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재덕 1


 

선조의 재덕   1

 

<연려실기술> “선조” 항에 선조의 존호와 재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조 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은, 휘가 연(昖)인데, 처음 휘는 균(鈞)이었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비(妣)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는, 판중추부사 세호(世虎)의 딸이다. 가정 31년(1552) 임자 명종 7년 11월 11일 기축에 인달방(仁達坊) 사제(私第) 덕흥대원군의 집에서 나서 처음에는 하성군(河城君)을 봉하였었고, 융경(隆慶) 정묘년에 명종의 유명으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라, 만력(萬曆) 경인년에 존호를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 올렸고, 갑진년에 지성대의격천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만력 36년 무신 2월 1일 무오에 황화방(皇華坊) 별궁 경운궁(慶運宮) 에서 승하하였으니, 왕위에 있은 지 41년이요, 향년 57세였다. 명나라에서 소경(昭敬)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는 존호를 사용한 만력 경인년(1590)은 선조 23년이고, 지성대의격천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는 존호를 가첨한 만년 갑진년(1604)은 선조 32년이다. 선조 사후 시호를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라고 했는데, 광해군 때 묘호를 선조로 바꾸어 존호를 더 올렸다. 대한제국 때에 명나라에서 내린 소경(昭敬) 시호를 폐지하여, 정식 시호는 선조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다. <연려실기술>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부친 이광사(李匡師)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他界)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하니, 대한제국 이전이라 소경(昭敬)을 시호에 넣었다.

선조는 왕위에 있은 지 41년이고 향년 57세로 승하했으니, 왕위에 오른 당시의 나이가 16세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름다운 바탕에 용모가 맑고 준수했다고 여러 기록들이 전하고 있듯이 남다른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일화 중에 명종이 왕손들에게 글자를 써서 올리라고 명령하였는데, 혹은 짧은 시(詩)를 쓰기도 하고, 혹은 연구(聯句)를 쓰기도 했는데, 선조가 홀로 ‘충성과 효도가 본시 둘이 아니다.’고 여섯 자를 썼으므로 명종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는 율곡의 기록이 전한다.

선조의 비범한 자질을 율곡은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 명종의 뒤를 이어 갑작스레 왕좌를 계승한 16세의 하성군이 조선왕조 최초로 방계로 왕위에 오르는 장면도 그 중 하나다. 명종이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승하함으로 하여 조선은 혼란에 빠질 수 있었다. 이는 명나라 사신 한림검토(翰林檢討) 허국(許國)과 병부급사(兵部給事) 위시량(魏時亮)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조서를 반포하려고 조선으로 오다가 안주(安州)에 이르러 명종의 부고를 듣고, 국중에 변고 있을까 의심하였다는 기록에도 알 수 있다. 이 두 사신이 막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조서를 전하는 장면을 <석담일기>에서 율곡은 이렇게 적고 있다.

임금이 권지국사로서, 곤룡포와 면류관 칠장복을 입고, 명나라 황제의 조서를 교외에서 맞을 때에 두 사신이 주목하기를 잠시도 그치지 아니하다가 접대함이 법도에 어긋나지 아니하니, 탄식하면서, “저런 어린 나이로 행동이 예절에 합하니, 이런 어진 임금을 얻은 것은 조선의 복이다.” 하였다. 그때에 왕의 춘추는 16세였다. 그 이튿날 두 사신이 소복으로 조상하였다.

황망한 중에 대국의 사신을 접대하여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의식의 절차가 적법하였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조의 몸가짐과 행동이 위엄과 권위가 있었음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는 타고난 재덕 위에 평소 공부의 소양이 덧입혀져야 가능하다. 전일에 명종이 선조를 사랑하여 별도로 선생을 뽑아 한윤명(韓胤明), 정지연(鄭芝衍)으로 가르치게 했다고 율곡은 <석담일기>에 적어 두었다. 그렇다면 선조의 늠름한 기상은 명종의 정훈(庭訓)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인들은 시를 통해서 인물이 타고난 재질을 가늠하곤 했는데, <연려실기술> “선조의 아름다운 덕행” 항에 선조의 시를 연달아 적어두었다.

 

외로움을 품고서 펴지 못한 채 홀로 다락에 기대었더니 /
抱孤難攄獨依樓

속에서 나오는 백 가지 감정과 근심을 이기지 못하겠네 /
由中百感不勝愁

달은 옛 궁전에 밝은데 향 피우는 연기는 다하였고 /
月明古殿香煙盡

바람은 성긴 수풀에 찬데 밤눈이 남아 있다 /
風冷疎林夜雪留

몸은 사마상여와 같이 병이 많고 /
身似相如多舊病

마음은 송옥(宋玉)과 같이 괴로워 가을을 슬퍼하누나 /
心如宋玉苦悲秋

처량한 정원에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안 들리고 /
凄凉庭院無人語

구름 밖 종소리만이 절로 아련하네 /
雲外鐘聲只自悠

 

이 시를 두고서 율곡은 시의 정조가 너무 애상적이고 기교적인 수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임금은 임금 된 낙이 있으니, 사람을 제대로 등용하여 직무를 맡기면 태연히 화평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시로 자신의 성정을 읊조리는 것은 성현들도 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문장에 마음을 쓰면 학문에 해가 된다고 평하고 있다.

이어서 그 아래에 선조 22년(1589) 기축년에 민응기(閔應箕)가 왕자의 사부가 되었을 때, 선조가 손수 부채에 써서 하사한 시 두 편이 나온다.

 

주석들이 생긴 뒤로 변설이 번거로워 /
箋註成來辨說繁

얼마나 많은 고금의 속된 선비들이 떠들었는가 /
幾多今古俗儒喧

그대는 보라, 한 조각 마음속의 밝은 달을 /
君看一片靈臺裏

다만 진공일 뿐 말이 필요치 않네 /
只是眞空不待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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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칼을 어루만지니 기(氣)가 무지개같이 뻗어 나네 /
撫劒中宵氣吐虹

장한 마음 일찍 우리 동쪽나라 편안하게 하리라 작정하였는데
壯心曾許奠吾東

연내로 하는 일 한단 걸음 같아서 /
年來業似邯鄲步

서풍에 머리를 돌리니 한이 끝없어라 /
回首西風恨不窮

 

앞서 율곡이 기록한 시와 비교하자면 그 기상과 구조가 우렁차면서도 초연한 맛이 있다. 율곡이 기록한 시는 선조가 젊은 시절에 쓴 시라 아무래도 애상이 지나치고 기교에 치우친 면이 보인다면 이 두 편의 시는 기교는 아랑곳하지 않는 담박함이 묻어나고 초연한 기상을 잘 느낄 수 있다. 이 또한 학문 연찬과 연륜의 소산일 것이다.

선조에게는 외증조부의 피가 흐른다


선조에게는 외증조부의 피가 흐른다

 

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는 명종의 자식이 아니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岧)의 셋째아들이다.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567(명종 22)년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려 처음에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沈氏)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이듬해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선조가 왕위에 오름에 따라 아버지가 대원군으로 봉해짐으로써 조선에서 처음으로 대원군제도가 시행되었다.

선조의 치세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발생하여 사림 간에 분열이 발생하였다. 선조가 국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제대로 재건했다면 위기를 기회로 극복한 위대한 군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은 위기를 잘 넘긴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선조 때를 본격적인 사림정치의 시작으로 보는데, 이는 연산군부터 명종까지 이어진 이른바 4대 사화를 겪으면서 위축되었던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유학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펼치게 되었다는 의미다. 선조는 재위 초기 조선 전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림들을 신원하여 주었고, 반대로 선비들에게 해를 입힌 훈구세력들에게는 벌을 내려 사림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증직하고 그에게 피해를 입힌 남곤의 관작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 등을 죽인 윤원형(尹元衡)의 공적을 삭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사림들에게 중앙정계 진출이라는 명분을 확보해 주어 새로운 인물들이 등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혹자는 재위 초기의 선조와 중후반기의 선조를 구별하여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재위 초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중후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기록에 전하는 어린 시절 선조의 모습은 분명 남다른 바가 있다.

명종이 왕손들에게 글자를 써서 올리라고 명령하였더니, 짧은 시(詩)를 쓰기도 하고, 혹은 연구(聯句)를 쓰기도 하였는데, 선조는 홀로, ‘충성과 효도가 본시 둘이 아니다.’고 여섯 자를 썼으므로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명종이 선조를 총애하여 자주 불러 학업을 시험해 보고 은사(恩賜)가 있었다고 한다. 또 별도로 선생을 뽑아 한윤명(韓胤明)과 정지연(鄭芝衍)으로 가르치게 하였는데, 선조는 글 읽는 것이 매우 정밀하여 때로는 질문하는 바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어서 선생들도 대답을 못하였다고도 한다.

선조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으며 용모가 맑고 준수하기도 하였지만 근칙하는 마음자세와 조신한 몸가짐을 지녔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선조가 익선관을 함부로 쓰지 않은 일화는 대표적이다. 선조의 이러한 몸가짐은 타고난 자질이 수승하고 학문을 배워 몸에 익힌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태생과도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선조의 부친 대원군의 어머니는 창빈 안씨(昌嬪安氏)이다. 창빈(昌嬪) 안씨는 탄대(坦大)의 딸로, 중종 후궁으로 들어가 숙용(淑容)이 되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영양군(永陽君) 거(岠)요, 둘째가 선조의 친부가 되는 덕흥대원군이다. 중종이 죽은 후에 3년이 지나자, 관례대로 인수사(仁壽寺)로 나가려 하였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특명으로 궁중에 남아 있게 하였다.

선조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 안씨는 애초 중종 후궁 출신으로 그 집안은 여느 왕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미천한 집안이었다. 당시의 통례로는 중종이 승하한 후에 창빈이 인수사로 출가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는 것이었음에도 문정왕후가 특명을 내려 궁중에 남아 있게 한 데에는 창빈 안씨의 마음씀씀이를 어여삐 여긴 문정왕후의 은전이기도 했지만, 권력의 암투가 휘감고 있는 구중궁궐에서 사단을 일으킬 수 없는 한미한 집안이라는 생각도 작용한 것이다. 이는 이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은 후에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던 하성군으로 보위를 잇게 한 데에도 역시 선조의 한미한 집안 내력이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선조가 명종의 후사를 잇는 데에는 그의 근실독려한 몸가짐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 근실독려한 몸가짐은 그의 출생 내력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집안이 단지 한미한 것만으로 그의 근실독려한 몸가짐의 내력을 설명하기는 부족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그의 외증조부는 비록 집안이 미천하였지만 조신한 태도는 여느 명문가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공사견문에> 선조의 증조부가 되는 안탄대(安坦大)에 대한 대략의 내용이 나오는데, 글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안탄대의 사람됨과 처신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안탄대의 본관은 안산(安山)으로 집안은 매우 미천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점잖고 조심스러워 남과 겨루는 일이 없었다. 딸이 궁중에 들어간 뒤로는 몸가짐이 더 겸손하고 근신하였는데, 창빈이 왕자녀(王子女)를 낳은 뒤에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남들이 혹시나 왕자의 외조라고 할까봐 두려워서였다. 선조가 대통(大統)을 계승한 뒤로는 처지가 더욱 존귀하건만 몸에 주단을 걸치지 아니하고, 만년에는 노병으로 눈이 멀었다.

선조가 초피 갖옷을 주어서 그 몸에 영광이 되게 하려 하여 사람을 시켜 그 뜻을 묻게 하니, 안탄대는,

“나는 미천한 사람이요, 초피 갖옷을 입는 것은 죽을 죄가 됩니다. 그러나 임금의 명을 어긴다는 것도 역시 죽을 죄이지만, 죽기 일반이라면 차라리 제 분수대로 지키다가 죽을까 하오.”

하였다. 선조가 그 뜻을 꺾지 못할 줄 안고 집 사람을 시켜서 강아지 가죽이라 하고 주었더니, 손으로 만져 보며,

“궁중의 개는 특별한 종자가 있나 보다. 부드럽고 곱기가 이렇단 말이냐.”

하였다고 한다.

임금이라도 부자의 천륜을 저버릴 수는 없다


임금이라도 부자의 천륜을 저버릴 수는 없다

 

조는 명종을 이어 조선의 14대 임금에 오른다. 선조가 비록 명종을 이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명종 소생은 아니다. 건강이 좋지 못한 명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자,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가 그 당시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던 하성군으로 보위를 잇게 하였다. 이는 왕이 후사를 정하지 않으면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정하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선조는 방계로서 왕위에 오르는 최초의 임금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 데에는 인순왕후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하지만, 실상 명종이 생전에 하성군을 무척 아꼈다는 기사는 도처에 보인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선조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으며 용모가 맑고 준수하였다. 명종이 아들이 없으므로 속으로 이미 선조에게 기대를 정하고서 매양 불러볼 때마다 반드시 탄식하기를, ‘덕흥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라고 기록을 남겨두었다.
선조가 명종의 마음에 든 데에는 역시 하성군의 근칙하는 마음자세와 조신한 몸가짐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김시양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처음에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하원군(河原君)ㆍ하릉군(河陵君)ㆍ선조ㆍ풍산군(豐山君)에게 하루는 익선관(翼善冠)을 왕손들에게 써 보라 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려고 한다.’ 하시고, 여러 왕손들에게 차례로 써 보게 하였다. 선조는 나이가 제일 적었었는데도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 사양하며,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명종이 심히 기특하게 여겨, 왕위를 전해 줄 뜻을 정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왕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일로 치자면 분명 국왕의 친아버지인 덕흥군이 복이 있다는 명종의 말은 허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선조가 명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이상 왕가의 예법으로 따지면 명종과 선조가 부자간이 되고, 선조는 덕흥군을 부자의 예로 섬길 수 없게 된다.

선조는 자식 된 도리로 어떻게든 생부를 높이고자 하였지만 이때마다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사은(私恩)이 국법을 넘어서면 국가기강을 훼손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조는 어떻게든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싶어 했고, 신하들은 사은이 국법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다.

선조가 신하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부를 추존하고자 했던 저간의 사정은 <조야첨재(朝野僉載)>에 나오는 임기(林芑) 관련 기사에도 잘 드러난다. 기록에 의하면 임기는 글을 잘하고 이문학관(吏文學官)의 직에 있었는데 성질이 음험하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더 출세를 하려고 조정에 무슨 일이 생기는 요행의 기회를 바라더니, 병자년에 임금의 마음이 선비들을 싫어하고 또 덕흥군을 임금으로 추존하고 싶어하는 것을 눈치채고 소를 올렸는데

“남의 후사된 자가 그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성인의 법이 아닙니다. 임금께서는 마땅히 덕흥군의 아들로서 덕흥군을 높이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야 합니다.”

하고 인종(仁宗)의 신주가 문소전(文昭殿)에 있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 하고, 또 선비들의 풍습을 헐뜯어,

“<심경>이나 <근사록> 따위를 읽어 헛이름만 낚아서 허위의 풍습을 조장합니다.”

고 하였다.

이 소를 두고서 사간원에서

“임기가 몰래 패역한 마음을 품고 흉하고 간사한 말을 선동시켜 시비를 혼란하게 하고, 이목을 속여서 조정에 근심을 끼치고, 사림에 화를 돌리려는 꾀가 혹독합니다. 바로 잡아들여 국문하소서”

하였는데, 선조가

“문소전을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는 말은 조광조(趙光祖)의 입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으로 죄를 주려면 조광조가 먼저 그 죄를 당하여야 한다. 저 사람(조광조(趙光祖))은 죄주지 아니하고 이 사람(임기)을 죄준다면, 임기가 불복하는 데는 어찌할 것인가. 또 임기의 말은 낳은 어버이를 대대로 제사 지내자는 것이요, 임금으로 추존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그만 임기 하나로 하여 양사(兩司)에서 궐문 밖에 엎드려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조급한 짓이 아닌가.”

하고 양사의 청을 듣지 아니하여, 궐문 밖에 엎드려 청한 지 달이 지나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선조가 임기를 두둔한 데에는 필시 덕흥군 제사에 대한 그의 글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율곡은 어떤 입장을 견지했을까? 정축년(1577) 5월에 선조가 대원군 사당에 친히 제사지내려 하였는데, 이때 홍문관에서

“예(禮)에 사묘(私廟)에 제사 지낼 수 없습니다.”

하고 글을 올린다. 이에 선조가 크게 노하여,

“누가 이 말을 처음 내었는가.”

하고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려 하는 것을 대신이 나서 말린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두고서 율곡이 <석담일기>에서 천륜과 국법이 창과 방패처럼 서로 맞서지 않게 하면서 사리와 인정에 맞아떨어지는 설명을 내리고 있다.

“삼가 살피건대, 남의 후사된 의리가 진실로 중하지만 낳아준 부모의 은혜도 가볍지 않은 것이다. 비록 정통에 전심하여야 할 것이나, 어찌 사친의 정을 끊겠는가. 임금이 대원군 사당에 친히 제사 지낸다는 것은, 예에도 어김이 없고 정으로도 면하지 못할 것인데, 옥당은 무슨 소견으로 못한다고 하였는가. 혹자는 의심하기를 임금이 대원군을 제사 지낼 때에 만일 임금이 신하의 사당에 임하는 예로 한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신하로 할 수 없는 것이요,

만일 자식이 아버지 사당에 들어가는 예로 한다면 정통을 존중하게 여기는 데 방해가 될 것이므로, 임금이 사친의 사당에 제사 지낼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글 읽지 못한 사람의 말이다. 예에는 공조례(公朝禮)ㆍ가인례(家人禮)ㆍ학궁례(學宮禮)가 있는 것이니, 공조례에는 임금이 존엄하므로 숙부들도 신하의 예절을 공손히 지켜야 할 것이나, 친아버지는 신하로 대할 수 없고, 가인례에는 존속(尊屬)이 중하므로 임금도 부형의 아랫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 한(漢) 나라 효혜제(孝惠帝)가 궁중에서는 형 되는 제왕(齊王)의 아래에 앉는 것과 같은 것이요, 학궁례에는 스승이 높은 이가 되므로, 비록 왕자라도 역시 늙은이에게 절하는 일이 있으니,

한 나라 효명제(孝明帝)가 환영(桓榮)에게 절한 것 같은 일이다. 하물며 대원군은 임금의 몸을 낳았으니 가령 아직도 생존하였다면, 임금도 신하로 대하지 못하고 궁중에서 보면 반드시 절하였을 것이니, 이제 그 사당에 들어가서 조카가 숙부에게 제사 지내는 예를 쓴다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속된 선비들이 이치를 연구하는 공부가 없어, 한갓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것이 예 되는 줄만 알고, 사친을 끊지 못할 것은 알지 못하여 근거 없는 의논을 드려서 임금으로 하여금 노함을 일으켜 지나친 거조가 있을 뻔 하였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과연 조선을 대표하는 명유의 탁견이 그대로 발휘된 글이다.

신익전(申翊全, 1605-1660) – 제2편


신익전(申翊全, 1605-1660) – 제2편              PDF Download

 

익전은 자가 여만(汝萬)이고 호는 동강(東江)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증조부는 우참찬 신영(申瑛)이고, 조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다. 부친은 영의정 신흠(申欽, 1566-1628)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신흠은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

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23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바른 종통)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공은 1628년(인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郎)이 되고, 이어 검열·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부응교·사인(舍人)·사간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1639년에는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때 상사(上使)인 상국(相國) 최명길(崔鳴吉)과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를 지내면서 크게 강개하여 기휘(忌諱)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후 이때 한 말이 명나라를 부지하려 했다는 것이라는 이계(李煃)의 고변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인조 19년(1641) 이계(李煃)가 선성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신익전(申翊全),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했다.

신익전을 엮을 적에 최명길과 기자묘에서 기휘를 언급한 것으로 했다. 또한 공의 나이 52세 때인 효종 7년(1656)에는 청나라에서 사신이 나와 다시 이 일을 사문(査問)하자, 체직되어 청나라 사신이 머무는 곳에서 심문에 답해야 했다.

공의 나이 47세가 되던 효종 2년(1651)에 사위인 숭선군과 그의 조카 신면(申冕)이 김자점(金自點)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었으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논자들이

“이때에 능히 충신으로서 스스로를 보전한 이로는, 공이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다.”

하였다. 이시백은 그의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았다.
박세채는 「신도비명」에서

“만일 쉬움과 어려움을 따진다면 또 분별할 바가 있으니, 이는 어찌 공이 평소에 겸공(謙恭)하고 근확(謹確)했던 증험이 아니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라고 했다.

이어서 신익전이 “염정(恬靜)을 숭상함에 뜻을 두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왕실(王室)과 인척 관계를 맺기에 미쳐서는 더욱 삼가하여, 비록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담담하기가 마치 초야(草野)에 거처하고 공허(空虛)한 데로 도피하는 것 같았으며, 기미(幾微)를 보고 간략함을 지켜 한결같이 옛 전적(典籍)에 종사하였으므로, 무릇 속세의 현회(顯晦)ㆍ장부(藏否)는 족히 그의 마음을 얽매지 못하였다.”라고 평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년 조에 신익전의 졸기가 적혀있다.

“전 참판 신익전(申翊全)이 죽었다. 익전은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집안 대대로 유아(儒雅)했는데, 익전 역시 문사(文辭)에 뛰어났다. 사람됨이 순박하고 겸허하였으며, 명가(名家)의 자제로 화현직(華顯職)을 역임하였는데, 권요(權要)의 직책에 당하게 되면 사양하며 피하고 처하지 않았다. 형의 아들 신면(申冕)이 권력을 좋아하여 패거리를 끌어 모으자 마음속으로 매우 싫어하며 늘 이 점을 자제들에게 경계시켰다.

신면이 이미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딸이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시집갔어도 화복(禍福)의 갈림길에서 전혀 오염을 받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들 인정하였다. 만년에 더욱 염정(恬靜)한 생활로 일관하며 세상일에 참여하지 않고 끝까지 아름다운 이름을 간직하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
『효종실록』
『국조인물고』
윤재환, 「東江 申翊全의 詩文學 硏究 : 戰亂 經驗의 詩的 對應 樣相 檢討」,「동양학」 제56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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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구(申應榘, 1553-1623)- 제2편


신응구(申應榘, 1553-1623)- 제2편                PDF Download

 

응구는 자는 자방(子方)이고 호는 만퇴헌(晩退軒)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증조는 판결사 신한(申瀚)이고, 조부는 가평군수 신여주(申汝柱)이며,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신벌(申橃, 1523-1616)이다. 우의정을 역임한 신익상(申翼相)이 그의 손자다. 성혼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신벌은 명종 7년에 효자로 천거 받아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이 되었고, 그 뒤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장악원직장(掌樂院直長)·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등을 지내고 직산현감·개성부도사·안산군수·여산군수·단양군수 등의 외직을 거쳤다. 이 후 선조 27년에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와 선공감판관(繕工監判官)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갔다.

80세에 당상으로 오르고, 아들 양주목사 응구(應榘)가 자기 아버지의 나이가 90이 되었으므로 은전을 베풀어줄 것을 아뢰자 왕이 실직제수(實職除授)를 명하여 1612년(광해군 4)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인품이 근엄하고 겸손하였으며, 직산현감 자리를 떠난 뒤 읍민이 송덕비를 세우자, 이를 철거하도록 하였다.

공은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천거로 장원(掌苑)이 되었다. 1588년 직산현감(稷山縣監)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그 뒤 임실·함열 등의 현감을 잠시 지낸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관계에 들어가 형조정랑·한성부서윤·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

경기어사 유몽인(柳夢寅)이 상고하길,

“전 이천 부사(利川府使) 신응구(申應榘)는 중국 사신의 지공(支供)을 핑계로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의 70여 석이나 거두어다가 이를 강선(江船)에 가득 싣고 갔는데 끝내 어찌 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체직되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증오하여 그의 살점을 먹고자 합니다. 응구는 명신 성혼(成渾)의 고제(高弟)로 당시 사람들이 사호(四皓)에 비유했었는데, 도리어 도척(盜蹠)도 하지 않는 짓을 하였습니다. 감사로 하여금 국안(鞫案)을 올려 보내게 하여 그 허실을 조사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 기사를 적은 후에 사관이 평하길, “이것은 혼(渾)이 바야흐로 시론에 배척당하자 응구가 그 파도에 휩쓸린 탓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다.

다시 충주목사·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고,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형조참의·동부승지·좌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1년 기사에 신응구가 사직하는 소를 올려 녹훈을 사양하는 기사를 적고 있는데 사관의 평이 박하다.

“응구는 조금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선임되어 왕자의 사부가 되었는데, 주군(州郡)을 맡고서는 명성이 크게 떨어졌다. 또 몸가짐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지 못하여, ‘관직에 있지 않으면서도 나라를 염려했다.’는 이유로 임해군(臨海君) 옥사로 공신에 들기까지 함으로써 사론(士論)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래서 겸손한 말로 녹훈을 사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노자(奴子)로 하여금 궁궐에 드나들게 하였는데 왕이 모든 청탁을 다 들어주었으므로 사론이 추하게 여겼다.”

또한 ⌈인조실록⌋ 인조 1년 11월 조에는 졸기가 나오는데, 사관의 평이 역시 박하다.

“춘천부사(春川府使) 신응구(申應榘)가 졸(卒)했다. 응구는 젊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부터 중망(重望)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추허(推許)하였다. 그런데 폐조 때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을 당하여 조진(趙振) 등과 함께 정훈(正勳)에 참여되었는데, 당시에 그를 일컬어 집에 있으면서 국가를 걱정한 공신이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뒤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서도 행실을 삼가지 못하였다는 비난이 많았으니, 선사(先師)를 욕되게 하였다 하겠다.”

한편 그에 앞서 인조 1년 1월에 인조가 신응구를 춘천부사로 보내려고 하자, 재고를 요청하는 간관의 말은 신응구가 공직을 잘 수행한다는 평가다. 사관이 “춘천 부사(春川府使) 신응구(申應榘)는 과거 판결사로 있을 적에 임무 수행이 엄명하고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아서 청단(聽斷)과 신리(伸理) 모두에 공평성을 얻었으니 당연히 그 직임에 오래 두어야 하는데도 갑자기 외관으로 옮겼습니다. 상규(常規)에 얽매이지 말고 특별히 잉임시켜서 청송(聽訟)하는 자리를 신중하게 하소서.” 하고 아뢰었다.

한편 김상헌은 신응구의 묘갈명에서 다음과 같이 공을 평하고 있다.

“공의 모습을 바라보니, 한 겨울의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고 공의 중심을 살펴보면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어 얼음이 녹듯이 화평했도다. 약관(弱冠)에 향양(向陽)의 마을에 찾아가 배워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니,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를 따른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세상에 어려움을 만나 조금만 시험해 보고 항상 곤궁하게 살았도다. 하늘에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결국 창생의 한을 남기었도다. 아! 매우 슬프도다!”

신응구의 손자인 신익상의 졸기가 숙종실록 숙종 23년 조에 실려 있는데, 그 중에 “당시 조정의 형상이 오이를 가르듯 노론(老論)·소론(少論)의 색목(色目)이 있었는데, 신익상이 그의 조부(祖父) 신응구(申應榘)가 송시열(宋時烈)에게 배척당하였다 하여 유감과 한을 깊이 품고 있다가, 마침내 송시열에게서 떠나 소론의 무리가 되었었다.”라는 사관의 기록이 나온다.

신응구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당론의 향배가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광해군중초본⌋
⌈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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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흠(宋明欽, 1705-1768) – 제2편


송명흠(宋明欽, 1705-1768) – 제2편               PDF Download

 

명흠은 자는 회가(晦可)이고 호는 늑천(櫟泉)이며, 본관은 은진이다. 고조는 동국 18현인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 증조는 공조정랑을 지낸 송광식(宋光栻), 조부는 의금부도사를 지낸 송병원(宋炳遠)이다. 병원은 딸만 둘을 두어 동생 병익의 2자 요좌(堯佐, 1678-1723)로 계후하였다. 송요좌의 큰 아들이 송명흠이다. 송명흠은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이재의 문인이다.

송명흠은 어려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고, 9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재독할 만큼 영민하였다. 16세에 김육(金堉)의 현손인 김도흡(金道洽)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다. 18세 때(경종 2년)에 신임옥사가 일어나 고모부 김제겸(金濟謙)의 부친이면서 노론 사대신의 한 명이었던 김창집(金昌集)이 죽고 김제겸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송명흠은 부친 송요좌가 사화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옥천(沃川)으로 낙향할 때 함께 갔다.

23세 때 이재를 처음으로 찾아뵙고, 이후 자주 내방하여 수학하였다.

30세 때에 운평 송능상과 맹자와 주서(朱書)를 독서하였고, 12월에는 녹문 임성주와 운평 송능상과 모여서 독서하였다.

영조 15년 35세 때에 신임사화가 소론과격파에 의해 조작된 무옥임이 밝혀져 경신처분이 내려졌다. 신임사화가 마무리되자 영조는 세자 교육을 담당할 산림 천거를 요청하는데, 송인명이 세자의 강학을 위해 도학이 있고 행실이 바른 선비로 5명을 천거하였는데, 그 중에 한 명으로 송명흠도 있었다.

50세 때에 민우수(閔遇洙), 신경(申暻), 김원행(金元行), 송능상(宋能相), 최재흥(崔載興)과 함께 시강원 서연관으로 제수되었으나 어머니 병 때문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762년(영조38) 윤5월에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 송명흠을 다시 징소하면서 영조가 “마땅히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상설(象設)을 바라보라. 칠순이나 되는 임금의 기대는 오직 호서(湖西)에 있고 동궁의 보도(輔導) 또한 산림(山林)에 있다. 글로는 뜻을 다할 수 없고 오직 ‘반드시 보고 싶다.[必欲見]’라는 세 글자가 있을 뿐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라고 했다.

59세(영조39) 때 3월 5일의 상소에서 영조를 조후(曹侯)비유한 ‘적불(赤芾)’이란 말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적불(赤芾)은 붉은 무릎 가리개로, 대부(大夫)이상의 관원은 적불을 착용하고 초헌(軺軒)을 탔는데,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장(候人章)에 조(曹)나라 군주가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였으므로, 대부가 5인인 제후(諸侯)의 제도를 무시한 채 그 복색(服色)을 한 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어진 이는 도(道)를 지키느라고 도리어 빈천(貧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이에 대해 계속해서 초선(抄選)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영조는

“송명흠의 적불이란 말도 역시 산야(山野)의 당론”

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후 박세채의 문묘 종향 문제로 당론이 이어지자 신경(申暻)ㆍ송명흠ㆍ홍계능(洪啓能)ㆍ김양행(金亮行)을 모두 초선에서 빼라고 명하면서 당습(黨習)은 망국의 단서인데 그 원인은 산림의 선비에게서 말미암았다고 글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 송명흠, 김양행, 홍계능을 서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영조43년에 유림을 서인으로 만든 것은 3백 년 동안 없던 바라 하여 송명흠을 서인으로 삼으라는 명을 정지하였다.
영조실록⌋ 44년 조에 송명흠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사관의 평이 다음과 같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정초(旌招)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藹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송명흠이 이재의 문인이 된 데에는 부친 송요좌가 낙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배경을 작용했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연혼관계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재의 부친 이만창(李晩昌)은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결혼했는데, 민유중은 송존길의 사위이자 문인이다. 이재에게 송준길가는 어머니의 외가가 된다.

송명흠의 학연을 논할 적에 김창협→이재→송명흠으로 학통이 이어진다고 본다. 이재(1680-1746)를 김창협(1651-1708)의 문인으로 본다. 그런데 이재가 김창협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는지는 다소 명확하지 않다. 이재 스스로가 김창협으로부터 직접 사사했다는 기록이 안 보이고, 김창협이 사망할 때 이재의 나이가 19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김창협에게서 직접 학문을 전수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받았다고 하더라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김창협과 이재의 관계는 직접적인 학문적인 사승관계보다는 연혼관계를 통한 사숙일 가능성이 높다. 이재는 어려서 숙부 이만성(李晩成, 1659-1722)에게 수학했다. 이만성의 배위는 김창협의 숙부인 김수흥(金壽興)의 딸로 이재에게는 작은어머니가 된다. 김창협과 이만성은 사촌처남과 사촌매제 사이다. 이재에게 이만성은 숙부이면서 스승이었고, 김창협은 이만성과 사촌처남매제의 관계다. 이런 연혼 관계로 이재가 김창협에게 직접 지도를 받지는 못했지만 사숙하여 학문이 낙론으로 귀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성봉현, 「늑천(櫟泉) 송명흠(宋明欽)의 학연과 경세관(經世觀)」,「우계학보」 34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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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응수(楊應秀, 1700-1767) – 제2편


양응수(楊應秀, 1700-1767) – 제2편               PDF Download

 

응수는 자는 계달(季達)이고 호는 백수(白水)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아버지는 승의랑(承議郞) 양처기(楊處基)이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외우(畏友)인 화산(華山) 권(權) 선생에게 배우고, 후에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이 9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극진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어른과 같았다. 부친상을 마치고 13세에 선친의 외우인 화산 권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다. 생전에 화산은 외우이니 가르침을 받도록 하라는 유명을 따른 것이다. 권 선생이 공의 총명함을 보고서, “내 친구의 아들이 여기 있으니 비록 몸은 죽었지만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해 12월에 모친상을 당해 지극 정성을 다했다. 17세에는 스승 권 선생이 졸하였다.

공은 본래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부형들의 기대가 있어 부득이 과업을 준비했었다.

24세에 과장에 들어갔다 마침 내린 비로 의관을 더럽힌 후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성리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38세에 한천에서 강학하고 있는 이재 선생을 찾아뵙고 사제의 연을 맺었다. 먼저 제자를 보내 이재 문하의 가르치는 법도를 살핀 후에 공이 직접 찾아뵈었다. 첫 만남부터 사제 간에 감복하고 기뻐함이 그지없었다. 공을 제자로 받아들인 후에 이재는 큰 기대를 했고, 사제 간의 정분이 부자처럼 다정했다.

56세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익위사부수(翊衛司副수)로 옮겨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오로지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만 전념해 「사서강설(四書講說)」을 남겼다. 만년에는 박성원(朴聖源), 김원행(金元行), 송명흠(宋明欽) 등 당시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천문학(天文學)에도 밝아 천체의 운행과 해·달·별 등의 천상(天象)을 도표로 만들어 우주관을 해설한 「혼천도설(渾天圖說)」을 지었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스승 이재의 학설인 이일기이설(理一氣二說)을 바탕으로, 기(氣)의 본원은 하나이지만 동정(動靜)에 따라서 음양(陰陽)·이기(二氣)가 교합되어 오행(五行)·만물이 화생한다는 일기이기설(一氣二氣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람의 일신(一身)에는 혼백(魂魄) 또는 혈기가 있으며, 심(心)에는 이(理)와 지각(知覺)이 겸해 있다고 전제하고, 본연지기(本然之氣)와 혈기지기(血氣之氣)가 교합됨으로써 지각의 묘를 생한다는 「이기설(二氣說)」과 「지각설변(知覺說辨)」을 지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낙론(洛論)을 지지하고, 호론(湖論)을 배척하였다. 만년에는 박성원(朴聖源)·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 등 당시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중용강설」에서 인물성동이론의 중요한 논쟁처인 ⌈중용⌋ 수장을 해석한 내용을 통해 공의 학문 규모와 엄밀함을 살필 수 있다.

(질문) ‘사람과 동물이 태어날 적에 각자에게 부여된 이치를 받아서 건순오상의 덕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각각 얻는다(各得)’이라는 말은 호랑이와 이리는 단지 부자간의 인(仁)만을 부여받았고, 벌과 개미는 군신간의 의리(義)만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인가?’

(답) ‘그렇지 않다. 이는 호서학파(호론)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과 동물의 본연지성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개끼리는 본연지성이 같지만 소와는 다르고, 소끼리는 본연지성이 같지만 사람과는 다르다. 사람끼리는 본연지성이 같지만 개나 소와는 다르다 하는 말은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질문) ‘그렇다면 동물도 오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답) ‘그렇다. 본성은 다섯 가지이지만 실상은 단지 생리(生理) 하나다. 인이 생리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인을 가지고 있다. 의예지신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개를 가지고 설명하면, 어미개가 새끼를 사랑하는 것이나 주인을 사랑하는 데에서 인을 볼 수 있다. 도둑을 막는 데에서 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하지 말하는 것은 순종하는 데에서 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인, 의, 예)를 아는 것이 지이다. 이 세 가지를 지키고 결코 허물지 않으며 주인을 죽을 때까지 따르며 결코 다른 이에게 가지 않는 것이 신이다. ……그래서 정자가 동물과 인간은 매우 비슷하지만 미루어 갈 수 있는지 여부에서 차이가 난다고 했다. 또 혈기가 있는 것들을 모두 오상을 가지고 있지만 확충할 줄 모른다고 했다.’

(질문) ‘그렇다면 주자가 순수한 인의예지를 동물이 어떻게 완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는가?’

(답) ‘이는 정자가 미루어가고 확충하지 못한다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이다. 동물의 본연지성은 사람과 같지만 기품의 구속되어 오성의 전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인을 가지고 말하자면, 사람은 부모를 아끼고 타인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낄 수 있지만 동물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애초에 남당의 말처럼 금수는 오성 중에서 인만을 품부 받거나 혹은 의만을 품부 받고 나머지 네 개가 없는 것이 아니다.’

호락논쟁은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에게서 그 논쟁의 본말이 모두 시작되었는데, 이간은 양자 간의 논쟁점을 미발(未發)과 오상(五常)에 관한 논쟁으로 정리하였다.
미발에 관한 논쟁은, 이간은 미발시에 선악이 있느냐는 문제로 논의를 전개했다면, 한원진은 미발시에 기질지성이 있느냐를 문제로 논의를 전개했다. 이간은 미발시에 악이 있지 않다는 입장이고 한원진은 미발시에 기질지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오상에 관한 논쟁은, 이간은 오상을 인물이 모두 품부 받았다는 입장에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고, 한원진은 오상은 사람만이 온전하게 품부 받았다는 입장에서 인물성이론을 주장한다. 한원진은 사람이 동물과 다른 근거로 오상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인의예지신 전체를 동물이 갖지 못하다는 설명을 했는데, 양응수는 이재의 논리를 따라 一理의 전일성을 기반으로 인의예지신을 동물도 갖고 있다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참고문헌>
양응수, 『백수집(白水集)』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전라문화연구소, 전북대학교, 1990
권오봉, 「白水 楊應秀의 讀書論에 관한 硏究」, 전남대학교 석사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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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


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                           PDF Download

 

언호는 자는 사경(士京)이고 호는 칙지헌(則止軒)으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우윤 유직기(兪直基)이다. 형이 은일로 이조참의에 천거된 유언집(兪彦鏶, 1714-1783)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 정치의 제거가 청의(淸議)와 명분을 살리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 동지들의 모임인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의 타파를 탕평으로 생각한 영조의 엄명으로 흑산도로 정배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기도 하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김우진(金宇鎭)·심환지(沈煥之)·김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홍봉한의 당을 공격함이 의리라는 김구주 당의 견해에 동조했으므로, 순조대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칙지헌집⌋이 있다.

정조실록⌋ 20년 조에 유언호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정조의 남다른 마음과 유언호의 인품이 잘 드러난다.

사관이 다음과 같이 총평을 하였다.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죽었다. 언호는 자가 사경(士京)이며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족질이다.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영종(英宗) 신사년에 등제하여 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주연(胄筵)에서 지우를 받았다. 상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그에 대한 총애와 발탁이 다른 신하들과 아주 달라서, 몇 년 동안에 화요직을 두루 거쳐 정경(正卿)에 뛰어 올랐고 정미년에 정승이 되었다.

무신년 조덕린(趙德隣)을 복관(復官)시킬 때에는 상의 노여움이 대단하였으나 뜻을 크게 지키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로 인해 비록 외진 섬으로 정배되는 엄한 견책을 입었으나 오래지 않아서 사면을 받아 다시 정승에 임명되어 상의 권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자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이어서 정조의 하교를 기록하였다.

“지우를 받음이 동료들 가운데 가장 앞섰고 칭찬을 받은 것도 끝내 변함이 없었으니 같은 사람을 어디서 다시 찾아오겠는가. 이제는 죽었는지라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애석하고 불쌍한 마음에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의 행적과 나를 정성으로 섬긴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속일 수 없는 공의가 있다. 그러니 포장하는 것은 지나친 칭찬에 가깝고, 하지 않으면 또한 사실을 매몰시키게 되는데 어찌 명정(銘旌)을 쓸 때까지 늦추겠는가.

의당 사관으로 하여금 군신 간에 서로 잘 만난 전말을 갖추 기술하여 징신할 증거로 삼아야 한다. 시호를 내리는 은전은 시장(諡狀) 짓기를 기다려서 속히 거행할 것이요, 조문하고 자손을 녹용하는 일은 관례에 의해서 거행하라.”

다시 시장과 관련하여 정조가 하교하길,

“듣건대, 갑오년 이후에 주대(奏對)한 것과 그 사실들을 대신이 손수 기록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서 가묘(家廟)에 보관해 두었는데, 비록 집안사람이라도 열람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니,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정조가 그를 두고 말하길,

“외모는 비록 청수하고 허약한 듯하였으나, 마음속의 지조는 아주 확고하였었다. 연전에 탐라로 귀양 보낸 일은 내가 부득이해서였다. 어찌 털끝만치라도 그를 손상시키려고 했겠는가.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자신의 실수였으나 제우의 융숭함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라고 했다.

장례 때에 유언호 집에서 유계(遺戒)가 있다 하여 예장(禮葬)을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조가 하교하길,

“시호를 청하지 말고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했더라도 조정의 명령이 있으면 으레 모두 받는 법인데 더구나 예장이겠는가. 상주의 집에 유시하여 관례에 따라 받도록 하게 하라.”

라고 했다.

1802년(순조 2)에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순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언집(兪彦鏶, 1714-1783)


유언집(兪彦鏶, 1714-1783)                                  PDF Download

 

언집은 자는 사호(士鎬)이고 호는 대재(大齋)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우윤 유직기(兪直基, 1694-1768)이다. 정조 때 영돈녕부사에 오르고, 정조 묘정에 배향된 유언호(劉彦鎬)는 그의 동생이다.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유직기가 『소학』의 「가언」과 「선행」편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리한 것을, 유언집이 편집한 『대동가언선행』은 송대에 나온 『소학』의 「가언」과 「선행」 체제를 따라 조선 유학자들의 글에서 필요한 자료를 뽑아서 편집하였다.

대동가언선행』은 아동 교육서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본받을만한 훌륭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대체로 『격몽요결(擊蒙要訣)』·『성학집요(聖學輯要)』·『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등에서 해당 내용을 뽑아 정리하였다.

유직기가 책을 엮으면서 우리나라 인물들의 언행과 덕행을 채택한 것은 중국과 차별되는 독자적인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총애했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는,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은 소학의 사다리요, 유직기가 편집한 『대동가언선행』은 『소학』의 날개이다. 그 말이 모두 깊고 알기 쉬우니, 『소학』을 읽을 때 항상 참고하면 그 효과가 매우 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유언집은 학행이 있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정조 1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유언집이 사직 상소를 올리자 정조가 다음과 같이 비답했다.

“그대가 일찍이 도관(道關)에 계합(契合)하고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조예(造詣)의 공부와 의리(義理)의 정밀함은 본래 깊이 알았던 바이고 우연히 듣게 된 것이 아니었는데, 그대가 어찌 한결같이 지나치게 사양함이 이렇게 심한 데에 이른단 말인가? 그리고 그대의 소장 가운데 과업(科業) 운운한 것은 진실로 또한 지나치다.

퇴계(退溪)·율곡(栗谷)도 유독 과목(科目) 중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내 뜻을 마땅히 그대의 아우에게 유시(諭示)할 것이니, 그대는 신병의 차도가 있음을 기다려서 곧바로 길에 올라 내가 옆자리를 비워두고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1778년(정조 2) 경연관이 되었으며, 1783년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어 원자를 보도(輔導)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정조실록⌋ 7년 조에 유언집이 졸하자, 정조가 이에 하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유신(儒臣)은 내가 모앙(慕仰)하는 바이었으나 내 성의가 부족한 것 때문에 마침내 한 번도 조정으로 불러내어 함께 국가 일을 하게 되지 못했다. 매양 그의 아우가 고감에 따라 그때마다 쏠리고 있는 이 마음을 표해 왔었는데, 어찌 오늘 그가 장서(長逝)하였음을 듣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당면한 지금 세상의 도의가 풀려 버리고 민생에 대한 근심이 몹시 다급하므로, 이런 때를 바로잡아 구제해 가는 방책에 있어서 그윽이 임하(林下)에서 독서(讀書)하는 선비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하물며 이 유신은 나이와 덕이 모두 높아 조야(朝野)가 의지하며 중시했었으니, 내가 기대하며 바라게 되는 바가 더욱 어떠했겠느냐? 이제는 그만이게 되어버렸으니 다시 말을 한들 무엇하겠는가? 성복(成服)한 뒤에는 마땅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겠는데, 제문(祭文)도 마땅히 친히 짓겠다. 무릇 은졸(隱卒)에 관한 범절을 한결같이 고 장령(掌令) 김종후(金鍾厚)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연이어 사관이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유언집의 자는 사집(士集)인데, 유언호(兪彦鎬)의 형이다. 젊어서부터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노닐었고,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했었다. 드디어 초복(初服)에 당하여 경학에 통달하고 덕행이 있음으로써 선발되어 벼슬이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나 여러 차례 불러도 나오지 않았고, 몸이 고되도록 학문 연구를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졸하였다.”

 

편서(編書)로는 『오복명의(五服名義)』가 있다. 이는 고금의 예제(禮制)를 참작하여 다섯 가지 상복의 이름과 그에 대한 뜻을 적은 책이다.

정현(鄭玄)·주희(朱熹) 등 중국의 예학자는 물론 김장생(金長生)·박세채(朴世采) 등과 성리학자이며 예학자인 이황(李滉)의 학설을 망라한, 오복에 관한 예설을 집대성한 책이다.

인용된 참고도서는 ⌈주례(周禮)⌋·⌈의례(儀禮⌋를 비롯,⌈가례家禮)⌋·⌈개원례(開元禮)⌋·⌈정화례 (政和禮)⌋·⌈개보례(開寶禮)⌋ 등과⌈당률(唐律)⌋·⌈당예의지(唐禮儀志)⌋·⌈송사예지(宋史禮志)⌋·⌈대명집례(大明集禮⌋·⌈대명회전(大明會典)⌋·⌈상례비요(喪禮備要)⌋ 등 두루 참고하였다.

이 책은 정구의⌈오복연혁도⌋와는 달리 군신관계의 상복부터 다루지 않고 부자관계의 본종복부터 설명하였다. 또한 단순한 도표가 아니라 왜 그러한 상복을 입는지 그 이유와 의의를 설명하였다. 이는 중국의 모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의식적으로 오복의 예설을 준행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극효(安克孝, 1741년 식년문과 장원)


안극효(安克孝, 1741년 식년문과 장원)       PDF Download

 

 

극효는 자는 사칙(士則)이고 호는 백강(栢岡)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아버지는 첨추(僉樞) 안숙(安橚)이다. 사촌동생 안극권(安克權), 안극관(安克觀)과 더불어 이재의 문하에서 사사했다. 동문수학한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목산(木山) 이기경(李基敬) 등과 막역지우로 서로 학문을 교류하였다.

안극효는 1741년(영조 17)의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헌부의 지평, 장령, 헌납 등 주로 언관직에서 근무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력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활발한 언론을 펼쳤다.

일찍이 영조와 8촌간인 여천군(驪川君)이 동생 이학(李學), 외손인 이권책(李權冊) 등과 함께 투서를 조작하여 역모 혐의를 덮어 씌었을 때 안극효는 영조와 맞서 이들 종친을 법으로 다스리는 데 앞장섰다.

이후 결국 영조로부터 축출된 것도 이때의 언관 활동으로 미움을 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극효는 또한 중종 때의 명신 김정(金淨)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고자 여러 차례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안극권은 유집사실(遺什事實)·세계비지(世系碑誌)·제현기술(諸賢記述) 등에서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안향(安珦)에 대한 사적(事蹟)을 모아 ⌈문성공실기(文成公實記)⌋를 1766년에 간행하였다.

안극권은 안향의 17대손이다. 책머리에는 대제학 이정보(李鼎輔)를 비롯하여 박성원(朴聖源)·송명흠(宋明欽) 등의 서문이 있으며, 16대손 안석근(安錫謹)의 발기(跋記)가 있다.
<참고문헌>
유제식, 「전북 지역문화의 성립기반과 그 맥락에 대한 연구: 전북유학의 전개」,「전라문화연구」 3호, 198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