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본 기대승


 

율곡이 본 기대승

 

선 성리학 3대 논쟁의 서막을 장식하는 논쟁이 바로 사단칠정논쟁이다. 그 사단칠정논쟁의 주역이 퇴계와 고봉 기대승(1527-1572)이다. 1501년생인 퇴계보다는 26세가 어리고, 1570년에 죽은 퇴계보다는 2년 늦게 죽었다. 퇴계가 70세를 살았고 고봉은 46에 죽었다. 한편 1536년생인 율곡보다는 9세가 연장이고, 1584년에 죽은 율곡보다는 12년 전에 죽었다. 율곡은 49에 죽었다.

<연려실기술>에 전재 한 <조야첨재>의 기록에 의하면, 고봉은 사후 유림의 종장으로 추앙받았다.

간원에서 아뢰기를,

“기대승이 젊었을 때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이 있어서 본 바가 뛰어났고, 이황과 왕복하는 편지로 성리의 학설을 강론하여 예전사람이 발명하지 못하였던 것을 발명하였으며, 경연에서 진술한 바가 요순삼대(堯舜三代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 때를 말한다.)의 도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추앙하여서 유림의 종주라 하더니, 불행히 병이 들어 중도에서 죽었는데, 집안이 대대로 청렴하고 가난하여 장사 지낼 수가 없사오니, 청컨대 관가에서 초상과 장사를 돌봐주어, 국가가 유학자를 높이 여기고 도학을 중요시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대승 조에 실린 그의 학문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고,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

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하여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는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이다.

역시 기대승 하면 퇴계와 나눈 그의 사칠논변임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율곡 또한 <석담일기>에서

“그가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같고 다른 것을 논쟁한 수천 마디는 논의가 활발하고 시원스러웠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대승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임신년(1572)에 대사간 기대승이 사면하고 남으로 돌아갔다. 기대승은 기개가 호방하고 뛰어나며 언론이 능히 온 좌중을 굴복시키므로 맑은 명성이 높았으나, 이량(李樑)이 그를 꺼려해서 벼슬해서 떨어졌다. 한림(翰林)으로 쫓겨났다. 이량이 패한 뒤에 사류가 그를 추대하여 영수가 되니, 기대승이 역시 경륜하는 것으로 당시에 자부하였으나, 그 학식이 다만 널리 변론하고 크게 늘어놓는 것을 힘쓸 뿐이요, 실상은 굳게 잡고 실천하는 공부가 없었고, 또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개결한 선비들은 합하지 아니하고 아첨하는 자가 많이 따랐다. 언론 또한 평범함을 따르는 것을 힘쓰고 혁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에 조식(曺植)이 기대승을 보고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득세한다면 반드시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다.”

하였고, 기대승도 역시 조식을 유자(儒者)가 아니라고 하여 둘이 서로 허여(許與)하지 않았다. 대사성이 되어서는 성균관 유생의 식사를 박하게 하였고 또, ‘먹는 데 배부른 것을 구하지 말라[食無求飽]’는 말로 출제하여 시험 보이니, 많은 유생들이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위훈(僞勳 위사공신(衛社功臣))을 삭탈하기를 한창 논할 때에 기대승이 홀로 말하기를,

“을사년의 훈공은 허위가 아니오. 또 선왕 때에 정한 일을 이제 삭탈할 수 없소.”

하자, 간당(奸黨)들이 기대승을 주장으로 삼으니, 식자가 매우 옳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율곡은 고봉이 기개가 호방하고 뛰어나며 언론이 능히 온 좌중을 굴복시키므로 맑은 명성이 높았지만, 그 학식이 이론적인 변론에만 능할 뿐 실상 현실에서 실천하는 공부가 없었고, 호승지심(好勝之心)이 강하여 남의 의견을 듣기 보다는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는 것을 기뻐하여 소신을 가진 선비들보다는 아첨하는 자들이 주변에 많았다고 평가한다.

또한 율곡은 고봉이

“평범함을 따르는 것을 힘쓰고 혁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라고 평하면서 을사년 위사공신 위훈 삭탈을 논할 적에 고봉이 을사년의 훈공은 허위가 아니고, 또 선왕 때에 정한 일을 이제 삭탈할 수 없다고 주장한 내용을 기록하여 혁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실례를 들어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고봉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음도 알 수 있다. 고봉은 귀로를 재촉하던 중에 고부에서 객사한다.

율곡은 선조가 고봉의 부음을 접하고,

“기대승의 부고를 받아 보고 놀라며 슬퍼하였고, 사람들은 그 재주를 아까워하였으니, 기대승이 비록 실용되는 재주는 아니었지만 영특한 기상이 출중하였다. 그가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같고 다른 것을 논쟁한 수천 마디는 논의가 활발하고 시원스러웠다.”

라고 율곡은 적고 있다.

고봉의 영특한 기상은 사단칠정에서 드러난 학술적 논변에서 드러난 그대로지만, 그의 전체적인 학문은 현실을 바꾸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실용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고봉에 대한 율곡의 종합평이라고 할 수 있다.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택당 이식이 지은 고봉의 시장(諡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때에 많은 인재들이 바야흐로 진출하여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하기를 급하게 여기어 정사(政事)를 이룩하여 밝힌 것이 많아 논의가 시끄러웠는데, 공은 ‘뜻을 세워 현명한 사람을 구하여 위임해 책임을 완성토록 하는 것으로 큰 강령과 우선할 업무로 삼을 것’을 청하였으니, 대체로 뜻이 근본을 바로잡고 교화(敎化)를 먼저 한 뒤에 법으로 제제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자못 부패한 제도를 고쳐서 새롭게 하는 논의와는 서로 어긋나서 대신들이 더욱 불평하였다.

택당은 그 대신들이 누구인지 특칭하지는 않았지만, 율곡이 고봉을 두고

“평범함을 따르는 것을 힘쓰고 혁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라는 비판적 평가에 대한 변호의 내용이 될 것이다.

또한 퇴계가 고봉을 허여한 아래의 글은 율곡이

“그 학식이 다만 널리 변론하고 크게 늘어놓는 것을 힘쓸 뿐이요, 실상은 굳게 잡고 실천하는 공부가 없었다.”

라는 비판적 평가에 대해서도 재고할 여지를 주는 글이다. 이 또한 택당의 변호라고 할 수 있다.

퇴계가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선조께서 조정의 신하 가운데 누가 학문을 하느냐고 하문하였다. 당시 많은 현인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퇴계가 감히 알지 못한다고 사양하고 오직 말하기를,

“기 아무개[奇某]가 문자(文字)를 널리 열람하였고 그 이학(理學)에도 역시 뛰어난 조예가 있으니, 박학하고 실천력이 있는 학자라고 말할 만합니다. 다만 자신을 단속하는 공부가 극진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퇴계에게 묻기를,

“기 고봉(奇高峯)은 실행한 것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합니다.”

하니, 퇴계가 말하기를,

“고봉은 임금 섬기기를 의리로 하였고 진출하고 은퇴하기를 예(禮)로서 하였는데, 무엇을 실행한 것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