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심(崔秉心, 1874-1957)


 

최병심(崔秉心, 1874-1957)                                  PDF Download

 

병심(崔秉心, 1874-1957)은 전라북도 전주 출신으로 이병우(李炳宇)에게 배웠으며 간재 전우(田愚, 1841-1922)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전주 지역에서 널리 ‘최학사’ 혹은 ‘최학자’로 불리던 최병심은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등과 함께 전북 유학의 삼재(三齋)로 꼽힌다. 스승인 간재 전우가 사망한 뒤에는 옥류동(지금의 한옥마을이 있는 교동)에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자들에게 유교의 도학정신과 함께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던 그는 국가가 무너져도 도를 지키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고 하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요즘은 전주한옥마을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1874(1세, 고종 11년)에 전라도 전주에서 벽계(碧溪) 최우홍(崔宇洪)과 이천서씨(利川徐氏) 서학문(徐鶴聞)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존(敬存), 호는 금재(欽齋)이다. ‘欽齋’는 보통 흠재로 읽히나 최병심은 ‘흠’자를 옛날 음인 ‘금’으로 읽었다.

1889(16세, 고종 26년),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 때부터는 청하(靑下) 이병우(李炳宇)의 문하에 들어가 사서(四書) 및 주역(周易), 춘추(春秋), 서경(書經) 등을 배웠다.

1897(24세, 광무 1년), 태안 안면도의 연천서당(蓮泉書堂)으로 가서 간재 전우의 제자가 되었다. 전우는 그에게 서경의 ‘흠명문사(欽明文思)’에서 ‘흠(欽)’자를 따서 ‘흠재’라고 호를 지어 주었다. 최병심은 ‘흠’자를 옛 음인 ‘금’자로 읽어 자신의 호를 ‘금재’라고 하였다. ‘흠명문사’란 중국 고대 요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말로 그의 공덕은 무척커서 이르지 않는바가 없고 문장과 생각이 밝고 심원함을 뜻한다.

1904(31세, 광무 8년)에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이해 6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 무렵 옥류동(玉流洞, 지금의 전주 교동)에 서당 염수당(念修堂)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자들에게 유교의 도학정신과 함께 항일정신을 심어주는데 힘썼다.

1910(37세, 광무 14년),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였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된 치욕을 당하여 그는 발산(鉢山)에 올라가 하루 종일 통곡하였다. 발산은 태조 이성계의 선조 일가가 모여 살던 자만동에 있던 산으로 조선 왕조의 발상지였다. 이후에 그는 자신이 기거하던 옥류동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옥류동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수양산에 비유하였다.

1912(39세, 일제시대), 항일의병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전주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7(44세, 일제시대), 당시 도지사 이진호가 일제의 지침에 따라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에 잠업시험장을 조성한다는 구실로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땅을 팔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최병심은 단식으로 항의하였으나, 경찰은 토지수용령을 발동하여 순경 30여명, 소방서원 90명 등 120여명을 최병심의 집으로 보내 강제로 가옥을 철거하고, 불태웠다. 불속에서 저항하던 그는 강제로 구출되고, 항의하던 가족들은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였는데 부인 통천 김씨는 이 일로 중상을 입어 1919년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강탈당한 땅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 사건은 나중에 한전(韓田)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땅을 빼앗긴 사건이란 뜻이다. 비록 조그마한 개인의 땅이지만 조상들이 더불어 살았던 조선의 강토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이 일은 ⌈염재야록(念齋野錄)⌋에 기록되어 있다.

1918(45세),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제향을 그만둘 수 없다고 주장하다 괴산경찰서에서 7일 간 구속당하였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원군을 파병해준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었다. 오늘날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있었다.

1922(49세), 부모 섬기듯이 모시던 스승 전우(田愚)가 사망하였다. 간재는 선비가 난세에 처했을 때는 수의(守義)를 하든지, 창의(倡義)를 해야한다고 하였는데, 최병심은 ‘수의’의 길을 택하여 평생 동안 근신하고 일제에 항의하였다.

1925(52세), 전라선의 철교 개설로 한벽당이 철거 위기에 처하자 항의하여, 터널로 개통하도록 하였다. 한벽당은 조선왕조의 개국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이 별장으로 건립한 곳으로 전주 8경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교동)에 위치하며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이다.

1937(64세)에 모친상을 당했다. 11월에 조희제(趙熙濟)의 『염재야록(念齋野錄)』에 서문을 쓴 일로 경찰서에서 저자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렀다. 「염재야록」은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秘史)를 엮은 책으로 최병심은 거기에 민족자존의 의지를 밝힌 서문을 썼다.

1941(68세), 24년 전에 일제에 빼앗겼던 땅을 되돌려 받았다. 소위 ‘한전사건’이 매듭지어졌다.

1948(75세), 해방이 된 뒤, 성균관 부관장에 추대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강학에 힘썼다.

1957(84세) 옥류동 염수당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 『흠재문집(欽齋文集)』 30권 14책이 있다. 그는 태극(太極), 심성(心性), 이기(理氣), 의리론(義理論) 등 많은 문장을 지었으며, 사람이 음양, 흑백을 분별할 줄 모르면 소인·난적이 되기 쉽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 간재학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켰는데, 지극히 높은 것은 성(性)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영묘한 것은 마음(心)이지만, 마음은 때때로 욕망에 흐르기 쉬우니 경계해야한다고 하였다. 또 성을 높여 도(道)를 스승으로 삼고 성경(誠敬)으로 마음을 조절하면, 성과 마음이 일치되어 사람이 곧 천리(天理)에 부합된다고 강조하였다.

1980년에 국민훈장 애족훈장을 추서 받았다. 2007년에는 전북대 박물관의 ‘전주한옥마을 재발견’ 특별전에서 유물이 공개되어 관심을 모았다. 이를 계기로 그의 유물관을 한옥마을에 건립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참고자료>

조기대, 「최병심」,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명엽, 「한옥마을의 새로운 발견-최학자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열린전북」, 2008년 7월호

이화정, 「‘최병심 유물관’ 한옥마을 건립을」, <전북일보>, 2008.7.27

이상호, 「금재 최병심의 학문과 사상」, 「동양철학연구」61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