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의(愼爾儀, 1685-1756)


신이의(愼爾儀, 1685-1756)                                  PDF Download

 

이의는 자가 가상(可象)이고 호는 취촌(醉村) 또는 명발와(明發窩)이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부친은 신제윤(愼齊尹)이다. 어려서는 큰아버지인 신후윤(愼後尹)에게 수학하여 시에 능하였으며,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신이가 학문의 기틀을 잡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는 큰아버지인 대곡(大谷) 신후윤인데, 신후윤의 스승이 타우(打愚) 이상(李翔, 1620-1690)이다. 이상은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서 김집(金集)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이상은 1658년(효종 9)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의에 임명된 뒤, 산림직(山林職) 진선을 역임하였으며, 1661년(현종 2) 이후 지평을 비롯한 장령·집의 등의 사헌부 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였으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1681년에 사업이 되고, 형조참의·우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8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고,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세한 뒤인 1690년 옥사하였다.

이상이 신후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동로(東老, 신후윤)처럼 출중한 능력으로 출사하지 않고 시골 사람 살림살이를 하고 있으니 무척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허명을 얻어서 출사하여 당화(黨禍)를 당하고 있는 것은 그대에게 좋은 경계가 되길 바라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신후윤은 이상의 고족으로 큰 기대를 받았다.

신이의는 30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극진한 정성을 다하였고, 그 후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재가 큰 기대를 하면서 궁리거경(竆理居敬)의 요체를 지도하였다. 5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역시 극진히 정성을 다했다. 이후로 환로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접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명발와(明發窩)라는 호는 이재가 신이의를 위해 지어준 호이다.

60세가 다 되어서도 스승 이재로부터 서명(西銘)과 태극도설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신이의가 예기에는 60세가 되면 가르침을 직접 받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나이 들어 가르침을 받는 것이 무슨 부끄러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재 또한 공의 정신이 가상하다고 칭찬하였는데, 이는 마치 우암 송시열이 그의 제자인 타로 이상에게 기대했던 것처럼 이재가 공에게 기대한 것이다.

이재가 죽자 3년간 심상(心喪)을 행하였다. 1751년(영조 27) 학행(學行)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천거,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에 제수되자

“일흔 넘어 첫 벼슬이지만 원량(元良: 왕세자) 한번 뵙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고 벼슬에 나아가, 왕세자에게 『서경』을 진강(進講)하고,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뜻을 상설하여 세자의 칭찬을 받았다.

강을 마치고 나면 세자의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를 기록하여 부왕이 친람하도록 하였는데, 통례상 가급적 잘했다고 기록했었다. 그러나 신수의는 ‘천지의 도리는 공명정대하다. 어떻게 왕을 속일 수 있겠는가’ 하면서 사실대로 성적을 매겼기 때문에 세자가 무척 싫어했다. 이에 맡은 바 소임을 마무리하고 물러나왔다.

공 다음으로 진강한 이강중(李剛中)이 우리라면 도저히 공처럼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탄식하면서 그 확고하고 분명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공은 이제 소원을 풀었으니 돌아가야지 하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임종에 즈음하여 효제근신독서궁리(孝悌謹愼讀書竆理)로 유서하였다.

공은 ⌈심경⌋,⌈근사록⌋,⌈가례⌋등에 정통하고 역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소학은 평생 몸으로 실천했다. 경(敬)을 학문의 요체로 삼았다.

“정자 때에는 ⌈소학⌋에 전주(傳注)가 없었는데, 정자가 경을 보충하였다. 이 경은 주자가 요체로 설명한 것이니, 주자가 ⌈소학⌋을 집주한 것은 다름 아닌 정자의 경이다. 따라서 경이야 말로 상하좌우전후를 관통하는 가장 긴용한 공부다”

라고 했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남당 한원진이 주장한 “인물은 각각의 본연이 있다(人物各本然)”, 미발에 선악이 공존한다(未發前淑慝), 명덕은 분수가 있다(明德有分數)의 설에 대해 체계적인 비판을 가한다. 또한 한원진의 인물성이론을 옹호한 병계(屛溪) 윤병구(尹鳳九)와도 변론하였다.
<참고문헌>
이상(李翔), 타우유고(打愚遺稿)
임헌회(任憲晦), 『고산집(鼓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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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이(愼守彛, 1688-1768)


신수이(愼守彛, 1688-1768)                                 PDF Download

 

수이는 자가 군서(君叙), 호는 취한당(就閒堂)이며 황고선생(黃臯先生)으로 불렸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조부는 신경호(愼景昈)이고 부친은 신부(愼桴)이다.

8세 무렵에 새잡이 그물을 치는 것으로 동네 아이들 끼리 옥신각신하다 욕설이 오고갔는데, 공이 사람은 양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거늘 한동네에서 사소한 이익 때문에 싸우는 것은 안 된다고 하면서 이를 시로 지었는데 그 사리가 분명하였다.

장성하여 공부하러 다닐 적에 일상 언행을 소학에 따라 준행하여 소학동자라고 일컬어졌다. 나무를 깎아 패로 만들어 환성자(喚醒子)로 명하고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나무패가 부딪힐 때 나는 소리로 자신을 각성하였다.

한천에서 학문을 가르치던 도암 이재를 찾아뵙고, 수개월 동안 가르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제자의 예를 표했다. 이재는 공의 연수와 학문을 고려하여 도학지우로 지내고자 했으나 한사코 거부했다. 이재 또한 겸양하고 제자로 대하지 않았다.

공이 이재와 변론한 내용들은 사문 안에서 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재가 졸하자 제자로서 심복을 하고 이재의 어록을 수정하였다. 공이 기록한 어록은 내용이 자세하면서도 분명하여 이재의 평소 가르침을 잘 전하고 있다.

공이 죽은 후에 구연서원(龜淵書院)에 배향하고 후에 도암 이재, 역천 송명흠과 더불어 성천서원(星川書院)에 배향하려고 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공은 기품이 순수하고 자질이 돈후하였으며, 의양이 단정했다. 평소 집안에 거할 적에도 경계하고 독실하게 처신하였다. 집안이 다스려지는 것은 아내에게 본보기가 되는가에 달려 있으니, 이것이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했다.

8권 3책으로 된 황고집(黃皐集)이 전한다. 증손 신필우(愼必祐) 등이 수집 편집하여 1845년(헌종 11)에 간행하였다. 시(詩)·서(書)·서(序)·발(跋)·기(記)·설(說)·상량문(上樑文)·제문(祭文)·애사(哀辭)·고축문(告祝文)·잡저·묘갈명(墓碣銘)·묘표(墓表)·행장·부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침착하고 돈중(敦重)한 학자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벗들과의 차운시·수증시가 많다. 「한중만음(閒中謾吟)」에서는 초가을 활짝 갠 푸른 하늘 아래 자연과 함께 동화된 유유한 심회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서(書)에는 일상적 안부를 묻는 내용 외에 성리설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개진한 것도 다소 있다. 이재(李縡)는 당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시비로 야기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진전 과정에서 윤봉구(尹鳳九)와 호서심설의 문제로 논쟁했는데, 이재는 낙론(洛論), 윤봉구는 호론(湖論)을 지지한 바 있었다. 서 가운데 이재에게 올린 「상도암이선생서(上陶庵李先生書)」는 당시 학계의 커다란 쟁점이 되었던 심설(心說)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여기서 공은 주희(朱熹)의 합이기설(合理氣說)을 들어 주기적(主氣的) 성향을 배척하였다. 별지에서는 장재(張載)의 이원론을 들어 주리(主理) 또는 주기의 일원론을 논박하고, 여러 선유(先儒)의 설을 인용해 심즉이기(心卽理氣)의 이원론을 논증하여 스승의 설에 동조하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잡저의 「한천어록(寒泉語錄)」은 이재의 어록이다. 스승을 처음 만난 날로부터 죽을 때까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자세히 적어, 덕행과 학문의 대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밖에 여러 논의들도 당시 심설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던 학계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영조실록⌋ 영조 13년 조에 신수이에 대한 평이 나온다.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도내(道內)에 있는 인재들을 천거하기를, ……안음(安陰)의 신수이(愼守彝)는 학문과 행실이 정밀하고 독실한데가 재능도 갖추고 있으며, ……”

<참고문헌>
신수이, ⌈황고집(黃皐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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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석(宋瑚錫, 1693-1756)


송호석(宋瑚錫, 1693-1756)                                  PDF Download

 

호석은 자가 자는 기여(器汝), 호는 몽와(蒙窩)이고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증조부는 송격(宋格)이고, 조부는 송지희(宋之熺)이며, 부친은 송득규(宋得奎)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심경연의(心經演義)』를 저술하였으며, 『몽와유고(夢窩遺藁)』 5권이 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모친이 연로하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며 기쁘게 해드렸다. 가난한 중에도 제수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모친을 봉양하는 데에는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잘못된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서 과실이 있는 자들은 함부로 집으로 드나들지 못했다.

도암 이재가 한천에서 강학을 할 적에 병들고 가난하여 이재의 문하에 직접 나아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글을 올려 질문하였는데 경전의 뜻을 밝힌 것이 많았다. 이재가 직접 면대하지 않더라도 글을 통해 학문을 논하는 것은 옛날의 도리하고 하면서 오늘날의 군자로 허여하고 위기무실(爲己務實) 네 글자로 권면하였다.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송호석의 행장을 지었는데,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頤齋遺藁)』 卷18에 「몽와처사송공행장(蒙窩處士宋公行狀)」으로 전해진다.

황윤석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1759년(영조 35) 진사시에 합격,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고, 뒤이어 사포서(司圃署)의 직장·별제를 거쳐 익위사의 익찬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년(정조 3)에 목천현감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전생서(典牲署)의 주부를 거쳐 전의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그의 학문은 실학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인데, 처음에는 이학(理學)의 공부에 힘쓰고 『주역』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송호석의 손자인 송상은(宋相殷)이 승문원 정자로 있을 적에 조부의 문집 ⌈몽와유고(蒙窩遺稿)⌋를 간행하려고 하면서, 김종후(金鍾厚, 1721-1780)에게 서문을 부탁한다.

김종후는 송호석의 학문은 궁리‧정심‧수신‧정가(窮理正心修身正家)의 올바른 법도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조금의 가식도 없다고 평한다.

또한 인물성오상을 논할 적에 주자가 논한

“위치가 다르면 이치의 발용도 동일하지 않다(所居之位不同則其理之用不一)”,

“명덕은 심과 성의 합일이다(明德合心性)”,

“마음은 리를 탑재한 기이다(心爲載理之氣)”

등을 가져와 변론한 내용은 탁견이라고 평한다.
송호석은 평생토록 도암 이재를 앙모하였고, 이재가 졸하자 제자의 예를 다했다고 적었다. 송호석이 비록 병들어 이재 문하에 나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편지로 올린 질문을 이재가 크게 허여하였고, 이재와 송호석이 면대하여 가르침을 수수하지는 못했지만 틀림없는 사제간이라고 했다.

아울러 송윤석이 보내준 「몽와처사송공행장(蒙窩處士宋公行狀)」을 읽으니 송호석의 학문과 인품이 출중함을 잘 알겠다고 했다.

김종후는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문인이고, 민우수는 김창협과 권상하의 문인이다. 그리고 이재는 김창협의 문인이다.
<참고문헌>
황윤석(黃胤錫), 이재유고(頤齋遺藁)
김종후(金鍾厚), 본암집(本庵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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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수(徐逈修, 1725-1779)


서형수(徐逈修, 1725-1779)                                  PDF Download

 

형수는 자는 사의(士毅), 호는 직재(直齋)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할아버지는 서종대(徐宗大)이고, 아버지는 현령 서명훈(徐命勳)이다. 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김원행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고, 대사성 서유망(徐有望)이 아들이다.

1751년(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척신(戚臣) 홍계희(洪啓禧) 등 요인들이 교유를 청해온 것을 거절하여 관계의 진출이 늦어졌다.

1757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서 윤시동(尹蓍東)의 신구(伸救)를 청하였으나 당쟁을 일삼는다 하여 남해현(南海縣)으로 방귀(放歸)되었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1771년 교리로서 척신의 자제가 대거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폐단의 시정을 촉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승지로서 국가 대훈자(大勳者)의 특전이 너무 지나침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 해 벽파(僻派)를 탄핵하였다가 면직당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1773년 승지로 재기용된 뒤 대사간·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776년(정조 즉위년) 공조참의에 이르러 홍인한(洪麟漢)·이득신(李得臣) 일파의 전횡을 규치할 것을 계속 주장하였고, 그 뒤 대사간·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실록⌋ 33년 3월 기사에 정언 서형수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남해현(南海縣)에 방귀(放歸)하도록 명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서형수가 상서하길,

“윤시동(尹蓍東)이 연좌된 것은 마음속에 품은 바가 있으면 숨기지 않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그를 신원하자, 영조가 명하길,

“당습(黨習)을 다시 행하려 한다“

고 하여 방축을 명하였다.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은 1754년(영조 30) 25세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설서가 되었고,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 당론을 일으켰다고 탄핵을 받아 7년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가 풀려났고, 1766년 대사간이 되자 신광집(申光緝)의 무죄를 논하다가 다시 전리에 방축되었고, 1776년(정조 즉위년) 경기도관찰사로 재직시 당론을 운위하다가 다시 남해현에 유배되었고, 그 뒤 형조판서로 있을 때 당론을 다시 운위하다가 삼화로 유배되었다. 김종수(金鍾秀)·심환지(沈煥之) 등 시파와 함께 벽파공격에 앞장섰고, 김한구(金漢耉)·홍인한(洪麟漢) 등 척신의 축재를 규탄하였다.

1795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서형수의 딸인 영수합(令壽閤) 서씨는 조선의 대문장가로 불리는 홍석주의 어머니로, 학문이 뛰어나고 겸손한 인품에 자식들까지 훌륭하게 키웠다.

서씨는 남자 형제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스스로 글을 터득했지만, 다른 형제들보다 빠르게 학문을 받아들였다. 서형수가

“세 아들이 모두 뛰어나지만, 네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한세상을 풍미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서씨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으나, 아녀자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홍석주는 사람들 몰래 어머니에게 책을 가져다주고는 했다. 남편 홍인모도 그녀가 학문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홍인모는 자식들에게 어머니가 시를 읊으면 몰래 베껴놓으라고 지시했고, 자식들은 수백 편이나 되는 시를 기록했다.

서씨의 시는 『영수합고(令壽閤稿)』라고 하여 남편 홍인모의 문집 『족수당집(足睡堂集)』에 실려 있다.

서형수의 아들인 서유망은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 1803년(순조 3)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806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었다. 1808년 전라우도의 암행어사로 나갔고,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으며, 1812년 대사성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정진하였으며 뛰어난 문장을 이루었다. 아버지를 본받아 청직(淸直)의 전통을 세웠다.

두 자녀를 통해서도 서형수의 학문과 인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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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朴聖源, 1697-1767)


박성원(朴聖源, 1697-1767)                                 PDF Download

 

성원은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며,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박성원은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었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공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재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 또한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학들의 예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서로는 『돈효록(敦孝錄)』·『보민록(保民錄)』·『돈녕록(敦寧錄)』·『겸재집(謙齋集)』 등이 있다.

돈효록』은 효에 관한 내용을 종합 정리하여 편찬한 책이다. 박성원은 효가 만선(萬善)의 근원이고 지덕(至德)인 동시에 지도(至道)로 『효경』이 이러한 도덕연원의 근본으로 사람이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효에 관한 지언(至言)과 격론(格論)을 여러 책에서 모아『돈효록』을 편찬하였다. 원 제목은 ‘효경연의(孝經衍義)’라고 제목을 붙였으나, 스승인 이재(李縡)가 효행의 돈독함을 권장한다는 의미를 강조해 ‘돈효(敦孝)’라고 이름 지은 것을 존중하여 그대로 책이름으로 삼았다.

예의유집』은 관혼상제을 해설한 책이다. 관혼상제에 대한 해설로서 주희(朱熹)의 『가례』를 따르지 않은 곳도 있다. 오복(五服)의 제도는 참최(斬衰: 거친 베로 짓되 아랫도리를 접어서 꿰매지 않은 상복) 3년부터 시작했고, 상장(喪葬)과 도구(道具)에 관해서는 치상도구(治喪道具)부터 기록하였다. 제례는 사례(四禮) 위주로 제현의 설 가운데 서로 같지 않을 때는 모두 기록한 것이 특색이다.

정조는 어제서문에서

“본조의 열성(列聖)이 유교를 진작한 뒤 300년 동안 예에 밝은 사람이 40∼50가에 이르니 예에 대한 고훈과 학설이 각처에 산재해 한 데 모으기가 어려웠는데, 박성원이 이를 극복하고 종법과 잡례를 총망라해 책을 만든 것이 가상해 교서관에 명해 간행하도록 한다.”

고 그 간행 경위를 밝혔다.
⌈영조실록⌋ 20년 조에 박성원이 영조에게 간쟁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박성원이 대간에 나아가 11개 조목에 대해 간쟁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기로소에 들어가려는 영조에게 중지할 것을 간언한 내용이다. 영조는 박성원을 불러들여서 노기를 띤 채,

“조신(朝臣)이 혹시 비슷하지도 않는데 기사(耆社)에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이것을 반박하더라도 좋겠지만, 네가 감히 인군(人君)이 기사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존호(尊號)의 여덟 글자를 어찌하여 반박해서 바로잡지 아니하고 곧 이처럼 계달(啓達)하는가?”

라고 엄하게 하교하고 박성원을 남해현으로 귀양 보냈다.
박성원의 11조목의 간쟁과 영조의 반응 및 제신들의 변론 및 의견을 기사를 적은 후에 사관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박성원은 임금과 소원한 신하로서 감히 말하기를 꺼리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그 마음이 과연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 기백은 숭상할 만하고, 그 말도 또한 취할 만한 것이 많았는데, 특히 한 마디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그 몸은 귀양 가고 그 말은 쓰이지 못했으니, 애석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

 

<참고문헌>
『영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형수(閔亨洙, 1690-1741)


민형수(閔亨洙, 1690-1741)                                  PDF Download

 

형수는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할아버지는 민유중(閔維重)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다. 민익수와는 사촌간이다.

조부 민유중은 숙종의 장인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노론에 속했고,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대공설을 지지했다.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경서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부친 민진원은 어머니가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우참찬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 일파가 크게 탄압을 받던 때여서 등용되지 못하였다. 1697년 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수찬(修撰)에 재등용되었다.

1715년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간행을 둘러싸고 노론·소론 간에 당론이 치열해지자 노론 정호(鄭澔)를 두둔하다가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729년 중추부판사가 되어 「가족제복론 加足帝腹論」을 찬진(撰進)하였다. 그 뒤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730년 기로소에 들고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공은 1719년(숙종 45)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6년 설서(說書)를 거쳐, 검열(檢閱)·봉교(奉敎)·겸설서·한림(翰林) 등을 역임하였다.

1729년(영조 4년) 정언(正言) 및 별겸춘추로서 정미환국 이후 노론의 거두인 아버지가 밀려나고 소론이던 이광좌(李光佐)가 좌의정으로 등장하게 된 사실을 신원(伸寃)하는 요건으로 이광좌를 소척하려 하였다가 이천현감으로 쫓겨났다.

그 뒤 1733년 부수찬이 되었으나, 다시 이광좌를 소척하다가 갑산(甲山)에 유배당했다. 이듬해 풀려나 1735년 부교리·교리·부수찬 등을 거쳐, 1736년 승지·대사간·금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739년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러서, 동생 통수(通洙)와 함께 다시 이광좌를 소척하다가 또 해남현에 찬배되었다. 뒤에 곧 풀려나 1740년 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이르렀다.

1741년 형조참판을 거쳐, 함경감사 때는 북관의 진보(鎭堡) 설치에 힘을 기울였다. 아버지 민진원의 신원을 위하여 이광좌를 끈질기게 소척하려 하였고, 이로 인하여 자신이 또한 파란을 많이 겪었다.

민형수가 부친 민진원의 신원을 위해 배척한 이광좌(李光佐, 1674-1740)는 이항복의 현손으로 소론의 영수였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다.

1721년(경종 1) 호조참판을 거쳐 사직(司直)에 있으면서 왕세제인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반대하여 경종이 이를 취소하게 하는 등 경종 보호에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1725년(영조 1)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노론의 등장으로 파직당했다.

1728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다시 등장하자 영의정에 올랐다.

1730년에는 소론의 거두로서 영조에게 탕평책을 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막도록 건의했다.

1740년 영의정으로 재직하던 중 박동준(朴東俊) 등이 중심이 되어 삼사의 합계(合啓)로 호역(護逆)한 죄를 들어 탄핵을 해오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민형수가 정언이 되어 영조 5년에 올린 상소는 영조 4년에 일어난 무신난과 경종의 죽음에 대한 미묘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노론의 수장이었던 부친 민진원을 변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뇌관을 건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조로부터 지속적인 견책을 받았다.

“아! 지난해의 흉악한 역적의 변고는 어찌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변란은 발생하는 날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연유하는 바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니, 진실로 폐단의 근원을 뽑아 화근(禍根)을 끊지 못한다면, 한때 조금 안정된 것은 믿을 수가 없어서 앞으로의 근심이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개 일찍이 거슬러 올라가 논한다면 갑진년495) 대상(大喪)을 당했을 적에 편찮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휘음(諱音)을 받들게 되었었습니다. 약원(藥院)에서도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한 일이 없었고, 교문(敎文)에도, ‘한밤에 옥궤(玉几)에 기댔다496) ’는 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 불행히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홍서(夢逝)하셨다’고 하여 사모하여 통곡하며 망극(罔極)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했었습니다. ……

조정 안에서는 또한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근본을 추구(推究)해서 분명하게 말을 하여 위로는 성상의 무함(誣陷)을 변석(辨釋)하고 아래로는 간사한 마음의 싹을 꺾어버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이런 때에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으면서 어찌 명을 들은 즉시 달려나와서 극력 말을 하고 힘을 다해 논하여 전하께서 받으신 망극(罔極)한 무함을 남김없이 통쾌하게 풀어드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아!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임금과 어버이가 무함받음을 목도(目覩)하고 한마디 말도 변명(辨明)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臣)은 진실로 인륜에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이 소를 시작으로 민형수는 수차에 걸쳐 이에 대한 소를 올리고 그때마다 영조는 엄한 비답을 내린다. ⌈영조실록⌋ 9년에 민형수의 소와 관련한 사관의 평이 기록되어 있다.

“무신년 이후로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죄를 성토한 것으로 이 상소처럼 엄정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주상(主上)은 위를 무함한 흉언(凶言)이 오로지 이광좌가 병을 숨긴 사실과 조태억의 교문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이제 와서 애초에 변명할 무함이 없다고 하였으며, 민형수(閔亨洙)의 무리가 변무(辨誣)한다고 말한 것이 도리어 역적의 구실거리가 되었다. 이것을 혐의로 삼아 점점 더욱 격렬해져 심지어 지난 일을 제기하여 말이 무엄하다는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민형수의 무리가 임금이 무함당한 것을 변명한다는 구실로 이광좌와 조태억의 죄를 얽어 놓은 듯함이 있었다. 한 번 말한 것이 겨우 들어가자마자 엄한 견책이 뒤따라 장차 의리가 밝혀지지 못하고 흉도(凶徒)가 그치지 않게 되었으니, 식자(識者)의 근심과 탄식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사관이 거론한 조태구(趙泰耉, 1660-1723)는 최석정(崔錫鼎)의 문인으로 소론의 핵심인사다. 170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지평·정언 등을 지냈고 1721년 호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최석항(崔錫恒)·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세제(世弟 : 뒤의 영조) 책봉과 대리청정을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영조실록⌋ 17년 조에 기록된 민형수의 졸기가 다음과 같다.

“민형수는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아들이다. 정언(正言)이 되어 이광좌(李光佐)의 휘질(諱疾) 한 죄를 논핵하였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 삭출당하였고, 옥당(玉堂)에 들어와서는 또 이광좌의 죄를 극언하였다가 갑산부(甲山府)에 귀양갔다. 오랜 시일이 지난 후 석방되어 승지로 발탁되고 곧바로 다시 형조 참판에 발탁되어 조정에서 바야흐로 마음에 들어 임용하려 하였는데, 민형수가 성격이 소직(疏直)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함에 진역(畛域)을 두지 않아서 조현명(趙顯命)의 유혹을 받아 위시(僞詩)를 들추어내어 국옥(鞫獄)을 이루게 되니 이에 민형수가 마음으로 통한(痛恨)을 하며 졸(卒)하였으므로 그 형(兄) 민창수(閔昌洙)가 진소(陳疏)하여 그 마음을 폭로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익수(閔翼洙, 1690-1742)


민익수(閔翼洙, 1690-1742)                                  PDF Download

 

익수는 자는 사위(士衛)이고 호는 숙야재(夙夜齋)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고, 아버지는 민진후(閔鎭厚)이며, 대사헌 민우수(閔遇洙)의 형이다.

조부 민유중은 숙종의 장인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대공설을 지지했다.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노론에 속했다. 경서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부친 민진후(1659-1720)는 호는 지재(趾齋)이고 시호 충문(忠文)이다.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오빠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생원이 된 뒤, 16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

169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대사간·강화부유수·형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718년 숭록대부에 올랐다. 내국제조(內局提調)로서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뒤에 개성부유수를 지냈다.

공은 진사로서 세마(洗馬)의 자리에 올랐으나, 조정이 당론으로 소란스러운 것을 보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동생 민우수와 함께 여강(驪江)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사어(司禦) 등에 제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729년 재행(才行)으로 한덕필(韓德弼) 등과 함께 별천(別薦)에 올랐다가, 1737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음보(蔭補)로 기용되었다.

1740년 지평(持平)으로 대직(臺職)에 올라 그해에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이른바 위시사건(僞詩事件)에 연류된다.

영조 16년(1740)에 위시사건과 관련하여 영조가 김원재(金遠材)를 친히 국문하면서,

“네가 임금을 범하여 근거 없는 시(詩)를 진신(搢紳)들 사이에 전파하였는데, 이는 너 같은 어리고 미련한 사람이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다. 사실대로 정직하게 공초하라.”

명한다.
이에 김원재가 이 시를 집에서 보관하게 된 내력을 말하길,

“그 시는 백망(白望)이 가지고 온 것으로, 어제(御製)라고 하면서 신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전하여 주었는데, 또한 신의 아비가 세상에 살아 있었을 적에도 들었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이런 일이 없다고 하시니, 신이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공초한다.
아울러 이 시가 알려진 경우를 밝히는데,

“신의 아비가 직접 국가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백망이 전하여 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릉(穆陵, 선조)께서 신의 집에 내사(內賜)한 어필(御筆)과 함께 봉함하여 보관해 두었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보여 준 일이 없었는데, 김진옥(金鎭玉)·민익수(閔翼洙)는 지친(至親) 사이이기 때문에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라고 했다.
정조가 김원재로 하여금 위시(僞詩)를 외어서 고하게 했다.

“동국의 대현은 사계옹이고/지극한 행실은 또 서하공이 있다.

서하공의 후손에 김공이 있는데/ 충효와 학문이 조부와 같다.

마치 상(商)나라의 부열255) 이 은거한 것과 같고/

남양 땅에 제갈양이 은거한 것에 견줄 만하다.

태산 같은 높은 명성 들었으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지난밤에 갑자기 꿈속에서 만났네.

어느 때나 서로 만나 기쁨을 함께 할거나/

태평연월 누리면서 꽃밭에서 취하고 싶네.”

 

정조는 이 시가 정녕 거짓된 시라는 점을 거듭 밝히자, 김원재가 재차 말하길,

“신의 아비가 백망에게 속은 것인데 백망이 이 시를 어느 곳에서 얻었는지 신은 실로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시를 주고받을 즈음에는 신의 나이가 아직 어렸었으니, 무엇으로 연유하여 그것이 거짓인 줄 알았겠습니까? 단지 신의 집에서 전하여 오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신의 어미가 을사년(정조 원년) 뒤에 비로소 이 시를 민익수(閔翼洙)에게 보였었으니, 민익수를 불러 물어 보면 혹시 그 진위를 변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공초했다.
송인명 등이 민익수도 아울러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또 민형수(閔亨洙)가 위시(僞詩)를 깊이 믿었다는 것으로 죄를 가하려 했지만 정조가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 시를 김원재 부친에게 전해주었다는 백망(白望)은 신임옥사에 관여된 인물이다. 신임옥사는 목호룡(睦虎龍)이 백망(白望)·오서종(吳瑞鍾)·정인중(鄭麟重) 등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李頤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으로 고변하여 노론 4대신을 사사하게 하고 그 외 수백 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영조 16년에 위시사건이 발생하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영조 18년에 민익수가 졸하였는데, ⌈영조실록⌋18년 조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전 사헌부 장령 민익수(閔翼洙)가 졸하였다. 민익수는 판서 민진후의 아들로, 자신을 단속하고 행실을 닦아 능히 그 가풍을 이었으며, 신축년·임인년 이후로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대직(臺職)에 천거하여 제배하였으나 고사하고 끝내 명에 응하지 아니하다가 이때에 와서 졸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영조실록⌋ 42년 조에는 영조가

“민익수(閔翼洙)는 참으로 대가(大家)의 사람이다. 당습(黨習)에는 비록 몰두하나, 그 사람은 어질다.”

라고 평했다.
⌈고종실록⌋ 12년 조에는 이최응이

“문충공(文忠公) 민익수(閔翼洙)는 일생동안 선정신(先正臣) 김장생을 존경하고 사모하였으며 학문은 극기(克己)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신사년(1701)과 임오년(1702)의 사화 후에는 한결같이 임금의 무함을 밝히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조정과 선림들이 명분과 의리의 영수로 대하였습니다. 영묘조(英廟祖)의 50년 동안 의리가 해와 별처럼 빛났던 것은 사실 문충공이 논의를 제창한 힘입니다. 영원히 조천(祧遷)하지 말도록 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고종이 윤허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고종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유용(南有容, 1698-1773)


남유용(南有容, 1698-1773)                                  PDF Download

 

유용은 본관은 의녕(宜寧)으로 자는 덕재(德哉)이고 호는 뇌연(雷淵)·소화(小華)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 남정중(南正重)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남한기(南漢紀)이고,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아들이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급제하여 강릉참봉(康陵參奉),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냈다.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754년(영조 28) 원손보양관으로 있다가 다음해 『천의리편(闡義理編)』의 찬집당상(纂集堂上)을 겸하였고 이후 예문관제학, 좌부빈객, 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52년 가선(嘉善)으로 승계한 뒤 승문원제조·대사성·예조참판·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 등을 거쳐, 1754년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뒤에 정조가 된 세손을 세살 때 무릎에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는 그 은덕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1757년(영조 33) 원손사부(元孫師傅)를 거쳐 예조참판으로 옮겼고 1764년(영조 40) 우빈객, 1767년 봉조하가 되었다.

1772년 ⌈명사정강(明史正綱⌋을 편찬했으나, 서법이 존주지의(尊周之義)에 심히 어긋난다고 하여 영조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는 그의 역사관이 성리학적 역사인식 방법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로 말미암아 장차 조선사기(朝鮮史記)를 편찬할 인물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영조 33년(1757) 남유용이 원손사부로 있을 적에 영조가 원손을 불러 몇 가지를 시험하여 보고는 만족하면서, 하교하길,

“눈앞의 급선무 중에 원손을 보도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다. 사부 남유용은 교도(敎導)하기를 잘하여서 성취(成就)시킬 희망이 있다. 마땅히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기 위하여 호피 한 벌을 특별히 내린다.”

이어서

“지금 이것을 경에게 주는 것은 경으로 하여금 고비(皐比)를 깔고 앉은 스승이 되라는 것이니, 경에게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고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다.”

라고 했다.

영조실록⌋ 49년에 남유용이 졸기가 기록되어 있다. 남유용이 담박하고 순정한 인물이라고 적고 있다.

“봉조하(鳳朝賀) 남유용(南有容)이 졸하였다. 남유용은 고 대제학 남용익(南龍翼)의 손자인데, 자(字)는 덕재(德哉)이고, 호는 뇌연(雷淵)이다. 형 남유상(南有常)과 더불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 올라 승문원 부제학을 경유하여 세손보양관(世孫輔養官)·유선(諭善)을 거쳐 벼슬이 정경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70세에 상소하여 물러가 쉬기를 청하니 봉조하를 제수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였다. 사람됨이 탄이(坦夷) 하고 순실(純實)하여 세상 일에 담연하였다.

정조는 남유용이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글을 가르친 공덕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정조 16년 남유용의 아들 남공철이 과거에 합격하자 검교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와 남공철(南公轍)을 불러 보았다.

남공철에게 이르기를,

“네가 보양관(輔養官)의 아들로서 지금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내 마음이 감격스럽다. 고 재상 서문청공(徐文淸公)은 너의 아비와 더불어 같이 내가 어렸을 때의 스승이었는데, 네가 서영보와 동시에 조정에 서게 되었으니, 매우 귀한 일이다.”

하고 전교하길,

“남 보양관(南輔養官)은 내가 3살 때부터 수학(受學)하였는데 무릎 위에 앉히고 성심으로 가르쳤으니, 내가 문자에 처음으로 향방을 안 것은 바로 남 보양관이 훌륭히 가르친 공로였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비록 그 자손을 보살피기는 하였으나 어찌 그 공로를 보답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다행히도 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그 가문을 위해 다행스러움이 적지 않다. 고 정승 서지수(徐志修)는 바로 남 보양관(南輔養官)과 더불어 같은 때 보양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 손자가 과거에 급제하던 날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으니, 지금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 봉조하(故奉朝賀) 남유용(南有容)의 집에 검교 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짓겠다. 옷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그 부인의 안부를 물으라고 명하였다.”

 

남공철은 1780년(정조 4) 초시에 합격하고, 1784년에 아버지가 정조의 사부였던 관계로 음보로 세마를 제수 받았고,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냈다. 그러다 179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초계문신에 선임되었으며, 친우이자 후일의 정치적 동지인 김조순(金祖淳)·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 운동에 동참했고 그 뒤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 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으로서 후진교육 문제에 전념했다. 순조 즉위 뒤 『정종실록』 편찬에 참가했으며, 아홉 번씩 이조판서를 제수 받고, 대제학을 역임했다. 1807년(순조 7)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이나 재상을 역임했으며, 1833년 영의정으로 치사해 봉조하가 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안순태, 「뢰연(雷淵) 남유용(南有容)의 삶과 한시」,「한국한시작가연구」 17권, 201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종후(金鍾厚, 1721-1780)


김종후(金鍾厚, 1721-1780)                                  PDF Download

 

종후는 자는 자정(子靜)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호는 본암(本庵) 또는 진재(眞齋)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이고, 아버지는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이며, 동생이 김종수(金鍾秀, 1728-1799)이다.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문인이다.

스승 정암(貞庵) 민우수는 20세 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21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김창협과 권상하의 문인이다. 후에 174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750년 통정(通政)으로 승차(陞差)하면서 공조참의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었다. 175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세자찬선(世子贊善)·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종후의 동생 김종수는 1768년(영조 4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조정랑,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왕세손 필선(弼善)으로 성실히 보좌하였다. 이 때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그 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대제학에 올랐고,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 우의정에 올랐다.

1792년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라와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자, 예전에 정조와 대담했던 내용인 “순(舜)·주공(周公)과 같은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서 부모를 섬김이 효도”라는 소를 올려 이 논의를 가라앉혔다. 임성주(任聖周)·윤시동(尹蓍東)·김상묵(金尙默) 등과 친하게 교유했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김종후는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1741년(영조 17) 생원이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1776년 지평(持平)에 이어 장령(掌令)·경연관을 역임하였다. 이에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이 되고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그는 영조대 신임사화 때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궁지에 몰아넣은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김구주(金龜柱)와 입장을 같이 하였고, 장헌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을 공격하였다. 그 뒤 김구주가 제거되자 원빈(元嬪)의 오빠인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을 따랐다. 다시 원빈이 죽고 홍국영이 물러나자 소를 올려, 그에게 기만당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정조 4년(1780)에 김종후의 졸기가 기록되어 있다. <정조실록>은 정조가 죽은 지 6개월 뒤인 1800년(순조 1) 12월에 이병모(李秉模)를 실록총재관(實錄憁裁官)으로 임명하고, 편찬에 착수해 1805년 8월에 완성되었다. 총재관은 이병모·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서매수(徐邁修)였는데, 김종후에 대한 평가가 매우 박하다.

“장령 김종후(金鍾厚)가 졸하였다. 김종후의 자는 백고(伯高)인데,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曾孫)이며 김종수(金鍾秀)의 형이다. 영조 때 경학과 품행으로 천거되었고 지금 주상이 즉위하여 경연관으로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항상 명의(名義)를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였었는데, 홍국영(洪國榮)이 축출될 적에 상소하여 보류하기를 요청하면서 몹시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그의 창피함을 비웃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특별히 은전을 베풀 것을 명하였다. 그에게 본암집(本庵集)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는 『본암집』이 있고, 편서로 『가례집고(家禮集考)』, 『청풍세고(淸風世稿)』가 있다.
본암집(本庵集)』은 심환지(沈煥之)의 서문이 있고, 서(書)는 그의 스승인 민우수(閔遇洙)와 동문인 김자정(金子靜)·이경사(李敬思)·원인손(元仁孫)·홍자순(洪子順)·신광온(申光蘊)·임성주(任聖周)·강규(康逵)·이홍렴(李弘廉)·김원행(金元行) 등과 주고받은 서신이다. 주로 『대학』·『논어』·『맹자』·『주례』 등 경전에 관한 것과 태극·영(靈)·음양오행·성(性)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잡저에도 「심기질변(心氣質辨)」 등 성리학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가례집고(家禮集考)』는 『가례』를 본문으로 삼고, 삼례(三禮: 儀禮·周禮·禮記)와 그 밖의 경전(經傳), 그리고 유학 및 그 이외의 여러 사상계열의 고전과 역사관계의 저술에서는 물론, 패림소설류(稗林小說類)에서까지 『가례』의 예절과 관계되는 사항을 두루 모아놓았다. 유교관계의 문헌에만 국한하지 않고 여러 분야의 자료까지 동원하여 사례의 관계사항을 추출해서 모아놓은 일은 전통적인 예절의 본질과 발달사정을 넓은 시야에서 고찰하고자 한 폭넓은 시야의 작업이기도 했다. 제자 임육(任焴)이 1801년(순조 1)에 간행했지만 널리 유포되어 이용되지는 못했다.

청풍세고(淸風世稿)』는 조선 후기의 학자 김극형(金克亨)·김징(金澄)·김구(金構) 등 삼대의 시문집으로 1779년(정조 3)에 동생 김종수(金鍾秀)와 합편하여 간행하였다. 이들은 김극형의 5대손이다. 권두에 김양행(金亮行)의 서문이 있다. 권1은 김극형의 『사천집(沙川集)』, 2·3은 김징의 『감지당집(坎止堂集)』, 권4는 김구의 『충헌집(忠憲集)』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원행(金元行, 1702-1772)


김원행(金元行, 1702-1772)                                  PDF Download

 

원행은 자가 백춘(伯春)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는 미호(渼湖) 또는 운루(雲樓)인데 미호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김창협의 수제자인 이재(李縡)의 문인이자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 가문의 후손으로 학통을 잇는 존재가 되어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유수한 산림(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옥사 때 조부 김창집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김제겸과 친형인 김성행(金省行), 김탄행(金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조부·생부·형 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후 여러 중책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호학 내부에서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이간(李柬, 1677-1727) 간의 논쟁이 구체화되고, 이후 호론과 낙론이라는 지역적 대립 구도가 뚜렷해지는 상황 하에서, 김원행은 낙론의 학술적 입장을 대변하였다. 본래 낙학의 연원이 되는 김창협을 비롯한 가학적 전통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 낙론의 중심인물인 이재 문하에서 여러 학자들과의 학술 교류를 펼치며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구체화하였다. 호락논쟁의 전면에서 학술논쟁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18세기 중반 이후 낙론의 성리학적 입장을 구체화하는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낙론계의 학문을 주도하였다.

김원행의 성리설 형성과 관련하여 가장 교유의 폭과 깊이가 깊었던 학자로는 송명흠(宋明欽, 1705-1768), 송문흠(宋文欽, 1710-1752) 형제와 임성주(任聖周, 1711-1788)를 꼽을 수 있다. 송준길의 현손이자 김원행과는 고종사촌 간이었던 송명흠·송문흠 형제, 송명흠 형제와 이종사촌이었던 임성주, 이들은 모두 이재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다. 이들은 당시 호락논쟁의 주요 쟁점은 물론, 예학과 경학 등 다양한 학문적 주제에 대해 활발한 학술토론을 전개했다.

김원행의 인물성론(人物性論)을 비롯하여 심설과 명덕설 등은 그의 문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을 거쳐 19세기 초반 낙론을 주도한 오희상(吳熙常, 1763-1833), 홍직필(洪直弼, 1776-1852)에게 이어졌고, 20세기 초반 낙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전우(田愚, 1841-1922)에게 계승되었다. 한말 영남학계의 중심 학자였던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은 「서김미호인물성설후(書金渼湖人物性說後)」에서 ‘김원행의 성설은 대체로 지극히 정당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영조 38년에 영조가 주강(晝講)에서 ⌈대학⌋을 강하면서,

“문왕(文王)이 아들 노릇을 한 것은 효(孝)에서 그쳤는데 나도 효를 하고자 한다. 어제 진전(眞殿)에 전배하고 높은 곳에 올라 명릉(明陵)을 바라보고 왔다.”

또 영의정 홍봉한에게 말하기를,

“세손의 관대(冠帶)와 의양(衣樣)이 꼭 나와 같으니 참으로 귀엽다. 내가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가르쳤는데, 비록 장래에 학문의 성취함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후덕(厚德)한 군자(君子)가 될 듯하니,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왕손(王孫)이 이미 장성하였으니, 마땅히 봉작(封爵)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하자 전지를 내리겠다 하고, 왕손 교부(王孫敎傅) 김이안(金履安)에게

“네 아비는 교목세신(喬木世臣)인데, 어찌 와서 나를 보지 않는가? 네가 모름지기 내 뜻을 가서 전하여 반드시 와서 보게 하라.”

했다. 김이안은 김원행의 아들이다.
영조 48년(1772) 조에 김원행의 졸기가 나온다. 간략하지만 김원행의 학문과 인품을 잘 설명하였다.

“성균관 좨주 김원행이 졸하였다. 김원행의 자는 백춘(伯春)으로 안동(安東) 사람이다.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손자인데,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의 후(後)로 출계하였다. 출생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니 선배들이 모두 국기(國器)로 허여하였다. 임인년(경종 2년, 1722) 후부터는 산골에 물러가 살면서 오로지 위기(爲己)의 학문에 마음을 썼으니, 대개 문간공의 유서(遺緖)를 소술(紹述)한 것이다. 성명(性命)의 근본을 통견(洞見)하고 이기(理氣)의 묘(妙)를 깊이 탐구(探求)하였는데, 조용히 깊고 깊이 생각하더니 각각 그 극(極)을 이해하였다. 평소에 하는 사업이 평정(平正)·적실(的實)하고, 의리(義理)를 변별함이 엄확·명쾌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초선(抄選)이 되어 벼슬이 공조 참의·좨주·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성상의 권우(眷遇)가 융숭하여 정초(旌招)를 자주 내렸는데, 매양 그 정초가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의리로써 사양하며 종신토록 일어나지 않으니,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나이는 71세였으며 <미호집(渼浩集)>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미호집⌋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연대는 알 수 없다. 서(書)에는 저자의 종장(宗丈)인 김시관(金時觀)과 성리설(性理說)에 관해 논란한 것, 유척기(兪拓基)와 예설에 대해 논한 것, 송명흠(宋明欽)·임성주(任聖周)·김종후(金鍾厚)·이완(李浣)·홍대용(洪大容) 등 당시의 많은 학자·문인들과 주고받은 서한들이 있다.

이 서한들에는 경의(經義)·심성(心性)·이기(理氣)·예설·사론(史論) 등에 관한 내용이 많아, 훈고학(訓詁學) 및 성리학에 관한 저자의 학문적인 영역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이간의 낙론(洛論)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예론은 김장생·송시열의 예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박학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성리설(性理說) 연구(硏究) -18세기 중반 낙론(洛論)의 심성론에 유의하여」, 「민족문화연구」 71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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