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과(應科) – 입시공부에만 매달리지 마라


입시공부에만 매달리지 마라

 

공부의 목적은 무엇일까? 만약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좀 딱딱한 질문이 되겠다. 차라리 ‘공부를 왜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것 같다.

공부의 목적은 그 사람의 경험이나 지적 능력, 또는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말하겠지만, 청소년의 경우 대개 대학입시에 합격하기 위해서라거나 중간·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왜 그럴까? 공부를 먼 미래의 자신의 삶과 연관시키기보다는 당장에 성적을 올려야 하는 현실의 중압감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좀 어처구니없지만 초등학생들 가운데는 엄마가 공부하라니까 한다는 대답도 종종 있다.

이런 압박감이 덜할 경우 직업을 갖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좀 고상하게 말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러나 후자의 답은 잘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는 진술처럼 그 꿈이 무엇인지 잘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되물어야 할 형식적 답에 불과하다. 또 어른들이 말하는 이런 형식적인 답 가운데는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있다.

사실 공부의 내용은 자신의 꿈이 무엇이냐에 따라 만족스러울 수도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누구나 거의 똑같은 교육과정을 밟아야 하고, 또 그것에 따라 입시에 통과해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이 현실보다 이상에 가깝다면 입시위주의 공부에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입시공부란 당장의 해당 단계나 과정을 밟기 위해서 필요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그 각각의 단계가 쌓여 꿈을 향해 나아가게 되지만, 그 단계에 오르기 위한 입시자체로만 보면 이상적인 꿈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가령 어떤 소년의 꿈이 율곡 선생처럼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라면 실제 입시공부는 성인이 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비록 성인은 아니더라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점수 따기에 영악한 사람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크다.

그래서 입시공부와 좋은 인품을 기르는 공부가 서로 배치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고, 입시공부가 인성을 함양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믿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공부 잘 한다고 반드시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것은 아니라고 믿게 되는데, 그런 주장을 현실에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이른바 일류대학 출신의 고위 공직자의 비리나 범죄를 종종 접할 때면, 사람들이 보라는 듯이 공부 잘하는 놈들은 모두 이기적이라고 판단해 그 주범이 마치 지나친 입시교육인 것처럼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못난 사람의 범죄는 소수의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피해를 끼치지만, 잘난 사람의 범죄는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끼치므로, 공부 잘 했던 사람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이 크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입시위주의 공부가 훌륭한 인품을 기르는데 방해가 될까? 이런 고민은 오늘날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모범』의 열한 번째 주제는 과거에 응시하는 문제인 응과(應科)로서 과거는 관리가 되는 시험이므로 오늘날 공무원 입시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선생은 성인이 되는 것을 공부의 목표로 삼으라고 했는데, 얼핏 보면 이런 과거시험과 성인이 되는 공부는 서로 배치되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선생의 견해가 어떠한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과거는 비록 뜻있는 선비가 골똘히 매달려야 할 일은 아니지만, 요즈음 벼슬하기 위해서 통용되는 규정이다.

만약 도학(道學)에 오로지 뜻을 두고 예의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선비라면, 과거를 숭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치와 교화가 잘 되어서 나라의 성덕(盛德)이 빛나는 것을 보아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면, 또한 마땅히 성실한 마음으로 공부해야지 부질없이 세월만 허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과거(科擧)의 득실 때문에 자신이 지키는 지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도학(道學)이란 쉽게 말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다. 그런 공부를 제대로 한 선비라면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초빙하는 것이 오래된 옛날의 전통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시험을 통해 뽑는다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선비에게는 과거는 숭상할 바가 못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가 잘 다스려져 정의롭다면 과거에 응시해야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성인이 되고자 하는 뜻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과거공부 자체는 성인이 되는 공부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보통의 선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시험을 보지 말고 오로지 성인이 되고자 하는 도학에만 매달려야 하는가? 아니면 임금을 도와 백성들을 교화하고 잘 살게 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과거시험에 매달려야 하는가?

 

만약 도학에 뜻을 두어 게으르지 않을 수 있다면 일상생활이 이치를 따르지 않음이 없으므로, 과거시험 또한 일상생활 가운데 한 가지 일이어서 실제의 공부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여기서 이상과 현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성인이 되는 공부인 도학이란 멀리 있는 고원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므로, 과거시험이 그것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입시공부가 바른 인성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과 같다. 다만 그 전제 또는 조건은 공부하는 사람의 꿈이 도덕적이고 바람직한 인간이 되는 데 두고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일상생활에서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조건을 충족한다면 입시공부가 훌륭한 인격을 함양하는 데 방해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평소에 착한 학생은 입시공부가 착한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는 논리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도 당시 선비들 가운데는 과거시험 때문에 도학이 방해를 받는다고 여겨서 도학도 제대로 못하고 과거시험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한 가지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면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고 선생은 한탄하였다.

선생의 이런 논리는 오늘날 입시위주의 교육 때문에 인성을 제대로 함양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더 나아가 공부만 잘한다고 해서 훌륭한 인품을 보장할 수 없다는 세인들의 생각과도 맞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이것은 공부의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선생의 논리에는 공부하는 사람이 도학에 뜻을 두어 그 공부에 게으르지 않고 과거시험을 준비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나, 오늘날 공부는 그런 훌륭한 인품을 기르는 것보다는 학부모나 학생이 인기 있는 직업을 갖는 것만으로 공부의 목표로 삼아서 오로지 입시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입시공부와 인격공부는 별개의 것이 되고, 학생들의 인간성이 잘못되는 것은 지나친 입시교육 때문이라는 평가는 어쩌면 당연하다.

아무튼 우리의 현실은 미래의 직업이나 생존에 필요한 능력을 도외시하고 훌륭한 인격함양만을 위한 공부에만 매진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인격함양을 무시하고 입시공부에만 매달리는 것도 문제임은 분명하다. 양자를 조화시키려면 나름의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 뜻에서 율곡 선생이 제안하는 논리도 그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가치를 존중하고 준수하는 습관과 태도를 기르는 일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