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겸의 파직을 청함


심의겸의 파직을 청함

 

선조수정실록』1581년(선조14) 7월 1일의 기록이다.

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가 심의겸을 파직 시킬 것을청하였으나 선조가 따르지 않았다.  이때 이이는 조정에 있으면서 점차 임금의 총애와 신임을 받게 되고 선비들의 공론도 그를 중시하였는데,  김우옹·이발 등과 함께 조정의 논의를 화합시키려는 계책을 세웠다.  정인홍(鄭仁弘)은 강건하고 독실하다고 자임(自任)하여 남을 공박하는 일에 과감하였으나,  또한 이이에 의하여 일을 함께하게 되어 의견이 서로 통하였다.

그런데 정인홍 등이 우성전(禹性傳)·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한 이후  당시 사람들은 이이 등이 이 일을 주장한 것으로서 동인을 억누르고 서인을 부축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불평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발은 평소부터 심의겸을 증오하였으므로 늘 죄를 드러내어 탄핵하려고하였다. 이때

“심의겸이 선조가 즉위하던 초기에 남모르게 외척의 신분을 이용하여 상(喪)을 당했을 때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벼슬하기를 희망하였다.”

라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는데,  이 말은 인정과 도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흔적도 없었다. [우리나라 제도에 전란이 일어났을 때가 아니면 장수와 재상이나 공이 있는 신하나 임금의 친척이라 하더라도 부모의 상중에 있을 때는 벼슬을 시키는 전례가 없고 당하(堂下: 정 3품 이하의 관리)의 이름난 관리들은 전란이 일어났더라도 모두 상중에는 벼슬을 사양한다.] 이발은 정인홍이 기가 드세어 일을 논할 적에 진위를 따지지도 않고 무슨 말을 듣기만 하면 곧바로 흥분한다는 성격을 알고서,  이 말로 그를 충동시키자 정인홍은

“맹세코 이런 적(賊)과 함께 같은 조정에 있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이와 성혼이 말리면서 말하였다.

“이 말은 인정과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절대로 믿어서는 안되오. 심의겸은 오늘날에 있어서 어미를 잃은 병아리와  같고 썩은 쥐와  같은 처지이니 그를 권세가 없는 한가한 지위에 있게 하더라도 나라를 위할 수 있소.  만약 그를 탄핵하면 사람들이 의혹을 품게 되어 부질없이 사단만 일으키게 될 것이오.”

그리고 김우옹도 불가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발은 이들의 말을 모두 듣지 아니하고 정인홍에게 한번 결단하라고 권하였으나 정인홍은 이이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자 혼자서 탄핵하는 논의를 꺼내기는 어렵다고 여겨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발이 이이에게 설득하기를

“지금 선비들이 공(公: 이이를 말함)을 깊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공이 심의겸을 버리지 않기 때문인 것 같소.  공이 이 사람을 버려서 끊어버린다면 이 시대의 선비들이 모두 공을 믿고 따를 것이며,  서인편의 좋은 선비들도 또한 화합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 나랏일은 오히려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이 사람의 탄핵을 논하지 않으면 정인홍도 관직을 버리고 돌아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소?”

라고 하니 이이가 그렇게 여겨 성혼에게 물었다.

“오늘날 근거 없이 심의겸을 논하는 것은 전혀 마땅한 일이 아니지만,  지금 선비들은 본래 내가 심의겸의 편만 든다고 의심하네.  만약 정인홍이 나와의 의견 대립을 빌미로 떠나간다면,  저들은 반드시  이것을 내세워 나를 공격할 것이네.  그렇다고 내가 떠나가 선비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나랏일은 더욱 낭패스럽게 될 것이네.  지금의 형세는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야 할 것 같네.”

성혼은 말리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거야말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격이라 하겠다.”

라고 하였다.
김우옹이 이이에게 단지 차자(箚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을 이용해 한 번 논죄하고서 중지하라고 권하였으나 정인홍이 따르지 않자,  이이는 끝내 정인홍의 말을 따라 자신이 심의겸의 죄를 논하는 글을 초안했다.  거기서

“심의겸은 일찍이 외척으로 오랫동안 조정의 논의를 주도해 오며 권세를 탐하고 즐겼으므로 선비들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조정의 의견이 흩어져 화합할 수 없게 된 것은 실로 이 사람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의(公議)가 고르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데,  아직도 그가 확실하게 배척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호오(好惡)가 분명치 못하고 인심이 의혹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파직을 명하여 호오를 밝히고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라고 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이가 정인홍에게말하기를,

“이 글이 합당하고 공평하고 바르니 연계(連啓: 임금께 어떤 글에이어 계속해서 올리 는글)하는 글에 다시 딴 내용을 증가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사간원에서 잇따라 아울러 글을 올렸고 옥당(玉堂:홍문관의 부제학·교리[校理]·부교리·수찬·부수찬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에서도 차자를 올려 공론을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는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이 기록을 보면 율곡이 어쩔 수 없이 선비사회의 다수 의견을 존중하여 조정의 화합을 꾀하려고 이발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심의겸에 대한 유언비어를 탄핵의 근거로 삼은 것은 아니고,  그 이유를 다소 추상적이게 ‘권세를 탐하고 즐겼다’는 점만 지적하였다.
이 점은 심의겸에게 소문과 같은 잘못이 있다고 믿어서 이발의 의견을 따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앞의 기록의 ‘정인홍 등이 우성전(禹性傳)·이경중(李敬中)을 탄핵했다’ 는 말에서 먼저 이경중의 경우를 보자.   같은 해(1581년) 정여립(鄭汝立)이 당시 명망이 있음을 보았으나 이경중이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극력 배척하며 청현(淸顯: 학식과 문벌이 있으며,  인품이 청렴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것.  혹은 그러한 관직을 뜻함)의 자리에 두지 말라고 논했다가,  도리어 정인홍·박광옥(朴光玉)·정탁(鄭琢) 등 동인의 언관(言官)들로부터 탄핵된 것을 말한다.

우성전의 경우는 이건창의『당의통략』에 아래와  같이 전한다.  그가한 기생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가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그 기생이 머리를 풀고 그 집에 들락거렸다.  이발이 우성전의 집에 조문을 갔다가 우연이 그것을 보고 정인홍에게 말하자,  그는 우성전이 같은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탄핵하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동인들은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율곡이 정인홍을 시켜서 한 일이라고 의심하였다는 것이다.
또『당의통략』에서는 아래와  같이 전하기도 한다.

그 후 한참 뒤 선조의 종친인 경안군(慶安君) 이요(李寥)가 선조와 대화하다가

“모든 것[붕당을 일컬음]이 유성룡·이발·김효원·김응남등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나라를 그르치는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라고 결론 짓자,  선조가 이 말이 옳다고 여겨 이조전랑 자리를 전임자가 추천하는 법을 폐지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동인들이 두려워하고 기가 죽었으며 유성룡 등도 기가 죽어 물러났다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은 또

“경안군 이요가 이이의 가르침을 받아 한 짓이다.”

라고 떠들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심의겸 탄핵사건도 일을 점점 크게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