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인(接人) – 남을 올바르게 대하라


남을 올바르게 대하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남과 어울려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로빈손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고, 우리나라도 이른바 ‘자연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일도 있어서, 혹 누가 혼자 살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로빈손 크루소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살다가 훗날 사회에 복귀하였고, 자연인 또한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통해 만들어 놓은 물건을 사용하기도 하고 가끔씩 산에서 내려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정해진 질서가 있다. 그 질서 가운데 강제적 규범으로는 법이 있고 자율적 규범으로는 윤리나 도덕 그리고 예법과 관습 등이 있다. 누가 자율적 규범을 어겼을 때 비록 법적인 구속력이 없더라도, 비난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청소년들 사이에도 나름의 질서를 세우는 규범이 있는데, 가령 선배와 후배의 구별, 또래 사이에서 잘 난 척 하지 않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재학 시절에는 대개 같은 나이 많아야 한두 살 차이 나는 학생들과 생활하지만, 일단 사회에 나오면 여러 연령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나이가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또 조선시대라면 신분이나 덕(德) 또는 벼슬이 거기에 추가 되었다.

오늘날은 그런 신분은 철폐되었고, 벼슬 또한 하나의 직업으로서 직위 또는 지위 개념에 속한 문제라 같은 직장 안에 있는 구성원들에게는 사람을 대하는 나름의 기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는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다만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에게는 거기에 알맞은 예우가 법적으로 정해져 있을 뿐이다. 또 덕이 기준이 되는 경우는 이제 매우 드물다.

어쨌든 나이만은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사람을 대하는 강력한 기준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나이든 노인에게 반말을 쓰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며, 반면에 노인이 젊은 사람에게 반말을 써도 크게 흉이 되지 않는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말을 배울 때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높임말·예사말·낮춤말의 표현이라는 점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가 나이든 사람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면, 버릇없다거나 심지어 ‘싸가지 없다’는 비속어로서 비난받기도 한다. 우리 속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을 보면 안다.’라는 말도 이런 배경에서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의 부정적인 전통 가운데 하나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고, 그 때문에 ‘나이가 무슨 벼슬이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이 『학교모범』 속에서도 나이에 따른 사람을 대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열 번째 주제로서 접인(接人)이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이 나이에 따라 사람을 대우해야 한다고 하는 말이 현대적 관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일인가? 일단 선생의 주장을 들어 보자.

 

남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예의를 준수해야 한다. 나이든 사람을 섬길 때는 동생처럼 대하되, 잠자는 것과 먹는 것과 걷는 것은 모두 나이든 사람보다 뒤에 해야 한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이상이면 형으로 섬기고, 두 배 이상이면 더욱 공손하게 대우한다.

 

일단 여기까지 보면 선생이 사람을 대우하는 기준이 확실히 나이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대전제가 있다. 남을 대할 때 예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예의였고 선생의 주관적인 생각은 아니다. 이런 전통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왔다. 『예기』나 『논어』나 『맹자』 같은 고전을 보면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열 살 이상이면 형으로 섬겨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열 살 이내에는 친구로 사귈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격몽요결』 「접인」장에서는 다섯 살 이상이면 약간의 공경을 더한다고 하여 친구로 여기기는 좀 어색하다.

어쨌든 친구로 사귈 수 있는 대상은 나보다 다섯 살이 넘지 않는 상대이니, 나보다 어린 사람도 해당되므로 앞뒤 열 살 이내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또 『격몽요결』에서는 나보다 갑절이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더욱 공손하게 대우한다는 말이 그 뜻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사회생활 가운데 굳이 나이로만 따지기에는 의미 없는 경우도 있다. 어린이나 친족 그리고 이웃 간의 생활원리 등이 그것이다. 나이가 종적인 규범의 기준 가운데 하나라면 횡적인 기준내지 원리도 필요하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어린이를 자애롭게 어루만지며 친족과 화목하고 이웃과 잘 지내서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어야 한다.

매양 덕이 있는 일을 서로 권장하고
[德業相勸],
허물이 있으면 서로 바로잡고
[過失相規],
관혼상제 예법의 풍속을 서로 이루어주며
[禮俗相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서로 도와서
[患難相恤],

남이나 상대를 돕고 이롭게 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남이나 상대를 해치고자 하는 생각을 털끝만큼도 마음에 가져서는 안 된다.

 

횡적인 기준은 어린이와 이웃사랑인데, 그것으로 남이나 상대를 잘 대우하라는 뜻이다. 특이한 것은 향약(鄕約)의 내용이 여기에 들어갔다는 점인데, 이것은 향촌사회의 자치규범이므로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향약의 내용상으로 보면 나름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나, 공동체가 와해된 오늘날 우리들의 도시적 삶에서 그 실행에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다. 다만 어린이를 사랑하고 이웃과 잘 지내야 하는 점은 여전히 우리가 항상 지켜야 할 것들이다.

자,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가 나이가 과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짚어보자. 나이든 사람을 공경했던 옛날에는 나름의 실용적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의 경험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었고, 권력과 재산권을 가진 사람도 나이든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그런 규범이 중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면서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거나 창출하는 일은 대개 젊은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은 직장에서 내몰리거나 가족 내에서도 은근히 무시를 당하는 경향이 있다. 다행이 나이든 사람에게 많은 재산이나 권력이 있을 경우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공경하는 척 한다. 게다가 나이든 사람들이 사회에서 지탄받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어 젊은이들로부터 공경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나이만으로 공경 받는 시대는 이제 저물어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일부 뜻있는 노인들은 그 점을 알아차려 나이만으로 대접받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은 제4차 산업혁명이 눈앞에 닥친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바로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그것이다. 당분간 기계 또는 로봇이 인간의 감정을 대신할 수 없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며 사랑을 나누는 일은 단연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선생이 제시한 이웃사랑과 남이나 상대를 이롭게 하는 이런 태도는 이 시대에 새로운 블루오션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곧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을 상대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이런 태도 위에 구성한 인적 네트워크는 그 사람만의 자산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