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事師) – 스승을 잘 따르라


스승을 잘 따르라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스승의 날에 부르는 노랫말의 일부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은 정말로 노랫말처럼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지나가는 행사이나 아무 생각 없이 부를까? 그 답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사회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저 필요에 따라 인용하는 옛말일 뿐이고, 스승을 존경하기는커녕 비난하거나 대드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학교 급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심지어 ‘스승은 종업원 학생은 고객’이 되어, 스승은 고객의 진상에 쩔쩔매는 종업원의 신세로 전락한 느낌마저 든다. 이제 스승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이나 정보를 파는 사람, 그 지식이나 정보가 하잘 것 없으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고 마는 처지에 놓였다. 고매한 인격과 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이런 현상이 개탄할 일이라고 목청 높여 말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는 지식과 정보가 일부 사대부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배우려면 그들은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보통의 지식과 정보를 가질 수 있으니 그런 지식을 소유했다고 해서 존경스러운 일도 아니리라. 더구나 돈 되는 지식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지 않겠는가?

게다가 스승이 얼마나 많은가? 학교나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강사, 교수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 가운데 혹 누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실제로 권력의 시녀가 되거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는 스승들도 있어서, 줄곧 스승의 권위가 점점 땅에 떨어지는 데 일조하였다. 참된 스승이 어딘들 없겠냐마는 스승을 존경하는 사람을 점점 찾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학교모범일곱째 항목에서 율곡 선생이 스승을 섬기라는 사사(事師)가 그저 당시에만 통용되고 오늘날 불필요한 말일까? 게다가 율곡 선생은 맹목적으로 스승을 섬기라고만 했을까? 선생이 스승을 섬기라는 내용은 어떤 것일까?

 

배우는 자가 성심으로 도에 뜻을 두었다면 먼저 반드시 스승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 사람은 임금·스승·어버이 세 분 덕에 태어나고 가르침을 받고 길러지니, 하나같이 섬겨서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임금·스승·어버이를 교육적 차원에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로 여겨 그 은혜가 같다고 여겼다. 옛날에는 이렇게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요즘은 임금이 없으니 임금대신에 국가나 사회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거나 국가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니, 은혜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니 당시와 지금의 시대적 문화 차이 때문에 선생의 이런 발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배우는 사람들이 부모님이나 스승의 은혜, 그리고 국가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일이 있다면 매우 가상한 일이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 보살핌과 가르침을 자신의 권리라고 여겨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은 구체적으로 스승을 어떻게 섬기라고 했을까?

 

평상시에 모시고 받들 때 존경을 다하고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고 명심하여 그것을 잃지 않도록 한다.

스승의 언행에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조용히 질문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지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스승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또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스승의 말만 무작정 믿어서는 안 된다.

 

율곡 선생도 가르치는 스승이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도 인간인 이상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이 있을 수 있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존경하고 가르침을 믿고 명심하라고 하였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사실 스승은 가르침을 위해 존재한다. 학생이 스승을 찾는 것은 배우기 위해서이다. 만약 배움을 주는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하물며 배우는 학생이 사리가 분명한 성인(成人)도 아니고 청소년이라면, 더구나 그가 존경할 수 없고 심지어 비난받아야 할 스승으로 여긴다면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래서 일찍이 순자(荀子)도

“스승을 비난하면 스승이 없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학생이 스승을 존경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스승을 위해서라 아니라 배우는 학생자신을 위한 일이다. 스승을 잘 섬기는 것은 학생이 제대로 배우는 지름길이었다. 예컨대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닮으려고 한다. 옷차림은 물론 언행까지도 모방하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그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승을 존경해야 스승의 가르침이 먹히기 때문이다.

그럼 스승의 잘못을 그냥 보고 넘어가자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단지 비난하지 말고 조용히 질문을 하라고 한다. 그 질문에 스승이 자신의 잘못을 알아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학생의 오해일 수도 있어 그것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질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학생의 머릿속에는 스승의 잘못만 기억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해야 한다.

이렇게 율곡 선생의 스승을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스승의 잘못에 대해 학생들끼리 수군거릴 뿐 아무도 질문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간혹 학생이 스승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한다고 싶으면 다짜고짜 항의부터 하려 드는데, 선생이 말한 이러한 정중한 질문이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 아닐까? 물론 스승 된 자도 이런 질문에 솔직해야 하고 화를 내서도 안 된다.

아무튼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확인되지 않은 나쁜 소문이나 평판만 듣고 가르치는 사람을 평가한다든지, 때로는 작은 오해로 스승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 또한 제대로 배울 수 없는 태도이다.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사람 곧 스승이 된 사람은 항상 언행에 조심하고 학생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단지 직업으로 가르치는 일에만 종사하고 평소 자신의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교육적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스승의 권위가 조선시대만 못한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만약 어떤 가르치는 사람이 스승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보통의 가르치는 사람에게 없는 특별한 지식과 기능과 인품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제자를 골라 가르칠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없이 단지 도덕적 교훈 따위로 스승을 잘 섬기라고 해서 잘 섬기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인간은 대개 자기보다 특출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