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기독교


 

1775년 4월 19일, 유교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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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아담 샬의 모습
선교사 아담 샬의 모습
금 우리나라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교나 유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많다. 유교를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했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는데 천주교가 먼저 들어오고 나중에 개신교가 들어왔다.
천주교는 1700년도 말엽에 조선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1791년, 정조 15년에 조정은 천주교 신자 2명을 참수형에 처했다. 당시 북경 천주교의 지시를 따른 전라도 선비 윤지충 등이 천주교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신해박해(辛亥迫害)라고 하는데 이는 그 뒤에 일어나는 여러 차례 천주교 탄압사건의 시작이었다.

당시 국왕 정조는 사실 천주교 탄압에 소극적이었다. 천주교 같은 사교(邪敎)는 유교를 이길 수 없고, 결국에 소멸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유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학자 군주였다.
하지만 정조의 예상과 달리 천주교는 갈수록 세력이 커져갔다. 정조 뒤를 이은 왕들은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천주교는 왜 그렇게 탄압을 받았을까?

앞의 그림에 보이는 사람은 중국에서 활동한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중국이름 湯若望, 1591∼1666)이다. 그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이름 利瑪竇, 1552∼1610)의 요청으로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였다. 특히 그는 중국 선교에 활용하기 위해서 중국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양 천문학과 역법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앞의 그림에 나타나있는 지구의나 세계 지도, 그리고 방안 곳곳에 그려져 있는 도구들은 그가 그런 분야의 전문가임을 표현한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미 15세기 말엽에 이탈리아 천문학자 토스카넬리(Paolo dal Pozzo Toscanelli, 1397∼1482)가 주장하였으며, 독일사람 마르틴 베하임(Martin von Behaim, 1459∼1507)은 그런 주장을 바탕으로 위와 같은 지구의를 만들었다. 또 마젤란(1480∼1521)은 1521년에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까지 항해함으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하였다.

아담 샬은 1622년에 중국에 건너와 명나라 학자인 서광계(徐光啓 1562∼1633) 등과 함께 새로운 역법(崇正曆法)을 제작하기도 하고, 같이 서양식의 대포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로 바뀐 뒤에는 청나라 조정에서도 인정을 받아 천문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결국에 논리적으로 지구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동설(地動說)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지동설은 아직 서양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지동설 주장을 담은 서적을 피렌체에서 발간한 것은 1632년이었다. 아담 샬이 중국에 건너오고 나서 10년이 지난 때다.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이의 책 배포를 금지하고 그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하였다. 그 다음해, 1633년에 갈릴레오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로마 교황청은 지동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회 출신 아담 샬은 지구가 둥근 것은 인정하지만, 지동설은 아직 인정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지동설도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예를 들면 1766년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지은 의산문답(醫山問答)은 오늘날의 지동설과는 다소 다르나 지구가 스스로 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담 샬은 1644년에 조선에서 볼모로 잡혀 와 있는 소현세자(1612∼1645)와 만났다. 소현 세자는 나중에 조선의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아담 샬에게는 조선을 선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그해 9월부터 11월까지 2달여 동안 소현세자에게 자신의 과학지식과 함께 천주교에 대해서도 다양한 지식을 소개하였으나, 소현세자는 조선에 귀국한 뒤에 곧바로 사망하여 아담 샬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담 샬의 꿈은 엉뚱한 루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조선에서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사도 없는 조선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서학 책을 통해서 신앙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물론 일부 유학자들은 ‘서학’이 상당히 위험한 사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천문, 지리학과 천주교 사상이 동양의 유학사상과 너무 극단적으로 충돌한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조선의 왕권을 위협하는 사상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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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있다. 일월도(日月圖) 혹은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은 병풍으로 되어 있어, 항상 왕의 뒤편에 위치한다. 달과 해, 그리고 다섯 봉우리가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그 자체로는 완성품이 되지 못하고 그 앞에 왕이 앉거나 위치하여야 하나의 그림이 된다고 한다.

일월오봉도와 왕이 앉는 옥좌·
일월오봉도와 왕이 앉는 옥좌·

 

위 사진을 보면 일월오봉도 앞에 옥좌(혹은 용상龍床)가 있다. 비어 있는 이 옥좌에 임금이 앉으면 일월오봉도의 완성된 모습이 된다. 그렇다면 이 일월오봉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일월오봉도는 진안 마이산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다섯 봉우리 앞에 두 줄기의 폭포가 보이고 그 폭포가 흘러내리는 곳에 노란 색의 물결이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한반도에 많이 보이는 구릉들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물결을 묘사한 것이다. 그곳이 바다일 수도 있고, 하천이나 호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소나무가 양쪽에 그려져 있는 데 소나무가 서있는 곳에는 육지가 보인다. 흙무더기 위에 소나무가 두 그루씩 세워져 있다. 실지로 마이산을 가보면 위 그림과 비슷한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탑영제에서 바라본 마이산 풍경
탑영제에서 바라본 마이산 풍경

 

진안의 마이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호수가 있다. 탑영제라고 하는 곳인데, 마이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여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진의 건너편에 높이 솟아난 산들이 일월오봉도에 나타난 다섯 개의 봉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앞쪽의 봉우리는 비교적 펑퍼짐하지만 뒤쪽의 봉우리들은 일월오봉도에 나타난 산들처럼 뾰쪽하게 솟아 있다.
이곳 마이산은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유적지다. 이성계는 고려시대 말엽, 즉 1380년, 우왕 6년에 남원 부근의 운봉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마이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이전에 꿈을 꾸면서 하늘로부터 금으로 된 자(尺)를 받았는데 그 장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곳 마이산은 조선 건국의 영산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 이유로 그 마이산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일월오봉도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그림으로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이 그림은 마이산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니다. 상징화시킨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달과 해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계가 하늘로부터 왕의 권위를 계시 받은 꿈과 관련된다는 점, 그리고 이 그림 앞에 왕이 위치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점이다. 즉 왕의 권위가 드러난다고 한다. 이 그림은 심지어 왕이 죽고 나면 왕의 어진(御眞, 초상화) 뒤에도 놓인다. 그만큼 왕의 권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화가 오태환의 일월오봉도(2012년작)
화가 오태환의 일월오봉도(2012년작)

조선은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건국된 나라이다. 유교는 바로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다. 이 때 유교는 성리학, 즉 주자학이다. 주자가 집대성한 유학을 바탕으로 조선을 기획한 유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정도전은 주자가 바라는 국가를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를 통해서 실현해 내고자 하였다. 이 그림도 당연히 정도전의 유교 국가인 조선의 설계안에서 같이 구상되었을 것이다.

성리학은 우주와 천하만물을 논의하는 이기론(理氣論)과 인간의 마음과 도덕을 논의하는 심성론(心性論)으로 이루어진 사상이다. 이 사상의 체계화에 중요한 기여를 한 사상가가 북송사상가 주돈이(周敦頤, 1017∼1073)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태극(太極)이 움직여 양(陽)을 낳고 음(陰)을 낳는다. 그것이 서로 뿌리가 되어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멈추고, 멈춤이 극에 달하면 움직이면서 음양이 이루어진다. 음양은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다섯 가지 기를 낳아 오행(五行)이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다시 서로 다양하게 조합하여 운행함으로써 건도(乾道)는 남성적인 기를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적인 기를 이룬다. 이 두 기가 서로 감화하여 만물이 형성되고 인간이 생겨난다.
인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인 성인(聖人)은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 기준을 삼고, 고요함을 주로 하여 인극(人極), 즉 표준을 세웠다. 성인은 그 덕성이 천지와 합치되고 그 밝음은 일월(日月)과 합치하며 순서는 네 계절과 합치된다. 말하자면 음양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우주만물이 생성, 발전하고, 그러한 이치가 인간의 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이 주돈이 태극도설의 주요 내용이다. 일월오봉도는 이러한 사상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월오봉도와 이 주돈이의 사상을 결합하여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이 그림 앞의 옥좌나 용상에 앉으면 태극이 드러난다. 임금은 태극이다. 태극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理)이기도 하다. 태극이 움직여 하늘에 그려져 있는 해와 달, 즉 그것이 상징하는 양과 음을 낳는다. 그 음과 양이 서로 뿌리가 되어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멈추고, 멈춤이 극에 달하면 움직이면서 음양이 이루어진다. 음양은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다섯 가지 기를 낳아 오봉으로 상징된 오행(五行)이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다시 서로 다양하게 조합하여 운행함으로써 건도(乾道)는 남성적인 기를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적인 기를 이룬다.

그림에서 흘러내리는 두 줄기 폭포는 바로 그러한 남성의 기와 여성의 기를 상징한다. 이 두 기가 서로 감화하는 곳은 오봉 앞의 호수다. 이 호수에서 이 두 기가 서로 감화하여 만물이 형성되고 인간이 생겨난다. 두 기가 감화하는 모습은 호수 위의 작을 물결들이고 감화한 결과는 호수의 흙 위에 솟아난 소나무들이다. 화가 오태환의 그림을 보면, 꽃도 보이고 바위도 보인다. 오행은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내며 인간도 만들어낸다.

여기까지는 임금을 중심으로 한 이 세상, 즉 조선이라고 하는 국가의 구조, 즉 천지자연과 백성들을 포함한 우주론적인 구조를 설명하였다. 이 다음은 그러한 태극으로서의 임금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하는 문제를 규정한 것이다.

인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인 성인(聖人)은 바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은 이 그림에서 주인공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존재다. 왕의 권위를 갖춘 성인, 즉 임금은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 기준을 삼고, 고요함을 주로 하여 백성들이 행해야할 도덕적인 표준을 세운다. 즉 그러한 표준을 세우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또 세워야한다. 임금의 가장 큰 의무가 이것이다. 이 표준은 임금의 심리적인 내면의 마음에서도 그렇게 해야 하며, 정치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법을 만들거나 집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임금의 행위는 그 덕성이 천지와 합치되어야 하고 그 밝음은 일월(日月)과 합치하며 순서는 네 계절과 합치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음양의 움직임과 오행의 운행, 우주만물의 생성, 발전과 임금의 덕성 및 행위가 완전히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조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이며 인간의 행위가 원활하게 운행되고 이루어질 것이다.

1775년 4월 19일 눈의 띠는 궁중의 일상은 경연(經筵, 유교 경전 공부)이었다. 선조가 왕세손이었을 때 당시 임금인 영조를 모시고 유교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궁중의 중요한 일이었다. 이 날 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들은 수시로 그러한 경연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경연을 실시할 때도 임금은 항상 일월오봉도 앞에 앉았다. 일월오봉도는 왕에게 왕의 권위를 내려주는 그림이기도 하지만, 왕의 존재 이유를 상징한 그림이기도 하였다. 왕에게 항상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게 하는 그림이었으며, 경연의 목표를 이미지로 분명하게 드러낸 그림이었다.
그런데 서학, 즉 서양 과학과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면서 일월오봉도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동양에서 지구는 네모형태라고 생각했다. 그 사방에는 바다가 있고 더 나아가면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월오봉도가 전제로 된 이 세상은 그러한 세계이었다. 또 지구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고, 조선은 중국 옆에 붙어 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존재도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일월오봉도에는 중국이 없다. 조선이 비록 표면적으로는 중국이 천하 국가임을 인정하고 조공을 받치기도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은 중국과 대등한 주권국임을 일월오봉도는 상징하고 있었다. 조선 국왕은 중국 천자에 뒤지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 일월오봉도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의 국왕은 중국의 제후국으로 자처해야 했고 중국에 조공을 보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중국 천자의 권위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한 구조가 무너지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서양 천주교는 이 세상을 여호와가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음양의 조화와 오행의 운행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최고신이 어느날 갑자기 창조하였다고 한다. 일월오봉도에서 표현된 음양(해와 달)이며 오행(오봉)이 모두 서양 천주교의 신이 창조했다고 한다면 음양오행이 시작되는 태극은 여호와인가? 조선 국왕의 권위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또 조선 국왕이 경연을 통해서 유교 사상을 배우는 행위도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인가? 참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된다. 정조 15년에 유교식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천주교 신자 2명을 처형한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었다. 조선 왕의 권위를 위험하게 만드는 사상이 천주교였다.

천주교의 내용을 보아도 유교와 비교해보면 극히 위험스러운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천당과 지옥, 만민 평등의 사상, 그리고 그 사상을 전파하는 신부나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은 유교가 따라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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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천주교가 1775년에는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조선 조정을 위협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천주교를 신앙으로 삼기 시작했던 주요 인물 몇 사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은 1775년 당시 39세(만 나이, 이하 모두 같음)였다. 그는 1771년 경기도 양주에서 정약용, 이벽 등 남인(南人) 실학자들이 개최한 연구회에 참여하면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삼기 시작했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사형되었다.

이벽(李蘗, 1754∼1786)은 1775년에 21살이었다. 정조 1년, 1777년에 권철신, 정약전 등의 서학 토론회에 참석한 후 천주교에 관심이 커졌다. 그 후 적극적으로 천주교를 신앙으로 삼고 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아오자, 그 자신도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1785년, 정조 9년에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시작하자 천주교를 잠시 멀리 하였으나 그 다음해 병으로 죽었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1775년에 19살이었다. 정조 4년, 178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후 남인학자들과 함께 ‘서학’에 심취하여 그것을 실천의 학문으로 간주하여, 신앙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러다 27되던 1783년에 북경으로 가서 천주교 영세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 천주교 영세를 받은 것은 지금까지 기록 중, 조선 사람 중에서는 최초였다. 귀국 후 1년 뒤인 1785년부터 그는 지금의 명동에 천주교회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신앙활동과 선교활동을 하였다. 1795년에 주문모 신부 입국 사건에 연루되어 충남 예산군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1775년 당시 17세였다. 그는 성리학자이자 생물학자로 정약종, 정약용의 형이다. 정조 14년, 17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798년에는 ⌈영남 인물고⌋를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천주교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서 벼슬을 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흑산도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흑산도 물고기를 관찰하여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지었다. 유배지에서 16년간 활동하다 사망하였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1775년에 태어났다. 그가 16살 때인 1790년(정조 1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는 아주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그를 특별히 불러 격려하였다. 그리고 나이가 어려서 벼슬을 못주니 20세가 되면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황사영은 20세가 되기 전에 천주교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북경에 있던 천주교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탄압이 심하니 조선에 군대를 보내 진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그가 지참한 백서(帛書)에 담겨 있었는데 발각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다른 100여명의 천주교 교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를 황사영 백서사건이라고 한다. 조선의 미래를 기대했던 젊은이가 천주교에 빠져서, 외세까지 끌어들이고자 한 이 사건은 당시로서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천주교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젊은이들을 매혹시키면서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당시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은 서구의 기독교 문명이 동양으로 진출하고, 동양의 기존 문명은 바야흐로 몰락해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일본은 이미 그 전부터 서양의 과학문명을 신속히 받아들여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의 종교적인 부분에 더 매력을 느꼈다. 종교적인 부분이라도 그것을 신앙으로 수용한다면 차츰 서양의 본질을 접하게 되고 조선을 개혁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정은 줄곧 강경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탄압이 조선의 몰락을 재촉한 것이다.

1775년 4월 봄은 조선 전체를 혼동에 빠뜨리게 될 새로운 종교세력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