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우(擇友) – 친구를 잘 선택하라


친구를 잘 선택하라

 

당신에게는 친구가 몇 명이 있는가? 그 친구들이 당신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직장이나 학교 또는 동창회나 동호회처럼 같은 모임에 나가기 때문에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 그리고 사귀는 목적이 무엇인가? 친선도모나 공통의 취미나 취향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학교나 고향출신이라서 사귀는가?

이처럼 성인의 경우라면 대개 학교, 직장, 출신지역, 동호회, 사업, 종교 등을 매개로 친구를 사귀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학교나 출신지역으로 보자면 오래된 친구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친구를 사귀는 경우는 서로 간 나름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사귄다. 사귀는 목적은 대개 친선이나 친교, 상부상조 등이 대부분이고 때로는 학문이나 예술 또는 사회봉사나 종교적 실천의 동반자로서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들은 어떤 기준에서 사귈까? 상대의 외모, 집안 배경, 뛰어난 자질이나 능력 등도 한 몫 할 것이다. 예컨대 집안이 부유하여 돈을 잘 쓴다든지, 외모가 출중하여 남의 시선을 끌거나 탁월한 운동기능이나 예능이 있을 때 친구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상대가 마음이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아야 한다. 아무리 이런 조건을 갖추어도 마음이 옹졸하고 이기적이면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사실 그보다도 청소년들에게는 같이 놀아주는 상대가 친구가 되는 경우가 가장 훨씬 많다. 운동이나 취미활동 및 여행 등은 물론이고, 음주나 흡연처럼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조차도 함께하고 호응해야 친구가 된다.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처럼 청소년기에는 친구를 잘못 사귀어 탈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2014년에 개봉했던 영화 ‘피 끊는 청춘’에서도 보이지만, 이른바 ‘일진’을 중심으로 친구들이 몰려다니고 패싸움 따위를 하기도 한다. 친구의 잘못을 말하기는커녕 같이 행동하고 그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는다. 비록 대등한 관계의 친구가 아닐지라도 같이 어울려 다닌다. 이 영화는 주인공인 이종석(중길 역)과 박보영(영숙 역)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렇게 좋게 끝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당시는 어떠했을까? 율곡 선생이 권하는 친구사이는 어떠한가? 『학교모범』의 여덟 번째 주제는 택우(擇友) 곧 친구를 골라서 사귀는 일이다.

 

학문을 갈고 닦아 인(仁)을 돕는 일은 실로 친구로부터 힘을 얻는다.

 

선생의 이 말에는 친구를 사귀는 목적이 들어 있다. 그 목적은 인(仁)을 돕는 곧 보인(輔仁)에 있다는 것이다. 보인이란 말은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인데,

“군자는 학문을 익히면서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
(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니까 친구를 사귀는 목적은 친구들끼리 바른 도리를 서로 권하여 인덕(仁德: 어진 덕)을 쌓는 데 있다.

그런데 착한 덕을 쌓기 위해 친구를 사귄다는 말은 요즘 청소년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친구를 사귀는 동기자체가 덕을 쌓는 것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거리가 있는가? 이것은 청소년들이 대체로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많이 받기 때문에, 육체적이고 감각적이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자극적인 일에는 쉽게 반응하고 관심을 보이지만, 이성적인 덕이나 도덕은 좀처럼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수의 성인(成人)들도 그러할진대 청소년이나 그 이하의 어린이들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바로 여기서 윤리나 도덕에 관련된 교사나 교수 그리고 인성교육을 바라는 학부모들의 세심한 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 현대사회는 청소년들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비도덕적인 유혹이 너무 많아서, 그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일단 이런 청소년들의 경향을 이해하고 인성교육이든 도덕교육이든 이들에게 먹힐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율곡의 이런 친구사귀는 목적이 자칫 현실에서 하나의 이상론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어떠할까?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반드시 충성과 신의, 효도와 우애가 있고, 강직하고 방정하며, 돈독한 사람을 가려 친구로 사귀어야 한다.

잘못이 있으면 서로 경계하고 선행(善行)을 함으로써 서로 충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함으로써 친구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만약 마음먹은 것이 독실하지 못하고 자기 몸을 단속하는 일이 엄숙하지 못하여 경박하고 방탕하며 즐겁게 노는 것만 좋아하고 말 잘하는 것과 기운만 숭상하는 자는 모두 벗으로 사귀지 말아야 한다.

 

친구를 사귀는 목적이 그러하듯, 사귀는 방법도 도덕적인 사람을 골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친구에게 잘못이 있을 때 충고할 수 있어야 한다. 『논어』에서는 충고하여 잘 인도해야 하는데 친구가 말을 듣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으며 그만 두라고 한다. 그러니 방탕하고 경박하고 덕이 되지 못하는 일을 숭상하는 사람이야 친구로 사귈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이 우리 조상들 특히 선비들의 친구 사귀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의 친구사귀는 것이 오늘날 통할까? 청소년은 물론이고 성인사회에 있어서도 상당이 난처해 보인다. 우선 같이 놀아야 친구가 된다. 오락실도 같이 가고 운동도 경우에 따라서는 탈선도 같이 해야 친구가 된다.

보통의 성인의 경우도 같이 노는 것은 물론이고 각자에게 이득이 되어야 친구로 두려고 한다. 사업이나 승진 또는 출세하거나 아니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심지어 남에게 자랑이라도 할 수 있는 지위나 명성을 지닌 사람을 친구로 두려고 하지, 내게 손만 벌리고 늘 도움만 받으려고만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친구로 사귀려 들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러한 도움 없이 그 사람의 인품만 훌륭하다고 해서 쉽사리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더욱이 그런 분이 가난하다면 더욱 멀리 할 것이다. 그나마 나은 경우라면 서로가 필요할 때 돕는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리가 적용되는 친구사이이다. 성인사회의 친구사귀는 동기는 실제로 도덕보다 이런 이익이 지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의 친구 사귀는 목적과 방식에 비추어 오늘날 보통 사람들의 친구사귀는 목적이나 방식을 비난할 수 있을까? 혹 우리가 이익을 떠나서 살 수만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목적은 서로의 이익을 포함하여 서로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며, 같은 목표를 실천하는 동지로서, 때로는 가족처럼 필요할 때 서로 돕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목적의 외연이 선생이 말하는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더 넓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도덕적 덕을 쌓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더라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떻든 아무나 함부로 친구를 사귀어서는 안 되겠다. 그 점은 예나지금이나 통용되는 진리이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

는 말이 있듯이 친구 때문에 내가 잘못될 수도 있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에 유학을 따르던 옛날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사회나 인간을 바라보는 철학이나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다. 오늘날 유학의 가르침도 수많은 가르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