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하루


 

1775년 4월 19일, 평범한 하루

 

1775년 4월 19일은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일성록⌋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〇 내(왕세손 정조)가 임금(영조) 옆에서 탕약 시중을 들었다.
〇 임금께서 연화문에 나아가 향축(香祝, 향과 축문)을 맞이하고 전송하셨는데, 내가 따라가 참석하였다.
〇 대신과 비변사 당상(堂上, 정삼품正三品 이상의 고위 관료)이 들어와 임금을 뵈었는데, 내가 옆에서 모셨다.
〇 약방 관리가 임금을 진찰하는데 내가 옆에서 모셨다.
〇 임금께서 홍문관에 나아가셨는데, 내가 시강(侍講, 임금께 강의)을 하였다.
〇 과거 시험관이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의 제술인(製述人, 문장 시험을 본 관리들)을 거느리고 임금을 뵈었는데, 내가 옆에서 모셨다.
〇 저녁 진료할 때 내가 옆에서 임금을 모셨다.
〇 과거 합격자 등수를 매기려고 신하들이 들어와 임금을 뵙는데, 내가 옆에서 모셨다.

임금의 몸이 편찬하여 약방 관리가 수시로 임금을 진찰하였다는 이야기, 탕약을 올린 이야기, 홍문관에서 강연한 이야기, 그리고 과거 시험에 관한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다. 이중에서 홍문관에서 강연한 이야기는 상세한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다. 다른 기록에는 제목만 있을 뿐이다.
이날 기록을 보면 외국인의 침범이나 전란이 있었다든가 내란이 발생하였다든가 혹은 천재지변과 같은 큰 사건의 기록은 없다. 평상시의 과거시험 혹은 비변사 업무 관련 기록이나 임금의 건강 문제만 적혀 있다.

영조실록⌋ 124권, 영조 51년 4월 18일(병신)의 기록도 마찬가지다.(⌈영조실록⌋의 날자와 ⌈일성록⌋의 날자가 서로 다른데, 착오로 보인다.)

〇 향을 맞이하는 예를 행하다.
〇 대신과 비국(備局비변사, 군사업무 담당 관청)이 당상(堂上)을 접견하다.
〇 서북 지방의 무사에게 시사를 행하고, 소학과 대학을 강하다.
〇 남북 지방의 문관(文官)·음관(蔭官)을 대상으로 제술 시험을 행하다.

동일한 날짜의 기록이기 때문에 일성록과 유사하다. 다만 이 기록은 국가의 기록이기 때문에 일성록의 “내(정조)가 옆에서 모셨다”는 이야기는 없고, 이날의 중요한 사항만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소학과 대학에 관한 경연이 있었다는 기록은 일성록에 시강을 하였다는 항목과 동일한 것이다. 경연 외의 기록은 모두 간단하지만 경연 기록만은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일성록의 기록보다는 분량이 적다.

경연(經筵)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임금을 교육하는 일이다. 특히 유교의 경전이나 역사 서적을 바탕으로 강의를 하고 논의를 하는 일이다. 고려 문종시기에 처음 도입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기능이 더 강화되고 제도가 정비되었다. 세종 임금과 같은 경우는 학문을 좋아하고 경연을 여는 일을 좋아 하여 2천 여회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재위 기간이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이었기 때문에 연평균 62회에 이른다. 일주일에 한차례 이상 경연을 개최하였다. 경연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열리기도 한다.
이러한 경연은 정치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임금과 대신들이 모여서 책을 읽는 자리니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유교 경전 가운데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당시 정치 현안이 화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경연은 또 정치적 측면에서 경연정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종 임금 이후에 이러한 기능이 강화되었다.

고종 10년(1873년) 12월 24일『고종실록』을 보면 우의정 박규수(朴珪壽)가 다음과 같은 간언을 한다.

 

“우리 왕조는 나라를 세운 규모가 광명정대하며 모든 다스림과 정책이 모두 경연에서 나왔습니다. 하루에 세 번 신하와 만나서 경서와 사서를 토론한 것은 바로 의리를 강구하고 치란을 거울삼기 위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진강하는 여가에 연석에 나온 여러 신하들이 그 자리에서 일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대관(大官)은 나랏일을 건의하여 재가를 받았고, 유신(儒臣)들은 옳은 일을 권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게 했습니다. 따라서 조강의 규례를 보면 다스림과 정책이 경연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연의 자리에서 경서와 사서를 토론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관료가 나랏일을 건의하고 결재를 받으며, 유학자들을 그러한 사항에 대해서 시비판단을 하였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른 이래로 날마다 경연을 열어서 참으로 예모(禮貌)를 간소하게 하시고 친근하게 신하를 불러서 만나신 것은 도리어 법강(法講) 때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글의 음과 뜻을 강독하는 것은 10번 정도이고 위에서 문의하면 아래에서 진술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비록 대관이 연석에 나온 날이라도 반드시 급한 일을 아뢰어 재가를 받고 잡다한 일을 평의(評議)하는 것은 아니니, 경연의 강독은 따로 한 가지 일이 되고 다스림과 정책의 토론은 따로 한 가지 일이 될까 염려됩니다.”

 

경연을 하면서 임금의 질문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답만 할 뿐, 적극적인 평가나 건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또 대관들은 그 자리를 빌어서 급한 일에 대한 결재만을 받고 끝난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경연제도에 대해서 이렇게 건의하였다.

 

“만일 현재 긴급한 백성들의 근심거리와 원대한 경세제민의 계책에 대해서는 일의 기미에 따라서 그때그때 묻고 지루함을 꺼려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임금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올바른 말씀을 들려드리지 않겠습니까? 오직 우리 임금께서 반드시 이를 즐거워하여 피로해하지 않으신다면 일체의 치도(治道)가 경연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경연이 소극적인 경전 읽기에 그치지 않고 원대한 경세제민의 계책까지 논의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모든 정치의 방도가 이 경연에서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연은 이렇게 폭넓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전제조건은 유교 경전이었다. 그 경전에 기초해서 유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적인 장치가 바로 이 경연이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다’라고 말할 때, 그러한 유교적 통치가 가능하도록 한 핵심적인 제도 중 하나가 바로 이 경연제도였다.

1775년 4월 19일 하루는 평범했지만,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궁정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