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직필(洪直弼)1776∼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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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긍필(洪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이다. 서울 출신이며, 병마절도위 홍상언(洪尙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홍선양(洪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이간(洪履簡)이다.

체구가 거대하고 넓은 이마와 긴 얼굴에 성근 눈썹과 아름다운 수염이 있고 큰 쇠북종이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를 소유하였다고 한다. 박윤원이 이름을 ‘직필(直弼)’로 바꾸고 자를 ‘백응(伯應)’으로 바꾸어주기 전까지 그의 이름은 긍필(兢弼)이었고 자는 백임(伯臨)이었다. 박윤원은 김원행(金元行)과 김지행(金砥行)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3세에 부친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4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5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으며, 7-8세 무렵에는 한자로 문장을 지었다고 한다.   1783년 8세에 외가에서 본가로 돌아와 이때부터 일과를 정하여 공부하면서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7세에는 정동(貞洞)에 있는 박윤원(朴胤源)을 찾아가 수업하였으며, 박윤원으로부터 ‘우리의 도를 맡길 곳이 있게 되었다(吾道有托)’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박윤원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시로 선생을 찾아가 질정하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이렇게 홍직필은 박윤원을 만난 뒤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학문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었고 학자로서의 이름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을 만나 이후에는 뼈를 깎는 노력을 다하여 겨울에도 따뜻한 방에 있지 않았고 배가 고파도 솔잎을 먹으면서 책상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며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서 공부에 집중하였다고 한다.   홍직필이 얼마나 학업에 힘을 쏟았던지 그 소문이 대궐에까지 들려

“홍모(洪某)가 요즘도 도포를 입고서 온종일 몸을 세우고 앉아 책을 읽는다던가”

라고 정조가 주변 사람에게 거듭 물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하여 초시에 합격했지만, 회시에 실패한 후 일체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다. 후일에

“나는 어려서부터 벼슬에 나아가 출세하는 것을 단념하였다. 세 차례 사마시를 본 것도 억지로 어버이의 명을 받은 것일 뿐이다. 대과는 한 차례도 응시하지 않았다”

라고 술회하였다.

이때부터 당대 명망있는 학자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학문적 깊이를 더해갔다.   20대 초반부터 그가 교유했던 당시 선배 학자들로는 우암 송시열의 5대손인 호론계의 송환기(宋煥箕)를 비롯하여 낙론계의 임정주(任靖周)․이직보(李直輔)․유한준(兪漢雋)․이채(李采)․민이현(閔彝顯)․임로(任魯)․김종선(金宗善)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낙론계뿐만 아니라 호론을 계승한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홍직필의 학문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하였는데, 오희상이 사망할 때까지 근 20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교유하였으며, 인간적인 유대는 물론, 역사와 인물, 예설(禮說)과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질정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여기에서 예설은 예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론들을 말하며, 특히 관례․혼례․상례․제례 등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의미한다. 또한 이기심성설은 송대 성리학의 중요한 내용으로, 성리학은 인간의 존재를 리와 기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현상인 성과 정의 문제까지도 리와 기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교유가 더욱 깊어감에 따라 홍직필은 오희상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의 뜻을 품고 있었고, 당시의 유종(儒宗:유학자의 으뜸)으로 그를 추앙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승인 박윤원과 더불어 오희상을 당시의 학자 가운데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하였다.
낙론의 적통을 계승하였던 만큼 율곡을 비롯한 기호낙론의 선배 유학자들을 크게 존숭하였다. 특히 율곡․김장생․송시열을 각각 우리나라의 공자와 증자, 그리고 주자라고 지칭하여 조선에서의 유학정통이 율곡학맥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송시열(宋時烈) 이후 기호학맥의 중심인물인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이 율곡의 학문을 제대로 계승한 인물로 규정하였다.

또한 홍직필은 낙론 계승의 입장을 강화하면서도 호론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지니지 않았다. 한원진(韓元震)의 학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지만, 그의 학설 가운데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찬성의 입장을 아끼지 않았으며, 한원진의 영당(影堂)을 수차례 참배할 정도로 선배 유학자에 대한 존숭의 뜻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영남학파의 선배 유학자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이상정(李象靖)의 손자인 이병운(李秉運)을 통해 영남 제현들의 문집을 받고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으며, 영남지역을 순례하며 선배 유학자들의 유적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만큼 홍직필은 당시 유림의 중심인물로서 유림 사회 전체의 화합에 주목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특히 송시열에게서 비롯된 기호 노론의 정신적 학문적 유산을 온전히 계승하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래서 송시열의 후손들과 깊은 교유를 맺었고, 직접 송시열의 묘소를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송시열을 추향하는 여러 서원을 탐방하였다.

있었지만 일찍부터 출사를 단념하고 끝까지 그 뜻을 꺾지 않았다. 일찍이

“나이 어려 아는 바 없지만 명예와 절개를 귀하게 여기노라”

라고 선언하였듯이 선비로서 명예와 절개를 지키고 도학에 매진하고자 하였다. 홍직필에게 제수되었던 관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810년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814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제배되었다. 이때 동궁(東宮: 뒤의 翼宗)이 새로 세자에 올라 당시의 유명 인사들을 뽑아 매일 서연(書筵)을 열 때 발탁되었다. 1822년 장흥고봉사에 임명되었으나 물리쳤다. 1838년에 이조에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이듬해 장악원주부․황해도도사에 임명되고,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음해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고, 이어 지평을 거쳐 집의에 이르렀다.
1844년 특별히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다시 동부승지에 제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좨주를 비롯해 1851년 대사헌에 전후 두 차례나 특배되고, 이듬해에는 지돈녕부사에 승배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국왕의 소명(召命)이 계속되었어도 끝까지 응하지 않고 처사로서의 삶을 고수하였다. 그만큼 그의 뜻은 완고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학자는 훗날 기호학계의 비중있는 학파를 이룬 임헌회(任憲晦)를 비롯하여 오희상과 더불어 홍직필 문하에서 낙론의 종지를 익힌 조병덕(趙秉㥁), 19세기 호남유학의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인 소휘면(蘇輝冕), 그리고 비록 훗날 화서 이항로의 문하로 입문하였지만 젊어서 홍직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김평묵(金平黙)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19세기 기호학계 및 정계를 주도했던 이지수(李趾秀)․박예빈(朴禮彬)․윤종섭(尹鍾燮)․김기례(金箕澧)․김한충(金漢忠)․한운성(韓運聖)․신응조(申應朝)․강장환(姜長煥)․민주현(閔冑顯)․심규택(沈奎澤)․전병순(田秉淳)․이응진(李應辰)․김만수(金萬壽)․박기종(朴淇鍾)․서찬규(徐贊奎)․민영목(閔泳穆)․이병문(李秉文)․이용만(李容萬) 등도 모두 홍직필의 문인들이다.
그리고 임헌회의 문인인 전우(田愚)를 비롯하여 홍직필의 재전제자들은 기호학계의 중심에서 한말 도학을 주도하였다. 그만큼 홍직필은 19세기 낙론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확산의 중심이었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매산집(梅山集)⌋ 52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즉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음을 문(文)이라 한다’와 ‘밤낮으로 경계함을 경(敬)이라 한다’는 시법에 따라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 처음에는 광주의 구수동(九壽洞)에 묻혀 있다가 15년이 지난 정묘년(1867)에 죽산군 근이면 외초리 곡촌의 남향 언덕으로 옮겨 정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되었고, 다시 이장되어 현재는 청화산 자락에 묻혀 있다.

매산집(梅山集)⌋ 조선 후기의 학자 홍직필(洪直弼)의 시문집이다. 53권 28책. 목활자본. 현재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66년(고종 3) 임헌회․서정순(徐政淳)․신춘조(申春朝) 등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권말에 임헌회의 발문이 있다. 이때에 제자들이 홍직필이 남긴 자료를 완전히 수집․정리하지 못하다가 새로 발견되는 자료를 거듭 모아 편집을 완료했으나, 끝내는 간행을 못한 채 ⌈매산속집⌋이라는 필사본 5책으로 남아 있다.
이 속집에는 간행본에 실려 있는 것도 있고, 처음 초고본에서 교정할 때 제외시켰다가 뒤에 속집에 편찬 추가된 정사(淨寫)본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매산선생서증편(梅山先生書贈編) 4권 2책도 필사본으로 합본되어 있는데, 홍직필이 종유(從遊)하던 사람들에게 보낸 서한문을 1875년에 제자들이 모아 엮은 것이다.

권1에는 부(賦) 3편과 시 235수가 수록되어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시를 차운한 「불국사화점필재운(佛國寺和佔畢齋韻)」, 중국 도잠(陶潛)의 「귀거래사」를 소재로 한 「화도연명귀거래사(和陶淵明歸去來辭)」 등이 있다.  권2·3에는 시 442수가 수록되어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시를 차운한 「수보최고운운(遂步崔孤雲韻)」, 율곡 이이의 시 「화석정(花石亭)」을 차운한 「화석정근화판상율곡선생운(花石亭謹和板上栗谷先生韻)」, 중봉 조헌의 시를 차운한 「도형강근차중봉선생운(渡荊江謹次重峯先生韻)」 등이 있다.

권4에는 소 11편, 계(啓) 1제2편, 의(議) 4편, 연설(筵說) 1편, 악대연설(幄對筵說)이 수록되어 있다. 「사대사헌겸진소회소(辭大司憲兼陳所懷疏)」 등을 비롯하여 계·의·연설 등은 모두 관직을 사직하거나 부름을 받을 때 왕에게 올린 글로, 국가의 현실 타개와 안위(安危) 문제를 다루고 있다. 권5∼26은 750편의 서한문으로, 스승 박윤원(朴胤源)에게 올린 「상근재박선생(上近齋朴先生)」, 임정주(任靖周)에게 올린 「상운호임장(上雲湖任丈)」, 문인 임로(任魯)에게 보낸 「상영서임장(上穎西任丈)」 등이 있다.

권27에는 잡저 8편, 서(序) 21편, 권28∼30에는 기 2제2편, 제발(題跋) 14편, 명(銘)·잠(箴)·찬(贊)·전(箋)·고축(告祝) 등 33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1에는 오희상(吳熙常)과 박윤원의 제문 등 제문 27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2∼44는 애사·신도비명·묘갈명·묘비명으로, 문장가로서의 그의 문명(文名)을 짐작할 만큼 많은 사림에게 글을 써주었다. 권45∼50은 박윤원을 비롯하여 당시 그가 교류한 문인들에 대한 시장(諡狀)·행장이 수록되어 있다. 권51은 유사(遺事)·전(傳), 권52는 잡록(雜錄), 권53은 연보이다.

[참고문헌]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숙재집(肅齋集)⌋, ⌈매산집(梅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재의(李載毅)1772∼1839


이재의(李載毅)                                                             PDF Download

 

1772(영조 48)∼1839(헌종 5). 조선 후기의 학자.

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홍(汝弘), 호는 문산(文山)이다. 1772년(영조 48)에 서울 공동(公洞)의 외가에서 출가하였으며, 진사 이응오(李應五)의 아들이다. 모친은 안동김씨 승지 김약행(金若行)의 딸이다. 송계간(宋啓幹)의 문인이다.   추양 송계간은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이다.

이재의는 외가의 집에서 태어났기에 자연스럽게 외조부 김약행에게 수업하여 문예가 일찍이 성취될 수 있었다. 그가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인 17세에 이미 사마시 생원, 진사 초시에 모두 합격한 것은 아마도 초년에 외가의 훈도가 큰 힘으로 작용한 듯하다.   이주국은 증손인 이재의를 무척이나 사랑하여 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주국은 유정모(柳鼎模)와 남유두(南有斗)와 같은 당시에 모두 문학으로 이름이 난 선비들을 서당의 선생님으로 모시고 이재의 형제를 가르쳤다.
이재의가 이들로부터 전수받아 익힌 것이 적지 않았다. 유정모에게서 ⌈소학⌋과 같은 수신서를 비롯하여 유교경전을 배우고, 남유두에게서는 시문학을 익혔던 것 같다.   성장하여 이재의는 경학방면의 선학을 찾았는데, 박윤원(朴胤源)에게 예를 묻고 송환기(宋煥箕)에게 제자의 예를 올리고 그 문하에 출입하였다.
이에 박윤원과 송환기는 이재의가 장차 크게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재의는 초년에 외조부에게 수학하고 본가로 돌아온 뒤엔 집안의 글방에서 유정모와 남유두를 통해 문학, 즉 기본 경전 학습과 작문중심의 과거공부에 치중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경학이나 성리학 방면의 담론을 위해 스스로 박윤원과 송환기의 문하를 찾았던 것이다.

이재의는 박윤원과 송환기 이외에도 당시에 명망이 있던 선학들과 틈나는 대로 교유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호남을 대표하는 재야 학자인 정재면(鄭在勉)이다. 정재면에게 ⌈주역⌋의 원형이정(元亨利貞)에 대해 물었고, ⌈논어⌋의 효제(孝悌)와 충신의 관계에 대해 물은 것이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보인다.

정약용(丁若鏞)과의 교유는 유배지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있은 이후로 1814~1839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지속되었다. 여기에서 정약용의 시 한 수를 통해 이재의에 대한 생각의 일단을 헤아려본다.

정약용이 윤사월 십이일에 이재의와 함께 문암장에 가 노닐면서 배 안에서 지은 작품이다.

박식하고 고상 담박한 문산자는 博雅文山子

비밀한 기약이 청산에 있는지라 幽期在碧山

띳집 짓고서 몸소 농사지어 먹고 結茅思食力

노 저으며 때로 한가함을 즐기네 蕩槳樂偸閒

예악은 마음에 두지 않거나와 禮樂休牽戀

산수는 얼굴을 향하기에 합당해라 煙霞合駐顔

이 길이 원래 자유자적함이니 此行元自適

백구 같은 흰 물굽이에서 묵으리 且宿白鷗灣

 

또한 이재의와 교유한 대표적 인물로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을 들 수 있다.   홍직필은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77세의 장수를 누림으로써 이이-김장생-송시열-이단하-김창흡-김원행-박윤원-홍직필-임원회-전우 등으로 이어지는 서인계 중 기호학파의 거장이다.  이재의는 본래 친구간의 도리를 중히 여겨 홍직필과 50년 동안 정분이 막연하였다.
홍직필이 만년에 어려운 처지에 놓여 궁한 호숫가에 살고 있었는데, 이재의가 매양 흥이 나면 그의 손을 이끌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손에는 술잔을 잡고 서로 마주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재의가 죽자 홍직필은 함께 노닐던 강과 호수도 여한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슬퍼하였다. 또한 홍직필은 제문을 지어 이재의를 애도하였는데,

“나는 거문고를 끊으려 하네. 높은 산 흐르는 물을 노래한들 영원히 감상할 이가 사라졌으니 세상이 외롭고 우주가 쓸쓸하도다. 어느 곳에서 얻을까. 그대와 같이 곧고 변함없는 이를. 그대와 같이 온화하고 후덕한 이를 어느 곳에서 다시 가까이할까”

라고 탄식하였다.

지기인 홍직필의 기록에 따르면, 이재의는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했으며 도량과 재주가 크고 두터웠다.  또한 속마음이 평탄하여 경계를 두지 않았으며, 간혹 속임을 당할지라도 상대를 예전처럼 대우했다. 또한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때문에 어진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모두 그의 덕에 감복했다.
검소한 것을 덕으로 여겼으니 거친 음식이나 검소한 의복을 싫어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고치지 않았다. 큰 집의 종손으로서 자질과 품격, 도량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이를 기초로 이재의는 문중의 일을 순리에 맞게 처리하고자 힘썼다.  산 이를 잘 길러내고 죽은 이를 잘 보내며 묘역을 잘 꾸미고 집안을 안정시키는 일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여러 아우들을 한 몸처럼 보살피고 그의 자식들을 내 몸에서 나온 것처럼 돌보았다. 두 아우가 임소에서 죽자 여러 조카들을 어루만지고 보살펴주어 어떻게든 일어서게 해주었다.  누님을 어머니처럼 섬겨서 항상 안부를 묻기를 멈추지 않았다. 날로 종족이나 인척을 미루어 생각하되 가깝다고 친하게 대하거나 멀다가 소원하게 대하지 않았다.   베풀어주기를 좋아하여 궁핍한 이를 도와주되 항상 온 힘을 다한 뒤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시 짓기를 좋아하여 명승지에 이르면 반드시 시를 읊었는데, 그의 대표적인 시 한편을 소개한다.

 

외로운 소나무가 절개를 안 고치니 孤松不改節

은둔자가 이리저리 노니는 곳 되었지. 隱者盤桓處

그 곁에는 작은 壇이 하나 있으니 傍有小壇築

이 맘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랴. 此心誰與語

 

대표적인 저서로는 ⌈문산집⌋이 있다. ⌈문산집(文山集)⌋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의의 시문집이다.  11권 4책으로 활자본이다. 1870년(고종 7) 그의 막내 아들인 이건식(李建栻)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있을 때에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상현(金尙鉉)의 서문과 시문총목(詩文總目)이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8에에는 시 825수가 있고, 권9에는 서(書) 23편이 있으며, 권10에는 제문 15편, 서(序) 4편, 기(記) 5편, 부 3편, 제(題) 3편, 발(跋) 3편, 설(說) 제2편, 잡저 4편이 있고, 권11에는 부록으로 다산문답(茶山問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800여 수에는 그가 경치를 즐겨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의지와 취향을 숭상한 뜻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기행시가 많으며, 이 중 단군을 찬양한 「단군대(檀君臺)」나 금강산의 경치를 읊은 「동유록(東遊錄)」 등이 돋보인다. 이것들은 18세기의 한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서(書) 「답홍백응서(答洪伯應書)」는 사람에게 부여된 이기(理氣)에 대하여 논변한 글이고, 「장석문목(丈席問目)」은 「중용」과 「대학」에 대한 문목이다. 잡저 중 「역계만록(易繫漫錄)」은 주역」 연구에 대한 기록으로, 특히 시책(蓍策)에 관한 설명은 점술(占術) 및 설시(設蓍)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부록의 「다산문답」은 정약용의 사칠성정(四七性情)에 대한 논설을 정주(程朱)의 학설을 끌어다가 비교하여 논변한 것이다.  여기에서 사칠(四七)은 사단과 칠정을 의미하는데,  사단은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가지 도덕적 정감을 말하고, 칠정은 기쁨․분노․슬픔․즐거움․사랑․미움․욕구 등의 인간의 일반적인 정감을 말한다.

이밖에도 화양동을 읊은 「화양동부(華陽洞賦)」, 고양이를 잡는 일과 비유하여 쓴 「착묘설(捉猫說)」 등이 있다.

 

[참고문헌]

「문산집(文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산 이재의의 삶과 교유」(한국인물사연구13, 이종호)

이승연(李升淵)1767∼1829


이승연(李升淵)                                                             PDF Download

 

1767(영조 43)∼1829(순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뇌연(雷淵). 자는 문계(文階) 또는 태초(太初), 호는 연재(衍齋)이다. 세종의 별자(別子)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14대손)으로, 아버지는 군위현감 이의화(李義和)이며,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郞) 유언(兪彦)의 손녀이다.

홍의영(洪儀泳)과 박윤원(朴胤源)에게서 수학하고, 1792년(정조 16) 사마시에 합격한 뒤, 1804년(순조 4) 익릉참봉(翼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중이라 부임하지 않았다. 1810년 제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의금부도사․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장악원주부․호조좌랑․영희전령(永禧殿令)․장녕전령(長寧殿令)․전생서판관(典牲署判官) 등을 역임한 뒤, 1817년에는 목천현감이 되었다. 1826년 장악원(掌樂院)과 사옹원주부(司饔院 主簿)를 거쳐 1827년에는 군자감판관(軍資監 判官)을 지냈다.
청렴결백하고 공사를 바르게 집행하여 사람들이 ‘신명같다’고 칭송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남긴 유고(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매산문집(梅山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종선(金宗善)1766∼1810


김종선(金宗善)                                                             PDF Download

 

1766(영조 42)∼1810(순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청풍(淸風). 자는 성보(城甫), 호는 송재(松齋)이다. 할아버지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김기대(金基大)이다.

일찍이 이술원(李述源)으로부터 글을 배운 뒤 박윤원(朴胤源)․오윤상(吳允常)의 문인이 되었다. 근재 박윤원과 영재 오윤상은 모두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z

정조에 의해 특별히 척신(戚臣)으로 기용되어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가 되었으며, 1800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의령현감을 역임한 뒤 승지와 도승지가 되어 매번 강연(講延)에 나아갔다. 1809년(순조 9) 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우윤(右尹)이 되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매산집(梅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익진(洪翼鎭)1766∼1801


홍익진(洪翼鎭)                                                             PDF Download

 

1766(영조 42)∼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학자.

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진(景進), 호는 남애(南崖)이다. 홍현주(洪顯周)의 아들인데 큰아버지 홍봉주(洪鳳周)에게 입양되었다. 홍익진의 처는 기씨(奇氏)이다.  김이안(金履安)과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미호 김원행은 도암 이재(李縡)의 제자이며 담헌 홍대용(洪大容)의 스승이다.

1790년(정조 14) 별시에서 부(賦)를 지어 정조로부터 시권(試券)을 하사받았으며, 1799년 왕명으로 「농정소(農政疏)」를 올리자 정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영릉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후진들의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실천하는데 주력하였다.   뒤에 학행이 인정되어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남애집」 2권이 있다.

남애집(南崖集)⌋은 조선 후기의 학자 홍익진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현손인 홍복희(洪復憙)와 홍석희(洪錫憙)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노장(奇老章)의 서문과 권말에 홍복희의 발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부(賦) 11편, 시 3수, 소 1편, 발 제2편, 일기 1편이 있고, 권2에는 부록으로 가장․묘갈명․묘표․서(序) 각 1편, 서(書) 4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농정소(陳農政疏)」는 1799년(정조 23)에 농정에 대한 시무(時務)를 진언한 상소로, 먼저 옛 성현들의 정치제도와 그 시행에 대한 뜻을 밝히고, 당시 농정의 폐단을 12조목으로 구분하여 상세히 지적한 다음, 그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하였다.
토지가 건조하고 습함에 따라 파종의 시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과 곡물도 기후의 특성에 따라 적기에 파종하고 수확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한발․홍수․역민(役民)․징세(徵稅)․저수(貯水)․동경(冬耕) 등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농업관계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일장여소년부(日長如少年賦)」는 봄날의 길고 화사함을 소년시절의 학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봄날이 길고 좋기는 하지만 영구히 계속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소년시절도 오래 가는 것이 아니므로 시기를 놓치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취해야 된다는 글이다.   이밖에도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보고 들은 것을 모아 비망에 대비한 「일기(日記)」가 있다.

[참고문헌]

「남애집(南崖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동형(朴東蘅)1749~1808


박동형(朴東蘅)                                                             PDF Download

 

1749年(영조 25)~1808年(순조 8) 조선 후기 문신.
관은 죽산(竹山), 자는 태언(台彦), 호는 불변당(不變堂)이다. 아버지는 박원유(朴元)이며 전라도 호곡리(好谷里)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박진호(朴震祜)이고 손자는 순조(純祖) 25년(182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합격한 박규서(朴奎瑞)이다. 김이안(金履安)의 문인이다.

남원 죽산박씨 종가(南原 竹山朴氏 宗家), 즉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에 있는 죽산박씨의 종가 가옥에 가면 효자(孝子) 박동형(朴東蘅) 정려(旌閭)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저서에는 ⌈불변당유고⌋ 2권이 있다.
⌈불변당유고(不變堂遺稿)⌋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동형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1966년 6세손 박환준(朴煥俊)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윤동(金潤東)의 서문과 권말에 박중식(朴仲植)의 발문이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詩) 181수, 문목(問目) 6편, 서(書) 16편, 제문 10편, 묘표 1편, 찬(贊) 1편, 서(序) 6편, 잡저 1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2에는 부록으로 언행록 1편, 문(文) 4편, 가장(家狀) 1편, 만(輓) 24수, 제문․행장․묘표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차운(次韻) 또는 화답류(和答類)가 많으며, 율시에는 성리학의 이학적 사변을 읊은 것도 있다.  서(書)에는 예학과 경학(經學)에 관한 훈고적인 문답이 많다. 대개 친구 사이에 왕복한 것으로, 그 중 ⌈가례에 관한 문답이 39개 항목, ⌈대학에 관한 문목이 29개 항목, ⌈논어에 관한 문목이 21개 항목, ⌈맹자에 관한 문목이 7개 항목 등으로 되어 있다.
잡저에는 자손들을 경계한 것으로, 선비된 자는 뜻을 세우기에 따라 성공여부가 달려 있다는 내용으로 입지(立志)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불변당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낙풍(金樂灃)1786∼1834


김낙풍(金樂灃)                                                             PDF Download

 

1786(정조 10)∼1834(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관은 의성(義城). 자는 적여(績汝), 호는 삼락재(三樂齋). 김섭(金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표로(金彪老)이고, 아버지는 김성(金城)이며, 어머니는 장학호(張學浩)의 딸이다. 김이안(金履安)의 문인이다. 김이안의 호는 삼산재(三山齋)으로 김창협(金昌協)의 증손자이며 김원행(金元行)의 아들이다.

1814년(순조 14)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평안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으며, 온릉령(溫陵令)을 거쳐 예조좌랑과 호조정랑․병조정랑을 역임하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822년 장령이 되었다가, 같은 해 종부시정 겸 편수관이 되어 선원보(璿源譜)를 찬수한 공으로 1823년 병조참의에 올랐으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824년 돈녕부도정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예론을 열심히 따랐다.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李珥)에게 성리학을 배워서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매산집(梅山集)⌋, ⌈노사집(蘆沙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국 남창시 삼아학원 순회강연 자료

2016년 12월20일 중국 남창시 삼아학원에서 율곡학 순회강연을 진행하였습니다.

중국 남창시 해남대학 순회강연 자료

2016 년 12월 19일 중국 남창시 해남대학에서 율곡학 순회강연을 진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