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별 율곡학맥 색인

선병삼안유경임태홍조동영
강민저(姜敏著)

강익문(姜翼文)

강인회(姜寅會)
강인회(姜寅會)-2

강장환(姜長煥)

강정환(姜鼎煥)

강호부(姜浩溥)
강호부(姜浩溥)-2

고광선(高光善)

고예진(高禮鎭)

고용즙(高用楫)
고용즙(高用楫)-1
고용즙(高用楫)-2

곽시징(郭始徵)
곽시징(郭始徵-2

구시경(具時經)

기우만(奇宇萬)
기우만(奇宇萬)-2

김교준(金敎俊)

김낙풍(金樂灃)

김녹휴(金祿休)

김명희(金命喜)
김명희(金命喜)-2

김병욱(金炳昱)

김사우(金思禹)

김상현(金尙鉉)

김성원(金聲遠)

김수근(金洙根)

김승학(金承學)

김시민(金時敏)
김시민(金時敏)-2

 

김영행(金令行)

김원행(金元行)

김유(金瀏)

김재석(金載石)

김재석(金載石)-2

김종선(金宗善)

김종호(金鍾昊)

김준업(金峻業)

김준영(金駿榮)-1
김준영(金駿榮)-2

김지백(金之白)

김지행(金砥行)

김직순(金直淳)

김진강(金振綱)

김진현(金珍鉉)

김창립(金昌立)
김창립(金昌立)-2

김태원(金泰元)

김필태(金必泰)

김한충(金漢忠)

노광두(盧光斗)

민영목(閔泳穆)

민주현(閔冑顯)
민주현(閔冑顯)-2

박동형(朴東蘅)

박명벽(朴命璧)

박성원(朴聖源) 

송명흠(宋明欽) 

심규택(沈奎澤)

심승택(沈承澤)

양응수(楊應秀) 

오원(吳瑗)

오희상(吳熙常)
오희상(吳熙常)-2

유신환(兪莘煥)

이기경(李基敬)

이승연(李升淵)

이재의(李載毅)

이종우(李鍾愚)

임윤지당(任允摯堂)

전병순(田秉淳)

정윤영(鄭胤永)
정윤영(鄭胤永)-2

조병덕(趙秉悳)

조중회(趙重晦)

최경휴(崔敬休)

한경의(韓敬儀)

한운성(韓運聖)

홍이우(洪理禹)

홍익진(洪翼鎭)

홍직필(洪直弼)
홍직필(洪直弼)-2
홍직필(洪直弼)-3

황경원(黃景源)

황윤석(黃胤錫)

 

강인회(姜寅會)1807~1880 – (제2편)


강인회(姜寅會)-(제2편)                                          PDF Download

 

1807(순조 7)~1880(고종 17).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는 태화(太和), 호는 춘파(春坡)로 1807년 정묘 12월 27일에 고창군 대산면 장동리에서 아버지 예당공(禮堂公) 강재형(姜在衡)과 어머니 함풍 이씨(咸豊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난번 글에 이어 여기서는 강인회의 시문집인 춘파유고(春坡遺稿)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유고는 강인회의 손자 강천수(姜天秀)가 수집하였고 유고의 뒷부분과 편차는 현손 강복원(姜福遠)이 그의 족제 강병원(姜炳遠)과 함께 작성하였으며, 경당 최윤환(崔允煥)의 감수를 받고 그의 서문을 붙여 간행하였다.

춘파유고의 맨 앞에 갑인(1974)년 11월 상순에 월성 최윤환이 지은 ‘춘파유고서’가 있고, 다음에 ‘춘파유고 목차’가 배열되어 있다. 이 목차 다음에 시 작품이 오언절구, 사언율시,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 등의 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다음에 서(書)․잡저(雜著)․서(序)․기(記)․축문(祝文)․제문(祭文) 등의 산문이 편집되어 있고, 그 다음 부록(附錄)에는 ‘노사선생 왕복 시서(蘆沙往復詩書)’와 ‘조월고 성가 내서(趙月皐性家來書)’와 제문(祭文)과 만장(挽章)이 있다.

다음에 송사 기우만(奇宇萬)이 찬한 행장과 월고 조성가(趙性家)가 찬한 묘갈명과 경당 최윤환이 찬한 묘표가 있고, 맨 끝에 강인회의 현손 강복원이 찬한 발문이 있다.

춘파유고에 게재된 작품은 시가 96수이고 산문이 33편이다. 춘파 강인회는 평생 동안 학문을 일삼았으나 남들처럼 명리를 탐하지 않았고, 부귀와 공명은 뜬구름처럼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대하면 시를 읊었고 다정한 친구를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며 심정을 토로하면서 한가한 세월을 보냈다. 따라서 그가 지은 시에서 인생의 삶을 숨김없이 토로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그의 시 몇 편을 감상하여 보자.

 

늦은 봄에 놀며
遊暮春

우는 꿩 소리 꿩꿩 들리고
鳴雉角角

싹튼 보리 잎은 번질번질하네
嫩麥油油

말없이 밖에 나가 놀기도 하고
薄言出遊

술독에는 술이 많이 담겨있네
樽酒淹留

맑은 거문고 소리 마주볼 생각하니
淸琴晤懷

좋은 시구 마음 근심을 풀어주네
好句紓愁

따뜻한 봄날의 한 가락
陽春一曲

천년에 누구와 짝을 하리
千載誰儔

 

춘파유고에 ‘화도시기조직교(和陶詩寄趙直敎)’라는 제목으로 사언율시 12수가 들어있다. ‘도시’란 중국 동진 때의 도잠(陶潛)의 시라는 말이고 ‘조직교’는 동문수학했던 월고 조성가의 자가 직교(直敎)임으로 그에게 지어준 시임을 알 수 있다. 강인회의 시의 내용으로 보면 도잠의 ‘시운’을 화운하여 처음 4수는 친우를 생각하는 시이고 다음 4수는 모춘의 유람을 읊은 것이다. 봄날에 앞산에서 우는 꿩 소리는 유달리 크기도 하여 산촌의 적막을 깨기가 일수이다. 그리하여 ‘나 여기에 잇노라’하고 자랑하는 듯 또는 선포하는 듯하여 결국은 암놈(까투리)을 부르는 본능적인 외침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리려는 언사를 흔히 ‘춘치자명(春雉自鳴)’이라 한다. 백화가 난만히 무르익은 봄날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는 동문을 생각하고 봄의 정경을 지어 보낸 강힌회의 벗을 그리워하며 봄날을 즐기면서 도연명처럼 유유자적하는 도인의 생활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연꽃 시를 지으려 하나
我欲蓮詞製

그대를 칭찬할 시구가 없네
無詞可讚君

굴자는 향기를 맡으려 차고
香聞屈子珮

주렴계는 청정하다고 글을 지었네
淨撰極翁文

물에 잠기니 영롱한 붉은 옥이고
蘸水瓏紅玉

바람에 흔들리니 푸른 구름 넘치네
颭風漲碧雲

어떻게 이백의 시구를 가져다가
那將白也句

조각하여 꾸미고 삼분을 따라갈까
雕餙去三分

 

이 시는 연꽃을 읊은 것이다. 연꽃하면 송나라 염계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을 국화나 목단을 사랑하지만 주돈이는 연꽃을 사랑한다고 지은 글이다. 이 시에는 초나라 굴원(屈原)과 주돈이와 이백(李白) 등이 작품 속에 언급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굴원은 초사의 작자이고, 이백은 당나라 시선으로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시인이다. 연꽃을 바라보며 그저 ‘좋구나’ 아니면 ‘참 아름답구나’ 정도를 넘어서 굴원을 상상하고 주돈이를 연상하고 이백을 그리워하는 작자의 학문의 경지는 시를 짓는 수준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생각이다.

 

글공부에 힘을 쓰는 것 큰 뜻 품은 길인데
於書着力是鵬程

마침내 가난한 사람이 뜻과 행실 얻게 되네
畢竟貧寒得志行

누가 이름 아래 남파 늙은이 있음을 알까
誰知名下南坡叟

사는 이치 공과 공이라 한 솥에 새긴 명이네
生理空空一鼎銘

 

유교가 현실생활을 강조하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공양의 도를 받들고 실천하는데 왜 종교가 아니겠는가. 인간도 다른 생물처럼 죽으면 ‘혼비백산’하게 되니 그 다음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선을 행하고 사회를 위하여 공을 쌓으라’는 것이 유교의 중심 사상이다. 따라서 학문을 하는 목적은 인격을 수양하여 행실을 바르게 하며, 벼슬에 오르면 만인을 위하여 업적을 남기는 것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이었다.

위의 시는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고제인 강인회가 남파 이희석(李僖錫)의 시에 화운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학행(學行)으로 향당의 귀감이 된 분들이었으니 안빈자족(安貧自足)하면서 담박한 인생을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春坡遺稿 小考」(한자한문교육제11집, 유풍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호부(姜浩溥)1690∼1778 – (제2편)


강호부(姜浩溥)-(제2편)                                          PDF Download

 

1690(숙종 16)∼1778(정조 2).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관은 진주(晉州). 자는 양직(養直). 호는 사양재(四養齋)이다. 강진휘(姜晋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덕후(姜德後)이고, 아버지는 시정(寺正) 강석규(姜錫圭)이며, 어머니는 김성급(金成岌)의 딸이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지난번 글에 이어서 여기서는 그의 경세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강호부는 영조 원년(1725) 당시 조선의 현실을 ‘수노지인(垂老之人)’에 비유하였다. 정기가 소모되고 지원(眞元)이 빠져나가 거의 노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조섭과 보양을 잘하지 않아서 온몸이 병으로 물들어 고통을 겪고 있으니, 만약 대단한 진작과 치료가 없다면 죽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대단한 진작과 치료’가 바로 경장(更張)과 변법(變法)이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오직 경장에 잇을 따름이다”라거나 “비록 요순과 공맹이 지금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장차 다스릴 방도가 없을 것이다”

라는 그의 말은 경장과 변법에 대한 강한 신념을 보여주는 말이다.

여기에서 그의 대표적인 경장의 모델인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을 살펴보자. 조선후기 부세제도의 모순 가운데 군정의 문란은 ‘양역(良役)의 폐단’으로 지칭되었다. 양반 사족들이 군역 부담에서 빠져나감으로써 군역은 오롯이 양인들의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역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양역 변통책으로는 호포(戶布)․결포(結布)․유포(游布)․구전(口錢) 등의 방안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런데 강호부는 이 가운데 결포․유포․구전은 그것이 비록 옛 제도에 의거했다고 하지만 구차함을 면할 수 없다고 보았다.

먼저 결포의 경우 토지 면적을 계산해서 포를 내는 것인데, 당시 전세(田稅) 이외에 대동미(大同米)를 비롯하여 잡다한 세금이 토지에 부과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현행의 제도만으로도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 과중하여 토지를 버리는 자들이 간혹 있는데, 만약 결포를 시행하게 되면 비옥한 토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토지가 버려질 것이고, 이는 생재(生財)의 근원을 막는 것이므로 시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강호부는 오직 호포만이 다른 방안에 비해 낫다고 생각했다. 주목할 것은 강호부가 호포제의 시행과정에서 주된 표적으로 삼고 있는 계층이 ‘향품중서지배(鄕品中胥之輩)’, ‘시전유타지류(市廛遊惰之流)’였다는 사실이다. 강호부는 이들이 값비싼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국가를 위해서는 터럭 하나도 뽑으려 하지 않는 무리들로 매도하였다. 호포제가 시행되면 이들이 더 이상 면역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것이고, 이야말로 ‘균역의 좋은 법’, ‘백성을 구제하는 좋은 대책’이 된다고 평가했다.

또한 강호부는 호포제를 시행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당시 삼남(三南)의 각읍에서 활동하고 있던 수세법(收稅法)으로 작부법(作夫法)과 산결제(散結制)가 있는데, 작부법은 많은 폐단이 발생하고 있어서 백성들은 산결제를 원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것은 토지 1결에서 쌀 25두를 관에서 직접 거두어 그 가운데 20두로 삼세(三稅)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 5두는 ‘잡역가(雜役價)’로서 일용의 각종 비용에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강호부는 바로 이러한 방식을 차용해서 1결당 23두를 거두어 그 가운데 18두를 삼세에 충당하고, 나머지 5두로 양역가(良役價)에 대응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그가 계산하기에 국가의 1년 경비가 대략 70여만 필이고, 전결의 총수가 1,222,290여 결이므로 평년에는 100만 결, 흉년에는 80~90만 결 정도에서 수세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1결에서 5두의 쌀을 거두어 양역 1필의 값을 충당하는데 충분히 여유가 있다고 보았다.

이 외에도 강호부는 당시 양역제 운영상의 문제점에 대해 거론하였다. 그것은 호포제로의 근본적인 개혁이 불가능할 경우 운영상의 문제점만이라도 해소하자는 취지의 논의였다. 그는 먼저 지방 행정구역의 구분 문제와 그에 따른 군액(軍額) 부과의 불공정성을 지적했다. 예컨대 큰 지역은 사방 수백 리에 달하고 작은 지역은 불과 10리에 지나지 않는데 군액의 부과는 그러한 면적의 대소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가호가 1000호에 미치지 못하고 양민의 숫자도 수백에 불과한데, 군액은 500~600명에 달하는 경우가 파생되고 있었다. 강호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호적을 고찰하여 민호가 적고 군액이 많은 읍의 군액을 민호가 많고 군액이 적은 곳으로 나누어 이송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강호부의 제안은 ‘병성주현(幷省州縣)’론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현재의 주현(州縣)은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그 규모와 시설이 대체로 동일하다고 보았다. 일개 현의 경우를 보면 향리나 관속에게 지급되는 심부름꾼, 향교에 소속된 인원, 장교의 예하 인원 등이 수백 명에 가까웠다. 따라서 주현을 병합할 경우 이 인원에 해당하는 비용을 줄여 양역에 충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강호부는 일로(一路)에서 수십 현씩 줄인다면 양정(良丁) 3만 정도를 일거에 얻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또 하나의 제안은 삼남 지방 군액의 1/5을 양서(兩西) 지역으로 이송하자는 것이었다. 이는양서 지역의 양민들 태반이 본읍(本邑)의 장교나 관군의 수에 충족되어 있고, 여번(餘番) 수포(收布)가 모두 수령의 사익을 채우고 있다는 현실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강호부는 호포제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에 수반된 여러 대책을 제시하는 등 양역 변통 문제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는 조선후기 양역변통책으로 거론되었던 결포․유포․구전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호포제를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였으며, 호포제로의 근본적인 개혁이 불가능할 경우 행정 구역 재편을 통해 군액 부과의 불공정 문제를 해소하고자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병성주현’론이었다.

[참고문헌]

「18세기 정통주자학자의 현실인식과 학문적 대응-사양재 강호부의 저술을 중심으로-」(「한국사상사학」제31집, 구만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곽시징(郭始徵)1644∼1713 –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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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인조 22)∼1713(숙종 39).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숙(敬叔) 또는 지숙(智叔)인데, 처음 경숙이었다가 스승인 송시열에 의해 지숙으로 고쳤다. 세거지는 목천(木川)이며 호는 경한재(景寒齋)이다.

지난 호에 이어 여기서는 그이 대표적 시조인 <경한정감흥가(景寒亭感興歌)>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조는 곽시징이 지은 것으로 진동혁(秦東赫)에 의해 처음 학계에 소개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모두 24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일 제목으로 전해지는 시조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작품 수로 구성되어 있다.

곽시징이 <경한정감흥가>를 창작한 시기는 기사환국 때 사사되었던 송시열이 갑술환국 이후 신원되자 태안에서 은거하던 그가 목천으로 돌아온 때였다. 그는 고향이 목천으로 돌아와 경한정(景寒亭)을 지어 은거하였는데, ‘경한’은 그의 스승인 송시열이 직접 써 준 것으로 스승을 기리기 위해 이것으로 편액을 한 것이다. 그는 이 곳에서 독서를 하기도 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때때로 자연을 완상하다가 즐거움이 지극하여 감흥이 일어나면 문득 시와 노래를 지어 자기의 뜻을 부치기도 하였다. 그는 단순히 자연을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교(世敎)에 목적을 두고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시와 노래를 지었던 것이다.

곽시징이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영향을 받아 시조 <경한정감흥가>를 창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형식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시조의 효용성에 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면 근심도 잊어버리고, 마음을 맑게 하기도 하며, 욕심도 적게 하기 때문에 ‘배움에 뜻을 둔 자’에게 보탬에 된다고 한 것이다.

즉 시조는 노래 부르는 자와 그것을 듣는 자에게 모두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경한정감흥가>를 창작한 동기이다.

여기서는 율시 8구를 제목으로 하는 시조 가운데 5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곽시징 poem1

이것은 ‘아유경한암(我有景寒菴)’의 취지를 해석한 시조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나에게 경한암이 있다’라고 해석이 된다. 여기에는 경한암이라는 정자를 소유하고 있다는 정도의 정보밖에 없다. 나머지 정보는 시조에 실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시조에는 경한정이 건립한 목적이 나와 있다. 내가 있는 경한암은 한천(寒泉)을 상상하며 주자의 도덕을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모하니 이에 밤낮으로 제자들에게 강학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하였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한천’이란 주자가 40대에 머물렀던 정자인 ‘한천정사(寒泉精舍)’를 뜻한다.

주자는 이곳 한천정사에서 사서삼경에 대한 주석의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한천정사는 신유학을 집대성하는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한천은 주역의 수풍정괘(水風井卦)에 나오는 말로 중정지도(中正之道)를 지칭하는 말이다. 즉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경한암은 주자의 한천정사를 본떠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서 주자학을 계승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전수하겠다는 목적으로 지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곽시징 poem1

 이것은 제목으로는 보면 ‘낙수가에 깃들어 산다네’ 정도로 해석을 할 수 있으나, 시조에는 낙수가에서 어떻게 깃들어 살고 있는가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스승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세상과 인연을 끊은 곽시징은 이 세상의 부귀공명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바람과 달 등 자연을 벗삼아 생활하며 틈틈이 낙수가에서 낚시질을 하는 등 한가하게 사는 모습을 시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곽시징 poem3

이 제목은 ‘군왕의 은덕으로 우물 파서 농사짓는다’이다. 이것은 농부로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짓는 것을 생애로 삼아 아무런 걱정 없이 늙어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군왕의 은혜임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다는 취지로 시조를 지은 것이다.

곽시징 poem4

‘어버이의 은혜가 깊음을 풍수로 느끼노라’는 뜻의 제목 아래 ‘부모의 은혜를 갚으려 하나 다 갚을 수도 없고, 갚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돌아가셨으니 더욱더 갚을 길이 없다. 그래서 허물이나 적게 하여 부모의 명성에 욕 끼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라는 뜻의 시조로 그 취지를 해석한 것이다.

곽시징 poem5

이것은 창작시기를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는 작품이다. 이 시조의 제목은 ‘달을 바라보며 형의 얼굴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것의 취지를 해석한 것이 시조인데, 거기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형들에 대한 깊은 정이 나타나 있다. 곽시징의 네 형들 중에 아직 생존해 있으나 서호(西湖)와 결성(潔城) 등지에 떨어져 있어 만나지 못하는 두 형의 모습을 낙수의 맑은 연못에 비치는 달을 통해 떠올리게 되는 내용이다.

이상에서 보면 시조가 시여(詩餘)라는 명칭으로도 사용되듯이 한시구(漢詩句)만으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운 취지와 감흥을 우리말 가락에 얹어 충분히 풀어내고 있다. 이것이 이 시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곽시징의 <景寒亭感興歌> 연구」(시조학논총제29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우만(奇宇萬)1846∼1916 – (제2편)


기우만(奇宇萬)-(제2편)                                          PDF Download

 

1846(헌종 12)∼1916.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관은 행주(幸州)로 지금의 경기도 고양이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며 또는 학정거사(學靜居士)라고도 부른다. 기우만은 개항 직전인1846년에 태어나 개화기를 거쳐 조선이 멸망하는 역사적인 격동기를 겪은 호남의 대표적 유림이었다. 노사 기정진 손자로서 그 학문과 위정척사 정신을 계승하여 항일의병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지난 호에 이어 여기서는 기우만의 시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시 세계를 보면, 우선 현실에 대해 암울하게 인식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개항 시대 이후에 태어나 일본과 서양 세력에 의해 조선이 침탈당하고 마침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생의 경험에 의해 그는 현실을 암울하게 표현했다.

 

각라가 중화를 어지럽힌 지 삼백년
角羅猾夏三百年

지나치게 높이 올라가면 반드시 그 끝에 일이 생기는 법
亢極必反竟生事

오랑캐가 때를 틈타 일어나 제멋대로 날뛰니
氐羌乘時起陸梁

방현령이나 두여회조차 손 묶인 형세와 같네
房杜束手指如臂

중심과 뿌리가 벌레에 먹히니 구할 수 없고
心蠱根蠧竟莫救

꼬리는 너무 커져 지금 천지에 흔들기도 어렵네
尾大難掉今天地

기자 가르침 백년 염치 있는 풍조는 쓸어 버렸는지
箕敎百年廉風掃

한 말 곡식, 한 자 베까지도 아전들이 긁어 가버리누나
斗粟尺布輸剝吏

개화가들이 소 울면 말이 응대하듯 하니
牛鳴馬應開化家

여자들은 정조도 없고 선비들은 뜻을 잃었네
女無貞操士喪志

임금을 위협하여 자리를 비우게 하여 노름판의 막돈처럼 만들었으니 虛位挾天作孤注

높은 충정심에 어찌 제 목숨 없어질까 되돌아볼까.
危忠那顧軀命毁

 

기우만이 보기에 당시 현실은 기자에 의해 교화되어 중화에 가까웠던 그 유풍은 모두 사라졌다. 기자가 주나라 중화문명을 가져와 조선 땅에 예악과 문물이 융성하고 윤리가 떳떳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염치없는 풍조가 성행해서 아주 적은 양의 곡식과 옷감조차도 모두 다 빼앗아 가버리는 아전들이 횡행한다. 아전들은 백성을 보호해야 하지만 도리어 가혹하게 세금을 걷고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다. 아전의 임무를 다하기는커녕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야 할 염치조차 없다.

한편 개화가들은 임금을 겁박하고 노름판의 막돈처럼 함부로 대하는 행위를 자행한다. 개화파들은 일본이나 서양을 개화 모범으로 삼았다. 조선의 전통적인 문화, 사상, 제도는 개혁해야할 대상이었다. 일본과 서양도 직접적으로 조선을 침탈하는 것보다는 조선 내의 정치가들과 결탁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그 과정에서 민비 시해, 고종의 아관파천, 청에 의한 대원군 납치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는 신하가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로서 유학 윤리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개화파들은 외국의 사상 등을 수용, 확산시키면서 유학적 윤리사상을 비판했다. 그 결과로 여자들은 정조 관념이 없어지고 선비들은 뜻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오랑캐가 틈을 타 날뛴’ 결과이다. 그래서 서두에서 ‘각라(청 오랑내)가 화하(華夏), 즉 중화를 흔들’었고 시간이 지나 극성하여 조선에도 오랑캐 힘이 미쳤다고 서술한 것이다. 조선의 위기를 오랑캐와 중화의 대립적 관점, 곧 화이론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러므로 조선은 ‘짐승 발자욱이 가득하고 귀신이나 도깨비들이 출몰’하는 공간이며 인간의 나라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암울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방현령이나 두여회 같은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이 위기 상황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선비들이 상심하고 청산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도 임금의 걱정을 덜어줄 이 하나 없는’ 현실은 더욱 암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걸출한 인재들의 부재는 암울함을 더욱 절실하게 해주는 것이다.

 

한번 죽어 양을 붙잡은 이가 나라에 있으니
一死扶陽國有人

천추의 광악에 홀로 그 정신 높구나
千秋光岳獨精神

충성스런 영혼은 응당 주운의 검이 되어
忠魂應化朱雲劒

아첨만 하는 간사한 신하들을 궁궐 계단 앞에서
殿陛頭頭斷佞臣

하나하나 목 베어내리

이 시의 애도 대상은 박영원(朴永源)이다. 1896년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박영원도 참여했다가 관군에게 잡혀 죽었다. 기우만은 그의 충의 정신을 기리며 한나라 주운에 비견했다. 주운은 당시 사부였던 장우(張禹)가 직언을 하지 못하고 암첨하는 것을 보고 검을 빌려 장우의 목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우만은 박영원이 주운과 같이 강직함과 충성심을 가졌다고 칭송한 것이다. 기우만은 이런 인재가 활약하기를 희망하지만 현실은 간신들만 가득하다. 결국 주운 같은 박영원이 살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므로 그저 상상 속에서만 간산들을 죽이는데 그친다.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죽는 허탈감으로 인해 현실의 암울함을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기우만은 시를 통해 암울한 현실 인식을 드러냈다. 기우만이 살던 시대는 조선 내부적 모순으로 사회가 호란했고 외세에 의한 침탈까지 더해져 국가로서 총체적인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인들은 자신들의 시를 통해 다양한 현실 대응적 면모를 보였다. 국가의 위기 및 사회적 혼란상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하는 경향의 시들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당시 현황에 대해서는 ‘유학 및 유교적 정신의 쇠퇴’, ‘이적화된 조선’이라는 인식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기우만의 시에서 보여준 시대 인식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 나아가 당시 유교가 다양한 사상 및 학문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명확히 인식, 그것들을 ‘오랑캐의 것’,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이설(異說)에 현혹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우만의 문학은 소극적 척사 및 현실 비판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유학적 가치를 강조하고 후학들에게 유학을 고수하기를 권유함으로써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만의 해법으로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전통 유학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계승하고자 했다. 시를 통해서 이러한 의식을 드러낸 것은 ‘문학은 시대 상황을 보여주어야 하며 세상을 바른 데로 이끌어야 한다’는 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송사 기우만의 시세계 고찰」(<동양학>제60집, 김기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시민(金時敏)1681∼1747 – (제2편)


김시민(金時敏)-(제2편)                                          PDF Download

 

1681(숙종 7)∼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

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수(士修), 호는 동포(東圃) 또는 초창(焦窓)이다. 여기서는 지난번의 내용에 이어 김시민의 문예관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후기 회화사에서 주목할 특징이라면 ‘眞景山水’라는 사실 혹은 현실에 비중을 둔 회화 장르가 새롭게 탄생했다는 것인데, 이것의 이면에는 실학적인 학문사상이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주의 화풍이 성행하는 즈음에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진경산수를 그리는 화가와 그 교유 문인에게서 발견된다. 시론(詩論)과 화론(畵論) 상에서의 ‘정신’의 가치를 일깨우며 참된 예술 활동을 실현하자는 ‘진(眞)의 강조’ 움직임은 김시습에게서도 나타난다. 동포집 「일대육법(一代六法)」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병중에 할 일이 없어 그림 수집에 마음을 붙였는데, 모은 것이라고는 오직 지금시대의 그림이고 옛 것은 모으지 않았다. 손님 중에 이를 괴이하게 여겨 묻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모으시면서 옛 그림은 왜 수집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내가 옛 그림을 수집하지 않고 지금의 그림만을 수집하는 것은 특별한 뜻이 있고 또 의미가 있다네. 자네에게 들려줄까? 세상에 그림에 벽(癖)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대체로 지금의 것을 버려두고 옛 것을 쫓으며, 먼 시대의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시대의 것을 천시한다네. 심지어는 해진 비단조각에 그린 그림이나 떨어진 종이에 그린 그림, 불에 그슬린 채색화나 좀먹은 묵화까지 천금의 값으로 머나먼 만리타국에서 사와서 수놓은 비단으로 표구를 하여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이것은 당나라 때의 그림이다’, ‘이것은 송나라 때의 그림이다’, ‘송설(松雪)의 그림이다’, ‘현재(玄宰)의 그림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오래될수록 멀어질수록 더욱 그 참됨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미혼된다네.……아. 우리 선대왕께서 태평한 세상을 다스리시어 북돋아 길러주시는 아름다움을 완성하셨나니, 여기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네. 그러므로 나의 이 화첩은 진실로 국가의 태평한 운수를 고찰하는 거울이 되니 어찌 등한한 옛 그림과 바꿀 수 있겠는가? 천금을 주고 멀리서 사온 그림과 경중을 비교한다면 도리어 어떠한가?”

손님이 듣더니 시원하게 여기고 이윽고 나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조리가 있고 또 진실로 그런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물의 본질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태도인데, 당대의 지식층에 만연하던 호고(好古)에 반발하여 객관적인 검증이 가능하고 진실된 우리 시대 우리 사람의 문예작품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밑바탕으로 기능하였다. 스스로 그림에 대한 벽(癖)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림만 있으면 문득 눈여겨보며 관찰하고 완상하는 동안 완전히 그림과 정신이 하나되는 ‘신회(神會)’의 경지에 도달하는 애호가가 김시민이다.

그가 병중의 무료함을 달래고자 나선 일이 그림 수집이다. 그런데 수집한 그림이라고는 그와 동일한 시대의 우리나라 유명 화가의 것들 뿐이었다. 중국물품에 대한 동경과 애호가 넘쳐나던 시대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사뭇 다른 행보였기에 김시민의 수집 형태는 객의 궁금증을 유발하였다. 이에 대해 김시민은 이와 같은 수집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먼저 그는 옛 것을 좋아하는(好古) 당시의 풍조를 비판한다. 조선의 이름난 그림수집가들 혹은 애호가들이 지금 시대의 것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옛 것, 오로지 중국의 것에 광적일 만큼 집착하여 해진 비단 조각이나 떨어진 종이, 불에 그슬린 채색화나 좀먹은 묵화 등 본그림의 진면목을 알 길 없는 종이쪽을 천만금의 값을 주고 사들여 와서 화려하게 배접하고는 누구의 것이다, 어느 시대의 것이다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허울과 이름에 집착하는 당대 조선지식인의 과시적 풍조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어서 그는 유명한 것, 먼 시대의 것, 외국의 것에 집착하는 과시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참됨(眞)’이라고 강조함으로써 문예 창작이 담보할 것은 바로 진실에 있음을 주장한다. 회화에서 ‘참됨’을 소중히 여기는 그가 소유한 소장품은, 위로는 선배․장자, 중간은 동년배, 아래로는 후배나 천인 등의 그림이며 모두 그의 한 세대를 벗어나지 않는 유명한 화가의 것들이다. 더욱이 정체를 확인할 길 없는 외국의 그림들과 달리, 그가 소장한 그림은 단순히 유명한 아무 화가의 집에서 무조건적으로 구매해 온 것이 아니다. 유명 화가 본인에게 부탁하여 그려진 것이기에 그림의 진위(眞僞)에 대한 염려도 없다.

화첩을 펼치면 친구와 동년배들이 좌우에 빽빽이 늘어서 있고, 그들이 직접 그린 붓의 흔적이 찬란히 보이고, 그들의 얼굴과 똑같은 그림이 보이기에 그들의 ‘정신’과 ‘풍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서술은 회화에서 사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육법(六法)에서 ‘육’은 김시민이 화첩의 그림들을 산수․인물․매죽․포도․화초․령모(翎毛)의 여섯 항목으로 분류한 것이다. ‘법’은 여섯 부분의 대표 화가를 나이순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연령별 구별이 아니다. 모범이 될 만한 선배, 이후의 진보와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후배, 뛰어난 재능을 가져 높이 인정해줄만한 비천한 지위의 인물, 부자간에서부터 친구간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 관계에서의 모범 전승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

여섯 부분의 대표 화가들이 단순히 화폭 위에서의 모범만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림의 전형(典刑), 미래의 발전 가능성, 미천한 자들의 재능 존중 등 총체적으로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국운의 무궁한 발전 가능성을 점치는 거울과 본보기로서의 그림의 가치를 평가하였다. 이것은 과서 ⌈시경⌋에 수록된 다양한 시들을 통한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풍속교화를 통해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염원하던 것과 같다. 그렇기에 이 한편의 화첩에 거는 김시민의 기대치는 ⌈시경⌋에 대한 유가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방불케 한다.

김시민이 말하는 ‘진’의 개념은 그와 한 시대를 살던 우리나라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것이라는 측면을 중시한다. 이것은 그가 단순한 형체나 골격의 외형적 유사성을 앞세우는 단선적이고 편협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는 말이 아니다. 더욱이 그가 중국의 것을 거부한 채 오로지 우리 시대 우리 사람의 것만을 고집하며

‘시대가 오래 될수록 지역이 멀어질수록 더욱 그 참됨을 잃는다’

라고 한 말은 우리의 것, 조선의 것에 대한 자존심과 자심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시민의 이러한 주장은 박지원(朴趾源)이나 정약용(丁若鏞)이 산문과 시론에서 제창한 조선적인 것의 가치에 대한 인식보다 훨씬 이전 시대에 예술 전반에서의 조선적인 것, 현재적인 것의 가치를 적극 강조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동포 김시민의 문예관 연구」(「동방한문학」제44집, 김영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창립(金昌立)1666~1683 – (제2편)


김창립(金昌立)-(제2편)                                           PDF Download

 

1666(현종 7)~1683(숙종 9).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관은 안동(安東). 자는 탁이(卓爾), 호는 택재(澤齋)이다. 김창립은 18세에 요절하였고 그의 유고집은 홍유인(洪有人), 유명악(兪命岳), 최동표(崔東標) 등이 발간을 추진하여 형인 김창흡(金昌翕)이 그것을 산정하여 사후 1년 만인 1684년에 서사활자로 간행되었으며, 1700년에 운관활자로 다시 간행되었다.

특히 이 유고집의 서문과 발문을 쓴 인물들이 당대를 대표하는 명사들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 유고집의 서문과 발문을 쓴 인물들이 당대를 대표하는 명사들인데, 서문은 김석주(金錫冑)가 썼고 발문은 김수항(金壽恒), 김창흡(金昌翕), 송시열(宋時烈), 남용익(南龍翼), 김만중(金萬重) 등이 썼다. 김수항은 그의 아버지이고 김창흡은 그의 작은 형이므로 이들을 제외한다고 해도, 나머지 4명은 당시에 명성이 높은 인물로서 이들이 요절한 자의 유고집에 이렇게 서물과 발문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주목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는 지난번의 글을 이어 그의 유고집인 「택재유타(澤齋遺唾)」의 간행과정과 구성 및 내용을 살펴보고 그의 몇 편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생몰 연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창립은 18세에 요절하였다. 그런데 그의 유고집은 사후 1년 만인 1684년에 초인되었다. 이러한 예는 조선시대 문집 간행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1700년에 운관활자로 간행된 「택재유타」는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구성내용을 살펴보면 서(序)․시(詩)․부록(附錄)․발(跋) 등으로 되어 있는데, 부록에는 행장(行狀)․묘표(墓表)․묘지명(墓誌銘)․전(傳)이 포함되어 있고, 발문은 5명이 썼다. 서문을 쓴 김석주(1634~1684)는 일세를 풍미한 정치가로 당시의 정국을 주도하던 인물의 하나였다. 서문의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갑자년에 한양에 전염병이 크게 있었는데 김창립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그 후에 상공이  「택재유타」 라는 시집 한 권을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김창립의 여러 형들이 그의 주머니에 있던 초고를 모아 기록한 것이다.”

첫 장 첫 줄 상단에 ‘택재유타’라 쓰여 있고, 하단에 ‘안동김창립탁이저(安東金昌立卓爾著)’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시가 끝난 줄 여백 아래에 ‘택재유타종(澤齋遺唾終)’이라 되어 있다. 시의 배열순서는 시체(詩體)와 관계없이 시대순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작은 형인 김창흡이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

시집으로서의 「택재유타」를 살펴보면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절구(絶句)나 율시(律詩) 같은 정격(正格)의 작품도 있지만 변격(變格)의 시가 많다는 것이다.

전체는 85수인데 이 중에서 5․7언장구 5수, 5․6․7언 1수, 4언4구 2수, 4․5언 2수, 6언22구 1수 등을 포함하여 5언시나 7언시의 경우에도 각각 10구, 14구, 20구 등 다양하다. 이러한 변격의 작품이 도합 27수이다. 이것은 김창립이 추구했던 시의 경지와 관계가 있다. 김창립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배우는 시를 거부하고  「시경」의 시나 고풍시(古風詩)를 따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이유로 율격에 맞는 시보다는 파격적인 작품을 선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시를 살펴보자.

 

구림마을 국사암에는
鳩林國師巖

도선의 발자취가 남아있네.
道詵足跡在

밤에 올라 바닷물을 보니
夜登見海水

밝은 달이 세상을 비치네.
明月照海內

 

이것은 시집에 수록된 첫 번째 작품이다. 제목 아래에 협서로 을묘(乙卯)라 기록되어 있으니 을묘년(1675), 곧 김창립의 나이 10살되던 해였다. 이 해에 갑인예송(甲寅禮訟) 후 남인과 대립하던 김수항은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이 시기에 김창립이 영암의 월출산에 올라가서 이 시를 지었다.

10세에 지은 시는 이외에도 1수가 도 있다. 이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시를 썼지만,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한 것은 16세부터이다. 이어서 시 한 수를 더 소개한다.

지난 날 우리들 장쾌히 놀았지
往者吾輩能壯遊

화산에서 3일 동안 더 없는 즐거움을 즐겼네.
華山三日樂莫樂

서쪽으로 백운봉에 올라
西登白雲峯

한양의 성곽을 굽어보았네.
俯視洛陽郭

높은 곳에 올라 높은 곳에 올라
臨高臺臨高臺

구슬픈 피리소리에 가을 하늘은 아득하니
長笛悲歌秋天杳

백년 인생사 갑자기 비장해라.
人生百年忽悲壯

웃으며 북망산을 가리키니 행인이 드물고
笑指北邙行人少

아아! 인수봉은
嗟乎仁壽峯

조화가 어찌 그렇게 웅장한가!
造化何其雄

흰 구름은 땅에 가득 일어나고
白雲滿地飛

푸른 바다는 무궁하도다.
滄海去無窮

산꽃과 잎을 머리에 가득 꽂고
山花洞葉揷滿頭

노래하고 춤추며 내려오는데 산 그림자가 지네.
歌舞西下山影棲

 

이 시는 김창립이 삶의 마지막 해인 18세에 지은 것으로, 내용으로 보아 북한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도 정격의 격식을 갖춘 시라고 할 수는 없다. 대자연의 경치를 읊으면서 인생사의 비장함을 노래하는 젊은 김창립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유고시집에는 유일하게 <제망자문(祭亡姉文)>이라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 80자로 된 짧은 글인데, 그가 지은 문장 중에서 유고집에 실린 것이 이것뿐이다.

제문의 대상은 출가한 누이로서 김수항의 6남 1녀 중 하나뿐인 딸이다. 누이가 죽은 것은 1680년으로 추정된다. 이때 김창립의 나이는 15세였으므로 누이의 죽음이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정을 이루고 나서는 아내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누이와의 이별이 더욱 슬퍼 이 제문을 지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김창립은 10세에 처음 한시를 지었고, 한시에서 추구하는 바가 남달랐던 김창립의 문학은 주위의 기대를 모았으나 일찍이 사망하는 바람에 완성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깊은 애도를 받았으며,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이 유고시집이 전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澤齋 金昌立의<澤齋遺唾>에 관한 연구」(<서지학연구>제49집, 김순희)

김재석(金載石)1895~1971 – (제2편)


김재석(金載石)-(제2편)                                           PDF Download

 

1895(고종 32)~1971. 근대의 학자이다.

관은 울산(蔚山). 자는 경담(景潭), 호는 월담(月潭)이다. 그는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자 간재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순창과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야 유림이었다. 김인후로 이어지는 가학 전통과 간재의 학문을 계승하려는 그의 노력은 유학자적 면모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당시의 엄혹한 역사 현실을 무시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항일의병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유학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지사적 유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재석은 타고난 자질이 비범하고 매우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8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의 명에 따라 ‘구름’을 소재로 시를 지었는데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름 덮이니 하늘은 낮아지는 듯
雲浮天似低

그 구름 걷히니 다시 높아지네.
雲散天還高

본체는 항시 변함없으니
本體恒無變

본성을 회복하는 일 힘들다 마오.
復初莫說勞

 

첫 구절의 ‘구름 낀 하늘’과 둘째 구절의 ‘구름 걷힌 하늘’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이고 평담한 맛이지만, ‘구름 낀 하늘’과 ‘구름 걷힌 하늘’이 셋째 구절의 ‘본체’, 넷째 구절의 ‘복초’와 연결됨으로써 함축적이고 의미있는 도풍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월담유고(月潭遺稿)」에 수록되어 있는 「자경십도(自警十圖)」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경십도」는 「월담유고」권3,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김재석이 간재 전우의 학문을 계승한 성과는 「자경십도」에 담겨있다. 「자경십도」는 간재의 가르침에 따라 ‘소심존성(小心尊性)’의 의미를 밝힌 것으로, 모두 10폭의 그림(圖)과 설명(說)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경십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 사일(事一), 제2 삼외(三猥), 제3 삼요(三要), 제4 사극(四克)은 존심지방(存心之方) 즉 공부론을 밝힌 것이고, 제5 인체(仁體), 제6 지경(持敬), 제7 서학(恕學), 제8 위미(危微) 역시 ‘존심지방’의 의미를 미루어 밝힌 것이므로 공부론의 확장이며, 제9 총도(總圖), 제10 체용(體用)은 작가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제1부터 제8까지는 김재석 자신의 독창적 학문과 사유의 산물이라고 보기보다는 간재의 가르침을 도설로 풀어 설명한 것이고, 제9는 간재의 가르침에 김재석이 보충한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제10은 김재석 스스로 지어 도합 십도(十圖)를 구성한 것이다.

「자경십도」의 내용은 대부분 ‘소심존성’의 성리학적 의미를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발명하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유학자들이 견지해야 할 공부를 비교적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경십도」는 아마도 간재의 문집 곳곳에 보이는 ‘모모자경(某某自警)’이라는 글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적을 간재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컨대 제1 사일도(事一圖)의 내용은 「간재사고(艮齋私稿)」권32에 보이는 「원적사자경(圓寂寺自警)」과 그 취지가 매우 흡사하다. ‘사일도’의 오른편에 위치한 해설에서

“우리 인간은 천지로부터 지선(至善)의 본성을 품수받았고 성현으로부터 인의(仁義)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으며 임금과 어버이에게는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를 입었다”

라고 했는데, 간재의 「원적사자경」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보인다. 즉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먼저 천지와 부모와 임금과 스승께서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가르쳐주신 은혜를 생각해야 한다”

고 했는데, 이 두 구절은 그 내용과 논리가 일맥상통한다.

김재석이 밝히고 있듯이, 「자경십도」에는 간재의 ‘소심존성설’을 해명한 도설이 있다. 예컨대 제1 사일도(事一圖)에서

“지금은 이기(理氣)와 의리(義利)의 분변에 밝고, 성심(性心)과 본말(本末)의 영역을 구분하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극복하는 공부가 성현과 군부의 마음에 이와 같음이 있어야 할 뿐이다”

라고 했다.

이 구절은 「자경십도」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특히 성(性)과 심(心)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성을 지존무대(至尊無待)의 본체로 심은 지령불매(至靈不昧)의 묘용으로 그 관계를 확정한 것은 간재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의 요체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을 절대적인 본체로 간주함으로써 심보다 우선하는 지위를 부여한 것은 구한말 ‘심’을 위주로 전개되던 성리학, 특히 한주 이진상(李震相)과 화서 이항로(李恒老) 등의 입장에 대한 간재의 반격과 비판의 핵심이론이다. ‘사일도’의 이 구절은 간재의 ‘성사심제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자경십도」 제3 삼요도(三要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요도에서 김재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의 본체는 비록 선하지만, 그렇지만 성을 받들어 따라야 하는 것이지 갑자기 도체가 될 수는 없다. 기질의 본체는 비록 맑지만 마음을 가리지 않아야 하며 갑자기 영각(靈覺)이 될 수는 없다.”

삼요도는 간재의 성리학적 입장, 즉 기호 낙론의 입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심은 성을 받들어 따라야 한다”는 주장과 “기질은 마음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삼요도에서 기호 낙론의 입장을 따르는 간재의 입장과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김재석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김재석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에 의해 침탈되고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조선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때로는 적극적으로 독립활동에 참여하며 주어진 역사가 아니라 스스로 주도하고 해석하는 역사를 살아왔다. 재야 유학자로서 그가 보인 우국충절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에서 매우 값진 의미를 갖는다. 비록 그의 학문이 독창적인 성리학 체계와 의미를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간재의 학술을 계승하고 기호 낙론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서 김인후와 자연당 김시서로부터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가학을 지키고 선조들의 규범과 가치를 끊임없이 발양하는 그의 행동은 향촌 사회의 모범을 수립하려는 사림 본연의 일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가 생을 마치기 불과 몇 년 전에 지은 한편의 시를 은미하면서 그가 평생 추구했던 삶과 학문의 목표가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를 확인해 본다.

 

돌을 쪼아 옥 만들기를
先君期待意

선군은 기해댔건만
將石欲玉成

머리 하얗게 센 오늘까지도
白首今何事

본성 회복하는 일 밝히지 못했네.
復初尙未明

 

[참고문헌]

「월담 김재석의 생애와 학문」(간재학논총「제6집, 소현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주현(閔冑顯)1808∼1882


민주현(閔冑顯)                                                             PDF Download

 

1808(순조 8)∼1882(고종 19).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

관은 여흥(驪興). 자는 치교(穉敎), 호는 사애(沙厓). 아버지는 문행(文行)이 뛰어나서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울산김씨(蔚山金氏)로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인 김방엽(金邦燁)의 딸이다.  민주현은 1808년에 동북현 사평리집에서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학문은 주로 아버지로부터 배웠으며, 송치규(宋穉圭)·안수록(安壽祿)·장헌주(張憲周)·기정진(奇正鎭)·홍직필(洪直弼) 등을 두루 사사하였다. 7살 때에 아버지로부터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 한 번 배우면 책을 덮고 암송하는데 한 글자도 틀림이 없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14세 때에는 당․송․원․명과 우리나라 여러 시인 중 좋은 시를 뽑아 시집을 엮어 그 이름을 「박동집(泊董集)」이라고 하였다.

16세 때는 「시전(詩傳)」을 읽고, 18세 때에는 「주역」을 읽었으며, 19세 때에는 관례를 행하였다. 20세 때에는 양호영(梁灝永)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혼례를 올렸다. 21세 이후 성리서를 잠심강구하여 종제 민삼현(閔三顯)과 함께 조계사와 영봉사에서 글을 읽었다. 29세 때에는 구례 향시에 응하여 백형 민갑현(閔甲顯)과 함께 나란히 합격하였다. 그 후 송치규(宋穉圭)를 찾아가 교유하였고, 안수록(安壽錄)과 장헌주(張憲周)의 문하에 드나들며 교유하였다. 39세에 장성의 탁곡에서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뵈었는데, 민주현의 식견이 남다름을 알고 기정진이 존경하고 우러러보게 되어 도의로써 교우를 허여하였다.

40세에는 홍직필 선생을 알현하였다. 44세의 늦은 나이로 경과정시(慶科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45세(1852)에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고, 이 해에 스승인 홍직필 선생이 상을 당하여 광주 구수동에 가서 곡을 하였는데 홍직필의 장례를 집행함에 있어서 알맞게 헤아리고 예절의 규정이 곧고 치우침이 없으니 사방에서 보는 이들이 칭송하였다.

46세(1853)에는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1854년 조경묘별검(肇慶廟別檢)을 지냈다. 그 뒤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형조좌랑․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봉상시정(奉常寺正)․병조정랑․사간 등을 거쳤다. 64세 때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병조참판, 67세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여러 스승을 사사하였으며 66세에 다시 임헌회(任憲晦)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민주현은 향촌사회에서 올바른 예법이 보급될 수 있도록 앞장섰다. 특히 신암(申巖)과 더불어 12동지회를 결성하고 상가(喪家)에 만연된 허례허식과 낭비의 폐습을 고치지 위해 향음례(鄕飮禮)를 제정, 검소하고 실용적인 상장제례(喪葬祭禮)를 보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도록 권장하였다. 이때 저술된 「초학지남(初學指南)1권은 학동들의 교육지침서가 되었다.

민주현은 형제간에 우애가 심히 돈독하였고, 자식을 가르침에 의로운 방법으로 하였으며, 친하고 멂에 구애받지 않고 반드시 공경하고 예의를 다하였다. 행동엥 절제와 엄숙함이 따랐고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학문하는 일을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민주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글이 있다.

“무릇 날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나의 분수 안에 있으니 어찌 반드시 종일토록 독서한 연후에야 학문을 한다고 하겠는가? 선비라는 자는 마땅히 제때에 학문에 힘써서 자신의 덕을 쌓고 여력이 있으면 문장을 익혀 자신의 재주에 통달해야 하니 잘 쌓이고 이미 두터우면 절로 감동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출사(出仕)하여 임금을 섬길 때는 계책을 내고 생각을 밝혀 나라를 걱정하고 공익에 힘쓰며 항상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뜻으로 삼아 그 뜻에 합치하지 않으면 몸을 거두어 물러나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주현은 화순지방을 대표할 만한 선비이자 학자로 홍직필의 문인이며 도학과 절의가 출중하여 유림의 지표가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직시 국방과 교화에 대한 정책을 주장하였고, 만년에는 학문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사애문집」 6권이 전한다.

사애문집(沙厓文集)」은 조선 말기의 학자인 민주현(閔胄顯)의 시문집이다. 6권 4책으로 목활자본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기우만(奇宇萬)이 편집한 것을 1933년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최익현(崔益鉉)의 발문이 있다.

권1·2에는 사부(辭賦) 1편, 시 234수가 있고, 권3에는 소 7편이 있으며, 권4에는 서(書) 50편이 있고, 권5에 잡저 13편이 있으며, 권6에는 서(序) 제2편, 기 11편, 제발(題跋) 3편, 명 제2편, 혼서 1편, 축문·제문 각 4편, 묘표 1편, 행장 제2편, 유사·묘지 각 3편이 있으며, 별책 부록에는 민주현의 인물 정보를 알 수 있는 연보·행장·묘갈명·묘지명·유사가 수록되어 있다. 사부는 「화도연명귀거래사(和陶淵明歸去來辭)」이다. 시에는 계절을 소개로 한 시, 선암사·송광사·계룡산 갑사·지리산 쌍계사 등을 소재로 한 기행시, 매화[梅]·대[竹]·국화[菊] 등을 소재로 한 영물시(詠物詩), 홍직필(洪直弼)·기정진(奇正鎭) 등 스승에게 올린 증여시, 이수광(李睟光)·이색(李穡)·권필(權韠)·김인후(金麟厚) 등 문인·학자들의 시에 대한 화운시(和韻詩), 만시(輓詩) 등이 있다.

소 가운에 「면성학정방례소(勉聖學正邦禮疏)」는 학문을 권장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도모하고 인륜 도덕을 준수하자는 내용이다. 「청양병위이비완급소(請養兵威以備緩急疏)」는 국가가 무사할 때 미리 군병을 조련했다가 비상시에 대비하자는 상소문이다. 이 밖에도 과거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시정을 요구한 「진과폐소(陣科弊疏)」와 문란해진 삼정을 바로잡아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게 하자는 「삼정대책(三政對策)」 등이 있다.

잡저의 「책제(策題)」에서는 정법(政法)의 근본적 개혁을 경장(更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정책의 변화를 역사적 고찰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몽양편(蒙養篇)」은 후세 교육을 위해 만든 오륜(五倫) 해설서이다. 경서와 심성에 대한 내용으로 「대학도설(大學圖說)」과 「심전설(心田說)」이 있다. 그밖에 「단사설(丹史說)」·「학자오요(學者五要)」·「직중쇄언(直中瑣言)」·「방원도(倣原道)」·「독강목당중종기(讀綱目唐中宗記)」 등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수해(睡解)」는 잠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기(記)의 「태허사기(太虛舍記)」·「연와기(然窩記)」·「봉강서원이건기(鳳岡書院移建記)」·「문천재기(文泉齋記)」·「지헌기(芝軒記)」·「임대정기(臨對亭記)」·「효자손공정려기(孝子孫公旌閭記)」·「유쌍회정기(遊雙檜亭記)」·「즉이당기(則以堂記)」 등은 화순 지방의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참고 자료가 된다.

조선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사정을 살피고 유학자의 정치 참여 의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19세기의 호남 인물인 민주현의 개인 문집으로 당시 국내ㆍ외적으로 혼란기를 맞이하여 유학자인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학맥과 인맥을 통해 인적 교유망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참고문헌]

「사애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