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행(金文行, 1701-1754)


김문행(金文行, 1701-1754)                                  PDF Download
문행은 자는 사빈(士彬)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증조부는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고, 조부는 김창국(金昌國)이며, 부친은 돈령도정(敦寧都正)을 지낸 김치겸(金致謙)이다.

김수증은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로 1650년(효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는 세마(洗馬)가 되었다.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성천부사로 있던 중에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그 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공은 1726년(영조 2)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 1746년(영조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다음해인 1747년 수찬(修撰), 겸사서(兼司書), 겸문학(兼文學), 부교리, 응교(應敎)를 역임했다. 1748년에는 사간(司諫), 보덕(輔德), 익선(翊善) 및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했다. 1753년에는 승지(承旨)에 올랐고, 좌승지(左承旨)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문행이 부교리가 되는 과정이 영조 22년 “홍문관 도당록 회권” 항에 나온다. 영조가

“오직 인재를 가려 쓰는 과정에서 저절로 비율이 맞는다면 좋겠지만, 만약 서로 비율을 맞추려는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곧 색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문벌만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아주 옳지 못하다. 권점을 받은 사람이 그 직책에 걸맞지 않을 것 같으면 경들을 문책하겠다.”

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회권을 했는데, 6점에는 정순검(鄭純儉)·민백상(閔百祥)·김양택(金陽澤)·윤동도(尹東度)·김문행(金文行)이 뽑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6점이 최고점이다.
부교리로 임명 받은 김문행은 영조 22년 12월경에 종조부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을 신원하는 소를 올렸다. 김창집은 김수항의 아들로,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세자로 세우기로 상의해, 김대비(金大妃 : 숙종의 계비)의 후원을 얻었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김문행의 상소는 문제가 되었던 “삼자(三字)”와 “삼변(三變)”에 대한 신원이 나온다. 삼자는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신택군(臣擇君)’이라는 말이다. 삼변은 경종 원년(1721) 세제(世弟)의 대리 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측에서 처음에 대리 청정의 하교를 거두어 달라는 정청(庭請)을 베풀었다가, 경종이 뜻을 굽히지 않자 대리 절목(代理節目)을 정하여 연명으로 차자[聯箚]를 올리고, 소론의 조태구(趙泰耉)가 경종을 알현하자 이를 따라 들어가 대리 청정의 하교를 환수할 것[反汗]을 청하였는데, 소론측에서 이러한 정청·연차·반한을 삼변(三變)이라 하여 노론의 죄목으로 삼았다.

“신의 종조(從祖) 충헌공(忠獻公) 신 김창집(金昌集)이 40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선대왕의 두터운 신임과 백발 단충(白髮丹忠)의 포장을 가장 많이 입어, 지우(知遇)에 감격한 나머지 죽음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위중하고 후사를 부탁할 사람이 없음에 이르러서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불안해 하다가, 마침내 두세 대신과 동심협력하여 위로 우리 자전(慈殿)과 경묘의 뜻을 받들어 드디어 큰 계책을 결정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화를 당하였습니다. ……

‘신택군(臣擇君)이라는’ 세 글자의 죄인은 신으로서는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만, 삼종(三宗: 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은 오직 전하 한 분뿐이어서 노래를 부르고 송사를 하는 일반 백성들까지도 오히려 우리 임금의 아드님이라며 추대를 하였는데, 더구나 신의 종조(從祖)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일찍이 민진원에게 대책을 결정한 일로써 말하기를, ‘오늘날 왕자가 많았다면 사변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겠으나, 우리 임금의 아드님은 오직 한 분뿐이고 또 천명과 인심이 이미 이리로 쏠리었으니, 다시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민진원이 일찍이 이 말을 가지고 어전에 앙달하였으니, 대저 민진원의 충직한 성품으로 반드시 사사로이 아부하여 임금의 귀를 속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삼변(三變)의 설에 있어서는 그 때의 사세는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대개 대리 청정의 교명이 세제 책봉 초에 갑자기 내려졌으므로, 백관을 거느리고 감히 도로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는 것은 사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비답이 간절하여 ‘〈세제가 옳은가?〉 좌우의 〈신하들이〉 옳은가?’라는 전교가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니, 곧바로 정청(庭請)을 철회하고 성명(成命)을 받드는 것 역시 사세로 보아 당연한 처사였으니, 이것이 정청을 연차(聯箚)로 바꾸게 된 동기입니다. 북문을 몰래 열고 역적 조태구가 갑자기 들어가니, 또 무슨 모양의 화를 일으킬지 몰라 다급하여 호흡을 다투는 판이었으니, 앞뒤로 함께 들어간 것은 뜻밖의 변고를 막자는 의도였으며, 절목(節目)을 작환(繳還)한 것 역시 눈앞의 다급한 사태를 미봉하자는 의도였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한결같은 정성은 참으로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혹자가 이것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얼굴을 찌푸리고 길게 한숨지으며 말하기를, ‘지금의 세태를 보건대, 설령 성명을 봉행했더라도 하룻밤 사이에 변고가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우선 화를 일으킬 수 있는 단서를 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하였습니다. 아! 앞뒤로 청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며 사세에 따라 대응한 것들이 한편으로는 종사(宗社)를 위하자는 의도였고 한편으로는 성궁(聖躬)을 보위하자는 의도였으니, 실로 일분의 사심도 그 사이에 개입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하늘의 해가 함께 밝혀 주고 있습니다. ……

전하께서 신의 종조를 표창한 일이 또한 많기는 하나, 오직 이 ‘세 글자’ 및 ‘삼변’의 설만은 지금까지 분변하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경신년(영조 16년, 1740)의 비망기에 아직도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이 많이 있으니, 지난날의 흉당들이 이를 구실로 삼아 무고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논하는 자들도 오히려 그때의 처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과거를 깨끗이 씻어버리려는 성상의 초심(初心)에 손상이 되지 않겠으며, 또 지하에서 품고 있는 억울한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내가 깊이 알고 있다.”

하였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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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행(金勉行, 1702-1772)


김면행(金勉行, 1702-1772)                                  PDF Download

 

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증조부는 여주목사를 지냈던 김수익(金壽翼)이고, 조부는 호조정랑을 지낸 김성후(金盛後)이다. 부친은 진산군수였던 김시민(金時敏)이고, 생부는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김시서(金時敍, 1681-1724)이다. 김시서는 문중의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에게서 수학했다. 그는 1721년(경종 1) 증광사마시에 진사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남인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 있어서 벼슬 생활을 포기하고 은거하였다.

1755년(영조 31)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 2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아들 김이정(金履正)은 1765년(영조 41) 식년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고,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 4등으로 급제하여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

영조 32년에 정언이 되고, 35년에는 책례도감(冊禮都監)에 공이 있다하여 가자(加資) 되었다. 35년에 승지에 제배되어 소임을 다 하던 중에 38년 6월에 상소문을 접수하지 않은 건으로 찬배(竄配)의 처분을 받았다.

영조가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가뭄을 민망히 여겨 비가 오는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헌납 박치륭(朴致隆)이

“신이 지난번 듣건대, 용안현감 이정(李瀞)이 상소를 안고 와서 올리다가 후원(喉院, 승정원)에서 물리침을 당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뽑아 정원 문 밖에서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합니다. 엄숙하고 깨끗해야 할 궁궐 안에 이처럼 변괴의 일이 있었는데도 끝내 보고하지 않았으니, 거의 옹폐(壅蔽)하는 데 가깝습니다. 청컨대 그때의 정원에 있던 승지(承旨)는 아울러 삭직을 명하소서.”

라고 하자, 영조가 죄가 삭직에 그쳐서는 안 된다. 멀리 찬배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때의 해방(該房) 승지가 김면행이었다.

 

그러나 8월에 영조는 처분이 지나쳤다고 하고, 다음해 영조 39년에 대사간에 임명한다. 이후 승지와 대사간을 교대로 역임하던 중, 영조 47년 대사간으로 재임 중에 조엄(趙曮, 1719-1777)에 관한 일로 체직 당한다.

조엄은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하여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하여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다. 후에 제주도에서는 그의 성을 붙여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불렀다.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영조 46년(1770) 조엄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 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다.

이 건과 관련하여 영조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조엄의 함답(緘答)을 읽도록 명하였다. 비국 당상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신이 관서(關西)에서 온 사람에게 상세하게 물어보니 3자의 설은 실제로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대신(大臣) 및 여러 비국 당상들도 모두 신회의 말과 같았으나 영조가 여전히 의심스럽게 여겨 태천현감 이종영(李宗榮)과 전 의주부윤 홍억(洪檍)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하문하였는데, 모두가 이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또 전 서장관(書狀官) 이명빈(李命彬)을 불러다 사행(使行) 때 백성들이 정말로 눈물로서 간절히 하소연했는지의 여부를 물었는데, 이명빈 또한 울부짖는 자를 보지 못했다고 대답을 한다.

이때 김면행이

“3자의 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놀랍고 비참하게 합니다만 풍문은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마땅히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청컨대 암행어사를 가려 보내어 염찰하고 사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라고 한다. 영조는 암행어사를 보내는 것이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대신이 청할 바가 아니라고 책망한다. 이를 두고 정언 남주로(南柱老)가 김면행이 암행어사를 청한 것은 사체(事體)가 경솔하다고 하면서 파직을 요청하자 그대로 했는데, 조금 있다 김면행을 다시 우윤에 제배한다.

 

훗날 정조 8년에 정조가 하교하기를,

“기묘년(1759, 영조35) 책례 때의 상례(相禮)는 바로 참의 김면행(金勉行)이었는데 그의 아들 김이정(金履正)이 마침 승품(陞品)할 대상에 올랐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아직 후임이 차출되지 않은 상례에 전 교리 김이정을 의망(擬望)하여 들이라고 분부하라.”

라고 하였다.

 

정조는 효의왕후와의 사이에 자손이 얻지 못했다. 그러다 나인 출신인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문효세자를 얻는다. 이때가 1782년 9월로 정조의 나이 31세 때 일이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난 지 만 22개월째인 1784년 7월 세자책례를 올린다.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책봉에 해당한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단명한 세자가 되고 말았다.

 

<참고 문헌>
⌈영조실록⌋
⌈일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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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李縡, 1680-1746)


이재(李縡, 1680-1746)                                           PDF Download

 

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며,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심정진은 「제미호선생문(祭渼湖金先生文)」에서 사도의 도통을 논하면서 중국에서는 맹자 이후로 이정과 주자를 들고 동방에서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을 이어서 도암 이재를 들었다. 그의 문하에 미호 김원행, 역천 송명흠, 녹문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숙종 경신년(1680) 9월 28일에 태어났다. 임신 중에 민부인이 달이 수중에 드는 꿈을 꾸었는데 광채가 방에 가득하였다. 5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중부(仲父) 충숙공이 가르침을 심히 부지런히 하셨고 안으로는 민부인의 인도가 또한 엄격하였다. 일찍이 베틀에 임할 때 실을 짜서 쌓아야만 한 필을 이룬다고 하여 학문도 중간에 멈춰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니 명심하여 실추하지 않고 육예(六藝)와 학업을 일찍 성취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721년(경종 1) 예조참판, 강화부유수,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산릉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토목의 일을 감독하여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의대부에 가해졌으며 대사헌·동지춘추관사를 겸하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신축년(1721) 겨울에 경종이 왕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소론 측에서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대신들이 백료를 이끌고 명을 거두기를 정청(庭請)했는데 참여하지 않고, “우리 왕께서 만일 병이 없고 후손을 낳을 바람이 있다면 진실로 후사를 미리 세울 필요가 없지만 이미 병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참결(參決, 세제인 영조에게 국정에 참여하여 결정하라는 명)하라는 명을 하였으니 다만 마땅히 받들어야 할 것이지, 어인 일로 억지로 다투어 論執하는가?”하였다. 얼마 후에 신임옥사에서 중부 충숙공 이만성(李晩成)이 조옥(詔獄)에 유폐되어 죽자 예로써 염장(斂葬)하고 인제 골짜기로 들어가 더욱 경전에 힘써 날마다 과정을 두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여러 해 풍비(風痹)를 앓다가 병인년(1746)에 화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치료에 좋겠다고 하여 이에 가까운 고을의 벗들에게 편지를 써서 이별하였다. 발행(發行)하여 광주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서 낙생촌사(樂生村舍)에서 영명했는데, 이때가 10월 28일이었다.

항상 율곡의

‘한 터럭이라도 성인에게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마치지 않은 것이다.’

라는 말을 애송하고

“율곡은 나의 스승이시다.”

했다. 율곡의 明通하고 쇄락한 운치에 스스로 묵묵히 계합한 바가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일찍 아버지를 잃은 것을 애통해 하여 모부인을 섬김에 깊은 사랑이 뜻을 봉양하는 효성에 드러났다. 거상(居喪)에 미쳐서는 채소만을 먹고 흡혈(泣血)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를 다하여 노쇠한 나이라고 하여 스스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례를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날마다 선영에 올라가 둘러보며 슬프게 살펴보았다. 말년에는 행보를 하지 못해 매번 견여(肩輿)를 타고 집 뒤의 작은 언덕에 올라가서 묘소를 바라보고 부복하였는데 그 언덕을 첨경대(瞻敬臺)라고 불렀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영조 을미년(1775)에 정조가 서무를 대신해서 들을 때 특별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하사하여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 이재의 묘표를 짓고 그 마지막에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밝혀두었다.

“적이 논하건대 유자(儒者)의 일은 세 가지가 있으니 바른 진퇴, 정밀하게 발휘함, 크게 창명(倡明)하는 일이다. 셋이 갖추어진 연후에 비로소 성덕(成德)의 대현에 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선생은 비록 구학에서 뜻을 감추고 은거하였으나 종국(宗國)에 대한 근심은 간절하여 출사와 은거, 말과 침묵이 시대의 오륭(汚隆)에 관계되었다. 의리가 어두워지고 윤리강상이 서지 않으면 차라리 죽더라도 자정(自靖, 스스로 의리에 안주함)하여 후회하지 않았다. 민락(閩洛)이 이미 멀어 미언(微言)이 손상되자 이기와 심성에 대해 어지럽게 쟁송이 모이니, 이에 본원을 연구하고 진체(眞諦)를 지시하여 여러 어지러움을 꺾고 뭇 사람들의 미혹을 열어주었다.

이에 사도(師道)를 높이 들어 가르침을 널리 열고 순순히 인도하사 문채를 성대하게 일으켜 모범은 당시에 성행하였고 공리는 무궁한 후세에 미쳤으니, 체용을 겸전하고 중선을 다 갖추어 진실로 명세(命世)의 유종(儒宗)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즉 선생은 비록 조정에서 예복을 입고 바르게 서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초심은 이루지 못했지만 필경에 성취한 바는 이와 같이 탁연하니 과연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옛날 장경부(張敬夫)가 이르길 ‘회옹부자(晦翁夫子)가 한가한 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궁구한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하였으니 거의 먼 후세에도 부절을 합친 듯하다. 오호라 성대하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김동준, 「도암 이재의 삶과 시문학」,「한국한시작가연구」 14호, 2010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필칭(權必稱)


권필칭(權必稱)                                                             PDF Download

 

필칭(權必稱, 1721년∼1784년)은 선비집안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충청도우후, 해남현감, 광양현감, 삭주부사, 창성방어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신분은 비록 무인이며, 무과에 급제한 관리였으나 유학자의 풍모를 잃지 않았으며, 사후에 ‘유장(儒將)’이란 칭송을 들기도 하였다. 일생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도학에 힘써 유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문집을 남겼다. 『주역』·『논어』 등 경학에도 밝았으며,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의 문인이다.

 

1721년(1세, 경종 1년)
선비집안의 권수무(權壽武)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단성현 북면 신등리의 단계 상촌이다. 5대 할아버지 권도(權濤, 1557∼1644)는 과거시험 문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주서, 병조정랑 사간원 정언,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권도의 사촌인 권집(權潗)과 권준(權瀹)도 비슷한 시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안동 권씨는 명문 가문으로 불렸다. 자는 자평(子平), 호는 오담(梧潭)이다. 송명흠(宋明欽),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1726년(5세, 영조 2년)
소학⌋을 배우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733년(12세, 영조 9년)
암자에 들어가 시(詩)와 부(賦)를 공부하면서 과거시험에 대비했다.

 

1735년(14세, 영조 11년)
평산 사람 신씨(申氏)의 딸과 결혼했다. 처가 집안사람들 중에도 무과로 관직에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1743년(22세, 영조 19년)
생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2차 시험인 회시에서 낙방했다. 다음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1747년(26세, 영조 23년)
다시 생원시에 도전하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또 2차 시험인 회시에서 낙방했다.

 

1750년(29세, 영조 26년)
그동안 사마시를 두 번 봤으나 모두 낙방하여, 식년 무과에 도전하여 급제하였다. 총 합격자 431명 가운데 425등으로 매우 저조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즈음 권필칭의 집안에서 소유한 노비수는 약 20명(도망 9구 포함한 28구) 정도였다. 이후로도 평생동안 지속적으로 그 정도의 노비를 유지하였다.

 

1751년(30세, 영조 27년)
3월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이 선전관은 무반의 관직 중에는 가장 요직 중 하나였다. 이후 훈련원 첨정(僉正) 등을 거쳐 충청우병마우후(忠淸右兵馬虞候) 청주진관(淸州鎭管)에 임명되었다.

 

1758년(37세, 영조 34년)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759년(38세, 영조 35년)
동생 권필시(權必時)가 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권필칭은 낙향하여 1년 정도 어머니를 모시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당시 본인의 거처에 “이락헌(二樂軒)”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너의 집안이 적막한 지 오래되었는데 무슨 뜻으로 벼슬하지 않는가? 늙은 어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해달라.”

이 말을 듣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내가 청주에서 돌아온 후 다시는 세상에 나갈 생각이 없었으나 억지로 나오게 되었네. 또 이것이 헛되이 노모의 바램을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할까 걱정스럽구나. 구하려고 해서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사양하지 않겠다.”

고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1760년(39세, 영조 36년)
서지수(徐志修)의 도움으로 서산(瑞山)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2월, 장기(長鬐) 현감에 임명되었다.

 

1764년(43세, 영조 40년)
장기의 현감을 지내던 중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작년에는 둘째 동생이 사망하였는데, 이해 4월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9월에 셋째 동생도 사망했다. 3년 뒤에는 넷째 동생도 사망했다. 이 때문에 몇 년간은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다.

 

1771년(50세, 영조 47년)
고성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원인손(元仁孫)과 서지수(徐志修)의 천거로 산림유신(山林儒臣)의 예에 준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학문에 힘썼다. 이즈음 삼가(三嘉)에 오담정사(梧潭亭舍)를 짓고 자신의 학문적인 꿈을 펼치고자 하였다.

 

1772년(51세, 영조 48년)
해남 현감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함경남도 병마우후(兵馬虞侯) 북청진관(北靑鎭管)에 임명되었다.

 

1774년(53세, 영조 50년)
증광별시시관(增廣別試試官)으로 임명되었다.

 

1775년(54세, 영조 51년)
7월에 심환지의 추천을 받아 광양현감에 임명되었다. 11월에 겸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집안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북쪽으로 온 후에 ⌈근사록⌋만 수 백차례 읽었는데 의심나고 모르는 곳을 매번 누구와 함께 강론하고 물어야할지 모르겠다.”

라고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해에 백두산을 여행하고 다음과 같이 ⌈백두록⌋을 지었다.

“을미년(1775년) 5월 13일에, 나는 남병영(南兵營)의 우후(虞侯)로서 백두산으로 길을 떠났다. 이번 유람은 자항(玆航), 제인(濟仁), 황수(黃水), 종포(終浦), 웅이(熊耳), 호린(呼麟)등지를 거쳐서 갑산부(甲山府)에 도착하는 여정이다. 여기서부터 백두산까지는 모두 갑산부 경내이고, 허항령(虛項嶺) 북쪽으로는 무산부(茂山府)와 경계다. 남병영에서 후치령(厚峙嶺)까지는 110리, 후치령에서 갑산부까지는 170리, 갑산부에서 연지봉(臙脂峯) 까지는 350리, 연지봉에서 백두산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는 35리이다.

우리 일행은 불행히도 비가 쏟아지고 안개가 짙어서 비록 정상을 5리쯤 남겨 둔 곳까지밖에 가지 못했지만, 그 높이를 어림잡아 보건대 과연 백두산 높이가 300리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다행히 때마침 산 동쪽 기슭이 맑게 개더니 붉은 해가 막 떠올랐다. 온 산이 영롱하게 빛나고 여섯 개의 높은 봉우리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에 갑산부에서 가져온 홍로주(紅露酒)를 꺼내 술잔에 가득 채워 한 잔 마시고는, 머리를 들어 산을 멀리 바라보며 길게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손으로 가리키기도 했다. 이는 내 평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웅장한 일이다.

정상 아래는 둘레가 2,000여 리쯤 되는, 그리 경사가 심하지 않은 언덕이다. 산의 몸체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2,000여 리의 언덕은 백두산의 배와 장기에 해당하고, 평안도 지방은 오른팔에 해당하고, 함경도 지방은 왼팔에 해당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은 왼쪽 다리에 해당하고, 충청과 전라도 지방은 오른쪽 다리에 해당하고, 한라산과 대마도는 양쪽 발이 끝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두텁고 웅장한 기세를 쌓아 둔 산은 비단 우리 조선에만 처음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곤륜산(崑崙山) 외에는 온 천하를 통틀어도 비할 바가 없다.

옛말에 ‘뛰어난 인재는 땅이 영험한 덕택이다.(人傑地靈)’라는 말이 있는데, 단군 이래로 뛰어나고 이름나고 신이한 인재들이 우리나라에서 그 얼마나 많이 배출되어 중국의 인물들과 미명(美名)을 함께 일컬을 수 있었던가? 그것은 이 백두산이 정기와 신령을 잘 모아서 저절로 그리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하 생략)”

1776년(55세, 영조 52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충주진영장(忠州鎭營將)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통정대부, 삭주(朔州) 도호부사(都護府使)에 임명되었다. 삭주부사에 임명하는 자리에서 , 정조는 권필칭에게

“관리로서의 치적은 전에 이미 들었다. 이번에도 마음을 다해 잘 다스려 그 명성에 부합하도록 하라.”

고 치하했다.

 

1779년(58세, 정조 3년)
아들 권엽이 사망했다. 삼가의 집을 정리하여 고향 단계 마을의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단계 마을로 이사했다.

 

1781년(60세, 정조 5년)
평안도 방어사 창성(昌盛) 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수사첩록(隨思輒錄)⌋을 완성하였다. 수신에 관한 이 기록에서 그는 선비가 과거에만 전념하는 폐단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시험에서 선비의 풍습이 바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향당에서 자호(自好)하는 선비는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과거에 종사하고자 하지 않는다. 선비들은 진실로 뜻을 두어 일체의 과거 공부를 폐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힘써 옛 책을 읽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좋다.”

1783년(62세, 정조 7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동래진(東萊鎭)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784년(63세, 정조 8년)
3월, 수영(水營) 관사에서 사망하였다. 저서에 ⌈오담문집(梧潭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해은, 「18세기 경상도 단성현의 한 양반 무과급제자의 사환과 처세」, 「조선시대사학보」26.

유한준(兪漢寯)


유한준(兪漢寯)                                                             PDF Download

 

저암공 유한준(兪漢寯)
저암공 유한준(兪漢寯)

한준(兪漢寯, 1732∼1811)은 영조 44년, 즉 1768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김포군수, 형주 주부(主簿), 군위 현감, 해주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명문 집안인 기계(杞溪) 유씨(兪氏)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상 대대로 송시열을 섬기는 가풍이 있었다. 그래서 당파적으로는 노론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당색에 얽매이지 않고 북인계 남인 실학자들의 견해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노장과 불교에도 이해가 깊었다.

성리학에서는 소론파의 견해도 받아들이는 등 개방적인 사유의 소유자였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되어 주변으로부터, “향후 백년간은 이러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 “일세를 독보하는 문단의 거장”이라는 등의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이러한 폭넓은 관심과 자유로운 정신은 그의 아들 유만주(兪晚柱, 1755~1788)에게로 이어졌다. 유만주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33세로 사망하였으나, 그가 살아생전에 매일 같이 기록한 ⌈흠영일기⌋를 통해 조선시대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후세에 남기고 있다.

 

1732년(1세, 영조 8년)
4월 7일, 조선의 명문 집안인 기계(杞溪) 유씨(兪氏) 집안에서 태어나다. 부친은 진사 유언일(兪彦鎰, 1697∼1747)이며, 어머니는 창녕(昌寧) 성씨(成氏)이다. 증조할아버지 유명뢰(兪命賚)는 송시열의 문하생이었는데, 송시열이 사약을 먹고 사망하자, 평생 동안 은거하며 관직이 나아가지 않았다. 할아버지 유광기(兪廣基)는 예산 현감을 지냈으며, 부친 유언일(兪彦鎰)은 평생 포의로 지냈다.

 

1747년(15세, 영조 23년)
부친이 사망하였다. 향년 50이었다.

 

1748년(16세, 영조 24년)
10월, 부친을 잃은 슬픔을 못이기고 큰형 유한병(兪漢邴)이 사망하였다. 매부 김려행(金礪行)의 집이 있는 덕산(德山)에서 의탁하여 지냈다. 이해 안취범(安取範)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와 결혼하였다.
이즈음 김이곤(金履坤)에게 시를 배우고 남유용(南有容)에게 문장을 배웠다. 유한준은 먼 친척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 박준원(朴準源, 1739∼1807) 형제와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글을 함께 배우고 평생 깊은 교유관계를 맺고 지냈다. 박유원은 미호 김원행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일가를 이루었으며, 박준원은 1787년 셋째 딸(가순궁 수빈 박씨綏妃朴氏)이 간택 후궁으로 궁중에 들어가 세자 순조(1790∼1834)를 낳아, 임금의 외할아버지가 되어 순조 시대 초년,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과 함께 국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1758년(26세, 영조 34년)
2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다음해 어머니 행장(先妣行狀)을 지었다.

 

1762년(30세, 영조 38년)
단양 일대를 유람하였다.

 

1763년(31세, 영조 39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처럼 우리나라의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 우선 동전표목(東傳標目)이란 목록을 구성하고 서문을 썼다.

유한준은 도(道)와 문(文), 즉 도학(성리학)과 문예(문장)를 구분하고 각각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문예의 모범을 육경이나 성리학 서적에서가 아니라, 사마천이나 반고로 대표되는 진나라, 한나라 때의 고문(古文)으로 보았다. 그는

“진한(秦漢) 이래 도술(道術)이 천하에 분열되어, 문장과 학문이 나뉘어 두 길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학자들은 각각 제가 사모하는 바를 좇아, 사모하는 바가 도학에 있으면 도학을 숭상하고, 사모하는 바가 문장에 있으면 문장을 숭배하여, 근원에서 멀어질수록 말단은 더욱 나뉘어졌는데, 이는 그 추세가 그런 탓이다.”

유한준은 이렇게 역사와 문장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아들 유만주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764년(32세, 영조 40년)
12월, 둘째 아들 유면주(兪冕柱)가 천연두에 걸려 만 5살의 나이로 죽었다.

 

1767년(35세, 영조 43년)
4월, 「에호부(殪虎賦)」를 지었다. 과거에 누차 응시하였으나 결과가 계속 좋지 못했다. 이즈음 문장이 주변에 소문이 나서

“향후 백년간은 이러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

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일세를 독보하는 문단의 거장”

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768년(36세, 영조 4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아들 유만주(兪晚柱)가 결혼했다. 며느리는 오재륜(吳載綸)의 장녀 해주 오씨다. 스승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에게 「치사송(致仕頌)」을 올렸다.

 

1771년(39세, 영조 47년)
음직(蔭職)으로 종 9품의 동릉(東陵) 참봉(參奉), 즉 여주(驪州)의 영릉 봉사(寧陵奉事)에 임명되었다. 「청심루송(淸心樓頌)」, 「단궁난(檀弓難)」을 지었다.
다음해 사옹원 주부,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1773년(41세, 영조 49년)

손자 유구환(兪久煥)이 태어났다. 봄에, 며느리 오씨(吳氏)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가을에 지평 안대제(安大濟)의 건의로 파면되었다.

 

1774년(42세, 영조 50년)
새로 이사한 곳을 읊은 「초당부(草堂賦)」를 지었다. 아들을 다시 장가보냈다. 새로 맞이한 며느리는 박치일(朴致一)의 장녀다.

 

1776년(44세, 영조 52년)
형주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승진을 하여 형조 낭관이 되었다.

 

1777년(45세, 정조 1년)
경상도 군위(軍威: 羅山, 赤羅)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쓴 문장으로 「나산책(羅山策)」이 있는 데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리의 세 가지 정사(政事)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이니, 나라의 율령은 거역할 수 없다네. 백성들이 곡식을 해마다 반환해도 향리들이 쥐새끼처럼 곡식을 훔치네. (중략) 누런 띠풀 흰 갈대만 무성한데도, 마을사람에게서 고혈(膏血)을 쥐어 짜내고, 거친 모래와 자갈뿐인 땅인데도, 그 친족들까지 착취하네.”

“수령은 살피지 않고, 감사는 구휼(救恤)하지 않으며, 조정은 논의하지 않으니, 임금의 귀에 들리지 않네. 그런 까닭에 백성은 병들고 지쳐서 입과 배를 채울 겨를 없으니 예의를 어찌 돌보겠으며, 예의가 없으니 어찌 순수함이 있겠는가? 어디든 다 그렇지만 영남이 가장 심하고,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지만 나산(羅山)은 갑절이라네.”

그는 이러한 문장과는 별도로 경상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본 현은 3,40년 이래 폐단이 해마다 늘어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차마 하기 어려운 것은 대체로 세 가지 폐단입니다. 첫째는 환곡이고 둘째는 군정(軍丁)이며 셋째는 결세(結稅, 토지세)입니다. 환곡의 폐단은 이렇습니다. 본 현은 아주 작은 방처럼 작고 초라하며 백성들의 집은 모두 텅 비어 있습니다. 가구 수는 2,800호에 불과한데 환곡세는 37,000석입니다.

이처럼 많은 환곡을 저 정도의 가구가 분담하니 이것이 소인국 사람에게 솥을 들어 올리게 하며 파리,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방 들녘은 이미 가을이지만 관리들의 빚 독촉을 지탱하기 어려우니 지탱할 수 없으면 도망가고, 도망가거나 죽게 되면 친족이 대신 물게 됩니다. 해마다 친족에게 빚을 징수하고 매년 이웃 사람을 침해하니 죽음뿐인 우리 백성들의 삶이 슬플 뿐입니다. (이하 생략)”

아울러 그는

“대낮에도 뇌물이 행해지며 음지에서는 문서를 위조하여 관리들은 그것으로 처자를 배불리 먹이고 서리들은 술과 고기를 실컷 먹습니다. 진실로 기댈 곳이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을 먹이지 않고, 참으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은 도리어 다른 사람을 먹입니다.”

라고 질타하고 흉년이 든 이 해 한해만이라도 환곡을 경감해주도록 호소하였다.

 

1778년(46세, 정조 2년)
풍기(豐基), 단양(丹陽), 경주 등지를 여행하였다. 아들 유만주는 자신의 일기를 ‘흠영(欽英)’이라고 이름지었다.

 

1779년(47세, 정조 3년)
6월, 영남 암행어사 황승원(黃昇源)의 보고에 따라, 군위현감으로써 지역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1782년(50세, 정조 6년)
이해 황해도 해주 판관(海州判官)에 임명되었다. 개성, 평양 등지를 여행하였다. 다음해 그동안 지은 시문(詩文)을 정리하였다. 스스로 편집하여 ⌈자저(自著)⌋라고 이름을 붙였다.

 

1784년(52세, 정조 8년)
봄에 아들 유만주가 해주와 평양으로 여행을 왔다. 아들이 여름 8월에 명동에 백칸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유한준은 집이 너무 크고 화려하여 반대하고 값을 내려서라도 집을 내놓으라고 연락했다. 아들은 9월에 과거시험을 보았는데 또 낙방을 하였다. 아들 유만주는 11월에 홍대용의 집에 가서 서

양 천문기기를 보고, 12월에 한양에 온 청나라 사신의 행렬을 구경하였다. 홍대용은 작년 겨울에 사망하였다.

 

1785년(53세, 정조 9년)
해주 판관의 직에서 해임되었다. 관내에서 일어난 옥사사건의 처리를 잘못하였기 때문이다. 익산 군수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명동의 집을 다시 팔고 창동의 작은 집으로 되돌아갔다. 부친 유언일(兪彥鎰)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다음해 「가전(家傳)」을 지었다.

 

1787년(55세, 정조 11년)
둘째 손자 유돈환(兪敦煥)이 태어났다. 큰손자 병으로 유구환(兪久煥)이 죽었다. 아들 유만주는 과거시험에 또 응시하였으나 떨어졌다. 사도사(司䆃寺) 첨정(僉正)을 거쳐 부평(富平) 부사(府使)에 임명되었다. 생질 김리중(金履中)이 사망하였다.

 

1788년(56세, 정조 12년)
2월, 아들 유만주(兪晚柱)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다 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유만주는 자신이 열심히 썼던 일기 ⌈흠영⌋을 미완성한 글이니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 유만주는 책 읽는 일을 매우 좋아했다. 비록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유교 경전과 역사책, 제자백가, 지리서, 패관잡설, 등 수 천권의 서적을 읽고 장차 역사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죽기 1년 전에도

“밤에, 사관(史官)이 되는 꿈을 꾸었다.”

(⌈흠영일기⌋, 1787년 3월 11일자)고 하였다.

이해 「광부이산영조천묘시말기(廣富二山營兆遷墓始末記)」를 지었다. 청주(淸州) 목사(牧使)에 임명되었다.

 

1791년(59세, 정조 15년)
아들 유만주의 유고를 모아 ⌈통원유고(通園遺藁)」를 만들었다. 그의 일기인 ⌈흠영일기(欽英日記)」를 정리하고, 두 유고집의 서문을 지었다.

유한준은 이렇게 썼다.

“아아! 재작년 오늘 저녁 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서 뒹굴고 내던지며 하늘을 울부짖고 벽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 어제 같은데, 스물여섯 달이 흐르는 물과 같이 지나가 홀연 종사(終事)의 기일에 당하여 너의 빈소를 거두고 너를 부모의 묘 곁에 부장하다니, 아아 원통하도다! 이것이 어찌 너의 오늘의 일이란 말이냐?

내가 실로 지극히 미욱하고 지극히 어두우며 지극히 완고하여 죽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서 여전히 밥을 먹고 여전히 살아 있구나! 살아 있다면 마땅히 너와 더불어 혼기(魂氣)를 가까이하고 상과 의자를 가까이 하여 대상의 일을 마쳐야 하였거늘, 도리어 무슨 마음에 뱃놀이하고 유람하여 이 비통함을 아침저녁의 제사와 삭망의 제사에 때에 맞추어 드러내지 않고서, 돌아와서야 이 저녁을 마친다는 말이냐. 아비가 되어 살아서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자식에 대한 정을 다하지 못하니, 인간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아, 애통하도다!(중략)

이제 너의 책을 내가 간행할 힘은 없지만 설령 간행할 힘이 있다고 해도 세상 누가 소유하여 아낄 자가 있겠느냐? 나 또한 석함에 넣어 묘 옆에 묻고서 후세를 기다리려고 하지만, 뜻과 함이 서로 다르지 못할까 두렵구나.

아아! 사람들 중에서는 실로 비록 장수하였으나 장수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자들이 있으니, 이는 칭송할 것이 못된다. 만약 네 책이 다시 나온다면, 네가 비록 요절하였지만 그 수명이 무궁할 것이니, 내가 비록 슬픈지 안 슬픈지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또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후세는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 아픔이 더욱 깊다. 나는 실로 끝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구나!

아아, 애통하도다! 너는 죽고 나는 산 것이 3년이 되었다는 말이냐? 이 생애 어느 날 다시 아버지와 자식이 된다는 말이냐? 나는 이미 늙었다. 가슴 속에 얼음과 불을 끌어안고 있으니, 세상에 오래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죽는 날에 너희 부자와 함께 지하에서 노닐어, 여기서 다하지 못한 인연을 다시 이으려하니, 너는 잠시 기다리기 바란다. 말을 그치노라. 아아, 애통하도다!”

아들 유만주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누구인가? 『흠영』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도 없다. 나는 역사책, 지도, 여행, 주렴, 다래를 좋아하며, 역사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스스로 돌아보고 헤아려 보아도 이미 두루뭉실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 세련되게 꾸미기를 요구하는 세상의 규율에 너무나 맞지 않다.”

유만주의 ⌈음영일기⌋는 2015년 일부가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일기를 쓰다⌋1, 2,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돌베개) 유만주의 ⌈음영일기⌋를 기리는 행사가 서울역사박물관 주관으로 <유만주의 한양 – 한양 선비의 한해살이, 1784, Ordinary day in Seoul>라는 제목으로 2016년 11월 25일부터 2017년 2월 26일까지 개최되었다.

 

1792년(60세, 정조 16년)
유언민(兪彥民)의 문집 ⌈석은집(石隱集)⌋의 서문을 지었다. 김이홍(金履弘)이 사망하였다.

 

1793년(61세, 정조 17년)
이즈음 김포 군수가 되었다. 다음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이즈음(1795년), 임윤지당(任允摯堂)의 유고에 서문을 지었다.

 

1796년(64세, 정조 20년)
8월, 사복사(司僕寺) 첨정(僉正)으로 임명되었다가 종3품의 강원도 삼척 부사(府使)로 부임하였다. 이때가 마지막 외직생활이었다.

 

1798년(66세, 정조 22년)
12월, 삼척 부사에서 해임되었다. 다음해 4월, 원자궁(元子宮)의 요속(僚屬)이 되었다.

 

1802년(70세, 순조 2년)
자저(自著)⌋를 다시 편집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판본은 ‘임술본(壬戌本)’이라 부른다. 장작 부정(將作副正)에 임명되었다가 강화(江華)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

 

1808년(76세, 순조 8년)
이해에 강화도를 여행하였다. 「저수자명(著叟自銘)」을 지었다. 「자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자신은 처음 문장이 서툴렀을 때, 진나라 한나라의 고문만을 숭상하여 장자, 굴원, 사마천, 한유 등을 섭렵했으나 이후 50여년간 마침내 얻은 것은 없었다. 이제 늦게야 도(道)는 육경(六經)에 있고 사서(四書)에 온축(蘊蓄)되어 있음을 깨우쳤다. 이것을 너무 후회한다.

또 「자저」(권4)의 고시(古詩) 「내 친구(吾友)」라는 문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도 이미 늙었다. 화려하고 난폭한 언사가 이제는 권태롭다.
옛 성현들의 서적이 오히려 그 의미가 좋음을 이제 깨달았다.
이기(理氣)와 심성정(心性情), 주공(周公)과 공자, 정주(程朱)와 장재(張載),
그들의 도가 달과 태양처럼 밝고, 그들의 말이 실낱같이 상세하네.
이것이 그들의 문장과 언사가 만고불멸하는 이유겠지.”

1810년(78세, 순조 10년)
속자서(續自著)」를 편찬했다.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사직하였다.
유한준은 연암(燕巖, 1737년∼1805년) 박지원과는 평생 반목하면서 멀리하였는데, 박지원이 사망한 뒤 다음과 같은 글(朴士能文集序)을 지었다.

“바야흐로 문장에 뜻을 둔 그 시절에 외람되게도 근재(近齋) 박영숙(朴永叔, 박윤원朴胤源) 및 연암(燕巖) 박미중(朴美中, 박지원朴趾源)과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모두 젊은 시절의 일이다. 영숙은 처음에 고문을 짓는데 힘써 문장에 규칙에 딱 맞았다.

중년에는 인문입도(因文入道)하여 우뚝하니 유림의 표준이 되었다. 미중은 재능이 뛰어나 그 문장이 저절로 경지를 획득하였다. 그는 규칙에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해학으로 도피하여 문장으로 유희를 삼았다. 대체로 두 사람 다 풍치가 있고 우아하며 걸출하다고 할 수 있겠다.”

1811년(79세, 순조 11년)
봄에 원자궁(元子宮)의 여속(僚屬)이 되었다. 이해 7월 28일, 사망하여 부평(富平)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유한준」<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人物年表)>. 박경남, 「유한준 문학의 실학적 면모」, <한국실학연구> 26권, 2013. 김명호, 「박지원과 유한준」, <한국학보> 12권3호, 1986.

황윤석(黃胤錫)


황윤석(黃胤錫)                                                             PDF Download

 

윤석(黃胤錫, 1729년∼1791년)은 조선시대 후기, 영조·정조 시대의 학자이자 관리이다. 그는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서 경학을 배우고, 영조 때에 진사시 복시(覆試)에 합격하였다. 이후 주변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올라, 의영고(義盈庫) 봉사(奉事), 사포서(司圃署) 직장(直長),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익찬(翊贊), 전의(全義) 현감(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으로 그 자신 역시 경학의 범위를 넘어서 서학과 천문, 역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으며, 실사구시의 실학적인 문제나 고대 역사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는 또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주요 저서로 ⌈이재난고(頤齋亂藁)⌋, ⌈이재유고(頤齋遺稿)⌋, ⌈자모변(字母辨)⌋, ⌈자지록(恣知錄)⌋ 등이 있다. 이 중에 ⌈이재난고⌋는 그 자신이 10살 때부터 63세까지 54년간, 평생에 걸쳐 문학, 경학, 예학, 사학, 산학(算學), 병사(兵事), 형률(刑律), 종교, 도학(道學), 천문, 지리, 역학, 언어학, 전적(典籍), 예술, 의학, 음양, 풍수, 성씨, 물산(物産) 등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기록한 생활사 자료집이다. 실학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학술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황윤석의 생가(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5호)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황윤석의 생가(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5호)

 

1729년(1세, 영조 5년)
4월 28일, 전라도 흥덕현(興德縣) 구수동(龜壽洞), 즉 지금의 전북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 실재(實齋), 산뇌(山雷), 서명산인(西溟散人)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증조할아버지 황세기(黃世基)는 송시열(宋時烈)을 아주 흠모하였으며, 장성(長成)의 진사 기진탁(奇震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할아버지 황재만(黃載萬)은 사부(辭賦)에 능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송시열이 유배당하였을 때는 송시열을 구원하기 위해서 상소를 올렸다. 황윤석의 부친 황전(黃㙻)은 책을 매우 좋아 하였으며 고암서원(考巖書院)을 중심으로 학문활동을 하여 학덕으로 이름을 얻어 장릉참봉의 자리에 추천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집안의 기풍을 이어받아 황윤식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흡수하게 되었다.

 

1738년(9세, 영조 14년)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비롯해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글을 배워 익혔다. 이해부터는 평생에 걸쳐 날씨, 자신이 읽은 서적, 친구와의 교류, 여행기록, 연구한 내용,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일기로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장을 모아 놓은 것이 그의 ⌈이재난고(頤齋亂藁)⌋다.

 

1742년(13세, 영조 18년)
임영(林泳)의 ⌈창계집(滄溪集)⌋을 읽었다. 이때부터 이수(理藪)에 관심을 갖고, 자학(字學)을 익히기도 하였다. 2년 뒤부터, ⌈이수신편(理藪新編)⌋ 편찬을 시작했다.

 

1746년(17세, 영조 22년
자명종(自鳴鐘)을 구하여 원리를 관찰하였다. 고암서원(考巖書院)을 방문하여 송시열의 초상을 알현하고 인사를 올렸다. 송시열은 집안의 어르신들이 대를 이어 존경한 유학자였다.

 

1748년(19세, 영조 24년)
1월, 창원정씨(昌原丁氏) 정남혁(丁南爀)의 딸과 결혼하였다.

 

1749년(20세, 영조 25년)
가을에 정후(丁垕)에게 편지를 하여 호락학심성설(湖洛學心性說)에 대해서 논했다.

 

1754년(25세, 영조 30년)
6월, 남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을 하였다.

 

1756년(27세, 영조 32년)
여름, 전주 승보시에 장원을 하였다. 9월에,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을 처음으로 찾아보고 인사를 올렸다. 겨울에 담양 승보시에 장원했다.

 

1757년(28세, 영조 33년)
다시 김원행이 있는 곳을 방문하고 죽림서원(竹林書院), 팔괘정(八卦亭) 등을 둘러보았다.

 

1759년(30세, 영조 35년)
진사시 복시(覆試)에 합격했다. 부친의 권유로 이 해 2월, 동생 황주석(黃胄錫)과 함께 미호 김원행을 찾아가 정식으로 제자의 예(집지례執贄禮)를 올리고 석실서원 입학을 허락받았다. 여름에 김원행으로부터 ⌈대학⌋을 배웠다.

집안의 영향, 그리고 김원행의 영향으로 황윤석의 당론적인 입장은 노론 중 낙론에 가까웠다. 아울러 황윤석은 성리학에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시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던 실사구시의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1760년(31세, 영조 36년)
장성(長城)에 유배중인 정신재(靜愼齋) 김시찬(金時粲)을 찾아가 뵈었다. 11월, 백양산(白羊山) 백련암(白蓮菴)에서 주역을 읽었다.

 

1762년(33세, 영조 38년)
12월, 김시찬을 다시 찾아가 역(易)과 천문(天文)에 관해서 논하였다. 다음해 1월에도 김시찬을 찾아, 음양변화 등에 대해서 문의하고, 논했다.

 

1764년(35세, 영조 40년)
4월, 김원행을 찾아뵙고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머물렀다. 겨울에 장성 부사로 부임한 정경순(鄭景淳)을 만나 문장, 당론 등에 관해 논하고 자신의 시집에 대해서 평을 부탁했다. 정경순은 황윤석과 비슷한 연배였는데, 음관으로 관직을 시작한 인물로 행정적인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정경순은 황윤석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황윤석이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정경순은 자신의 6촌형인 정홍순(鄭弘淳)에게 황윤석을 적극 추천하였는데, 정홍순은 당시 이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1765년(36세, 영조 41년)
이해 김수(金璲)와 ⌈대학⌋의 ‘명덕(明德)’과 이기(理氣), 심성론(心性論) 등에 관해서 논했다. 또 안형옥(安衡玉)과 이간(李柬)의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説)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1766년(37세, 영조 42년)
봄에 서명응(徐命膺)과 역학, 범수(範數), 자서(字書) 등에 관해서 논했다. 그동안 문과에 급제를 하지 못하였으나 주위의 추천을 받아서, 이해 여름에 장릉(莊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767년(38세, 영조 43년
장경순(鄭景淳)을 만나 구시책(救時策)을 논하였다. 이해 9월, 동생 황주석(黃胄錫)과 함께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했다.

 

1768년(39세, 영조 44년)
여름에 의영고(義盈庫) 봉사(奉事)에 임명되었다. 윤창정(尹昌鼎)을 만나 마테오리치(利瑪竇)의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하였다. 겨울에 이연(李湅)과 율여법(律呂法)에 관해서 논하였다.

 

1769년(40세, 영조 45년)
6월, 사포서(司圃署) 직장(直長)으로 승진되었다. 그 후 바로 종부시 직장이 되었다. 여름에 칠석제(七夕製)에서 사육문(四六文)으로 수석을 하였다. 화양서원(華陽書院) 비문(碑文) 문제로 병계(屛溪)와 미호(渼湖) 문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이에 황윤석이 나서서 중재하고 무마하였다. 이형철(李衡喆)과 삼한(三韓)의 옛 유적에 관해 논하였다.

 

1770년(41세, 영조 46년)
2월,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교정하였다. 3월, 사릉(思陵) 제관(祭官)에 임명되었다. 9월, 국제(菊題)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2월, 방비어모지책(防備御侮之策)을 지었다.

 

1771년(42세, 영조 47년)
승진하여 6품 벼슬인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가 되었다. 이해 10월 7일 사직하게 되었다. 12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후 거의 6년간 관직생활을 하지 못했다.

 

1772년(43세, 영조 48년)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할아버지와 부친의 유고를 편찬하였다.
여름에 스승 김원행(金元行)의 부음(訃音)을 듣고 심상(心喪)을 행하였다.

스승 김원행은 황윤석에게 두 차례의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 서간은 ⌈미호집⌋에 실려 있다.

그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근자에 자네 아버님과 막내아우가 전후해서 왕림해 주셨네. 그리고 자네의 새해 첫 편지를 얻고서 최근의 상세한 근황을 잘 알았으니, 너무도 기쁜 마음에 마주하여 담소를 나누는 것과 다름없었네. 다만 우환 때문에 서책을 읽는 공부에 방해되는 점이 있다고 하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학문을 하는 요체는 문자(文字)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아니네. 행동하고 정지하며, 말하고 침묵하며,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며, 남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 마음을 풀어놓지 않고, 항상 하나의 옳은 곳을 찾아서 행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근본 공부라네.

책을 읽는 공부에 이르러서도 단지 이러한 의리를 규명하려고 해야지, 널리 보고 지나치게 읽는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하네. 비록 병석(病席)을 지키며 간호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한가한 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니, 때때로 익숙히 본 글을 가지고 잠심하여 완미함으로써 성현(聖賢)의 마음 씀을 찾는다면 또 어찌 학문을 폐하였다고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지난날에 내가 말해준 장재(張載)의 말과 서로 상통하네. 부디 이제부터 예전의 박잡(博雜)하게 공부한 습관을 버리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여 서너 해가 지난 뒤에 다시 어떠한지 살펴본다면 필시 탁월한 성과가 있을 듯하네.”

황윤석의 학문이 너무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스승으로서 제자의 학문적인 문제점을 완곡하게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774년(45세, 영조 50년
서울로 돌아왔다. 여름에 심정진(沈定鎭)이 찾아와 함께 경전의 뜻과 율력(律曆), 산수(算數) 등에 관해 논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776년(47세, 영조 52년)
1월 13일, 당시 병조판서 서명선(徐命善)이 추천하여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익찬(翊贊)이 되었다. 1월 말일에 사직하였다. 9월에 부인 정씨(丁氏)의 상을 당하였다. 홍대용의 집을 방문하여 이덕무, 박지원, 박제가를 만나 교류하였다. 서명응(徐命膺), 서호수(徐湖修) 부자 등과도 학문적인 교류를 즐겼다.

 

1778년(49세, 정조 2년)
1월, 사복사(司僕寺) 주부(主簿)로 임명되었다. 이후 동부(東部) 도사(都事)로 옮겼다. 좌랑(佐郞) 김재진(金在鎭)이 호남의 인물에 대해 물었다. 이에 김익휴(金益休), 임홍원(林鴻遠), 신사준(愼師浚) 등을 추천했다. 6월, 윤대관으로 임명되어 희정당에 입시하였다. 호락이학시말기(湖洛二學始末記)를 집필하였다. 12월, 장릉(長陵)의 영(令)이 되었다.

 

1779년(50세, 정조 3년)
8월에 목천(木川) 현감(縣監)이 되었다. 황윤석은 지방 수령이 되기를 희망하였는데, 이렇게 그 뜻대로 된 것은 황윤석과 친분이 있었던 이덕무가 충청도 관철사 이병정(李秉鼎) 쪽에 추천을 하여 성사된 것이었다.

 

1780년(51세, 정조 4년)
6월 15일, 관찰사 심이지(沈頤之, 1735년∼1796년)가 내린 평가가 매우 나빠 파직되었다. 심이지는 이렇게 평가하였다.(⌈일성록⌋ 6월 15일자)

“목천 현감(木川縣監) 황윤석(黃胤錫)은 질박한 점은 귀하게 여길 만하나 세금을 함부로 걷어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이상은 모두 하(下)입니다.”

1781년(52세, 정조 5년
12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1784년(55세, 정조 8년)
1월에 장악원 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창릉령(昌陵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786년(57세, 정조 10년)
4월, 전생서(典牲署) 주부가 되다. 6월, 전의(全義) 현감(縣監)으로 발령을 받아 희정당에 들어가 임금을 뵈었다. 원래 황윤석은 전의현감의 후보에 불과하였으나 당시 이조판서 유언호와 정조의 입김이 작용하여 정식 발령을 받게 되었다.

 

1787년(58세, 정조 11년)
1월, 호서(湖西) 암행어사 심환지(沈煥之)의 건의로 4월 8일 파직되었다.

심환지의 건의는 다음과 같았다.

“호서 암행 어사 심환지(沈煥之)가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를 올려 병사(兵使) 구세적(具世勣), 부여 현감(扶餘縣監) 윤득우(尹得愚), 공주 판관(公州判官) 서직수(徐直修),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운빈(李運彬), 연기 현감(燕岐縣監) 최숙(崔熽), 전의 현감(全義縣監) 황윤석(黃胤錫)의 잘 다스리지 못한 형상을 논핵하여 구세적, 윤득우, 서직수는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주고 이운빈, 최숙, 황윤석은 파직하게 하였다.”

황윤석에 대한 평가가 어떤 근거로 파직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후 황윤석은 더 이상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다.

 

1788년(59세, 정조 12년)
4월, 부친이 남긴 유고를 편집하였다. 10월, 고암서원(考巖書院)의 강장(講長)이 되었다.

 

1791년(62세, 정조 15년)
4월 21일, 사망하였다. 고부(古阜) 후리(厚里)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1829년 후손 황수경(黃秀瓊)이 유고를 편찬하여 전라도 관찰사 조인영(趙寅永)의 도움을 받아 간행하였다. 1909년, 화재로 남은 유고와 수천 권의 장서가 소실되었다.

저서로 ⌈이재난고(頤齋亂藁)⌋, ⌈이재유고(頤齋遺稿)⌋, ⌈자모변(字母辨)⌋, ⌈자지록(恣知錄)⌋ 등 300여권이 있다. 특히 ⌈이재난고⌋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10살 때부터 63세까지 54년간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다.

현재 57권 6000여장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신용남, 「이재유고 해제」. 하주성, 「300여권의 저서를 남긴 이재 황윤석 생가」, 오마이뉴스, 10.11.01. 노혜경, 「18세기 지방 지식인의 인적 네트워크: 황윤석의 「이재난고」」, 「장서각 아카데미 2012년도 역사문화강좌」.

홍대용(洪大容)


홍대용(洪大容)                                                             PDF Download

 

대용(1731년∼1783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과학사상가이다. 그는 음사로 관직에 나가 영조 말년에 내직 3년, 정조가 즉위한 뒤에는 6년간의 외직 생활을 하였다. 관리로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1766년 북경 방문은 계기로 청나라의 사정과 자신이 겪은 경험을 글로 정리하여, 당시 젊은 지식들 예를 들면 박지원(朴趾源, 1737년∼1805년), 유득공(柳得恭, 1748년∼1807년), 박제가(朴齊家, 1750년∼1815년), 이서구(李書九, 1754년∼1825년) 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그는 북학파 혹은 이용후생 실학파의 선구로 평가된다. 그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산문답(毉山問答)」과 「임하경륜(林下經綸)」을 통해서 새로운 과학사상에 대한 관심을 표하고 조선 사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중국 친구 엄성(嚴誠)이 그린 홍대용
중국 친구 엄성(嚴誠)이 그린 홍대용

1731년(1세, 영조 7년)
홍대용은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서 홍력(洪櫟)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청풍김씨로 군수를 지낸 김방(金枋)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金在魯)와는 6촌사이다. 홍대용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다.

부친 홍력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음관으로 문경현감, 영천군수, 해주목사, 나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증조할아버지 홍숙(洪璛)은 충청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호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할아버지 홍용조(洪龍祚)는 충청도관찰사, 호조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는데,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1742년(11세, 영조 18년)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가서 미호 김원행(金元行)에게 글을 배웠다.

 

1746년(15세, 영조 22년)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박지원으로부터 ‘조선 거문고의 명수’라고 칭찬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1751년(20세, 영조 28년)
윤증(尹拯)의 문집을 얻어 보고 윤증의 문장에 매력을 느꼈다.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련하여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문제를 스승 김원행에게 물어보다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다.

 

1754년(23세, 영조 30년)
스승 김원해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755년(24세, 영조 31년)
이즈음 스승 김원행의 석실서원에서 연암 박지원을 만나게 되었다. 다음 해에 석실서원에서 이재 황윤석(黃胤錫)을 만나 교류를 하였다. 황윤석은 홍대용에 대해서 ‘과거공부를 하지 않는 박학한 사람’, ‘중국 선비들과의 지속적 교유를 하는 자’, ‘기이한 서책과 문물의 소유자’, ‘음악가’등으로 평가하였다.

 

1758년(27세, 영조 34년)
부친이 나주(羅州)목사로 임명되었다. 부친을 따라가 나주에 머물렀다. 이 때 나주의 향약(鄕約)과 권무사목(勸武事目)에 대한 서문을 지었다. 또 화순 동복의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하는 과학자 석당 나경적(羅景績)을 찾아가 교류하였다.

부친으로부터 제작비를 받아 3년간 혼천의와 자명종을 제작하였다. 고향에 창고(籠水閣)를 지어 보관하였다.

 

1762년(30세, 영조 37년)
부친이 환곡에 관한 일로 처벌을 받아 예천(醴泉)에 정배(定配, 일정한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함)되었다. 아울러 금고(禁錮) 5년형에 처해졌다. 부친은 이 일로 충격을 받아 금고형이 끝날 즈음에 사망하였다.

 

1765년(34세, 영조 41년)
이해 11월, 작은 아버지 홍억(洪檍)이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의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가게 되었다. 홍대용은 자제 군관(軍官)의 자격으로 중국에 따라갔다. 사전에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를 탐독하였으며, 북경에 약 3개월간 머물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였다.

 

1766년(35세, 영조 42년)
2월, 북경 천주당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흠천감정(欽天監正) 할레르슈타인(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 고가이슬(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신부를 만나 서양의 천문기술과 서학 등에 대해 필담을 나누고 서양 문물을 배웠다. 이 대화는 ⌈유포문답(劉鮑問答)⌋으로 정리하였다.

정월 7일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유송령(劉松齡)의 나이는 62세, 포우관(鮑友管)의 나이는 64인데, 비록 수염과 머리털은 희었지만 건강한 얼굴빛은 어린애 같았고, 깊숙이 들어간 눈에 눈동자의 광채는 사람을 쏘는 듯하니, 벽화 속에서 보던 인물과 꼭 같았다. 모두 머리를 깎았으며, 의복과 모자는 청국 식으로 유송령은 양람정(亮藍頂)을 쓰고, 포우관은 암백정(暗白頂)을 썼다.

유송령은 3품(品), 포우관은 6품으로 모두 흠천감(欽天監)의 관직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중국에 들어온 지 벌써 26년이 되었으며, 수만 리의 먼 길을 항해(航海)하여, 복건(福建)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육지에 내렸다 한다. 통역관 홍명복(洪命福)을 통해 ‘배우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전하였더니, 두 사람은 모두 ‘감히 어찌……’ 하고 사양하였다.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으나 통역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많아서, 깊은 뜻은 말할 수 없었다. ‘당 안을 두루 살펴봅시다.’고 청하였더니, 유송령이 곧 일어나서 읍하고 인도해 주었다.”

홍대용은 또 항주에서 온 중국 선비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형제의 의를 맺고, 이들과 성리학, 역사, 풍속 등에 대해서 토론했다. 이때 엄성은 홍대용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여름에 돌아와 그동안의 자료를 정리하여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을 만들었다.

 

1767년(36세, 영조 43년)
귀국하였다. 중국에서의 경험을 글로 정리하였다. 중국 친구들과 나눈 필담을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으로 엮었다. ⌈해동시선(海東詩選)⌋을 완성하여 항주의 반정균에게 보냈다.

북경여행 경험을 주제별로 정리하여 ⌈담헌연기⌋(한문본)를 만들고, 일기체 형식으로 날짜에 따라 기록한 ⌈을병연행록⌋(한글본)을 정리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홍대용은 나중에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등이 중국으로 떠날 때 중국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기도 하였다.

홍대용의 ⌈담헌연기⌋는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더불어 3대 연행록으로 꼽힌다. ⌈을병연행록⌋은 서유문의⌈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과 함께 대표적인 한글 연행록으로 꼽힌다.

11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홍대용은 과거시험에 대한 미련도 버리고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1768년(37세, 영조 44년)
중국 친구 엄성(嚴誠)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지어 보냈다. 중국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항전척독(杭傳尺牘)⌋에 정리되어 있다. 부친의 상중에⌈주해수용(籌解需用)⌋을 지었다. ⌈주해수용⌋은 그때까지의 수학 지식,
즉 산법(算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문장은 내편과 외편, 의기설(儀器說)과 약율해(樂律解)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구구수(九九數)를 시작으로 수학의 여러 기본법을 제시하였다. 내편에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비롯하여 양전법(量田法), 체적법(體積法), 면적법(面積法) 등 18개 법칙과 직각삼각형 등에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 외편에는 천지의 모습을 살펴보는 측량법을 제시하였으며, 양끝(兩極)을 측량하기 위한 방법, 땅을 측정하기 위한 방법 등을 설명했다.

의기설(儀器說, 籠水閣儀器志)에서는 용수각에 자신이 만들어 모아놓은 천문 관측기기들을 설명하였다. 약율해는 각종 율관(律管)의 크기 등을 계산해 놓은 글과 황종(黃鍾)의 변화,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의 차이를 설명한 글 등이 실려 있다.

 

1770년(39세, 영조 46년)
부친상을 마치고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이곳에서 이송(李淞)을 만났다.

 

1772년(41세, 영조 48년)
그동안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도전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해 7월 스승 김원행이 사망했다. 이즈음 ⌈의산문답(毉山問答)⌋을 집필하였다. 이 저술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는 이즈음 지구 자전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 제도 폐지, 공거제를 통한 인재 등용 등 조선사회의 개혁에도 관심을 가졌다.

사회 개혁안이 실려 있는 ⌈임하경륜(林下經綸)⌋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본래부터 명분(名分)을 중히 여겼다. 양반들은 아무리 심한 곤란과 굶주림을 받더라도 팔짱 끼고 편하게 앉아 농사를 짓지 않는다. 간혹 실업에 힘써서 몸소 천한 일을 달갑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모두들 나무라고 비웃기를 노예(奴隸)처럼 무시하니, 자연 노는 백성은 많아지고 생산하는 자는 줄어든다. 이렇게 하면 재물이 어찌 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목별로 조항(條項)을 엄격히 세워야 마땅할 것이다. 그 중 사ㆍ농ㆍ공ㆍ상(士農工商)에 관계없이 놀고먹는 자에 대해서는 관(官)에서 벌칙을 마련하여 세상에 용납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재능과 학식이 있다면 비록 농부(農夫)나 장사치의 자식이 조정에 들어가 앉더라도 분수에 넘칠 것이 없고, 재능과 학식이 없다면 비록 공경(公卿)의 자식이 하인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한탄할 것이 없다. 위와 아래가 힘을 다하여 함께 그 직분을 닦는데,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조사하여 상벌(賞罰)을 베풀어야 한다.”

1774년(43세, 영조 50년)
봄에 이송(李淞)과 함께 동해를 유람하여 양양(襄陽) 낙산사를 방문하였다. 음사(蔭仕,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벼슬살이하는 일)로 관직에 나갔다. 처음에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조정에서는 다시 돈녕부 참봉에 임명하였는데 또 사양하였다. 하지만 12월경, 세자손 정조를 보위하는 세손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侍直, 정8품)에 임명되자 출사하였다.

동궁에서 세손(정조)과 주고받은 문답, 강학한 내용을 ⌈계방일기(桂坊日記)⌋라는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에는 자신의 연행경험이나 사사로이 잡담한 내용들도 대화체로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맨 처음 강연을 시작한 12월 1일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손 정조가 이렇게 물었다.

“계방(홍대용)은 바로 얼마 전에 새로 임명된 홍대용 시직(侍直)인가? 학업(學業)에 매우 독실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경연에 같이 참석한 보덕(輔德) 한정유(韓鼎裕)가 이렇게 거들었다.

“그의 다른 점은 알 수 없으나, 다만 경학(經學)에 넉넉하며, 또 과거(科擧)에만 대응(對應)하는 선비는 아닌 줄로 아옵니다.”

다시 동궁 정조가 한정유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제 강론한 형기지사(形氣之私)라는 문장의 뜻을 다시 생각해 보니, 어떻던가?”

한정유는

“신(臣)이 물러나가 다시 보았는데, 어제 말씀하신 내용이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궁 정조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계방(홍대용)은 경학(經學)하는 사람이라니,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오. 상번(上番, 한정유를 지칭하는 듯)이 시험 삼아 어제 다룬 문제를 가지고 물어 보시오.”

세손 정조의 명을 받들어 상번이 이렇게 홍대용에게 물었다.

“⌈중용(中庸)⌋ 서문(序文) 가운데, ‘형기지사(形氣之私)’라는 ‘사(私)’와 그 밑에 ‘인욕지사(人慾之私)’라는 ‘사(私)’가 있는데, 두 사(私)자의 뜻이 같은가 다른가?”

홍대용이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이 글을 읽은 지 오래되어 갑자기 기억할 수 없으나, 다만 두 사(私)자의 뜻은, 한 이치를 말한 것인 바, 달리 볼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즉 같은 뜻입니다.)”

이러한 답변에 대해서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기에 ⌈중용(中庸)⌋이 없으니, 어찌 다 기억할 수 있을 것이오? 내 의견에 시비(是非)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침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우연히 말한 것이오. 대개 ‘형기지사(形氣之私)’라는 ‘사(私)’자의 뜻은 주리면 먹고 싶고, 추우면 입고 싶은 것처럼, 남은 그렇지 않은데 나 혼자 그러한 것이오. ‘인욕지사(人慾之私)’에 나오는 ‘사(私)’자의 뜻은, 곧 욕심에서 우러나오는 사사로운 생각인 바, ‘사람의 마음(人心)에 있어야 하는 것’을 뜻함이 아닐 것이오.

또 ‘이자(二者)는 마음속에 섞여 있다.’라는 이자(二者)와 ‘정밀함은 이 이자(二者)를 살핀다.’라는 이자(二者)와는 역시 뜻이 같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러한 정조의 물음에 한정유가 이렇게 말했다.

“계방(홍대용)에게 물러가 깊이 생각해보고, 다시 답변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러한 말에 홍대용도 이렇게 말했다.

“다시 상고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이다음에 만일 하문(下問)하신다면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경연에서 왕세손 정조와의 첫 대면은 이렇게 힘들게 지나갔다. 시원스럽게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은 홍대용의 중용에 대한 이해가 미흡한 것도 있었지만, 정조는 당시 이미 보통 유학자들의 경전 이해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기 때문에 경연에 처음 참석하는 젊은 관리로서는 당연히 겪는 일이기도 하였다.

 

1775년(44세, 영조 51년)
일성록⌋ 기록에 따르면, 이해 1월부터도 경연에 참가하였다. 존현각에서 겸문학 정민시, 겸사서 홍국영 등과 함께 영조와 세손인 정조를 모시고 ⌈주자서절요⌋, ⌈성학집요⌋ 등을 읽었다. 이러한 경연은 이해 4월까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1월에 1차례 이루어졌다.

 

1776년(45세, 영조 52년)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뒤 임금으로부터 어린 말 1필을 수여받았다. 종친부 전부(典簿)가 되었다.
이즈음 홍대용의 생각을 잘 드러내는 글로 「담헌집」 내집(內集) 3권에 실린 「어떤 사람에게 주는 편지(與人書)」가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저 기예(技藝)란 사람에게 있어서 조그마한 기술일지라도 오히려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 종말에는 게을리 하며, 앞에서는 큰소리로 장담하다가 뒤에 와서는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면 남이 반드시 그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이르기를, ‘이 사람은 더불어 일할 수 없다.’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기술도 그러한데, 하물며 천하를 다스리는 큰 도(道)에 있어서는 어떻겠습니까? 나는 마음으로 그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고 또 부끄럽게 여깁니다. 살펴보건대, 그대는 안으로는 성색(聲色)과 주식(酒食)에 대한 욕심이 적고, 밖으로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나 명리(名利)에 대한 생각이 적으며, 어떠한 진귀한 물건을 좋아하여 거기에 빠지지도 않고, 늙고 병들어 그 기운을 잃는 일도 없습니다.

이 네 가지에는 사람의 타고난 마음과 성품을 잃는 것인데, 지금 그대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애석하게 여기게 하고 뒷공론을 하도록 함은 그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만 안락함이 독(毒)이 되었을 뿐입니다. (중략) 좋은 음식과 따뜻한 옷으로 거처를 편케 하고, 뜻에 따라 글을 보다가 뜻에 맞으면 그만두며, 왼쪽으로는 어린아이나 희롱하고 오른쪽으로는 쓸 데 없는 이야기나 한다면, 뜻이 어찌 교만하지 않겠으며, 몸이 어찌 방탕하지 않겠으며, 배움이 어찌 제멋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아아! 안락함의 화란 독살(毒殺)보다 더 참혹하고 칼날보다 더 혹독하며 타는 불보다 더 맹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밟는 자는 반드시 죽고 닿는 자는 반드시 망하는 것입니다.”

1777년(46세, 정조 1년)
임금으로부터 다시 반쯤 자란 말 1필을 수여받았다. 전라도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임명되었다. 조정 흥정당(興政堂)에 나가 여러 임명자들과 함께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그대가 일찍이 계방(桂坊, 동궁의 세자 교육 담당 관리)을 역임하였는데, 직책을 옮기고 나서는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이제 비로소 보게 되는구나.”

임금은 다른 수여자들에게도 모두 한마디씩 건넸다. 어떤 이에게는 수령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주의를 주기도 하였는데, 당시 수령은 칠사(七事)라고 하여 일곱가지 중요한 의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즉 농상성(農桑盛, 농업과 누에치기를 성하게 하는 일), 호구증(戶口增, 인구가 늘어나도록 하는 일), 학교흥(學校興, 지방의 향교나 서원이 흥하도록 하는 일), 군정수(軍政修, 군사와 관련 된 것을 잘 보수하고 유지하는 일), 부역균(賦役均, 백성의 부역을 균등히 하는 일), 간활식(姦猾息, 간사하고 교활한 짓을 그치도록 하는 일), 사송간(詞訟簡, 송사를 간략하게 하는 일) 등이었다. 임금은 특히 이러한 일 외에도 다스리는 법도가 많이 있으니, 성심을 다해서 일에 임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후로 홍대용은 모두 6년간 외직의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중앙 조정으로 다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1779년(48세, 정조 3년)
이해 겨울에 경상도 영천군수에 임명되었다.

 

1783년(52세, 정조 7년)
모친의 병을 이유로 영천군수를 사직하였다.
일성록⌋ 1월 19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록(영천 군수榮川郡守 홍대용을 재촉하여 내려보내라고 명함)이 있다.

○ 이조(吏曹, 관리의 임명을 담당하는 부서)가 홍대용이 부모의 병을 이유로 고을로 돌아갈 의사가 없음을 아뢴 데 대해, 임금이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부모의 병이 어떠한지 모르지만 신칙하는 하교가 내렸는데 어찌 지체할 수 있겠는가. 다시 재촉하여 내려보내라.”

그러나 홍대용은 끝내 임지로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이해 10월 23일, 중풍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청주(淸州) 구미평(龜尾坪)에 장사 지내고, 박지원(朴趾源)이 묘지명을 지었다. 친구 이송(李淞)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유족으로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1남 3녀를 두었다.

 

참고문헌)
「일성록」. 「담헌서」. 김경희, 「담헌서 해제」. 「계방일기(桂坊日記)」.

김상진(金相進)


김상진(金相進)                                                             PDF Download

 

상진(1736년∼1811년)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홍명원(洪命元), 김원행(金元行), 송명흠(宋明欽) 등에게 배웠다. 일찍이 19살 되던 175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20대 들어 부모가 돌아가시고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사망하는 등 우환을 겪었다. 그러는 중에 집안일과 과거준비를 함께 하였으나, 때마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이후 산림에 은거하면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심취하고, 주자학의 연구와 실천에 힘쓰면서 일생을 보냈다.

 

1736년(1세, 영조 12년)
5월 20일, 보은(報恩, 지금의 충청북도) 탁곡리(濯谷里)에서 김덕사(金德泗)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곽세규(郭世圭)의 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달(士達), 호는 탁계(濯溪)이다.

 

1748년(12세, 영조 24년)
신와(愼窩) 홍명원(洪命元)에게 글을 배우다.

 

1754년(18세, 영조 30년)
할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1755년(19세, 영조 31년)
진사 초시(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후에는 과거와 인연이 없어 매번 실패하여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박윤원(朴胤源), 임정주(任靖周), 김이안(金履安), 송시연(宋時淵) 등과 교류하면서 주자학 연구에 힘썼다. 특히 운호(雲湖) 임정주와는 예송(禮訟)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서신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즈음에 「남한감회(南漢感懷)」를 지었다. 병자년을 맞이하여 남한산성에서 인조(仁祖)시대 병자년의 난리에 대한 감회를 적은 문장이다.

 

1758년(22세, 영조 34년)
모친상을 당하였다.

 

1760년(24세, 영조 36년)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에게 편지를 써서 제자의 예를 청하였다. 이해, 11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부친에 대해서 김상진은 이렇게 썼다.

“부친은 글을 읽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집안에서의 몸가짐이나 사람들을 상대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옛사람의 도리에 합당했다.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어제일을 오늘 생각해보면 후회스럽다. 작년 일을 금년에 생각해보면 후회스럽다. 지금 40이 넘었다. 이제 좀 사람의 일을 알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사람의 일을 정말로 알지는 못한다. 부친은 임종 시에 나에게 이렇게 경계를 말씀을 해주셨다.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도모해라. 그리고 독서를 하여 몸가짐을 경계해라.
이 두 가지는 어느 한쪽을 버리면 안 된다. 입고 먹는 일은 너무 중시하기 쉽고, 글공부는 항상 소홀함을 걱정하기 쉽다. 그러나 너는 반드시 두 가지를 다 힘써라.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을 두 가지 사이에서 따지지 마라.”

 

또 부모를 모두 잃고 자신이 가정을 이끌어가는 사정을 김상진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부친을 대신하여 가정을 돌보았다.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며, 세금과 부역을 담당하는 일이며, 손님을 접대하고 하인들을 관리하며, 밑으로는 마당청소에서 문단속에 이르기 까지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직접 다 했다. 또 멀고 가까운 곳으로 배움을 찾아다니며 독서하는 일도 전력을 다했다. 사람들은 그래서 모두 칭하기를 옛사람의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1763년(27세, 영조 39년)
11월, 동생 김상훈(金相薰)이 사망하였다. 부모님을 차례로 여의고 다른 식구들도 없이 두 형제만 서로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동생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家庭古蹟」)

“이웃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씨네집 형제들은 참 이상하다. 형이 말하면 동생이 웃고, 동생이 말하면 형이 웃고. 그런데 옆에 사람이 다가가서 무슨 말 때문에 웃는지 들어보면, 별로 웃기는 이야기도 아닌데 말할 때마다 항상 웃는다.’
우리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준 모양이다.”

동생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제문(祭亡弟相薰文)을 지어 올렸다.

 

1764년(28세, 영조 40년)
보은으로 이사 온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나아가 글공부를 하였다. 이 때 「미강어록(渼江語錄)」을 지었다. 스승의 언행을 상세히 기록한 문장이다.

 

1766년(30세, 영조 42년)
여름, 당쟁으로 쫓겨나 용유동(龍遊洞)에 있던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소학(小學)」, 「대학(大學)」, 「근사록(近思錄)」 등에 대해서 의문사항을 물었다. 이때 들을 것을 기록하여 문장으로 남겼는데, 「탁계집」에 실린 「병천기문(甁泉記聞)」이 그것이다. 또 문장(「神龍吟上宋先生」)을 지어 송명흠에게 써서 올렸는데, 다시 정세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이해 가을에, 김원행을 찾아가 뵈었다.

 

1768년(32세, 영조 44년)
스승으로 모시던 송명흠이 사망했다.

 

1771년(35세, 영조 47년)
스승 김원행에게 「맹자」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써 보냈다. 「맹자」 고자장(告子章)에서 고자가 동물의 성(性)과 사람의 성을 똑같은 기(氣)로 본 것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여러 가지 견해를 적어 보낸 것이다.

 

1772년(36세, 영조 48년)
여름에 스승으로 모시던 김원행이 사망했다. 김이안에게 글(「답삼산재금공(答三山齋金公)」)을 써서 보냈다. 스승의 무덤에 쓸 ‘회격(灰隔)’에 대해 고찰한 내용이었다. 또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연에게 애통해하는 글을 써 보냈다.

 

1776년(40세, 영조 52년)
가을에 딸이 사망했다.

 

1779년(43세, 정조 3년)
여름에 추천을 받아 완산부(完山府) 조경묘(肇慶廟)의 참봉(參奉)이 되었다. 근무지에서 「태극도해(太極圖解)」와 「여도위체설(與道爲體說)」등을 지었다. 이즈음에 「규고설(刲股說)」을 지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부모의 병간호를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임청주(任靖周)가 일전에 청산현에서 벼슬할 때의 일이다. 청산현의 백성 중에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효도를 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놀래서 책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의 신체와 머리털, 피부는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감히 훼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효도의 시작이다.

이것은 효경이 시작되면 바로 등장하는 맨 첫 번째 뜻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를 훼손한 것이다. 어찌 효도를 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육은 먹어서는 안 된다. 부모로서 자식의 살을 먹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은 또 병든 부모를 속인 것이다. 그리고 부모로서 아들을 먹는 악행에 빠지게 하였다.

이러한 것은 무슨 명분이 있겠는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일이며, 지금까지 그것이 군자의 효라고는 듣지 못했다. 이러한 말을 듣고 나는 무의식중에 탄복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명나라 역사를 뒤져 보았다.(이하 생략)”

 

1780년(44세, 정조 4년)
가을에 임기가 만료되어 귀향하였다. 겨울에 선공감(繕工監) 부봉사(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에는 바깥에 나가지 않고 후학양성에만 힘을 썼다.

 

1784년(48세, 정조 8년)
11월, 부인상을 당하였다. 부인은 풍천임씨(豐川任氏) 임한성(任漢星)의 딸로 부인과 사이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이때의 슬픔을 다음과 같은 제문(祭文)으로 지어 올렸다.

“나와 부인은 상투를 틀고 쪽을 찌고 서로 만났네. 30년 넘게, 한방에서 같이 살아, 딸을 낳아 사위를 보고, 아들을 낳아 며느리를 보았네. 그리고 이미 손자들도 안아 보았네. 할머니라 불리며,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일하였고, 집안에서는 원망하는 소리가 드물었네. 성품은 겸손하고 말 또한 과묵하였네. 우둔함과 평범함이 서로 짝을 이루고 진실로 서로 잘 어울렸네.

가난함이 비록 심했지만, 화목함과 기쁨이 쇠하지는 않았지. 인간 세상에서 50년, 평온하게 지내고 때가 이르니 명이 다하고, 이제 승화하여 참된 곳으로 돌아갔네. 세상에 많은 부인들이 있지만, 이러한 행복을 얻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하 생략)”

 

1791년(55세, 정조 15년)
가을에 밭을 매입하여, 의전택(義田宅)을 만들었다.

 

1797년(61세, 정조 21년)
여름, 조정에서 전국에 「향례합편(鄕禮合編)」을 반포하였다. 이를 보고 「향음주례고증(鄕飮酒禮考證)」을 지었다. 이평(梨坪)에서 행한 향음주례의 16개 조목을 기록한 「향음주례약속(鄕飮酒禮約束)」도 이즈음에 지었다.

 

1799년(63세, 정조 23년)
여름에 증조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천여 권에 달하는 서적을 모아 장서각을 만들고 ‘묵장각(墨莊閣)’이라 이름을 지었다. 겨울에 문중의 규약, 즉 문약(門約)과 종맹(宗盟), 가숙절목(家塾節目) 등을 만들었다. 이해 이후로 줄곧 병마에 시달렸다.

 

1801년(65세, 순조1년)
3월에 「가정고적(家庭古蹟)」을 지었다. 자신의 선조 및 부모, 외조부까지의 일화를 기록하였다. 또 이즈음에 손자들에게 경계의 뜻으로 「서시직신(書示直信)」, 「서여직신익신(書與直信翼信)」 등의 문장을 지어 주었다.
이즈음(1802년)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글(「병중감회病中感懷」)을 썼다. 평생 동안 정자와 주자만을 흠모하여 공부를 하고, 국가를 위해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되고자 하였으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유학자밖에 되지 못하였음을 토로한 내용이었다.

 

1805년(69세, 순조 5년)
주자(朱子)의 옛 이야기를 근거하여 「고가묘문(告家廟文)」을 지었다.

 

1811년(75세, 순조 11년)
8월 17일, 사망하였다. 가을에 먼저 사망한 부인 풍천임씨의 묘에 합장하였다. 「예설잡지(禮說雜識)」, 「경전경의(經傳經義)」, 「미강어록(渼江語錄)」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 「예설잡지(禮設雜識)」, 「경전경의(經傳經義)」, 「미강어록(渼江語錄)」, 「탁계집(濯溪集)」(10권 5책) 등이 있다.

탁계집」은 1828년 손자 김직신(金直信)이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 문집에는 당시 유학자들과 주고받은 다수의 편지가 들어 있고,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소학」, 「근사록」 등 경전을 읽고 자신의 견해를 쓴 문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도 「가례차록(家禮箚錄)」, 「상례비요차록(喪禮備要箚錄)」, 「예설잡식(禮說雜識)」, 「주자시차기(朱子詩箚記)」, 「매원산록(梅園散錄)」, 「중용귀신장차록(中庸鬼神章箚錄)」, 「오륜해(五倫解)」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임정주(任靖周)


임정주(任靖周)                                                             PDF Download

 

정주(任靖周, 1727년∼179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조선시대의 유명학 유학자인 임명주(任命周, 1705∼1757), 임성주(任聖周, 1711∼1788),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의 동생이다.

176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다년간에 걸쳐서 영조 임금을 경연에서 모시고, 동몽교관에 임명되어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을 거쳐, 서연관으로 당시 세손(世孫)이었던 정조를 보필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에 밀려나 송화현감, 온릉령(溫陵令), 청산현감(淸山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전전했다.

학문적으로는 위 형들과 성리학자인 누나의 영향을 받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배격하고 성즉기(性卽氣)라고 주장하며, 기일원(氣一元)의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하였다.

 

1727(1세, 영조 3년)
함흥판관을 지낸 노은(老隱) 임적(任適)의 5남 2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성리학자 백신(伯新) 임명주(任命周, 1705∼1757),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 그리고 여성 유학자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의 동생이다. 증이조판서 윤부(尹扶)의 외손자이며, 본관은 풍천(豐川, 지금의 황해도 송화), 자는 치공(穉恭), 호는 운호(雲湖)이다. 어머니 윤씨는 파평윤씨 호조정랑 윤부(尹扶)의 딸이다.

 

1728년(2세, 영조 4년)
부친이 역병으로 사망하였다. 부친은 관직을 물러난 뒤에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에 힘썼다. 유교 경전과 기타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며, 재리(財利)를 멀리하여 사망할 때는 장례비용이 없어 주변에 돈을 빌려야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부친의 유고집으로 ⌈노은집(老隱集)⌋이 있다.

 

1729년(3세, 영조 5년)
모친을 따라 청주(淸州) 근처 옥화(玉華)로 이사하였다. 친형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에게 누나인 임윤지당과 함께 글을 배웠다. 큰형 임명주는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둘째 형 녹문 임성주(任聖周)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성천부사를 지낸 유학자이다. 누나 임윤지당은 여성 성리학자다.

 

1737년(11세, 영조 13년)
가족이 여주(驪州)로 이사하였다. 이때의 일을 임정주(任靖周)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이 열한 살 때 청주 옥화에서 여주로 이사가 살게 되었다. 여주는 번화한 곳이어서 친구들이 밀고 당겨 나도 모르게 방자하게 되었다. 누님이 조용히 타이르시기를 ‘왜 방심한 마음을 거두지 아니하고 남들을 따라 다니면서 두레박처럼 오르락내리락 놀기만 하느냐’ 하셨다. 내가 이 말씀을 듣고 깊이 뉘우치고 곧 마음을 바로 잡았다. 누님께서는 순순히 가르치시고 타이르는 성의가 간절하셔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큰 죄를 면하게 된 것은 실상 우리 누님께서 그때 깨우쳐 주신 덕분이다.’하였다.”

1740년(14세, 영조 16년)
누님 임윤지당이 원주 선비, 평산신씨(平山申氏) 신광유(申光裕, 1722∼1747)와 결혼했다. 매형 신광유는 7년 뒤 25세로 요절하고 누님은 자식도 없이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었다.

 

1757년(30세, 영조 33년)
11월, 큰형 임명주(任命周)가 사망했다.

 

1758년(31세, 영조 34년)
12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762년(35세, 영조 38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1767년(40세, 영조 43년)
세손의 교육에 관여하였다. 조정에서 연락이 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받아 그 장구(章句)를 정하고 그 의심스러운 뜻을 해석하고 그 언해와 구두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수년이 걸린 이 일에 이관(李灌), 한용화(韓用和), 박사형(朴師亨), 이겸진(李謙鎭), 심정진(沈定鎭), 안정복(安鼎福)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참여하였다.

 

1772년(45세, 영조 48년)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을 거쳐, 서연관으로 당시 세손(世孫)이었던 정조를 보필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신임을 얻었다. 이 때 강연했던 내용의 일부가 그의 유저 ⌈운호집⌋에 들어 있다. 제3∼4권에 들어 있는 잡저 중 「숙예록(宿預錄)」이 그것인데 고금의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서적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각종 이야기를 선정하여 만든 것으로 방대한 내용이다. 여기에 실린 기록은 실지로 행한 강의 중 일부라고 한다.

 

1773년(46세, 영조 49년)
존현각에 들어가 임금을 모시고 ⌈자치통감강목⌋을 읽었다. 이 때 같이 참여한 자는 문학 서유신, 사서 오정원 등이었다. 임정주는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의 자격이었다. 이 후 경연에서, ⌈속 자치통감강목⌋, ⌈예기⌋, ⌈성학집요⌋, ⌈주자서절요⌋ 등을 1775년 음력 4월까지 계속 읽었다.

 

1776년(49세, 정조 1년)
자신이 가르쳤던 정조가 즉위하였다. 송화현감(松禾縣監)에 임명되었다. 송화는 현재의 황해도 송화군이다. 기대했던 요직은 아니었다. 이 해에 새로 등극한 정조 임금으로부터 새끼 말 1필을 상으로 받았다.
이후 임정주는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에 밀려나 계속해서 요직에는 등용되지 못하고,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사옹원주부, 온릉령(溫陵令), 청산현감(淸山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만 전전했다.

 

1777(50세, 정조 2년)
여름에 조정에서 이루어졌던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러한 내용이 ⌈정조실록⌋ 6월15일자 기록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황해 감사 이성원(李性源)이 임금에 올린 보고서에, 수안 군수(遂安郡守) 정윤필(鄭潤弼)에 대해서는 뜻은 부지런히 힘쓰지만 정사는 혹 부드럽고 선하다고 하고, 송화 현감(松禾縣監) 임정주(任靖周)에 대해서는 어찌 부지런하지 않겠는가마는 점점 세상일에 많이 어두워졌다고 하여 모두 중을 주었으며,

– 임정주는 하(下)를 주었다. –

청단 찰방(靑丹察訪) 권계술(權啓述)에 대해서는 사리에 어두워서 일을 제대로 행하지 못한다고 하여 하를 주었다.”

황해감사의 평가가 임정주는 중(中)이었는데, 추가된 평가에서 더 낮은 하(下)를 받았다.

 

1785년(58세, 정조 9년)
누님 임윤지당이 자신의 문집 초고를 보내왔다. 누님은 문집간행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문장을 정리하여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는 「송씨부(宋氏婦)」부터 「안자소락론(顔子所樂論)」까지 초년 저작 8편과 「자로론(子路論)」 이하 중년 저작과 만년 저작 32편 등 모두 40편이 들어 있다. 이를 조카 신재준(申在峻)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멸실을 우려하여 자신에게도 필사본을 보내달라고 하여 필사본 1부를 받았다.

 

1788년(61세, 정조 12년)
조정에서 음해가 있었으나 정조의 은혜로 벗어나게 되었다. 일성록 8월 13일자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음관이 6인인데 그중에서 임정주(任靖周)와 이헌호(李獻祜)도 무슨 죄가 있어 이 명단에 써서 들였는가. 이들도 지우도록 하라. 그 외에 써서 들인 4인도 무슨 죄가 되는지를 모르겠으며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모르겠다.”

 

1793년(66세, 정조 17년)
이즈음 청산현감을 역임했다. 누님 임윤지당이 사망했다. 향년 72세였다. 이전에 받은 누님의 원고를 정리하여 3년 뒤인 1796년에 활자로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2권 1책을 간행했다.
이 해에 충청감사 이형원(李亨元)이 임정주의 치적을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청산현감(靑山縣監) 임정주(任靖周)는 문아(文雅)함을 스스로 지키고 다스리는 법도가 정연하였으며, 5년간 백성을 다스려 관리와 백성이 서로 익숙히 잘 알았습니다. 스스로 진휼을 담당하여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며 혹 한 가지 일이라도 다하지 못할까, 한 명이라도 살 곳을 잃게 될까 염려하였습니다. 기민을 뽑을 때는 신중히 하여 정확한지 과다한지를 살펴 합당하게 하는 데 마음을 쏟았고, 비방이나 칭찬에도 상관없이 성심껏 일을 해 나가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고상한 데 뜻을 두었다는 이유로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에 소홀히 하지 않아 비록 힘이 쇠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반드시 애써서 폐단을 살폈고, 정치는 옛 제도를 숭상하였으나 진휼(賑恤, 흉년에 가난하고 궁핍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도와줌)도 실제 효과를 보도록 힘써 온 경내가 안도하였고 칭송하는 소리가 한결같았으며, 자비한 곡물도 95섬이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보고서와 함께 다음 자료도 함께 제시되었다.

 

“청산현(靑山縣) – 1월부터 4월까지 진휼(賑恤)을 12차 시행하였는데, 기민(饑民, 굶주린 백성)이 도합 1만 1722구이다. 분급한 조가 973섬 6말 남짓인데, 그중 105섬 6말 남짓은 진휼곡을 떼어 준 것이고, 443섬은 첩가곡이고, 95섬은 현감 임정주(任靖周)가 자비한 것이고, 280섬은 감영에서 자비한 것이고, 50섬은 백성이 원납한 것이다.

죽을 쑤어 분급할 때 쓴 미가 18섬 14말 남짓이고, 장과 메주를 만들 때 쓴 태가 18섬 4말 남짓인데, 그중 12섬 4말 남짓은 진휼곡을 떼어 준 것이고, 6섬은 현감 임정주가 자비한 것이다. 침장염이 18섬 4말 남짓이고, 염이 3섬 7말 남짓인데, 그중 7말 남짓은 떼어 준 진휼곡으로 산 것이고, 3섬은 현감 임정주가 자비한 것이다. 곽이 95단 남짓인데, 그중 85속(束) 남짓은 떼어 준 진휼곡으로 산 것이고, 10속은 현감 임정주가 자비한 것이다.

○ 세전에 구급을 시행하였는데, 기민이 496구이다. 분급한 조가 29섬 5말이고, 죽을 쑤어 분급할 때 쓴 미가 14말 남짓이다. 장이 10말 남짓이고, 곽이 2단 남짓인데, 현감 임정주가 자비한 것이다.

○ 별순을 시행하였는데, 기민이 1241구이다. 분급한 조가 85섬 8말 남짓이고, 죽을 쑤어 분급할 때 쓴 미가 1섬 남짓이고, 장이 2섬 4말 남짓이고 곽이 9단 남짓이다.”

이러한 보고를 근거로 조정에서는 임정주는 통정대부로 승진시켰다.

 

1794년(67세, 정조 18년)
청산현감으로서의 선정이 중앙에 보고되어 왕의 특명으로 승진하여 중추(中樞)의 직함을 받았다.

 

1796(69세, 정조 20년)
사망했다. 저서로 시문집(詩文集) 운호집이 있다. 아들 임걸(任杰)이 1817년(순祖 17년)에 간행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임정주는 평생 동안 위기(爲己, 자신을 위한 수양)의 학문에 전심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 경에 처하여 진리를 추구함)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 마음을 잘 보존하고 본성을 양성함)에 힘썼다. 아울러 형 임성주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理)와 기(氣)의 이원론, 즉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배격하고 성즉기(性卽氣)라고 주장, 기일원의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하였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도 형 임성주의 학설을 따랐는데, 심체(心體)는 성인(聖人)과 범부(凡夫)가 모두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양쪽 당사자를 비판하였다. 또 성(性)뿐만 아니라, 심(心)·기(氣)에도 본연(本然)과 말류(末流)의 구별이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해제」. 최연미, 「임윤지당의 생애와 (윤지당유고)」, ⌈서지학연구⌋17, 1999.6. ⌈홍재전서(弘齋全書)⌋제35권.

조유헌(趙有憲)


조유헌(趙有憲)                                                             PDF Download

 

유헌(趙有憲, 1736∼1815)은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로 친형 조유선(趙有善, 1731∼1809)과 함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에게서 글을 배웠다.

형 조유선은 과거에 합격하여 혜릉참봉, 익산군수 등을 벼슬을 하였지만, 조유헌은 벼슬을 하지 않고 글을 읽고 개성에서 후진 양성을 하는데 힘썼다. 사망 후에는 조정에서도 그의 공덕을 인정하여 호조참의에 증직되고 형 조유선과 함께 나산사(蘿山祠)에 제향하였다. 저서로 ⌈정포은선생이적기(鄭圃隱先生異蹟記)⌋가 있다.

 

1736(1, 영조 12)
조성제(趙聖躋)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직산(稷山)이다. 자는 계무(季武), 호는 지산(芝山)이다. 아버지 조성제는 관직오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친형 조유선(趙有善, 1731∼1809)과 함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에게 글을 배웠다. 김원행은 김창집(金昌集, 1648년∼1722년)의 손자이며, 김제겸(金濟謙, 1680년∼1722년)의 셋째 아들이고, 담헌 홍대용(洪大容, 1731년∼1783년)의 스승이기도 하다. 당시 김원행은 경종 때 발생한 신임옥사로 할아버지 김창집, 부친 김제겸, 형 김성행, 동생 김탄행 등 가족을 모두 잃고 낙향하여 있었을 때였다. 영조가 즉위하여 가문의 권위가 복권되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으나 사양하고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771(35, 영조 47)
식년시(式年試) 과거에 친형 조유선이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772(36, 영조 48)
스승 김원행(金元行, 1702∼1772) 사망하였다. 스승과는 그동안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다. 미호집에는 조유선과 조유헌 형제에게 스승이 보낸 답장이 여러편 실려 있다. 형 조유선에게는 모두 10편, 그리고 형과 함께 조유헌에게 보낸 글은 2편이다. 조유헌에게 보낸 내용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계식(季式, 조유헌. 아마도 계무季武의 잘못인 듯)의 편지도 또한 대단히 후련하고 기쁩니다. 그 편지에서 이른바 ‘만나는 일마다 힘을 다하되 그 일에 골몰되지 않으니 더욱 실제로 득력(得力)하는 효과가 있다.’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부디 이 말을 다시 등골에 단단히 붙여 명심하고 사력을 다해 맨 채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비로소 학문하는 성과를 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니, 진심으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병세가 중간에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다가 7, 8일 전부터 도리어 더 심해졌습니다. 하늘이 장차 저를 폐할 듯하니, 어이하겠습니까?”

 

1796(60, 정조 20)
개성유수(開城留守)가 조유헌을 중앙에 천거했다. 지산초당(芝山草堂)에서 교육에 힘쓴 공 때문이었다.

 

1798(62, 정조 22)
개성유수(開城留守) 조진관(趙鎭寬)과 유생 김종오(金鍾五) 등이 편집, 간행한 ⌈삼충록(三忠錄)⌋의 발문을 썼다. ⌈삼충록⌋은 임진왜란 때 사망한 세 사람의 충신에 대한 기록으로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 회양부사(淮陽府使) 김연광, 임진(臨津)전투에서 전사한 부장(副將) 유극량이다.

 

1801(65, 순조 1)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809(73, 순조 9)
친형 조유선(趙有善, 1731∼1809)이 사망하였다. 당시에 ‘서경에서 수백년 내에 한번 나올만한 인물(西京數百年來一人)’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자는 자순(子淳), 호는 나산(蘿山)으로, 1771년 과거에 합격하여 혜릉참봉, 청하현감, 익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797년(66세)에는 진산군수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임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력하였으며, 저서에 ⌈고정유사(考亭遺事)⌋, ⌈사우연원록(師友淵源錄)⌋, ⌈나산집(蘿山集)⌋ 등이 있다. 낙론(洛論)의 대가 김원행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1815(79, 순조 15)
사망하였다. 저서에 ⌈정포은선생이적기(鄭圃隱先生異蹟記)⌋가 있다. 이 글을 고려시대 개성에서 활동한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8년∼1392년)을 기리는 글로서 정몽주가 살해당할 당시 선죽교에 묻은 혈흔, 영천 임고서원의 영정과 효자비 등과 관련된 이적을 정리, 소개한 것이다.

순조 24년, 1824년 9월 7일(음)에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이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연전 송경(松京, 개성)의 유생들이 고 군수(故郡守) 조유선(趙有善)과 고 참봉(故參奉) 조유헌(趙有憲) 형제가 학문을 돈독히 하고 힘껏 실천한 일을 가지고 포상하기를 청하여 조정에서 품의하여 처리하는 명이 계셨으나, 아직까지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번 제가 서로(西路)에서 올라오는데 개성부(開城府)의 인사(人士)들이 서로 나와서 다시 지난번 이야기를 거듭 말하며 전달(轉達)하기를 바랐습니다. 이 두 사람에 관한 건은 과연 상소한 바와 같으니 포상하여 기리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명을 내리셔서 즉시 심의하여 처리하게 하여 개성부의 인사들이 보고 분발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순조임금은 이러한 의견에 대해서 그대로 시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로서 조유헌은 호조참의에 증직되고 형 조유선과 함께 나산사(蘿山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미호집⌋권10,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비변사등록⌋,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