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金時敏)


김시민(金時敏)                                                              PDF Download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은 안동김씨 가문 출신으로 의빈부의 도사, 진산 군수 등을 역임한 조선시대의 관리다.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시문이 뛰어났다. 나이 들어서까지 관직에 나가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사회적,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펴지 못한 울분을 시문에 의탁하여 많은 시를 썼다. 학문적으로는 스승들의 입장을 따라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취했으며 명나라 왕양명의 문장과 사상에도 깊은 공감을 표시하였다.

1681년(1세)
숙종 7년, 10월 12일에 김성후(金盛後)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호조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모친은 임천(林川) 조씨(趙氏) 조원기(趙遠期)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도정(都正)을 지낸 김수일(金壽一)이다. 김시민은 2남 2녀중 장남으로 동생은 도사(都事)를 지낸 김시진(金時愼)이다.

김시민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사수(士修), 호는 동포(東圃), 동포거사(東圃居士), 초창(焦窓) 등을 사용하였다. 김시민의 집안은 소위 경화사족(京華士族) 안동김씨 가문으로 부친 김성후는 시를 잘 써서 이름을 날린 문인이다.

1694년(14세)
집안의 어른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등에게 문장과 학문(성리학)을 배웠다. 이 때문에 그는 낙론계의 철학관을 수용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동일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성장해서는 홍세태(洪世泰), 이병연(李秉淵), 신정하(申靖夏) 등과 교류를 하였는데 김시민 역시 부친처럼 시를 잘 썼다. 특히 당송시대의 유풍이 담긴 고시를 잘 썼다.

그의 아들 김면행은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부친은) 시 짓는 것을 좋아하였다. 어려서부터 시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아 우리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두 분 선조께서 자주 칭찬해주셨다. 만년에는 이사천(李槎川, 이병연李秉淵)과 나란히 쌍벽을 이루어 당대의 으뜸이 되어 마침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東圃集跋」)

 

1697년(17세)
해주최씨(海州崔氏) 최선(崔渲)의 딸과 결혼하였다.

1700년(20세)
이해 형을 따라 강화도에 가면서 「기행시도장(記行示道長)」을 지어 홍세태(洪世泰)에게 주었다.

1702년(22세)
최씨 부인상을 당하였다. 부인과는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이후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현감(縣監)을 지낸 황만(黃)의 딸을 다시 맞이하였으나 역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1704년(24세)
부친이 근무하고 있던 석성(石城)지방에 갔다가 병에 걸렸다. 이 때의 병으로 그는 학문적인 뜻을 접게 되었다. 아들 김면행은 부친이 시를 즐겨 쓸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렇게 전했다.

“사람됨은 실로 자상하고 결백하며 인륜에 독실하였다. 또 일찍부터 사문(師門,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옛사람들의 학문(유학)을 사모하였다. 비록 중간에 병에 걸려 그 뜻을 끝까지 추구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 어찌 일개 시인이 되는 것을 기꺼워하는 사람이었겠는가?(「東圃集跋」)”

 

1707년(27세)
이해 봄에 증조할아버지 김광욱이 행주 덕양산(德陽山) 지은 귀래정에 가서 「춘유귀래정기(春遊歸來亭記)」를 지었다. 이 문장은 당시 둘째 큰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고 친척들과 놀았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1708년(28세)
스승 김창협이 사망하였다. 김창협은 성리학 연구에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김창협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김시민은 학문적으로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가? 그 아들은 그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부친(김시민)은 학문에 대해서는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간혹 훌륭한 문장이 있다. 예컨대 성(性)에 대해 논한 글 한 편으로 말하자면 학문이 심오하다고 이름난 자들도 혹 도리어 한 수 접어주는 바가 있었다. 단순히 고금의 시인들 가운데 보기 드문 사람이 되는 데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어찌 터득한 바가 없으면서 그럴 수 있는 것이겠는가? 틀림없이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1713년(33세)

10월, 부친이 사망하였다. 부친상을 마치고 「제석감회(除夕感懷)」를 지었다. 한해가 저물 때 자신을 돌아보고 지은 시이다. 이후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1715년(35세)
김창흡에게 부친의 묘표를 부탁한 뒤에 그것을 받아 읽고 답서(「上三淵」)를 보냈다.

1717년(37세)
입양한 아들 김면행(金勉行, 1702∼1772)이 15세가 되어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김면행의 생부는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된 김시서(金時敍)이다. 김면행은 1755년에 을해정시문과(乙亥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벼슬은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1722년(42세)
친척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이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서 그의 형 김창협을 스승으로 모신 김시민은 세속과 더욱 멀어져 은거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지금 세상일은 어떤가? 종묘사직을 어이할까? …… 귀밑머리 늙을 때 아니지만, 세상의 큰 변화를 많이 보았다. 구구한 소원이 있다면 평생토록 다툼을 보지 않는 것. ”(「時事」)

 

1725년(45세)
영조가 즉위하였다. 다음해 11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즈음 김도수(金道洙, 1699-1733)가 김시민을 방문하여 만난 뒤,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김시민 공을 배알했더니 그분은 의분이 복받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비의 삶은 구차하지 않아야 하며 독서와 구도(求道)가 아니라면 어디에 마음을 쓰겠는가? 무릇 문장은 부득이하여 쓰는 것이고 즐겨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나의 문장을 읽고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가 또 어찌하겠는가?’ 그 말씀이 마치 슬픈 듯하였다. 공 집에는 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고, 노란 국화가 그 사이에 피어 있었다. 술잔을 들고 달을 바라보며 오로지 홀로 늙어가며 ‘도연명은 나를 알아주겠지’라고 하셨다.”(김도수 『춘주유고』, 김영주, 3쪽 재인용)

 

1732년(52세)
이해 여름에 주위 사람들의 추천으로 선공감(繕工監) 가감역이 되어 처음으로 벼슬을 하게 되었다. 10월에 선공감 감역으로 승진하였다.

이해에 「차남생학거운(次南生鶴擧韻)」을 지었다. 나이를 먹고 처음 벼슬을 하게 된 심정을 읊은 시이다.

1733년(53세)
3월, 사옹원의 주부가 되었다. 다음해 1월, 장례원의 사평에 임명되었다. 9월, 사직서 영, 종묘서 영 등에 임명되었다.

1735년(55세)
2월에 낭천(狼川)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이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거사비(去思碑)를 세워서 그의 공적을 기념하였다.

김시민은 나이 들어서 그림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다. 그러한 자신의 취미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一代六法序」)

“병중에 할 일이 없어 그림 수집에 마음을 붙였다. 모은 것이라고는 오직 지금 시대의 그림이고 옛 것은 모으지 않았다. 손님 중에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묻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답하였다. ‘내가 옛 그림을 수집하지 않고 지금의 그림만을 수집하는 것은 대개 특별한 뜻이 있고 또 의미가 있다네. 자네에게 들려줄까? 세상에 그림 수집벽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대체로 지금의 것을 버려두고 옛 것을 쫓으며, 먼 시대의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시대의 것을 천시한다네. 심지어 해어진 비단조각에 그린 그림이나 떨어진 종이에 그린 그림, 불에 그을린 채색화나 좀먹은 묵화까지 천금의 값으로 머나먼 만리타국에서 사와서 수놓은 비단으로 표구를 하여 화첨이나 족자로 만들고는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이것은 당나라 때의 그림이다, 이것은 송나라 때의 그림이다, (중략)

그러나 오래 될수록 그리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욱 그 참됨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허다히 미혹된다네. 지금 내가 소장한 그림은 위로는 선배, 어른, 중간은 동년배, 아래로는 후배나 천인 등으로 모두 나의 한 세대를 벗어나지 않지만 유명한 화가의 것들이지. 그 집에서 나온 그림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에게 청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니 다시 참과 거짓이 서로 뒤섞일 염려가 있겠는가?’”

 

1739년(59세)

2월, 부인 황씨(黃氏)의 상을 당하였다. 3월, 사옹원 주부가 되다. 봄에 왕이 친히 농사짓는 과정을 묘사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친경가(親耕歌)」를 지었다. 7월, 장례원 사의에 임명되었다.

1740년(60세)
의빈부의 도사에 임명되었다가, 7월에 진산(珍山) 군수에 임명되었다.

1747년(67세)
3월 20일, 평소 앓던 천식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양주(楊州) 선영에 묻혔으며, 조정에서 이조 참의에 증직하였다.

1757년에 문집인 『동포집(東圃集)』(8권 4책)이 활자본으로 발간되었다. 아들 김면행의 부탁을 받은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편집을 하였는데, 실제 원고 중에 3분의 1정도는 삭제되어 발간되었다. 이병연은 김시민이 생전에 가깝게 교류하던 문인이다.

김시민의 시풍에 대해서 아들 김면행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부친은 재능을 지니고 강직하게 살다가 결국 곤궁하게 노년을 보냈다. 세상에 쓰이지 않다 보니 유독 시에만 재능을 오롯이 쏟아 붓게 된 것이다. (중략) 그러다 보니 그 내용에 흥취가 넘치거나 호탕하고 분개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만년에는 더욱 정심(精深)하고 독실하며 경계가 진지하고 말이 핍절하여 혼연히 일가를 이루었다. 이런 이유로 공에 대해 논하는 세인(世人)들은 단지 그의 시가 경외할 만하다는 것만 알고 시보다 그 사람이 더 높이 쳐줄 만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니, 그래서 나는 그가 종내 지우(知遇)를 받지 못한 데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東圃集跋」)

 

<참고자료>

김영진, 「김면행」,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김영주, 「동포 김시민의 문예관 연구」, 『동방한문학』44, 2010
안유경, 「율곡학맥 인물이야기 – 김시민」, <율곡학 프로젝트>
서인숙, 「동포집해제」, <한국고전 종합DB>,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