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시대


 

1775년 4월 19일, 실학의 시대

 

전적인 의미로 실학(實學)은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등장한 일련의 사회 개혁적인 조선 유학의 학풍을 말한다. 그동안 조선 시대 들어와서 학문의 주류였던 주자학, 즉 성리학과는 다소 성격을 달리하는 학문으로 크게 보면 성리학 일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내부에는 성리학과 대항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러한 실학은 사실 근대에 한국학계에서 발굴해낸 개념이다. 17세기 후반 이후에 실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스스로 실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스스로는 누구나 정통 주자학자로 자처했다. 단지 학문의 대상이 다소 현실적이며 이론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실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중일 삼국 학자들을 모아 국제실학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학자들이나 일본에서 온 학자들은 이 ‘실학’의 개념에 대해 생각이 다르다.
중국의 어떤 학자는 ⌈중국실학사상사⌋를 집필하여 중국실학을 제시하기도 하였는데, 거기에는 송나라 시대의 주자학부터 명나라의 양명학, 그리고 청나라의 고증학까지 모두 포함하여 ‘실학’이라고 보았다. 중국인들에게는 주자학 자체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며 양명학도 실사구시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 조선시대 학자들이 초, 중기에 집중하여 연구한 성리학은 아주 특수한 ‘비(非) 실학적’인 주자학이다.

일본의 학자들도 한국의 ‘실학’ 개념에 적응을 잘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실심실학(實心實學)’ 개념이다. 한국의 실학은 ‘실심(實心, 진실한 마음)’의 실학이며, 일본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실심의 실학을 구마자와 반잔(熊沢番山, 1619∼1691)과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 1723∼1789)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마자와 반잔은 양명학자이며, 미우라 바이엔은 서구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은 동경대학 교수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의 주장이다.

사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 실학에 견줄 수 있는 학문분야는 난학(蘭學)이다. 난학은 ‘네덜란드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구학문’이다. 이 역시 실질적인 실용주의적 학문, 즉 ‘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난학은 철저하게 서양의 방법론으로 그들의 과학 지식을 수용하고자 하였으며, 철학적인 사유는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이 점이 우리나라 실학과는 차이가 있다. 철학 자체도 과학의 일종으로 수용하고자 한 것인 일본 난학의 특징이다. 이 난학은 양학(洋學)으로 발전하여 나중에는 일본 근대학문의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우리나라 실학은 일본 난학과 비교해보면 주자학적인 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고대 동양철학의 한 분야일 뿐이다.

1775년 영조시대 말기에 실학은 충분히 숙성해 있었다. 나중에 정조가 등극을 한 뒤에 활약한 실학자들의 면면과 그들의 대표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동사강목(東史綱目)⌋(1760)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의산문답(醫山問答)(1766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1780년)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가환(李家煥, 1742∼1801): ⌈기전고(箕田考)⌋(1790)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발해고(渤海考)⌋(1784년)
박제가(朴齊家, 1750∼1815): ⌈북학의(北學議)⌋(1778년)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자산어보(玆山魚譜)⌋(1814)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목민심서⌋(1818), ⌈경세유표⌋(1817)

1775년을 기점으로 보면,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이미 15년 전에 발간되었고, 홍대용의 ⌈의산문답⌋은 9년 전에 완성되었으며, 박제가의 ⌈북학의⌋는 3년 뒤에 발간된다. 그리고 ⌈열하일기⌋와 ⌈발해고⌋ 등이 1780년대에 완성되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작품이 약 35년 뒤인 1810년대에 줄줄이 발표된다.

1775년에 홍대용은 만 나이로 44세, 박지원은 38세, 이덕무는 34세, 이가환은 33세, 유득공은 27세, 박제가는 25세, 정약전은 17세, 정약용은 13세였다. 실학파의 주요 학자들이 이미 당시 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학은 사실 임진왜란 뒤인 광해군 시대에 활동한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나 영조 시대 초기부터 활약한 남인계 실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이익(李瀷, 1681∼1763) 등의 활약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수광은 1614년(광해군 6년)에 일종의 실학적인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어 새로운 학문의 등장을 알렸다.

유형원은 국가 개혁과 운영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지었는데, 1670년(현종 11년)에 완성하여 1769년(영조 45년)에 간행하였다. 이익의 대표작은 ⌈성호사설(星湖僿說)⌋로 1720년경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760년경에 편찬되었다. 이 책은 독서하거나 제자들과 나눈 대화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모아 만든 저술이다.
1775년에 <세한도>로 유명한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정조 10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나중에 ‘추사체(秋史體)’로 불리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서법을 만들었으며 금석문 연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러한 실학적인 분위기가 영조와 정조시기를 통해서 형성되어 있었으며, 1775년은 그러한 실학의 영향력이 한층 고조되고 있었다.

실학은 근본적으로 조선의 내부에서 발전된 것인가, 아니면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학문일까?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의 영향이란 구체적으로 중국을 통한 서구 문화의 영향이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북경으로 들어가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명나라 말기인 1601년경이었다. 이후 서양의 선교사들이 북경이나 중국 각지에서 활동하면서 서양 과학문명이 중국 지식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중국 지식세계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후반에 시작된 실학은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중국내부에서 일어난 고증학도 함께 조선의 실학파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사실은 서구 문명의 전파는 일본 쪽이 중국보다 좀 더 빨랐다. 서양 선교사들은 일본을 통해서 중국으로 진출했다. 예를 들면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는 이미 1549년경에 일본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일본의 난학이 그렇게 발전한 것은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과 그들과 함께 들어온 서구 상인들의 역할이 컸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을 쉽게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 수입한 서구 문명의 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의 지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다.

실학의 발생 배경으로 중국으로부터의 영향 못지않게 조선 내부의 변화도 중요하다. 이미 앞서 소개하였듯이, 영조와 정조 시대에 조선의 화가들은 자기주변의 사물을 과거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위 미술계의 ‘진경문화’ 시대와 똑같이 유학계에서도 ‘진경문화’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그동안은 중국에서 받아온 주자학의 이론에만 몰두하였으나 차츰 자기 주변의 환경과 사회를 주자학적인 이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역량이 생긴 것이다. 그러한 역량이 새로운 학풍인 실학 등장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775년의 조정은 그러한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