판하고 임금이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는 것이 율곡의 몸가짐이었다.

율곡이 서른다섯의 나이에 해주로 물러나 있을 때는 야두촌(野頭村)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처가 노씨의 전장(田莊: 경작지)이 있었다. 율곡의 학문적 명망이 높았기에 해주까지 내려가 배움을 청하는 서울 선비들도 많았다. 이듬해 해주의 고산(高山)에 있는 석담구곡(石潭九曲)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구곡에 이름을 붙였는데 특히 제4곡을 송애(松崖)라 이름하고 기문을 지었다. 이때부터 율곡은 이곳에 복거(卜居: 살 곳을 정함)할 뜻을 세웠다.

그러나 석담에 살고자 한 뜻이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이듬해인 37세 때 병이 생겨 부득이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선조가 부응교의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부르자 가까운 파주의 율곡(栗谷)으로 몸을 빼서 가버렸다. 그 후 선조가 다시 사간원 사간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홍문관 응교와 전한, 직제학 등 벼슬을 올려가면서 거듭 부르자 어쩔 수 없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동부승지, 우부승지, 대사간 등을 지냈다. 그 사이사이 벼슬을 그만두고 율곡으로 돌아가 쉴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정치와 사회의 개혁안을 지속적으로 내어놓았다는 점에서 우국애민의 선비정신을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은 43세가 되던 1578년 해주 석담의 청계당 동쪽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삶을 본격화하였다. 석담은 수양산 지맥이 서쪽으로 달려 형성된 선적봉과 선적봉 서쪽 수십 리에 있는 진암산 사이에 있었다. 물길이 두 산 사이로 흘러나와 아홉 번 꺾이며 40리를 달려 바다로 들어가는데, 꺾이는 곳마다 못이 있어 배를 띄울 정도로 깊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대부분의 조선 선비들이 동경하던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우연히 닮아 있었다.

율곡은 이곳에 은병정사를 세우면서 석담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한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이것이 우리 시가사에서 길이 빛나는 「고산구곡가」이다. 이는 송나라 주자가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가」를 지은 것을 본뜬 것이다. 「고산구곡가」는 한글로 지었으나 뒷날 송시열이 이를 한문으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이렇게 석담에 청계당과 은병정사가 세워지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더욱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율곡은 은병정사 북쪽에 주자사(朱子祠)를 세우고 여기에 조광조와 이황을 배향하려고 계획하여 규약까지 만들어 놓았으나 건물을 세우기 전에 세상을 떠나니, 2년 뒤에 제자들이 유지를 받들어 세웠다.

은병정사는 율곡의 사후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604년 해주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중수하고 신흠(申欽)이 지은 기문을 붙였다. 이와 함께 석담의 유적을 그림으로 그려 전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권섭의 <제고산구곡도(題高山九曲圖)>와 「고산구곡도설(高山九曲圖說)」에 따르면, 율곡의 서현손인 이석이 가장 먼저 고산구곡도를 그렸고 이를 평양의 화가 조세걸이 모사하여 김수증이 소장하고 있었다 한다.

이석이 그린 그림은 후에 원만령이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동방 도통의 적자임을 자부한 송시열이 다시 모사하게 하였다.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 차운하여 이이의 「고산구곡가」의 뜻을 담은 시를 짓고, 자신의 문인에게 구곡을 분배하여 한 편씩 시를 짓게 한 다음 이를 김현성의 글씨로 적어 <고산구곡도>와 함께 장정하였다. 이 일은 송시열의 고제자 권상하가 실무를 맡았다. 권상하를 비롯한 김수증․김수항․송주석․송규렴․김창흡․이희조․정호․이여 등 아홉 사람이 구곡에 대한 시를 지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송시열과 권상하가 대를 이어 이룩한 이 「고산구곡도」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율곡과 그의 풍도를 흠모한 후인들은 지속적으로 석담을 그림으로 그려 이를 바라보고자 하였다. 영조는 1760년 석담서원과 율곡이 살던 옛 집터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도록 명하였으며, 정조도 1781년 고산구곡을 그려 올리도록 명한 바 있다. 정선이 <석담도(石潭圖)>를 그린 바 있고, 김홍도․김득신․이인문 등이 구곡을 나누어 그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의 그림에는 율곡의 생전에 없던 소현서원과 요금정(瑤琴亭)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다. 소현서원은 율곡을 제향하기 위해 은병정사가 있던 곳에 세운 것이니 은병정사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요금정은 이희조가 해주목사로 나간 1699년에 세운 정자이다. 이희조의 「석담요금정기(石潭瑤琴亭記)」에 따르면 율곡은 거문고를 좋아하였는데 율곡이 죽은 후 최립이 그 거문고에 잠(箴)을 지어

“은병이 그윽하니 선생이 마음을 깃들인 곳이요, 금탄이 시원하니 선생이 소리를 의탁한 곳이다. 은병 아래 금탄 위에 선생이 거문고를 매만졌으니, 나는 선생이 음(音)을 얻은 것은 얕지만 마음에 안존한 것은 깊다고 생각한다.

선생은 명(銘)을 지었고 나는 좇아 잠(箴)을 짓노라. 은병 위와 금탄 아래 달빛이 잠기고 바람이 그치면, 선생이 계실 때처럼 나를 위해 거문고 한번 울려주었으면 좋겠네.”

라고 하였다. 그 후 이 요금정은 1739년에 홍수로 허물어진 것을 고을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1742년에 중수되었다. 그래서 18세기 석담을 그린 그림에는 모두 요금정의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