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에서 서학으로


 

1775년 4월 19일, 실학에서 서학으로

 

조와 정조 시대에 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학문적인 경향을 ‘실학’이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보고자한 것은 1930년대 일제 시대 때 부터였다. 일본의 침략이나 도움 없이도 조선은 스스로 근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는 좋은 증거로서 ‘실학’이 주목받은 것이다.
이후 다양한 논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실학은 우리나라 역사에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1770년대 영조에서 정조로 권력이 바뀌어가던 시기에 실학은 조선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한 가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실학이 현실사회와 실용에 관심이 컸던 만큼 조선사회는 전체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중시하는 사회로 발전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1770년대부터 정약용의 활동이 펼쳐진 1810년대까지의 다양한 실학적인 성과물들이 그러한 상상을 가능케 한다.

특히 정조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았다. 그렇다면 실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러한 “르네상스” 뒤를 잇는 시대적인 발전이 그 후의 역사에 보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잠시 그 뒤의 역사를 살펴보자.
정조의 뒤를 이은 23대 국왕 순조(1800∼1834) 시대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평안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또 서양 기독교가 전래되어 사회적인 혼란이 가중되었다. 민란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사회가 불안하고 민중들의 불만이 증대되었다는 뜻이다.

그 뒤를 이은 15년간의 헌종(1834∼1849)시대에는 서양의 함선들이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등 각지에 출몰하였으며 25대 철종(1849∼1863) 때에는 1862년에 진주 민란이 일어나는가 하면, 서양 기독교를 본받아 국내에서 창시된 동학 세력이 성장하여 조정을 긴장시켰다.
그 다음은 16대 고종(1863∼1907)의 시대다. 고종의 즉위와 함께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이쯤에 조선은 이미 시대에 뒤쳐져 몰려오는 서양의 근대화 물결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침략을 맞이하게 되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조가 사망하고 난 뒤에 전개된 조선의 현실은 실학자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실학’이 철저한 현실에 근거한 과학적인 사유의 성과물이 아니라는 것은 이렇게 역사가 보여준다. 현실 사회를 개선해나갈 수 있는 이론이 아니었다. 또 장차 전개될 조선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상도 아니었다. 설사 그러한 학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역사는 그것이 더 발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학자가 있다. 기학(氣學)을 제창한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1803∼1877)이다. 최한기는 순조 시대에 태어나 고종시대까지 활동한 철학자이자 실학자다.

그는 당시 물밀듯이 쏟아지던 서구 과학사상을 중국을 통해 수용하였다. 그의 실학은 서구 과학을 수용하여 구축되었지만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서구의 과학 사상을 수용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들은 서구의 언어를 배우고 서구의 과학 문명을 정확히 번역하는데 힘썼다. 그러한 번역을 바탕으로 서양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서양의 방법론으로 탐구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최한기는 서구의 과학을 번역하여 정확히 이해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을 유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또 유교적인 방법론으로 탐구하고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최한기의 노력은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서도 외면을 받았다.
당시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듯이 서구문명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서구의 새로운 과학문명을 배우고 서구 사회의 작동원리를 조선에 구현하지 않으면 조선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 200여국이 넘는 나라가 존재한다. 그런데 전통시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서구식의 국가관, 세계관, 가치관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는 재편성되었다. 근대 직전의 시기에 이러한 준비를 잘 하지 못한 나라는 대체로 멸망하였거나 다른 나라에 흡수되었거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은 그러한 준비를 잘 하지 못한 나라였다. 영조와 정조시기에 융성한 실학은 사실상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를 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본다면 영조와 정조 시대의 실학은 재빨리 ‘서학(西學)’으로 전환되어야 했다. 이익이나 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사상에서 보이는 서구 기독교적인 사상의 흔적들이 좀 더 전면에 드러나 조선의 사상계를 이끌어 갔어야 했다. 그것이 자발적 서구화의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실학자들 가운데는 ‘서학’에 주목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서학이란 서양에서 전래된 과학기술이나 종교를 뜻했다. 초기에는 서양 기독교나 천주교도 서학이라 불렸고, 서양의 총포에 관한 지식도 서학이라 불렸다.

이렇게 서학의 뜻이 서양 종교와 과학을 겸하게 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천주교를 전파할 때 서양의 과학지식, 즉 천문, 역법, 수학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과학책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그러한 서학이 조선에 전래되었다. 명나라 시기 1631년에 정두원(鄭斗源, 1581∼?)은 자명종(自鳴鍾), 망원경(千里鏡),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풍속기(西洋風俗記)⌋ 등 서학 서적을 들여오고, 청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과 교류하고 서학을 접했다. 1645년경에는 서양 과학 서적들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실학자들은 이러한 서학에 대해서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였다. 예를 들면 김석문(金錫文), 서명응(徐命膺), 홍대용(洪大容) 등이 서학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주위에 그러한 지식을 알렸다.
아울러 실학자들은 과학과 기술 관련 부분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으로 수용하고, 천주교에 대해서는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면서 이해를 깊이 하였다. 일부는 천주교를 학문적인 탐구 대상으로 살펴보기도 하고 일부는 신앙으로 수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실학자 이익의 종손이자 그의 영향을 받은 이가환은 천주교를 종교 신앙으로 수용하였으며 그의 조카인 이승훈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는 불교, 개신교와 함께 3대 종교에 속한다. 2005년 기준으로 불교 인구는 1072만 명, 기독교는 862만 명, 천주교는 514만 명이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신앙하는 종교가 서구 기독교다. 실학은 비록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했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종교적 공헌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1775년 4월 19일 조정 안팎에서 실학자들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전래된 서학, 즉 서양의 종교와 과학기술을 주목하고 주변에 알리고 있었다. 조선의 ‘근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유교 중심사회의 붕괴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