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친(事親) – 어버이를 잠 섬겨라


어버이를 잠 섬겨라

 

자식이 부모에게 패륜을 저지른 범죄가 종종 보도되고 있다. 부모에게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비록 패륜은 아니더라도 나이든 부모를 잘 모시지 않거나 심지어 홀로 방치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론 생활형편이 어려워 모실 수 없는 경우도 있겠고, 무관심과 부부나 형제사이 의견의 불일치로 모시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홀로 사는 독거노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어느 지역에 홀로 사는 노인 가운데서 하루사이 세 건이나 고독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고독사한 노인들 가운데는 자식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 죽어서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젠 남의 일이 아닌 듯이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돈 없는 부모는 그저 귀찮고 성가신 존재일 뿐일까? 아니면 함께 살 수 없는 피치 못할 어려운 여건 때문이었을까?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예전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이 줄어든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효도를 해야 하며, 또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하는가? 아니 효도랄 것도 없이 어떻게 하면 자식이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까?

학교모범』의 여섯 번째 주제는 어버이를 섬기는 사친(事親)이다. 옛 사람들의 효도의 이유와 방법을 알아보자.

효도는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에도 있을 정도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덕목이지만, 특히 유학에서 강조해 왔다. 부모께 효도해야 하는 이유는 보통 낳아주고 길러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으로서 도리이자 천리(天理)라고 가르쳐 왔다. 그래서 율곡 선생도 삼천 가지 죄목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다는 옛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다.

사실 낳아주고 길러주었기 때문에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조건적인 규범이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유학은 인간이 되는 근거 가운데 하나를 효도에 둠으로써 그 실천의 당위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래서 이런 유교문화 때문에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효도가 잘 먹힌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율곡 선생은 아래와 같이 효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평소에 반드시 극진하게 공경하여 명을 받들어 따르는 예(禮)를 다하여야 한다.

봉양할 때는 즐겁게 하여 음식으로 받들며,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근심하며 치료해 드리고, 돌아가시면 슬퍼하며 상례를 치루며, 제사를 지낼 때는 엄숙하게 추모의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일단 공경(恭敬)을 먼저 말하고 이어서 봉양과 질병의 치료, 그리고 상례와 제례를 말하였다. 그러니까 살았을 때만 아니라 돌아가셨을 때도 효도가 필요하였다. 봉양만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공경해야 해야 한다는 점은 공자가 일찍이 강조한 일이기도 하다. 공경이란 쉽게 말해 공손히 섬기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봉양을 잘해도 공손히 모시지 못하면 진정한 효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은 종교에 따라 장례 방식도 차이가 있고 또 점차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으니, 이런 분들을 불효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런 선생의 가르침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법으로 정한 일도 아니고 관습도 변하고 있으니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제사는커녕 살아있는 부모를 제대로 모시는 것만도 훌륭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부모가 살아계실 때에 하는 효도의 방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겨울에는 따뜻하게 모시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며 아침에는 문안으로 살피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드리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알리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뵙는 것까지도 모두 성인의 가르침을 따른다.

부모에게 혹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정성을 다하여 은근히 말씀드려서 점차 도리로써 깨닫게 해야 한다.

자식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몸을 돌이켜 보아 바른 행동이 갖추어지게 하고 시종일관 덕을 온전히 하여,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고서야 능히 어버이를 섬긴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내용을 보면 한부모의 자녀로서 오늘날 실천하는 데도 손색이 없다. 특히 부모에게 잘못이 있을 때 간(諫)하는 것이나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여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는 점은 오늘날 더욱 필요한 일이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이렇게 부모를 모셨으니 효도하는 본인 또한 훗날 그 자식으로부터 이렇게 효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효도는 어쩌면 상부상조하는 훌륭한 사회보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혼인을 못해서, 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직장 때문에, 또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해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또 사회적 분위기가 예전같이 않아 자신의 배우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효도를 제대로 할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혼인을 해도 자식을 낳을 생각도 안한다. 양육비와 교육비가 많이 드는 까닭도 있지만, 어차피 낳아서 길러봐야 효도를 받기는 글러서 밑지는 장사(?)라는 생각도 작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 아무리 효도를 강조하고 또 어떤 철학적·윤리적 근거를 가지고 효도를 주장해도 그것을 실천하는 자식들은 늘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부모가 돈이 많이 드는 중병이나 치매 같은 난치병에 걸리면 모시기가 쉽지 않다. 병원 치료비도 문제지만, 직장일로 잘 보살필 수도 없다. 단지 효도하려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민으로서 제대로 모시려니 생활자체가 파탄에 이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다보니 이제 자신도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든 자식이 더 나이든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럴 경우 모두 국가에서 해결해주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세태가 그러해도 여전히 효도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 가운데에는 가문의 전통과 관습이나 의무감 또는 도덕적 양심 때문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간혹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계산적이지 않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이 있고 싶고 잘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양육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사랑하는 방법이 훌륭한지 졸렬한지 다를 뿐이다. 사랑하는 방법이 훌륭하다면 자식의 가슴속에 부모의 사랑이 전달될 것이지만, 그 방법이 졸렬하다면 반항심과 증오만 키울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데도 올바른 방법이 필요하며, 그 경우에 간혹 효도를 강조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알아서 효도하게 된다. 자식이 혼인한 이후의 그 배우자인 며느리와 사위도 자기 자식처럼 그렇게 사랑한다면 먼 훗날 그 며느리나 사위도 친부모처럼 사랑하지 않겠는가?

이치가 이러하나 요즈음 나이든 중년 이상의 부모들을 보면 아예 자녀의 효도 따위를 체념해 버리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일이나 고독사는 이제 피치 못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아니면 그게 싫어서 돈으로 면해 보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인생의 끝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