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의 상소에 대한 논란


이이의 상소에 대한 논란

 

선조수정실록』1579년(선조12) 6월 1일의기록이다.

조가 조강(朝講: 아침 시간에 실시하던 경연)에 나아갔다.  집의(執義: 조선시대 사헌부의 종3품 관직) 홍혼(洪渾), 강관(講官: 경연에서 경서 등을 강의하는 문관) 유성룡(柳成龍)·김첨(金瞻) 등이 모두 이이의 상소에 담긴 뜻이 대단히 옳지 않다고 말하자, 선조가 이르기를,

“그가 올린 상소에 이른 바‘수사(收司)의 율(律)(옛날 중국에서 10가정을 한 조로 하여,  그 중의 한 가정에 죄가 있을 경우,  다른 아홉 가정이 관청에 고발하던 제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홍혼·유성룡이 아뢰기를,

“이것은 본래 진(秦)나라 상앙(商鞅: 법가에 속한 인물)의 법조문인데 지금 인용해서는 안 될 곳에 인용한 것입니다.”

하고, 김우옹은 말하기를,

“이는 주자(朱子)가 진량(陳亮: 남송 때의 학자, 관리)에게 준 글인데 ‘친구 사이도 수사연 좌율(收司連坐律)에 빠진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 대개 함께 그 책임을 받게 됨을 말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고매하고 본 책도 많으니 학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함양(涵養: 인간의 착한 본성을 마음에 배양하는 것)하는 정성과 노력이 없기 때문에 말과 행동에 경솔한 점이 많습니다.  지금 논하는 것도 이러한 병통으로 인하여 발단된 것입니다.”

하고, 김우옹이 말하기를,

“이이가 김효원·심의겸의 일과 을해년(1575)에 서인이 잘못한 일과 이수(李銖)의 옥사(獄事: 당시 진도군수 이수가 서인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혐의로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말을 했는데 모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날 조정의 논의가 마땅하지 않은 곳이 있다고 했는데 혹 그런 점이 있기 도합니다.
다만 시비를 크게 가려야 하는데 도이이는 크게 가리지 하지 않고 다만 양시(兩是: 양쪽 다 옳음)·양비(兩非: 양쪽 다 그름)라 말하고 있으니, 이는 그가 주장하는 의도가 잘못 된 것입니다.  만약 모두 시비를 논하여 가리지 않고 한 갓 진정시키려고 만한다면,  또한 시비가 혼잡을 이루어 진정 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중략)

이이의 상소 가운데 ‘이미군자(君子: 높은 학식과 덕행을 닦아 인격을 완성한 사람)와 소인(小人: 덕이 없고 사적인 욕심만 챙기는사람)으로 갈라 놓고 나서 서로 조정하여 화합시키려고 하니,  소인이 하나로 조정하여 화합 될 이치가 있겠는가? 한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으로는 단지 공(公)과 사(私)소인으로 갈라 놓는다면,  그 논의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소인이란 모름지기 권세를 잡고 조정을 흐리게 만들고 어지럽히며 현명한 사람을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하고 선비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일을 해야 이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심의겸 등의 마음씨나 의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별로 화를 끼친 일이 없는데,  어찌 소인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정말로 그가 소인이라면 조정 될 리가 없고,  그런데도 만약 조정 하고자 한다면 이는 나라를 잘못되게 하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자는 바로 한 세상을 농락하려는 소인이니,  어찌 사리에 밝으신 전하가 위에 계신데 여러 신하가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이의 말이 매우 옳지 않습니다.”

또 김첨은 말하기를,

“이이의 말은 진실로 다른 뜻은 없으나 그의 논의는 잘못 되었습니다. 후인들이 끌어다 붙여 현혹시켜 낸다면 선비사회에 화가 일어날까 두렵습니다.”(중략)

그리고 박소립(朴素立)과 홍혼(洪渾)이 모두 이이를 심하게 헐뜯었고, 또 군자와 소인으로 나눈 논의를 옳다고 하였다.  김우옹이

“이이의 마음은 다만 나라 를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장중(莊重)하고 침밀(沈密: 깊이 잠겨 엄격하고 삼가는 것)한 기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일을 생각함에 있어 분명하게 살피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경연에서 함께 뜻을 같이하는 신하로서 몸은 비록 물러나 있지만 감히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못하고 있고,  게다가 그가 전해들은 것이 또한 자세하지 못해서,  마침내 시국에 대한 의론이 크게 치우치고 국사가 크게 어그러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지나친 걱정과 분개한 마음에서 광언(狂言: 상식에 어그러진 미친 듯 한 말)을 한 것뿐입니다.  전하께서도 그가 실언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니 그의 광언을 용서해 주고, ‘그대의 의논이 옳지 않다’는 뜻으로 회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으나,  선조가 답하지 않았다.
[이때에 시국에 대한 의론에 견강부회하는 자들의 의논이 더욱 심했다. 그 러므로 박소립과 홍혼의 말이 김우옹의 말과 조금 달랐던 것이다.  이원익(李元翼)이 말년에 사람들에게 ‘동서의 의논이 있던 처음에 이이가 심하게 패한 것은 그가 두 당 사이에 중립해서 양편으로 부터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율곡의 상소는 1579년 대사간을 사직하면서 올린 것이다. 실록의 이기록을 보면 조정의 이 분위기는 동인이 주도하고 있고, 요즘 학자들이평 가하는 부분과 겹치는 곳이 더러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인이었던 이원익의 평가인데,  곧 율곡이 두 당사이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동 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점은 현대의 여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지만,  율곡이 동서붕당사태를 조정하려고 노력한데서 빚어진 일이기도 하다.

그런 노력은 요즘에도 정치적 사안을 두고 많이 회자되는 것처럼 양시론과 양비론이라고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 그것은 대부분 양쪽의 눈치를 보고 욕을 먹지 않으려고 기회주의적인 태도에서 펼치기도 하지만,  율곡의 경우는 어떤 기회주의나 눈치  때문에 그런것 같지는 않다.  비판가 운데 특이한 점에는 같은 동인들의 태도와 다소 다른 김우옹의 날카로운 지적이있다.  비록 두 사람을 군자나 소인이라 규정해서는 안되지만,  시비는 분명히 가려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점은 심의겸과 김효원 두 사람에 대한 군자 소인의 논의가 옳다고 여긴 박소립과 홍흔의 생각과 분명히 구별된다.

그런데 김우옹 의

“만약 정말로 그가 소인이라면 조정될 리가 없고,  그런데도 만약 조정하고자 한다면 이는 나라를 잘못 되게 하는 말입니다.  같은 자 는바로 한 세상을 농락하려는 소인이다.”

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그’는  심효원을 가리키는 것 같고,  조정하고자 하는 사람 은율곡이다.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소인은 절대 로조정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조정의 성공과 실패 여하에 따라 군자 소인으로 분류될 수 밖에 없다고 보고,  당시의 시점에서 사실상의 조정의 실패는 곧 율곡의 사태인식과 해결에 대한 평가를 수반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율곡의 말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자 붕당조정 실패를 책임 지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