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율곡, 같은 시대 다른 삶


퇴계와 율곡, 같은 시대 다른 삶

 

퇴계와 율곡이 처음 만난 것은 1558년(명종 13) 율곡이 처갓집이 있는 경상도 성주에서 강릉의 외조모 댁으로 가는 도중에 안동에 들려 퇴계를 찾아가 이틀 밤을 묵었을 때였다. 두 사람은 그 후 1567년(명종 22) 6월 퇴계가 임금의 부름에 답해 서울로 올라오자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부터 따져본다면 9년째가 되는 해였다. 이때는 율곡이 벼슬길에 나선 지 4년 째 되는 해로, 호조와 예조의 좌랑을 지내고 나서 사간원 정원을 거쳐 이조좌랑으로 일하던 때였다.

그전까지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여러 차례 거절하고 오랫동안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명에서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고, 조정에서는 사신을 접대하는 제술관으로 퇴계가 적임자라고 추천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문장과 학문이 뛰어난 인물을 발탁하여 그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퇴계는 이미 여러 차례 임금이 부르는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아 난처한 입장이었고, 또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사신이 머무는 동안만 필요한 임시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따라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퇴계가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명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신을 영접하는 일을 맡기 위해 올라왔지만, 퇴계는 임금의 장례를 눈앞에서 맞게 되었다. 퇴계는 국장을 맞아 명종의 행장을 지어 올렸고 곧이어 예조판서의 자리를 맡으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퇴계는 예조판서를 맡을 수 없다고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마침내 해직되자 다음 날 새로운 관직이 내리기 전에 임금에게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당시는 명종의 장례가 아직 끝나지도 않은 때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퇴계의 처신을 놓고 크게 물의가 일었다.

율곡은 퇴계가 서울에 있을 때 힘써 조정에 남도록 설득했고, 또한 따로 편지를 보내 낙향하려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다. 이때의 사정이 율곡의 『경연일기』에 보인다.

 

이이가 이황을 뵙고서 말했다.

“어린 임금이 처음 서시고 나랏일에 어려움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보더라도 선생께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황이 대답했다.

“도리로는 물러날 수 없지만 내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소. 몸에 병도 많고 능력도 또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요.”

그때 성혼을 참봉으로 삼았으나 나오지 않았으므로,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물었다.

“성혼은 왜 오지 않소?”

그러자 이이가 대답했다.

“성혼은 병이 많아 관직을 맡지 못하오. 만약 강제로 벼슬하라 하면 그것은 그를 괴롭히는 일이오.”

이황은 웃으면서 말했다.

“숙헌(이이의 자)은 성혼은 두터이 대접하면서 어찌 나는 그리 야박하게 대접하오?”

그러자 이이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한 몸의 사사로운 계책을 생각해줄 여지가 없습니다. 낮은 벼슬로 성혼을 바쁘게 한다고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경연 자리에 계신다면 이익이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한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이 대답했다.

“벼슬은 진실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일 남에게는 이로움을 미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에게 근심이 절박하다면 할 수 없소.”

이이가 말했다.

“선생이 조정에 계신다면 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임금이 마음 깊이 의지하고 사람들도 기뻐하며 힘입을 것이니, 이 역시 이로움을 남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은 퇴계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나서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율곡은 당시 조선의 형세를 서서히 허물어져 가는 만 칸의 큰 집에 비유하면서 ‘지금 여러 해 동안 손질하지 않는 바람에 옆으로 기울고, 위로는 빗물이 새고, 대들보와 서까래는 좀이 먹어 썩어가고, 단청은 모두 벗겨졌는데 임시방편으로 손을 보아 간신히 아침저녁을 넘기고 있는 신세와 같다.’고 보고 있었다. 율곡은 개혁의 긴급함과 현실의 답답함 속에서 번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나라가 고질병에 빠진 것이 20년이 넘었습니다. 아래위가 모두 옛 관습만 따를 뿐, 한 올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백성의 힘은 이미 말랐고 나라의 저축도 이미 비었습니다. 만약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벼슬하는 선비는 곧 허물 천막에 집을 지은 제비 신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 생각만 하면 한밤중에 저도 모르게 일어나 앉게 됩니다. 저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선생께서는 새 임금의 은혜를 입고 벼슬이 육경에 올랐는데 이에 대해 무심하실 수 있겠습니까?

율곡전서』9, 「퇴계선생께 올림(上退溪先生)」정묘(1567) 6월

 

율곡은 퇴계에게 다시 한 번 ‘문을 닫고 병을 다스리면서 대궐 일에 신경 쓰지 않더라도 서울에만 계시면 선비들의 기개가 저절로 갑절이나 될 것이요,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퇴계가 물러나려 하면서 내세운 논리, 곧 병이 많고 능력이 부족하여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율곡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이러한 퇴계의 처신을 놓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들끓었다. 퇴계를 ‘산새’와 같다고 하는 이도 있고, 이단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율곡도 퇴계의 처신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율곡은 낙향한 퇴계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벼슬길에 나오도록 권유했다. 율곡은 이 편지에서 퇴계에게 조정에 나와 임금을 도우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여기서 두 사람 사이에는 관직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퇴계나 율곡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림이라면 누구나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출처의 의리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때문에 고민했다. 임금의 은혜를 입은 신하요 큰 뜻을 품은 사대부로서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보살펴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바치는 것은 어릴 적부터 꿈꾸어오던 그들의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임금이 어둡고 세상이 혼탁하면 부귀와 영화에 홀리지 않고 초연히 은거하여 스스로를 기르는 것 또한 선비가 가야 할 길이었다. 조선 중기를 사는 양반 사대부라면 누구나 두 가지 길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그리고 자신이 하늘에게서 부여받은 임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갈리게 될 터이다.

퇴계나 율곡도 이 문제로 늘 고민하고 갈등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 이러한 고민과 갈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살펴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어느 한 길만이 옳은 길이며 그 길만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 길이 모두 가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 다만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좀 더 가치 있고 올바른 길인지 끊임없이 고민했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심했을 따름이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판단에 달린 문제였다. 이에 대해 퇴계는 자신의 소명을 은거와 학문에서 찾았고, 율곡은 관료로서 나라에 헌신하는 데서 찾았다.

퇴계와 율곡이 세상을 떠날 때 보여준 마지막 모습은 이러한 가치의 갈림길이 과연 어떤 것인지 웅변으로 들려준다. 퇴계는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제자들과 생활을 같이 하고 있었다. 1570년 12월 퇴계는 병세가 악화되자 세상을 마칠 준비를 했다. 유언을 구술하여 조카에게 적게 하고, 제자들을 불러 만나보며 마지막 길을 정리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던 날을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2월 8일 아침 선생께서 분매(盆梅: 매화나무 화분)에 물을 주라고 명하셨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조카 교를 불러 말씀하기를,
“내 머리 위에서 비바람 소리가 들린다. 너도 들리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하였다.

선생에게서 편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유시(酉時:오후 5~7시)에 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들어 지붕 위에 한 치 가량의 눈이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께서 누운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하시고는 붙들고 일어나 앉아서 돌아가셨다. 곧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개었다.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하, 「기선생임종지명(記先生臨終之命)」

 

반면 율곡은 벼슬길의 어려움을 절감하면서도 퇴계와 같이 떨쳐 벗어나지 못했다. 좀처럼 사림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 선조의 태도를 되돌리고, 동서로 갈라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던 사림세력을 화해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하다가, 1584년 1월 49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것도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러 찾아온 관리에게 병을 무릅쓰고 방략을 일러주다가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이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이 순무어사로 관북에 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이이를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만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이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만약 이 일로 병이 더 심해진다면 그 역시 운명이다.”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죽었다. 향년 49세였다.

선조수정실록』선조 17년(1584) 1월 1일 기묘(己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