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의 돌격대장 조헌


 

서인의 돌격대장 조헌

 

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조헌” 조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옥천에 있던 조헌은 휘하의 문인 이우(李瑀) 등과 더불어 의병 1,600여 명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왜적들과 맞섰다. 그리하여 8월 1일 영규(靈圭)가 지휘하는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1536년에 출생한 율곡에 비하여 8살이 연소한 조헌이 처음부터 율곡, 성혼, 송강 등과 교분이 깊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헌이 송강과 교분을 나누면서 율곡과 성혼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조헌의 행장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신사년(1581)에 조헌(趙憲)이 전라 도사가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공(송강)이 감사가 되었다. 이때는 조헌이 이발(李潑)ㆍ김우옹(金宇顒)과 더불어 교유하던 터라, 처음에 공을 헐뜯는 말을 믿고 그날로 병을 칭탁하여 벼슬을 버리고 가려고 하므로 공이 굳이 청하여 보고 말하기를,

“공이 나와 더불어 평소 잘 알지 못하는 터인데 무엇으로 그 흉칙스럽고 험한 줄을 아는가. 머물러서 나와 같이 일을 하다가 진짜 소인(小人)임을 알고 나서 떠나도 늦지 않소.”

하였으나 조헌이 듣지 않았다. 공이 다시 이이와 성혼에게 소개를 청하여 조헌과 같이 일할 것을 원하였다. 뒤에 교분이 날로 친밀해지니 조헌이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밝지 못해서 하마터면 공을 잃을 뻔했다.”

하였다.

조헌은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다. 당시 그와 교분이 있던 이발(1544-1589)은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장원하고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다. 김우옹(1540-1603)은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동서로 분당이 된 후로 이발과 김우옹은 송강을 비롯한 서인을 매섭게 비판한 동인의 중진들이다.

선조 8년(1575)에 동서 분당이 된 후로 동인과 서인 사이의 반목과 질시는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신사년(1581)이면 분당이 된 후로 6년이 되는 해인데, 당시 조헌이 전라도사가 되었을 때 전라감사로 송강이 임명되자 같이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기사는 동서 양당 간의 반목의 정도를 보여준다.

물론 이는 동서 양당의 반목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송강을 소인으로 생각하고는 과감하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버린 조헌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조헌의 이와 같은 성품은 무자년에 5차에 걸쳐 상소를 한 데에도 드러난다.

무자년(선조 21년, 1588) 여름에 공주제독(公州提督) 조헌이 상소를 올렸다. 집이 가난하여 노자와 양식이 없었으므로 서울에 오지 못하고 감사에게 전례에 따라 전달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감사가 상소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하여 받지 않고, 재소(再疎)ㆍ3소를 하여도 모두 받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여 심지어 조헌(趙憲)이 평소 우거(寓居)하던 주인에게 심한 형벌과 문책을 하기까지 하였다. 노수신(盧守愼)이 일찍이 천산갑(穿山甲)을 조헌에게 주면서 잠잠히 있을 것을 암시하였으나 조헌이 듣지 않고 또 4소를 올렸는데, 공주(公州)의 무인 원상(元祥)이란 자가 감사에게 올리지 않고 조헌의 집에 돌려보내고 글을 가지고 갔던 향교의 종을 매질하기까지 하였다. 조헌이 또 5소를 올려서 그 상황을 갖추어 진술하였으나, 감사가 또 받지 않았다.

이 외에도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결국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고,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하기도 했다.

선조 19년 병술년에 올린 소에서는 이이와 성혼의 학술이 바르고 나라에 충성하는 정성을 극력으로 진술하고, 동인들이 현명한 사람을 방해하며 나라를 그르쳤다고 하고, 서인이 은밀한 중상으로 배척받았다고 하는 내용을 일일이 거론하였는데, 수만 자(字)에 달했다.

또 선조 21년 무자년 정월에 올린 소에서는 노수신(盧守愼)ㆍ정유길(鄭惟吉)ㆍ유전(柳㙉)ㆍ이산해(李山海)ㆍ권극례(權克禮)ㆍ김응남(金應南)이 붕당을 만들어 나라를 병들게 한다 하고, 또 박순(朴淳)ㆍ정철(鄭澈) 같은 어진 이가 먼 지방에 버림당한 것에 대해 논하며, 또 송익필(宋翼弼)ㆍ서기(徐起)가 모두 장수의 재능이 있다고 논하기도 했다.

조헌은 정여립을 역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훗날 이발이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류되어 옥에 있으면서 같이 갇혀 있는 사람에게

“내가 조헌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였다. 조헌이 일찍이 이발에게

“여립과 절교하지 않으면 장차 큰 화를 입을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실상 정여립 모반 사건 전에 정여립을 극구 배척하고 탄핵했던 이가 조헌이다. 그러하기에 이발에게도 정여립과 절교하지 않으면 장차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일월록>에 생원 양천회(梁千會)가 올린 소를 기록하고서, 만약 역적 사건이 드러나기 전에 이 소장을 올렸다면 그 공적이 조헌과 서로 견줄 만한 것이라고 한 대목에서 드러나듯, 정여립 모반 사건 전에 정여립이 역모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강력하게 성토한 이가 조헌이다.

그럼 무엇으로 조헌은 정여립이 모반을 할 것임을 알았다는 것인가? <일월록>에 이렇게 적혀있다.

조헌이 늘 말하기를,

“여립은 반드시 역적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묻기를,

“어떻게 그것을 미리 알았는가.”

하니, 조헌이 답하기를,

“여립이 일찍이 어전에 있을 때 자못 좋지 못한 말과 기색이 있었으므로,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여립은 패기가 많아서 옆에 가까이 있게 하는 데는 맞지 않는다.’ 하시면서 한참 동안 이윽히 보셨으나, 여립은 별로 두려워 하는 기색도 없더니, 물러 나와서 섬돌을 다 내려온 후에 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다 보았으니, 이것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다.

조헌의 상소문은 꾸밈이 없고 직설적이라 그의 입장을 동조하는 자는 수긍할 수 있겠지만 논박을 당하는 당사자들과 동조자들이 보기에는 과도하고 일방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그의 충직한 성품과도 관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병장으로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의병장이란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사세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런 능력이 정여립의 모반을 예측한 데에서 발휘되었을 것이다.

병조판서 율곡


 

병조판서 율곡

 

세가로서 율곡을 거론할 적에 반드시 언급하는 것이 10만 양병설이다. 그러나 10만 양병설의 진위는 아직도 가려지지 않았다. <선조실록>에는 10만 양병설이 나오지 않는데, <선조수정실록> 16권 선조 15년(1582) 9월 1일자 기록에 율곡이 경연에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내용이 나온다. 김장생이 지은 <∫>의 내용을 토대로 사관이 실록에 기록한 내용이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는 그해 12월, 선조는 율곡을 병조판서에 임명한다. 병조판서는 국방을 책임지는 자리로, 율곡 본인이 생각하고 있던 국방 정책을 실천해 볼 수 있는 자리임에 틀림없다.

계미년(선조 16년) 정월에 병조판서 이이가 병으로 누웠다가 출사하여 사직하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의 병력이 진실로 전조(前朝)에 미치지 못하는데 나라가 태평한 지 백 년이니, 병정(兵政)이 폐해진 것이 오래되었다. 내 일찍부터 속으로 근심하면서도 사람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경이 개혁하고 기강을 바로잡고자 전후로 부지런하니, 이제 능히 기특한 계획을 세워 운영하고 모든 폐단을 개혁하여 양병(養兵)의 규모를 만든다면 국가의 다행이 될 것이다.”

하였다.

선조가 율곡을 병조판서에 임명한 이유는 율곡의 의지와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의 이 기록은 <계미기사(癸未記事)>를 인용하였다. <계미유사>는 선조 16년 계미년(1583)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시정(時政)을 기록한 책으로 율곡을 중심으로 동서당론에 관계된 기사를 뽑아 편찬한 책이다. 바로 이때가 율곡이 병조판서를 맡고 있었던 해이다.

당시 선조 16년(1583)에 북쪽 국경지역에서 호인(胡人)들의 소요가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2월에는 이탕개(尼蕩介)가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기도 했고, 여름 무렵에는 호인들이 종성(鐘城)을 포위하여 국경에서 급보가 날아오기도 했다.

2월에 이탕개가 침입하여 경원부가 함락되자, 경기(京畿) 이하 5도에 명하여 군사를 징발해서 북쪽으로 나가게 했다. 그런데 당시는 전쟁을 모르고 지낸지 오래되어서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다가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자, 동리에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때 율곡이

“자원하여 육진 수비에 나가 만 3년 동안 복무하는 자는 서얼이라도 과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고 공사(公私)의 천민들은 양민으로 올려주소서.”

하고 청했지만 양사(兩司)가 거행하지 말도록 청하니 이를 따랐다고 한다. 율곡의 계책이 시행되지 못했다.

여름에 다시 호인들이 오래도록 종성(鐘城)을 포위하여 국경에서 날로 급하다는 보고가 전달되었다. 이에 도성 5부(部) 각 방(坊)의 향도(香徒) 중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뽑게 하였다. 그런데 사수(射手)는 징발하였지만 관청에 전마(戰馬)가 없어서 갑자기 마련할 수가 없었다.

율곡은 앞서 을묘년에 군사들이 말을 약탈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런 일로 난을 일으킬까 깊이 근심하여, 뽑힌 사람들 중에 늙고 약한 이들을 모아 원하는 대로 말을 헌납하여 출전하는 자들에게 주게 하였는데 여기에 응모할 사람의 유무를 알 수 없어 먼저 영을 내려 모집하였다. 이에 말을 헌납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군사들은 갈 길이 급하여 기한을 늦출 수 없으므로 한편 아뢰며 한편 말을 나누어 주게 하니 선조가 곧 윤허하였다.

율곡은 전마 헌납과 관련하여 선조치 후보고의 방식을 택했는데, 이를 두고 군정의 중한 일을 먼저 시행하고 나중에야 아뢴 것은 병권을 마음대로 행사하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가 현저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율곡행장>에서는

“전쟁에 나가는 자는 말을 얻어서 다행으로 여기고, 남아있는 자는 전쟁에 가는 일을 면하였다고 기뻐하니, 공사간에 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시배(時輩)의 의논은 권력을 마음대로 부린다고 지목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율곡행장>에서 시배들의 의론이라고 명명한 그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연려실기술>은 <율곡행장>에 기록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재한다.

부제학 권덕여와 직제학 허봉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병조 판서 이이가 글자나 아는 것으로 출세하여 관계(官階)를 뛰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여 인정을 거슬렸으니 공론(公論)이 일어나 어찌 멈출 수 있겠습니까. 우선 요즈음의 일로 말씀드리자면, 크건 작건 아뢴 후에 명을 받아 시행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인데, 가까운 거리에 있는 궁궐에서 말을 헌납하라는 명을 자기가 내려 먼저 시행하여 놓고 나중에 아뢰었으니, 이것은 국가의 권력을 마음대로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평소와 같이 출입하고 있었으며 중한 병에 들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전하의 부르심에 대하여 교만스럽게도 몸소 내병조에 까지 이르렀다가 정원(政院)에 나아가 명령을 받지 않았으니, 이것은 군부(君父)를 업신여긴 것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대간에서 파직을 청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비판의 요지는 전횡과 불경죄로 압축되어 있다.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임의로 명령을 내린 것이 전횡에 해당하고 율곡이 선조의 부름을 받고 가던 중 갑자기 일어난 현기증으로 선조를 알현하지 않은 것이 불경죄에 해당한다.

물론 이에 대해 선조의 하교는 여전히 율곡을 두둔하였다.

상이 수교(手敎)로 대신에게 내리기를,

“요사이 이이가 내용으로 대간이 서로 격하여 이이를 나라를 그르칠 소인에게 비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대개 이이가 전부터 신진(新進)들을 제재하고 그들이 시세를 따라 편당에 붙는 것을 미워하여 여러 번 진계하여 논박하다가 시론(時論)에 미움을 받은 지가 오래이다. 마침내 이이가 실수한 것을 가지고 틈을 타고 흠을 만들어 반드시 이이를 탄핵하여 제거하고야 말려 하는 것이다. 무릇 공경대부 중에 소명(召命)을 받고서 오지 않은 자가 많았지만,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것으로 논란하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어찌 대간은 이이에게만 바른 말을 하는 것인가. 말(馬)을 헌납시키는 일을 나에게 묻지 않은 것도 허다한 사무(事務) 중에 미처 하지 못한 데에 불과한 것이다. 대저 권세를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신하의 극죄(極罪)인데,

어찌하여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 국법으로 다스리지 않고 이내 감히 파직시킬 것만을 청하여, 명종(明宗) 을사년에 간신들이 윤임 등을 반역으로 지목하면서 처음에는 체임(遞任)과 파직만으로 죄를 준 경우와 같게 하는가. 대간은 공론을 맡고 있으니, 속으로 자기와 뜻이 다르다 하여 배척하고 모함하려는 계획을 하는 것이 어찌 대간의 도리에 있다 하겠는가. 착함과 사특함을 분별하는 것이 오늘에 달려 있으니, 경들은 어물어물하며 분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대저 조정 신하들이 편당을 지어 나랏일이 날로 내쳐는데 대신이 분별하지 못하니, 장차 나랏일을 어느 지경에 이르게 하는가.”

하였다.

선조의 마음은 여전히 율곡에 있었고 당시 율곡을 비판하는 의론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비난이 여전히 비등하자 그해 6월에 병조판서에서 체직하였다. 그 후 9월에 율곡을 다시 불러 이조판서를 맡기는데, 그 다음해 선조 17년 정월에 율곡은 자택에서 영면한다.

율곡이 병조판서의 소임을 잘했다는 평가는 내리기 어려울 것 같다. 북방 변고를 조치하는 과정에서 제안하거나 실시했던 전마 헌납과 서얼 허통이 시행되지 않거나 거센 비판에 봉착한 데서도 드러난다. 물론 율곡이 병조판서를 맡은 기간은 선조 15년 12월부터 16년 6월까지로 기간이 짧고, 율곡이 선조 17년 정월에 작고한 데서 유추할 수 있듯이 병조판서의 직임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괘일록>의 이 글은 율곡이 병조판서로서 행한 실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로 사료된다. <괘일록>은 윤원형의 사위인 이조년이 편찬한 글이다. 그는 윤원형이 실각한 후에 관직에 나가지 않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이때 북호(北胡)가 난을 일으켜서 조정과 민간이 불안해하자, 참찬(參贊) 정언신(鄭彦信)이 순찰사(巡察使)가 되어 출정하였다. 이이가 군사를 조달하고 양식을 운반하여 그 책임을 전담하였는데, 뜻은 크고 재주는 엉성하여 새로 실시하는 일 중에 되는 것이 없었다.

전마(戰馬)를 납입하고, 양곡을 철령(鐵嶺)에 운반하는 이들 중 서얼들에게 허통하는 법을 만들었는데, 삼사(三司)가 번갈아 글을 올려 그 불가함을 논란하니, 그 차자의 내용에 과격한 것이 많았고 또 인정에 가깝지 않는 말도 있었다. 이에 이이가 차자를 올려서 스스로 해명하고 삼사를 들추고 비난하여 공론을 격동시키자, 공론이 분발하여 여지없이 공격하니 이이가 사직하고 교외로 나갔다.

율곡의 사직


 

율곡의 사직

 

<연려실기술> “이이가 사직하다” 항에는 선조 초년 몇 번에 걸친 율곡의 사직을 기록하였다.

곡은 외조모를 극진히 모셨다. 선조 1년 11월에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외조모의 병환이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간원(諫院)에서는 본래 법전에 외조모 근친하는 것은 실려 있지 않고 직무를 함부로 버리고 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파직을 청하였지만 선조가 비록 외조모일지라도 정이 간절하면 가 볼 수도 있는 것이며, 또 효행에 관계된 일로 파직시킬 수는 없다 하고 듣지 아니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외조모에 대한 율곡의 각별한 정은 어린 시절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외조모와 함께 보낸 정도 깊으려니와 모친을 이른 나이에 떠나보낸 그 아픔이 외조모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다음해 선조 2년 6월에 율곡은 홍문관 교리로 취임하는데 10월에 휴가를 받아 외조모를 봉양하다 상을 당한다. 그런데 율곡이 휴가를 받아 외조모를 봉양한 데에는 연로한 외조모를 간병하려는 데에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최고 통치권자인 선조에 대한 일종의 실망감이 작용했음을 <연려실기술>을 통해 알 수 있다.

기사년(1569, 선조 2년) 9월에 이이가 경연에서 《맹자》를 강론하다가, ‘임금이 좌우를 둘러보고 딴소리하였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 임금에게 여쭙기를,

“오늘날 민생이 곤궁하고 기강이 문란하여 사방 국경 안이 다스려지지 않음이 매우 심하니, 만일 맹자가 전하께,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고 물으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까.”

하였더니,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이는 임금이 태평한 정치를 구하려는 뜻이 없음을 알고 마침내 물러갈 뜻을 품었는데 마침 외조모의 병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를 청하고 돌아갔다.

선조가 즉위 초년에 학문에 정신을 쏟고 정사에 최선을 다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연려실기술>의 본 기사는 통상적인 이해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선조가 즉위 초년에 선정을 베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본 기사는 임금이 태평한 정치를 구하려는 뜻이 없음을 알고 율곡이 물러날 뜻을 품었다고 적고 있다. 전후의 간극은 어떻게 메꿀 수 있을까?

선조 6년 7월에 율곡이 직제학을 사면하는 그 무렵의 기록을 통해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임금이 이이에게 이르기를,

“한(韓) 나라 문제(文帝)가 어찌하여서 가의(賈誼)를 쓰지 않았는가.”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문제가 비록 어진 임금이지만 뜻이 높지 못하여 가의의 말이 큰 것을 의심해서 쓰지 못한 것입니다. 대개 사람은 큰 뜻이 있은 연후에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주인이 두어 칸 오막살이를 지으려 하는데 목수가 큰 집을 지으려고 하였다면 어찌 그 말을 듣겠습니까.”

하였다.

율곡이 답한

“문제가 비록 어진 임금이지만 뜻이 높지 못하여 가의의 말이 큰 것을 의심해서 쓰지 못한 것입니다.”라는 말을 가지고 설명하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선조가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한 것은 문제가 어진 임금인 것과 같다. 그러나 문제가 가의를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은 문제의 뜻이 높지 못하여 가의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조가 태평한 정치를 구하려는 원대한 포부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선정을 구하려는 뜻이 없다는 것이다. 율곡이 “비유하자면 주인이 두어 칸 오막살이를 지으려 하는데 목수가 큰 집을 지으려고 하였다면 어찌 그 말을 듣겠습니까.”라는 말은 이런 뜻을 여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태평한 정치를 구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군주는 현실적인 미봉책을 구사하는데 멈추지 않고 더욱 근본적인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바로 이 무렵 율곡이 직제학으로서 향약 시행과 관련하여 선조에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말처럼 말이다.

이이(李珥)가 직제학이 되어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향약은 삼대(三代)의 법인데 전하께서 시행하도록 명하시니, 진실로 근대에 없던 경사입니다. 그러나 다만 무슨 일이든지 근본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니, 임금은 마땅히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고서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고서 만백성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몸소 행하여 마음에 얻고 나서 시행하시어 조정의 정치가 모두 다 바르게 된 연후에야 백성이 감동하고 분발하여 흥기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직은 곧 공직에서 내려오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사직을 하게 되면 녹봉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사직의 행위는 형식적 예의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라면 그래도 비교적 자유롭겠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상당한 결심을 요구하는 행위다.

율곡이 선조 6년에 직제학 사직을 허락받고, 유몽학과 나눈 대화는 사직이라는 행위의 본래적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계유년(1563년, 선조 6년) 7월에 직제학 이이가 본직을 사면하고자 소를 세 번 올리니, 그제야 물러갈 것을 허락하였다. 삼사가 번갈아 소를 올려 이이를 만류하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유몽학(柳夢鶴)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물러갈 것을 청하여서 물러가게 되었으니 유쾌한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사람들마다 모두 물러갈 마음이 있으면 누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겠는가”

하니, 이이가 웃으며,

“만일 위로는 삼정승으로부터 아래로는 참봉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물러갈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형세가 자연히 태평하게 될 것이니, 국가를 부지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게.”

하였다.

향약과 율곡


 

향약과 율곡

 

<한국민족대백과> “향약” 항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약은 넓은 의미로는 향촌규약,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약계(鄕約契), 향안(鄕案),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안(洞安), 족계(族契), 약속조목(約束條目)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원칙적으로 향약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자치와 이를 통해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숭유배불정책에 의하여 유교적 에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災難)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규약이었다.

향약(鄕約)이라는 용어가 역사적 의미를 지니면서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실체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전국적으로 시행, 보급되면서부터이다. 향약을 최초로 실시한 것은 중국 북송(北宋) 말기 섬서성 남전현(陝西省 藍田縣)에 거주하던 도학자 여씨(呂氏) 4형제(大忠, 大防, 大釣, 大臨)였다. 이 중 여대림은 일명 여박사(呂博士)로 불리는 이정(二程)의 고족이다.

이들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 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대 강목을 내걸고 시행하였는데, 이것을 후대에 남전향약이라고 불렀다. 그 후 주자가 이 향약을 가감 증보하여 보다 완비한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그의 문집인 <주자대전>에 수록하였다.

조선 향약의 대표적인 역할을 한 것은 퇴계 이황(李滉)의 예안향약(禮安鄕約)과 율곡의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이다. 특히 율곡은 「서원향약」을 비롯한 4종류의 향약을 제정하고 일생을 향약과 관련하여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청년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향리 교도에 진력한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그런데 <연려실기술> “향약의 시행을 정지하다” 항목을 살펴보면, 선조 초년 율곡은 향약 시행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갑술년(1574) 1월에 이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근일에 여러 번 신하들이 향약을 시행하고자 급하게 청하였으므로 전하께서 시행하라고 명하시었으나, 신의 뜻에는 향약을 시행하는 것이 너무 이른가 합니다. 백성을 기르는 것이 먼저 할 일이고 가르치는 것은 그 뒤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민생의 곤궁이 오늘날보다 심한 때가 없사오니, 빨리 폐단을 제거하여 먼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져낸 후에야 향약을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교화는 쌀밥과 고기에 비할 수 있는 것인데, 만일 위장이 몹시 상해서 미음이나 죽도 내리지 못한다면 쌀밥과 고기가 아무리 좋아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나도 그 시행이 어려운 줄을 알았으나 이제 이미 시행하라고 명하여 놓고 중지시킨다면 어찌 될까.”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백성을 기른 연후에는 향약을 시행할 것이니, 이것은 중지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는데, 정지시켜야 한다 하기도 하고 정지시킬 수 없다 하기도 하였는데 임금이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갑술년(1574)은 선조 7년이다. 두 해 앞서 임신년(1572) 10월에 대사간 허엽(許曄)이 향약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오활하며 해괴한 풍속일 뿐이다.”

하고 듣지 아니하였는데, 다시 계유년(1573) 9월에 삼사가 번갈아 소를 올리고, 8도의 군ㆍ읍의 선비와 백성이 향약 시행을 여러 번 청하자 선조가 시행을 허락하였다. 이때 율곡은 직제학으로 선조에게 향약 시행과 관련하여 간언을 하는데, 갑술년의 입장과는 달리 향약 시행을 동의하였다.

이이(李珥)가 직제학이 되어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향약은 삼대(三代)의 법인데 전하께서 시행하도록 명하시니, 진실로 근대에 없던 경사입니다. 그러나 다만 무슨 일이든지 근본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니, 임금은 마땅히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고서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고서 만백성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향약은 만백성을 바르게 하는 법이니, 조정과 백관이 바르게 되지 아니하였는데 먼저 만백성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근본을 버리고 끝만 다스리는 것입니다. 일이 반드시 성과가 없을 것입니다마는 이제 이미 좋은 일을 시작하셨으니 중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몸소 행하여 마음에 얻고 나서 시행하시어 조정의 정치가 모두 다 바르게 된 연후에야 백성이 감동하고 분발하여 흥기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근거하면, 임신년(1572) 10월에 대사간 허엽(許曄)이 향약 시행을 요청하는데 선조는 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다가, 해가 바뀌어 계유년(1573) 9월에 향약 시행을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계유년에 선조가 향약 시행을 윤허했을 적에 율곡은 향약 시행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는데, 다시 다음 해인 갑술년에는 향약 시행을 연기할 의사를 내비친다. 율곡의 이러한 입장 변화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는 <연려실기술>의 내용만으로는 알 길이 없지만, <석담유사>에 기록된 율곡의 글을 통해, 율곡이 시기상조론을 펼친 이유를 대강이나마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가 살피건대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은 그 강령이 바르고 조목이 갖추어졌으니, 이것은 사군자(士君子)가 서로 규약을 정하여 예법을 행하는 것이요, 가히 범범하게 무식한 백성에게 시행시키지 못할 것이다. 주자(朱子)가 동지를 거느리고 그것을 실행하려 했다가 못했거늘, 하물며 오늘날은 말세여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그 항심(恒心)을 잃고 애비와 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가 흩어지는데, 급히 결속시켜 유자(儒者)의 품행으로 몰아넣으려 하니, 참으로 옛말에 이른바 결승(結繩)하는 정치로 어지러운 진(秦) 나라의 뒤를 이으려는 것이요,

간우(干羽 요순 시대에 하던 군중(軍中)의 춤)의 춤으로 평성(平城 한 고조(漢高祖)가 평성에서 흉노(匈奴)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경우를 당하였다.)의 포위를 풀려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하물며 약정(約正) 직월(直月)은 적당한 사람을 얻기 어려워서 시골의 호족들이 반드시 백성들에게 폐만 끼칠 것이다. 허엽과 같은 오활하고 망녕된 선비는 한갖 예전 일이 좋은 줄로만 알 뿐 시대의 급무도 모르고, 정치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천천히 할 일과 급히 서두를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향약을 시행하여 말세의 풍속을 만회하려고 하니 틀린 소견이 아닌가.

율곡은 향약이 백성들의 삶을 돕기 보다는 도리어 삶을 힘들게 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또한 갑술년에 선조에게 아뢴 시기상조론을 보면, 향약의 기능이 경제적 요소보다는 교화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율곡은 맹자 왕도정치론을 원용하여, 먼저 의식주를 해결한 후에 향약(교화)을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국고중세사사전>에“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향약을 만든 사람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후 영조·정조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실시된 향약은 이이의 향약으로, 그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향약은 본질적으로 피지배계급을 엄격한 봉건적 질서와 신분질서에 얽매고 억압하는 조직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착취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라고 한 설명에서 “경제적으로 착취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라는 설명은 율곡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율곡이 본 기대승


 

율곡이 본 기대승

 

선 성리학 3대 논쟁의 서막을 장식하는 논쟁이 바로 사단칠정논쟁이다. 그 사단칠정논쟁의 주역이 퇴계와 고봉 기대승(1527-1572)이다. 1501년생인 퇴계보다는 26세가 어리고, 1570년에 죽은 퇴계보다는 2년 늦게 죽었다. 퇴계가 70세를 살았고 고봉은 46에 죽었다. 한편 1536년생인 율곡보다는 9세가 연장이고, 1584년에 죽은 율곡보다는 12년 전에 죽었다. 율곡은 49에 죽었다.

<연려실기술>에 전재 한 <조야첨재>의 기록에 의하면, 고봉은 사후 유림의 종장으로 추앙받았다.

간원에서 아뢰기를,

“기대승이 젊었을 때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이 있어서 본 바가 뛰어났고, 이황과 왕복하는 편지로 성리의 학설을 강론하여 예전사람이 발명하지 못하였던 것을 발명하였으며, 경연에서 진술한 바가 요순삼대(堯舜三代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 때를 말한다.)의 도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추앙하여서 유림의 종주라 하더니, 불행히 병이 들어 중도에서 죽었는데, 집안이 대대로 청렴하고 가난하여 장사 지낼 수가 없사오니, 청컨대 관가에서 초상과 장사를 돌봐주어, 국가가 유학자를 높이 여기고 도학을 중요시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대승 조에 실린 그의 학문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고,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

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하여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는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이다.

역시 기대승 하면 퇴계와 나눈 그의 사칠논변임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율곡 또한 <석담일기>에서

“그가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같고 다른 것을 논쟁한 수천 마디는 논의가 활발하고 시원스러웠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대승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임신년(1572)에 대사간 기대승이 사면하고 남으로 돌아갔다. 기대승은 기개가 호방하고 뛰어나며 언론이 능히 온 좌중을 굴복시키므로 맑은 명성이 높았으나, 이량(李樑)이 그를 꺼려해서 벼슬해서 떨어졌다. 한림(翰林)으로 쫓겨났다. 이량이 패한 뒤에 사류가 그를 추대하여 영수가 되니, 기대승이 역시 경륜하는 것으로 당시에 자부하였으나, 그 학식이 다만 널리 변론하고 크게 늘어놓는 것을 힘쓸 뿐이요, 실상은 굳게 잡고 실천하는 공부가 없었고, 또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개결한 선비들은 합하지 아니하고 아첨하는 자가 많이 따랐다. 언론 또한 평범함을 따르는 것을 힘쓰고 혁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에 조식(曺植)이 기대승을 보고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득세한다면 반드시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다.”

하였고, 기대승도 역시 조식을 유자(儒者)가 아니라고 하여 둘이 서로 허여(許與)하지 않았다. 대사성이 되어서는 성균관 유생의 식사를 박하게 하였고 또, ‘먹는 데 배부른 것을 구하지 말라[食無求飽]’는 말로 출제하여 시험 보이니, 많은 유생들이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위훈(僞勳 위사공신(衛社功臣))을 삭탈하기를 한창 논할 때에 기대승이 홀로 말하기를,

“을사년의 훈공은 허위가 아니오. 또 선왕 때에 정한 일을 이제 삭탈할 수 없소.”

하자, 간당(奸黨)들이 기대승을 주장으로 삼으니, 식자가 매우 옳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율곡은 고봉이 기개가 호방하고 뛰어나며 언론이 능히 온 좌중을 굴복시키므로 맑은 명성이 높았지만, 그 학식이 이론적인 변론에만 능할 뿐 실상 현실에서 실천하는 공부가 없었고, 호승지심(好勝之心)이 강하여 남의 의견을 듣기 보다는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는 것을 기뻐하여 소신을 가진 선비들보다는 아첨하는 자들이 주변에 많았다고 평가한다.

또한 율곡은 고봉이

“평범함을 따르는 것을 힘쓰고 혁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라고 평하면서 을사년 위사공신 위훈 삭탈을 논할 적에 고봉이 을사년의 훈공은 허위가 아니고, 또 선왕 때에 정한 일을 이제 삭탈할 수 없다고 주장한 내용을 기록하여 혁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실례를 들어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고봉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음도 알 수 있다. 고봉은 귀로를 재촉하던 중에 고부에서 객사한다.

율곡은 선조가 고봉의 부음을 접하고,

“기대승의 부고를 받아 보고 놀라며 슬퍼하였고, 사람들은 그 재주를 아까워하였으니, 기대승이 비록 실용되는 재주는 아니었지만 영특한 기상이 출중하였다. 그가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같고 다른 것을 논쟁한 수천 마디는 논의가 활발하고 시원스러웠다.”

라고 율곡은 적고 있다.

고봉의 영특한 기상은 사단칠정에서 드러난 학술적 논변에서 드러난 그대로지만, 그의 전체적인 학문은 현실을 바꾸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실용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고봉에 대한 율곡의 종합평이라고 할 수 있다.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택당 이식이 지은 고봉의 시장(諡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때에 많은 인재들이 바야흐로 진출하여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하기를 급하게 여기어 정사(政事)를 이룩하여 밝힌 것이 많아 논의가 시끄러웠는데, 공은 ‘뜻을 세워 현명한 사람을 구하여 위임해 책임을 완성토록 하는 것으로 큰 강령과 우선할 업무로 삼을 것’을 청하였으니, 대체로 뜻이 근본을 바로잡고 교화(敎化)를 먼저 한 뒤에 법으로 제제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자못 부패한 제도를 고쳐서 새롭게 하는 논의와는 서로 어긋나서 대신들이 더욱 불평하였다.

택당은 그 대신들이 누구인지 특칭하지는 않았지만, 율곡이 고봉을 두고

“평범함을 따르는 것을 힘쓰고 혁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라는 비판적 평가에 대한 변호의 내용이 될 것이다.

또한 퇴계가 고봉을 허여한 아래의 글은 율곡이

“그 학식이 다만 널리 변론하고 크게 늘어놓는 것을 힘쓸 뿐이요, 실상은 굳게 잡고 실천하는 공부가 없었다.”

라는 비판적 평가에 대해서도 재고할 여지를 주는 글이다. 이 또한 택당의 변호라고 할 수 있다.

퇴계가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선조께서 조정의 신하 가운데 누가 학문을 하느냐고 하문하였다. 당시 많은 현인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퇴계가 감히 알지 못한다고 사양하고 오직 말하기를,

“기 아무개[奇某]가 문자(文字)를 널리 열람하였고 그 이학(理學)에도 역시 뛰어난 조예가 있으니, 박학하고 실천력이 있는 학자라고 말할 만합니다. 다만 자신을 단속하는 공부가 극진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퇴계에게 묻기를,

“기 고봉(奇高峯)은 실행한 것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합니다.”

하니, 퇴계가 말하기를,

“고봉은 임금 섬기기를 의리로 하였고 진출하고 은퇴하기를 예(禮)로서 하였는데, 무엇을 실행한 것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이준경의 유차(遺箚)


 

이준경의 유차(遺箚)

 

<연려실기술>에는 “이준경의 유차(遺箚)” 항을 별도로 만들어 기술하고 있다.

차란 유서 형식의 차자라는 말이니 이준경이 선조에게 유언처럼 올린 차자라는 말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이준경의 유차를 그의 문집인 <동고집>에 실린 내용을 전재하였다.

임신년 7월 7일에 영중추부사 이준경이 마지막 차자를 올리고 정침에서 죽었는데, 준경이 병이 위독하자 의원을 물리치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천명이 이미 다 하였거늘 어찌 이것을 먹어 생명을 연장시키랴, 단지 임금에게 한 말씀 올려야겠다.”

하고 차자를 초하였으니, 그 차자의 대략에,

“첫째는 제왕의 힘쓸 것은 오직 학문하는 것이 제일 큰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함양 공부는 모름지기 경(敬)을 하여야 하고 진학은 앎을 지극히 하는데 달렸다.’ 하였습니다. ……

둘째는 신하를 대하실 때에 위의가 있으셔야 합니다. ‘천자가 거룩하니 제후가 공경한다.’고 신은 들었으니 위의는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

셋째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군자라면 소인들이 비록 공격하더라도 발탁하여 써서 의심하지 마시고, 진실로 소인이라면 비록 사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배척하여 쫓으실 것입니다. ……

넷째는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혹 지나친 행동이 없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네와 한마디의 말이라도 합하지 아니하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행실을 닦지 아니하고 글 읽기에 힘쓰지 아니하며, 거리낌 없이 큰소리치며 당파를 지으면서 그것이 높은 것이라고 하며 헛된 기풍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군자이면 함께 서서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이거든 버려두어 저희끼리 흘러가게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전하께서 공평하게 듣고 공평하게 보아 주시어 힘써 이 폐단을 제거하실 때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근심이 될 것입니다.

이 유차는 조선시대 명재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준경의 심혈이 녹아들어간 글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이 네 번째의 사사로운 봉당을 깨트려야 한다는 말이다. 왜 문제가 되었던가? 조선 후기 문신인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조선 당쟁사를 기록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기록을 참조하면 대강 이렇다.

선조 5년(1572년) 이준경이 죽음을 앞두고

“지금 사람들이 고상한 이야기, 훌륭한 말들로 붕당(朋黨)을 결성하는데 이것이 결국에는 이 나라에서 뿌리 뽑기 어려운 커다란 화근이 될 것입니다”

라는 유차를 올렸다. 이준경이 붕당을 만들 인물로 율곡을 지목했다고 알려지면서 율곡은 이에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고 했는데 이준경은 그 말이 사납습니다.”

하고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이이를 지지하는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일제히 상소를 올려 이준경의 관작 삭탈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 서애 류성룡이 “대신이 죽음에 임해서 임금에게 올린 말이 부당한 것이 있으면 물리치는 것은 옳지만, 죄를 주기까지 한다면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고 반대해 삭탈관작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동고연보>의 내용은 율곡의 비판을 더욱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뒤에 이이가 또 따로 소를 올려 추한 욕을 하였으니 심지어는, ‘이준경이 머리를 감추고 형상을 숨기고 귀역(鬼蜮)처럼 지껄였다.’ 하였고, 또, ‘이준경의 말은 시기와 질투의 앞잡이요, 음해하는 표본입니다.’ 하였고, 또 ‘옛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선했지만 오늘날은 죽을 때에도 그 말이 악합니다.’”라고 했다고 기록하였다.

<율곡연보>에서는 이 일을 두고 “이준경이 임종할 때의 차자는 신‧구 두 파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이는 그것이 임금의 마음에 의혹을 일으켜 간사한 자가 그 틈을 타서 사림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차자를 올려 통렬하게 논박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신‧구 양파 간의 알력을 이준경과 기대승을 들어 밝히고, 백인걸이 신‧구 양파 간의 알력을 조정하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백인걸의 이 입장은 동서분당 이후 조제보합론을 주장하면서 신‧구 양파 간 조정을 위해 노력했던 율곡이 입장과 묘하게 겹친다.

처음에 이준경이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일시에 명망이 있었으나, 다만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고 성질이 높고 거만하면서, 선비를 높여 주고,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어 재해가 절박하고 인심이 흉흉한 때를 당해서도 별로 건의함이 없으므로 선비들의 비난을 받게 되니, 준경도 스스로 불안하여 신진사류들과 화합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대승(奇大升)은 재주와 기개가 넉넉하여 일을 논할 때에 과감하고 날카로워 이준경과 점점 틈이 생겨 기대승이 분이 나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사류들이 대부분 아깝게 여겼다. 백인걸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조정에서 신ㆍ구(新舊)가 불화한 것은, 대신은 안정에만 힘쓰는 데에 그 폐단이 있고, 사림은 무엇을 하려고만 힘쓰므로 과격한 데에 그 폐단이 있으니, 마땅히 조정하여 중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내가 전하를 뵙고 다 아뢰겠다.”

하니, 듣던 자가 백인걸은 말이 번다하여 본의를 잃어 도리어 임금으로 하여금 조정에 붕당이 있는가 하는 의심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힘껏 말렸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근거하면 백인걸 본인은 본래부터 이준경의 인격에 심복하여 사류들이 이준경에게 동조하지 않는 것을 불만으로 여겼고, 기대승과 심의겸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대신과 사림을 조정하여 중도를 잡겠다는 백인걸의 말은 율곡의 조제보합론의 취지와 일치한다.

당시 율곡이 이준경의 유차에 대하여 반박 상소를 올린 것은 자신은 붕당을 결성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준경이 죽은 지 3년 후인 1575년(선조 8)에 과연 동서분당이 일어났다. 이 점에서 보자면 율곡의 이준경 반박 상소는 적절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붕당이 생기자 율곡이 조제보합론을 제창하며 특정 당파에 편중하기 보다는 당론 조정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는 점을 상기하면 율곡이 이준경의 유차를 비판한 본의를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준경과 기대승 간의 갈등을 묘사한 율곡의 글처럼, 이준경과 율곡 간의 갈등도 안정을 추구하는 대신과 혁신을 도모하는 사림 사이의 갈등이 그 내면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견해 차이는 선배·후배 사림의 시국관과 출처관의 차이가 그 이면에 깔려있다.

이준경은 율곡이 지나치게 따지고 남을 신랄하게 비평하는 것을 싫어했다면, 율곡은 당시의 정국이 무너지기 직전의 초가집 같으니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율곡은 왕이 개혁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나와서 돕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 후진이나 양성하겠다는 태도라면, 이준경은 정치적 상황이 어떻건 간에 왕을 도와 경세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선배 사림으로서 이준경은 김개, 홍담 등과 같은 훈구파의 입장을 존중하였다면 후배 사림으로서 율곡은 개혁적 사림 정치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2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2

 

<연려실기술> “첫 정사의 출척(黜陟)” 항에는 김개 외에도 훈구파의 거두인 홍담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겨두었다.

담(洪曇, 1509–1576)의 이력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조하면 정리하면,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저작(著作)·설서(說書)·정언을 역임했다.

명종 1년인 1546년(명종 1) 예조와 이조의 정랑, 1547년 장령·장악원첨정·응교를 역임하였다. 1548년 사간, 사복시와 사재감의 정(正), 집의가 되고 이듬해 예빈시부정·전한(典翰)을 거쳐, 1550년 직제학·동부승지, 1553년 호남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우윤, 형조참판을 지냈다.

1555년 한성부좌윤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부제학·도승지·대사간·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60년 영남관찰사·홍주목사, 형조와 공조의 참판, 1565년 함경도관찰사·지중추부사 겸도총관을 역임했다. 선조 1년인 1568년(선조 1) 병조판서, 동지경연성균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와 예조의 판서, 1574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좌참찬·영중추부사를 거쳐, 1576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한 뒤 지중추부사·우참찬에 이르렀다.

홍담은 명종 재위 기간(1545-1567)을 거쳐 선조 초년까지 지속적으로 국정에 참여하면서 중책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응교로 있을 때 진복창(陳復昌)이 윤원형(尹元衡)의 권세에 빌붙어 사사로이 중상모략을 하자 이를 막았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던 인물이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

홍담은 조정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대범한 것으로 이름나 있었다.”

“홍담은 깨끗하고 검소한 지조가 있고, 또 가정에서는 행검이 있었다. 계모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하고 상중에 예를 극진히 지켰다.”

라고 말하면서도 홍담에 대한 율곡의 평가는 높지 않다. <석담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윤달에 이조 판서 홍담이 파면되었다. 홍담은 조정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대범한 것으로 이름나 있었으나, 다만 학문하는 선비를 미워하여 사람에게 말하기를,

“참 유학자가 어찌 지금 세상에 나겠는가. 지금 학문한다고 자칭하는 자는 다 허위이다. 만일 참 유학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공경하고 사모할 것이지 어찌 감히 트집 잡겠는가.”

하였었다. 이조 판서가 되자 더욱 좌상 정철(鄭澈)과 틈이 생겼고, 사류를 꺼려서 어떻게 쫓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구신(舊臣) 우상 홍섬(洪暹) 담(曇)의 종형, 판서 송순(宋純)ㆍ김개(金鎧)가 모두 홍담과 합심하여, 먼저 송순을 대사헌으로 만들어 사류들을 공격하려 하다가, 마침 허물이 있어 갈렸으므로 김개를 썼는데, 김개가 쫓겨나자 홍담은 스스로 불안하여 병을 사칭하고 사면하였다.

홍담은 깨끗하고 검소한 지조가 있고, 또 가정에서는 행검이 있었다. 계모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하고 상중에 예를 극진히 지켰다. 다만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의논하는 것이 비열하고 속된 까닭으로, 선비의 여론이 허여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므로 울분과 불평으로 지내었다. 박순(朴淳)이 이이(李珥)에게 말하기를,

“홍태허(洪泰虛)가 분한 마음을 품은 지 오래니, 이조 판서를 시켜서 위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자가 국량이 얕아서 만일 좋은 벼슬을 얻으면 반드시 기뻐하여 감정을 풀 것입니다.”

하니, 이이가,

“며칠 동안은 반드시 기뻐할 것이지만 며칠 지나면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다가 사류들이 듣지 아니하고 서로 버틴다면 오히려 노할 것이니, 어찌 며칠 동안의 기뻐함으로 그 평생의 노여움을 풀 수 있겠습니까. 또 자고로 사람의 노여워함을 두려워해서 큰 권력을 주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홍담이 죽었다.

율곡은 홍담이 청령하고 대범하고 깨끗하고 검소한 지조를 지녔고 계모에게 효를 다하고 가정을 법도에 맞게 다스렸다고 평가한다. 율곡의 기록에 근거하면 홍담은 수신과 제가 방면에서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사림파와 대비되는 훈구파라고 한다면, 현실 정치에서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권력 지향적이고, 부도덕하고 행검이 엄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이해된다.

성리학(도학)의 목표가 성인지학이라고 할 때 홍담이 보여준 행실은 상당히 훌륭한 도학군자의 풍모로 읽힐 수 있는데, 율곡이 홍담을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율곡은 홍담이 학문하는 선비, 곧 도학을 공부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의논하는 것이 비열하고 속된 바가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비판적 평가는 비단 홍담만이 아니라 김개에 대한 기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훈구파의 거두인 홍담이나 김개는 왜 학문하는 선비, 도학하는 선비를 싫어한 것일까? 이는 당시 새롭게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들에 대한 정치적 입장 차이와 반감이 작동했을 것이다. 홍담이

“참 유학자가 어찌 지금 세상에 나겠는가. 지금 학문한다고 자칭하는 자는 다 허위이다. 만일 참 유학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공경하고 사모할 것이지 어찌 감히 트집 잡겠는가.”

라는 대목에서 홍담의 진의를 읽을 수 있다.

이는 이준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된 세 명의 대신이 이황, 이이 그리고 이준경이다. 더욱이 이준경은 명종의 고명지신으로 명종의 유명을 받들어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통치 기반을 닦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신이다.

선조 초년의 원로대신이었던 이준경과 이이가 서로 알력관계였다고 하는 사실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선조 즉위 후에 을사년의 원통함을 풀고 을사년의 위훈(僞勳)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신중론을 편 이준경에 대해 이이가 직접적으로 반대함으로 하여, 이준경이 백인걸에게

“자네의 이이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

라고 비판하면서 양현 간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준경이 퇴계를 두고 평한 내용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데, 이는 김개와 홍담이 도학자를 비판하는 대목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준경은 진실로 어진 정승이어서 그 공적이 국가에 있으므로 이이도 전부터 일컬어 왔었다. 그러나 그 높고 교만한 성질은 도학(道學)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심지어 이황(李滉)을 가리켜 산금야수(山禽野獸)라고까지 하였으니, 퇴계의 나오기 어려워하고 물러나기 잘하는 것이 산새나 들짐승처럼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준경의 퇴계 비판을 곱씹어 보자면, 여기에는 국정을 이끌어온 노 정치가의 경륜에 비추어 봤을 때 명분과 의리에만 매달리는 것은 경솔하거나 무책임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것의 연속선상에서 도학하는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1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1

 

조 때부터 동인과 서인 붕당이 결성되면서 이른바 붕당정치를 하게 되는데, 서인이든 동인이든 이른바 사림파라는 점에서는 모두 한 집안이고 그 반대편에 훈구파가 자리한다. 따라서 선조 때에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선조 때부터 사림파가 조선 역사의 전면에 들어서면서 훈구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말과 동일하다.

고려 말의 적폐를 일소하기 위해 나섰던 신진사대부들의 이념적 무기는 성리학이었다. 이들은 조선 왕조의 건립을 기점으로 고려의 유신으로 의리와 절개를 지킨 사류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참한 사류들로 나뉘는데, 전자를 통칭하여 사림파라고 하고 후자를 관학파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관학파를 훈구파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조 때 이후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집단을 통칭한 말이다.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권좌에 올랐으니, 곧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바로 이 정난에 공을 세운 공신들이 정난공신으로 이후 훈구파의 뿌리가 된다. 왕좌에 오른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왕조를 반석에 세우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군왕으로서 세조의 치적은 무시할 수 없는 바가 있지만 문제는 유교를 이념으로 한 조선왕조에서 삼촌이 조카를 살해하고 왕좌에 올랐다는 점이다. 이러한 패역을 방조 협력한 사류들은 당연히 성리학의 도덕적 잣대로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사림파와 비교하면, 정난공신에서 훈구파의 뿌리가 시작되었으니 훈구파가 현실 정치에서 능력을 발휘할지는 모르지만 도덕적인 흠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연려실기술> “첫 정사의 출척(黜陟)” 항에

“6월에 대사헌 김개(金鎧)의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았다.”

는 기록으로 시작하는 율곡의 <석담일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김개(金鎧, 1504-1569)는 선조 초년의 훈구파의 거두로, 1501년에 태어난 퇴계보다는 3년 뒤에 태어나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1525년(중종 20)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된 뒤 1544년 정언(正言), 1546년(명종 1) 수찬(修撰), 1548년 검상(檢詳)·장령(掌令), 이듬해 집의(執義)·응교(應敎), 1550년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차례로 역임하여 이듬해 구황 겸 선위사(救荒兼宣慰使)로 청홍도(淸洪道)에 파견되었다. 1552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554년 형조참의가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7년 청홍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어서 대사헌과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563년 형조판서, 15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었다.

김개는 관직에 있으면서 매우 청렴하여 1552년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하기에 율곡도 김개는

“구신으로서 조금 청렴하고 대범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김개에 대한 율곡이 평가는 높지 않다. <석담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6월에 대사헌 김개(金鎧)의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았다. 김개는 구신으로서 조금 청렴하고 대범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위인이 강퍅하고 자신만만하였으며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시속과 다른 사람을 보면 반드시 대단히 미워하였다. 이황(李滉)이 물러간 뒤에 김개가 마음으로 불평하여 사람에게 말하기를,

“경호(景浩 이황의 자)의 이번 길은 소득이 적지 아니하군. 잠시 서울에 왔다가 손에 일품첩지[一品告身]를 쥐고 돌아가 고향에서 큰 영광이 될 것이니, 어찌 만족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이전에 훈구파의 또 다른 거두인 홍담(洪曇)이 이조판서가 되어 김개를 추천하여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맡았다. 율곡이 보기에 김개는 청렴하고 대범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여 상대방을 용납하는 기상이 부족한데 그 용납하지 않는 것 중에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시속과 다른 사람을 보면 반드시 대단히 미워하였다”

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본다면, 김개가 도학적 학풍을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를 평가 절하한 데에도 이와 같은 인식이 작동했을 것이다.

김개가

“요새 선비의 무리들이 함부로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하니, 꺾어 억제하지 않을 수 없다.”

고도 한 말은 당시 새롭게 등장하는 사림파 정치 세력을 겨냥한 것이다. 율곡은 이 말을 기록한 후에 김개가 “기대승, 심의겸, 이후백” 등을 두고 한 말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개의 이와 같은 비판을 통해 당시 사림파는 훈구파에 맞서 어떤 개혁의 의지를 담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훈구파의 거두로서 김개가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파 정치 세력을 비판하면서, 어느 날 경연에서 선조에게

“선비 된 자는 마땅히 제 몸이나 닦고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지금 소위 선비라는 것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망령되게 시비나 말하고, 대신이나 헐뜯으니, 이런 기풍은 양성시켜서는 안 됩니다. 기묘년에도 조정에 경박한 무리가 많아서 저들과 같은 자는 끌어들이고, 저들과 다른 자는 배척하였으므로 조광조가 죄를 얻었으니, 모두 그 경박한 자들이 화를 양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러한 버릇을 억제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다. 이 기록 끝에 “사림들이 의심하게 되었다”라는 율곡의 첨언은 김개가 선조에게 아뢴 말이 조광조를 비방한 내용으로 의심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이에 대해 지평 정철(鄭澈)은

“김개가 전하를 현혹시켜 사림에 화를 끼치려 하니, 전하께서는 살피시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김개의 과실을 들추어 그 병통을 통절히 지적하니 김개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절하고 먼저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이후 삼사(三司)가 다투어 탄핵하는 소를 올려서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기를 청하여, 결국 김개가 탄핵을 당하고 서울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시흥에서 낙향해 있으면서 대간이 탄핵한 글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이 아뢴 말을 보니 나를 소인이라고 하였구나.”

하고, 근심과 울분으로 병이 나서 두어 달 만에 죽었다고 <석담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근심이란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외지로 쫓겨난 것에서 연유한 것이라면 울분이란 자신을 소인이라고 한 데에 대한 울분일 것이다. 당시 새롭게 선조 조정에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사림파 정치 세력을 봤을 때 그들이야말로 소인인데 어찌하여 자신이 소인이라는 평을 받았는가에 대해 울분이다. 이는 김개가 경연에서 선조에게 아뢸 적에 “지금 소위 선비라는 것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망령되게 시비나 말하고, 대신이나 헐뜯으니, 이런 기풍은 양성시켜서는 안 됩니다.”라는 그 말에 도학을 논하는 선비들을 소인으로 취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유교정치사에서 사색당파의 시초가 되는 동서 분당이 선조 연간에 만들어지고, 이후 조선 유교정치를 사림파가 좌지우지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선조 초년 사림파 정치세력과 훈구파 세력 간의 알력 또는 사림파 정치세력의 개혁적 요소 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김개가 당시 세력을 확장해 가던 사림파 정치세력을 평가하는 입장과 율곡이 김개를 평가하는 대목들을 교차적으로 검토한다면 선조 초년의 정치 현장을 한층 입체적으로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종 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처음으로 강의하기 시작한 사연


 

명종 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처음으로 강의하기 시작한 사연

 

조가 명종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해가 1568년이다. 선조는 조선왕조에서 방계로 왕위를 계승한 최초의 군왕이다. 선조가 명종을 이어 후사로 책정되어 가는 과정은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참조하면 을축년(1565) 무렵으로 보인다.

을축년(1565) 9월에 명종이 편찮으시었다. 그 당시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이미 죽었으나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아, 인심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므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등이 미리 국본을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니, <동각잡기>에 이르기를,

“이준경이 약방 제조 심통원(沈通源)과 의논하여 약방에서 중전께 아뢰어 미리 계사(繼嗣)를 정하여 인심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였다.”

하였다.

명종의 환후가 위독하자, 중전이 봉함편지 한 통을 대신 처소에 내리시고 대신에게만 보게 하셨는데, 그중에 하성군(河城君)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석담일기>에, ‘하성군’은 선조의 봉군한 군호(君號)라 하였다.

을축년(1565)에 명종의 환후가 위독하게 되자, 후사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졸하게 되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이준경 심통원 등이 중전에게 계사를 정할 것을 간청했으며, 인순왕후가 명종의 뜻을 헤아려 훗날 선조가 되는 하성군을 계사로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종이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후사를 논의하는 것은 조정의 대신이나 남은 왕족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문제는 군왕의 역린을 건드리는 문제다.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후사(세자)를 책봉하는 문제로 추방되거나 비명에 간 신하들이 무수하다. 가까운 예로 선조 연간에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담당하게 된 데에는 선조의 적극적인 후원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기축옥사 후에 선조가 태도를 일변하여 정철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게 되는 계기가 바로 후사를 세우는 건저문제였다.

<연려실기술>에서는 명종의 환후가 조금 나아진 후에 명종의 계사를 신하들이 논의했음을 실토하고 혜량을 간구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진덕수(陳德秀)의 <대학연의>가 등장한다.

그때는 온 나라가 모두 경황이 없었는데, 당시의 판서 민기(閔箕)가 수상 이준경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왕의 환후가 오래가는데 대감은 나라를 맡고 있으면서 어찌 사직(社稷)을 근심하는 마음이 없으십니까.”

하니, 이준경이 크게 깨닫고, 계사를 정할 것을 들어가서 청하였으나, 임금의 말은 벌써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순회세자가 돌아간 후에 왕이 덕흥군의 셋째 아들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참 임금 될 사람이 이미 났으니, 내 자식은 의당 죽을 것이다.’고 말씀하였다.”

하니 이준경이,

“천의(天意)가 거기에 계십니다.”

하고, 마침내 장수에게 명하여 선조의 집을 호의하게 하였으나 명종은 모르셨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어 경연을 열자 민기가 자청하여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였고, 이준경은 임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성상께서 편찮으실 때, 온 나라가 모두 국본으로 두려워하며 근심하므로, 신은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종사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의 안색이 좋지 않아지시며,

“내 병이 어찌 죽게까지 되었다고 대신이 미리 그린 짓을 하였단 말이오.”

하니, 민기가 소매 속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꺼내 들고 ‘국본 정한다’는 장(章)을 보이며,

“대신이 나라 일을 위하여 어찌 몸을 돌보겠나이까.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어지럽고 망하는 것은 항상 계사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였다. 명종이 그 글을 자세히 보더니 비로소 낯빛이 화평해지며,

“수상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하려 하였으니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할 만하오.”

하고, 이내 명하여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강의하게 하고, 민기에게 표범 가죽 웃옷을 하사하였으니, <대학연의>를 강의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선조가 등극한 뒤에 민기가 제일 먼저 정승이 되었다.

민기가 명종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건저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한 내용이 생생하게 잘 드러난 기록이다. 특히 민기가 소매에서 <대학연의>를 꺼내들고 ‘국본 정한다는’는 장의 내용을 설파한 방법이 주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명종이 <대학연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조선왕조의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원래 유학은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는 학문일 뿐만 아니라 타인과 사회 전체의 공동체 이상을 실현하는 학문이다. 유학에서는 이러한 학문적 이념을 ‘內聖外王’, ‘修己治人’, ‘成己成物’로 표현한다. 주자학도 예외가 아니다. 주자의 이러한 학문적 특징은 여조겸과 함께 편찬한 ⌈근사록⌋의 목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근사록⌋통행 본 목차는 후대에 수정되기는 했지만, 원래 목차는 수기와 치인을 내용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유학에서 수기와 치인의 상관성을 체계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는 경전이 무엇인가 바로 <대학>이다. <예기>의 한 편이었던 <대학>이 송대에 이르러 유학자들로부터 본격적인 주목을 받는다. 왕안석은 ⌈광대학(廣大學⌋을 편찬하였고, 이정(二程)도 대학을 중시했다. 이정이 대학을 강조한 이유는 당연히 <대학>이 유학의 체계적인 수행방법뿐만 아니라 도덕과 경세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에서 도덕과 경세의 문제는 내성외왕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주자는 선현들의 업적을 이어 받아 명실상부한 제왕학의 교재로서 <대학장구>를 완성하였다.

주자학은 남송시대에 한때 위학으로 간주되어져 정치권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주자학이관학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배경에는 진덕수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그가 남송 이종(理宗)에게 <대학>을 강연하면서 지은 책이 바로 <대학연의(大學衍義)>다. <대학연의>라는 말은 <대학>의 뜻을 넓혀 나간다는 의미이다.

진덕수는 매 조목마다 고대경전 및 사적에서 그 근거를 확보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명말 유학자인 정신(丁辛)이

“니산(尼山)은 <대학>으로 육경을 연(衍)하였다면, 선생은 오히려 육경으로 <대학>을 연(衍)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는 경연에서 <대학연의>와 더불어 명나라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하였다. 훗날 정조가 진덕수의 <대학연의>와 구준의 <대학연의보>에서 가장 절실한 글을 선별하여 <대학유의(大學類義)>를 만들게 된다. 정조는 이 책의 제(題)에서

“임금이 이 글을 읽으면 태평의 교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요, 신하가 이 글을 읽으면 참찬(參贊)의 공(功)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이름을 <대학유의>라 명명하였다.”

라고 하면서 위정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강조하였다.

선조의 재덕 2


 

선조의 재덕 2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선조의 덕행” 항을 마무리 하면서 선조에 대한 종합적인 평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금은 문(文)으로는 족히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고, 무(武)로는 족히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있고, 밝기는 충(忠)과 사(邪)를 변별할 만하고, 지혜로워서 사무를 처리할 만하니, 참으로 이른바 세상에 드문 성인이요, 크게 일할 수 있는 임금이었다. 그 중간에 비색한 운을 만나 잠깐 파천하는 고생을 겪었던 것은 태평 끝에 난이 오는 운수의 관계이다. 마침내는 난리를 평정하고 몸소 나라를 중흥시켜 나라의 운수를 무궁하도록 연장시켰으니, 천하의 신무(神武)가 아니면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할 수 있으랴. 모두 위와 같다.

이긍익의 이 말들은 선조의 시호인

“선조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중에서 선조의 ‘현성의무성예(顯文毅武聖睿)’한 재덕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간에 비색한 운을 만나 잠깐 파천하는 고생을 겪었던 것은 태평 끝에 난이 오는 운수의 관계”

라고 하는데, 비색한 운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임에 틀림없다. 이긍익은 ‘비색한 운’의 소치라고 하고,

“마침내는 난리를 평정하고 몸소 나라를 중흥시켜 나라의 운수를 무궁하도록 연장시켰다”

고 평가를 내리는데, 이는 선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는 사뭇 다르다.
오늘날 선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임진왜란(1592-1598)이고, 그 뒤에 따라오는 평가는 무능함이라는 세 글자이다. 더욱이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결행했을 때 선조는 백성을 버린 왕이라는 가시면류관을 쓰게 된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은 위기를 잘 넘긴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엄정한 역사의 잣대로 평가했을 때 결코 성공한 왕은 아니다.

그렇지만 선조 때는 훈구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라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면서, 학문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시기로 조선 유학사의 중대한 고리이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영걸들이 활약한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중국의 왕조로 따지면 송나라가 문약하여 이방 민족의 칼날을 하루라도 힘겨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성리학과 문치의 훌륭한 전통을 남겨둔 것에 비견할 만하다.

사림 정치의 문이 활짝 열린 데에는 운수의 관계이기도 하겠지만 선조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임진왜란이 이긍익의 말처럼 운수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선조의 과(過)를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학문에 열성인 선조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무진(戊辰) 원년(元年)이라 임금이 자주 경연에 나와 변론하고 묻는 것이 매우 자세하니, 학문이 넓지 못한 강관은 입시하기를 매우 꺼렸다.”

무진년이면 1568년으로 선조의 나이 16세였을 때이다.

 

<연려실기술>은 선조의 유학 현창을 자세하게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려(高麗)에서 정몽주(鄭夢周)가 처음으로 끊어졌던 유학을 일으켰고, 본조(本祖)에 이르러서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 등이 계속해 나와서 경전의 뜻을 드러내 밝히고 의리를 강구해 밝혔으니, 임금이 그들은 도학에 큰 공이 있다 하여,특명으로 제사를 내리시고, 묘 지키는 사람을 두게 하고, 증직과 시호를 주며 그 자손을 추슬러 쓰게 하시고, 유학자인 신하 유희춘(柳希春) 등에게 명하여 그들의 말과 행실을 편집하여 이름을 <유선록(儒先錄)>이라 하고, 인하여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소학(小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서적을 인쇄하여 발행하기를 명하고, 예조에 신칙하여 <소학>을 배우기를 권장하게 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학문에 대한 정성과 조예가 지극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림정치가 선조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선조 때에 유신들이 대거 조정에서 활약을 하는 데에는 선조의 인재관이 일정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긍익은 선조의 인재 등용에 관한 일화를 한 토막을 <연려실기술>에 적어 두었다.

임금은 인재를 애용하여 모두 제각기 그 직무에 합당하게 썼으며, 더욱 유학하는 선비를 중하게 여기어 혹 헐뜯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곡진하게 보호하였다. 언젠가는 대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인재가 적은데 그 취해 쓰는 방법도 오로지 과거에 있을 뿐이니, 그중에는 과거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여, 산림에서 그대로 늙는 자가 없지도 아니할 것이다.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경들의 직무이니 마땅히 기특한 재주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 자를 힘써 구하여 나로 하여금 그들을 쓰게 하라. 예전에 안영(晏嬰)은 그 종을 천거하였고, 사안(謝安)은 그 조카를 추천하였으니, 진실로 쓸 사람이라면 친척이라고 겸연쩍게 여기지 말고 미천하다고 버리지 말라.”

하였다.

선조의 조정에 과연 기특한 재주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 자라면 천거하라는 그 명에 따라 등용된 인재가 얼마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조 때에 명현들이 즐비한 것은 역사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현량한 인재를 찾아 어진 신하에게 정사를 맡기라는 것이 유학의 기본적인 정치론이기는 하지만, 이를 군주가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그러하기에 이긍익은 선조의 이 말을 특별히 기록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다양한 인재를 발탁하겠다는 선조의 의지는 성리학만을 독존하지 않고 이교(불교)를 용납하는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계유년에 성균관의 유생이 상소하여, 정업원(淨業院, 성중에 있는 승방)을 철폐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손수 써서 대답하기를,

“수선(首善 성균관을 말하는데 착한 것을 주창(主倡)하는 곳이라는 것임)의 처지에 있으며, 강론하는 것은 도의요, 기대하는 것은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이니 마땅히 마음을 단련하고 성질을 참아서 갈고 닦아, 경(敬)과 의(義)를 행하여 안과 밖의 수양을 쌓아서 훗날에 참 선비가 되어, 위로는 임금인 나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혜택을 끼쳐서, 정치가 잘 되고 풍속이 아름답게 되면 유학이 쇠하고, 이단(異端 불교(佛敎))이 성행하는 것은 염려조차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굳이 위(魏)의 태무제(太武帝)와 같이 중을 죽이고 절을 헐어야 할 것이 있으랴.”

하였다.

현대 양명학 연구가들이 양명학의 시작을 남언경(南彦經)과 그에게서 양명학을 배웠다는 이요(李瑤)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왕족인 이요와 선조가 양명학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내린 대화가 기록으로 전해온다. 이 또한 선조의 학문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