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의 붕당 조정 노력


박순의 붕당 조정 노력

 

선조실록』1581년(선조14) 5월 24일의 기록이다.

의정 박순(朴淳, 1523~1589)이 말하였다.

“동서(東西)의 설 (동인과 서인으로 양분된 초기 붕당의 견해)은 항간의 잡담이니 조정에서는 거론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 이것 때문에 쓸만한 인재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김효원(金孝元)은 그 재능이 쓸만한 사람인데 버리는 것은 아깝습니다 .요즘 동서의 설이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논박을 당한 자와  일정한 보직이 없이 한직(閒職)에 밀려난 자는 모두 동서의 설에 따른 희생자들 입니다.  이제와서 만약 김효원을 불러들여 쓰지 않는다면 동서의 설을 핑계로 삼는 자가 더욱 더 많아 질 것입니다.”

듣고있던 선조가 말하기를,

“비록 김효원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쓸만한 사람이 없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가 말하였다.

“한 사람을 쓰고 안쓰는 것이 비록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동서의 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선비들이 서로 돌아보며 의심하고 꺼려하여 안정 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동서로 구별하는 상황을 말끔히 씻으시어 털끝만한 흔적도 없애야 합니다.  김효원이 만약 재능이 없다면 버린다고 해도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그러나 김효원의 재능이 쓸만한데도 동서의 설에 얽매어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선비들이 불안하게 여길 수  있는 근원이 될 것입니다.”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정3품) 유성룡(柳成龍)과 수찬(修撰: 홍문관의 정5품) 한효순(韓孝純)도 김효원의 쓸만한 상황을 되풀이 해서 전해 올렸고 옥당(玉堂:홍문관의 부제학·교리[校理]·부교리·수찬·부수찬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은 차자(箚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로 잘못을 따져 아뢰기까지 하였으나 임금이 끝까지 석연(釋然:의혹이 말끔히 해소 됨)치  않게 여겼다.

동서의 붕당을 뜻하는 동서의 설은 겉으로 볼 때 심의겸과 김효원의 묵은 사적인 감정에서 출발했지만,  여기에는 본질적이면서 구조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 어 느 정치 상황에서 늘 있는 것으로 구세력과 신진 세력의 대립이 그것이다.

당시 재상(宰相)을 중심으로 한 구세력을 대표하던 인물이 심의겸이고,  김효원은 새롭게 등장하는 신진세력의 구심점 이었던 것이다.  박순 또한 구세력에 속한 인물이어서 이런 정치 지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처럼 그도 어쩔 수  없이 어떤 정치적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지만,  한나라의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영의정으로서 조정에 일어난 일을 공정하게 조정하거나 처리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박순은 누구인가?
박순은 일찍이 후대에 기철학자로 알려진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문하에서 훗날 동인(東人)의 영수로 추대된 허엽(許曄,
1517~1580)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 뒤 문과에 장원한 뒤 벼슬길에 올랐는데, 1561년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정 4품)로 있을 때 명종 때의 외척으로 권세를 틀어진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간 적이 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1565년 대사간(大司諫: 사간원의 수장. 정 3품)이 되어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수장. 종 2품)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외척 일당의 횡포를 없앤 주역이 되었다.  그 뒤 승승장구하여 벼슬이 올랐다.

문제는 1572년 우의정이 되었을 때 당시 대사간 이었던 허엽(許曄)의 탄핵을 받아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일이 있었다. 후세 학자들 가운데는 이로부터 당론(黨論)이 드디어 나누어 졌다고 보기도 한다.  이때가 본격적인 동서붕당이 생긴 3년 전의 일이다.
이런 허엽과 대립하는 그를 중심으로 자연히 서인들이 집결하여 동서붕당이 서서히 형성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동서붕당의 발단은 김효원과 심의겸에서 출발 하였지만,  그 대표자가 화담 서경덕 문하에서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붕당의 원인이 사적인 감정이나 원한의 문제가 본질이 아니라 정치 세력간의 대립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김효원과 심의겸은 단지 사건이 촉발되는상징적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좌우간 그 뒤 박순은 1579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는데 율곡과 성혼(成渾)을 옹호하다가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학술적인 면에서 박순은 중년에 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을 스승으로 섬겼고 율곡과 성혼을 깊이 사귀었으며,  같은 지역 출신이자 퇴계와 편지로 논변을 벌였던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도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는 성리학에 능통하고『주역』에 해박하였다고 하며, 특이한 점은 이황이 그랬듯이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 창시한 양명학(陽明學)의 그릇되었음을 진술하였다고전한다.

앞의 선조 실록에서 이렇게 박순과 율곡이 김효원을 쓰자는 건의 는그를 지방의 한직(閑職)에서 중앙의 요직으로 불러 들이자는 말이다. 이렇게 말한데는 일정한 배경이 있다.  앞의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우의정 이었던 노수신이 율곡의 의견을 받아들여 김효원과 심의겸을 지방의 관리로 내보내자는 생각을 선조에게 올렸고, 그래서 처음에 심의겸을 개성 유수로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같은 외직이라도 개성과 부령(富寧)은 서울 근처와 함경도의 변방이니, 이 결정은 누가 보더라도 불공평했다.  그래서 율곡의 건의로 김효원을 삼척부사로 발령을 냈고,  이어 심의겸은 전주 부윤으로 보냈다.

이 일로 동인은 율곡이 서인을 편든다고 하고,  서인은 노수신이 동인을 편든다고 불평을 했다. 사실 율곡은 김효원에게 병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옹호하며 두 사람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입장에서 선조에게 말했으나,  어째든 일의 결과가 삼척과 전주라는 서울과 거리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동인들로부터 오해든 비난이든 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였고,  그 때문에 심적인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이 점이 반영된 것이 앞의 실록의 내용이다.  그때까 지만 해도 김효원은 지방의 한직을 전전하며 중앙 정계에서 멀어져가고 있었지만,  김효원의 입장을 봐서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동인들의 시각이나 반감을 율곡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순 또한 조정의 수장인 영의정으로서 율곡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 세력을 두둔할 수 없는 입장 일 뿐만아니라,  두 집단 간의 대립으로 정치가 파탄지경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정치적 대립이 심할 때는 집권 여당이 더 많이 양보하고 공정하게 처리해야 정치의 파행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일의 성공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정치판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비판자들의 몫이 아니라,  정치를 책임진자들의 그것임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일의 결과는 그 일을 제안한 당사자가 그 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