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의 암투


 

1775년 4월 19일 : 궁중의 암투

 

사는 사실 하루도 평범한 날이 없다. 역사의 수례바퀴가 지나가는 순간에 그 밑에 깔리는 땅에는 수많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어떤 미물(微物)은 그 바퀴에 깔려서 죽기도 하고 어떤 미물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기도 하고 어떤 생물은 횡재를 얻기도 한다. 역사는 그러한 점에서 하루도, 한 순간도 평범할 수가 없다. 또 그 이전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가 같은 경우도 없다.

겉으로 드러난 역사 기록상의 1775년 4월 19일(음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그저 평범한 한해였고 하루였다. 그러나 궁중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긴장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81세로 접어든 영조의 건강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1775년 5월 18일(음력 4월 19일) 일성록의 <임금께서 홍문관에 나아가셨는데, 내가 시강(侍講)을 하였다>라는 기사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약방 관리가 집경당(集慶堂)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좋은 일을 하였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강연을 한 것은 진실로 특이한 일이다. 세손의 문리(文理)도 아주 많이 나아졌다”

라고 하였다.

 

집경당은 경희궁의 중요한 궁전 건물 중 하나다. 그곳에서 임금 영조가 진찰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행하였던 경연에 대해서 평가를 하였다. 영조의 말 가운데 오늘 좋은 일이란 경연을 말한다. ‘할아버지’는 영조, ‘손자’는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를 지칭한다. 세손의 문리가 좋아졌다는 것은 경전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언뜻 보면 평화스럽고, 혹은 상투적인 표현처럼 보일지 모른다. 영조의 권력은 다음해에 정조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당시는 권력의 순리적 이양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조의 앞 왕은 그의 형이 되는 경종이었다. 영조가 경종으로부터 권력을 받고 나서 궁중 안팎에서는 경종 독살설이 돌았다. 영조가 형인 경종을 죽이고 권력을 뺏었다는 것이다. 또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숙종은 경종 앞의 왕이다. 이인좌는 이를 빌미로 반란까지 일으켰다.

또 영조는 자신이 마땅히 권력을 넘겨주었어야할 세자 사도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고 그를 뒤주에 가두어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사정을 생각해보면 영조와 왕세손인 정조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다양한 가능성이 많았다. 위의 기록 다음에 도제조(都提調, 좌의정) 이사관(李思觀, 1705년∼1776년)과 주고받은 대화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사관 : 진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성대한 일입니다.

임금 : 세손이 질문한 글 뜻이 어떠하던가?

이사관 : 신이 강연에 입시하지는 못하였어도 신하들이 전하는 바를 들으니 세손이 말한 글 뜻이 진실로 좋았습니다.

임금 : 그렇다. 오늘 일은 진실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세손 정조에 대한 영조의 강연 평가를 소개한 문장이다. 이러한 문장이 여기에 들어있다는 것은 바로 영조가 정조를 매우 신뢰하고 있으며 권력 이양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궁중에는 정조로의 권력이양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물밑에서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해 10월경부터 영조의 건강이 더욱 나빠지자 대리청정의 이야기(代理聽政)가 나왔다. 대리 청정이란 임금의 허락을 받아 다른 사람이 임금 대신해서 국정에 관한 사무를 대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정조가 대리청정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1753년(영조 29년)에 문과 급제한 홍인한(洪麟漢, 1722년∼1776년)이 1775년에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세손 정조가 대리청정을 맡게 되는 것을 반대했다. 홍인한은 아울러 정후겸, 심상운 등과 함께 정조의 심복이었던 홍국영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홍인한은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작은 아버지이기도 하다.

당시 실권자였던 정후겸(鄭厚謙, 1749년∼1776년)도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평민출신이었던 그는 1764년 영조의 서녀 화완옹주의 양자로 입적하여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 영조의 외손주가 된 그는 영조의 총애를 받아 호조참판, 공조참판, 병조참판, 승정원 승지까지 올랐다. 그는 정조가 권력을 잡게 되는 것을 반대하여 온갖 모략과 음해를 하였다. 정조의 주의에 사람을 심어두고 정조를 감시하는가 하면, 유언비어를 퍼뜨려 정조의 비행을 사방에 퍼뜨렸으며, 사람을 시켜 정조를 돕고 있던 홍국영의 탄핵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영조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걱정하면서 어떻게든지 정조로 권력이 이양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결국 영조가 1776년 초(영조 52년 음력 3월)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사망하자 왕세손 이산(정조)은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집권을 방해한 홍인한, 정후겸 등을 서인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충청도 여산, 함경도 경원, 고금도 등지로 유배한 뒤에 처형하였다.

조정의 중요한 고위 세력가들이 정조의 등극을 반대하고 그것을 방해하였다는 것은 1775년 조정 내에서 왕세손으로서 정조의 위치가 불안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단순한 방해에 그치지 않고 온갖 모략과 적극적인 음해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1775년 4월 19일,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하루였지만 조정안에서는 목숨을 건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날 경연의 말미에 영조가

“오늘 좋은 일을 하였다. 할아비와 손자가 함께 강연을 한 것은 진실로 특이한 일이다.
세손의 문리(文理)도 아주 많이 나아졌다”

라고 한 말은 유교 경전을 잘 읽고 이해하는 세손 정조가 다음 왕으로 등극할 자격이 충분이 있음을 선포한 것이었고, 정조의 등극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향하여 정조를 왕세손으로 지지하는 자신의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