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9년 대사간을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


1579년 대사간을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

 

곡은 1579년 대사간을 사직하면서 붕당해소에 관한 견해를 밝힌 상소문을 올린다. 『율곡전서』제7권에 실려 있는데, 『선조수정실록』1579년 (선조12) 6월 1일자에 이 상소문을 두고 일어난 논란을 기록하고 있다.  그논란을 소개하기 전에 이 상소문을 먼저 읽어 두는 것이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음은 그 상소문의 핵심 내용을 발췌하여 재구성한 내용이다.

먼저 율곡은 사림(士林)에 대해 논하는데,  사림은 나라의 원기(元氣: 타고난 기운 또는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근본이 되는 기운)로 사림이 왕성하고 화합하면 나라가 잘 된다고 밝힌다.  사림은 오늘날로 치면 지식인 사회 또는 여론 형성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림이 잘못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과거 역사에서 예를 들었다.
이어서 심의겸은 현재의 나이든 선비들을 과거 이량(李樑)으로 부터 보호해 준 선행이 있어 그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김효원은 비록 젊었을 때 척신 윤원형의 집에 드나든 잘못이 있지만,  명망이 있어 젊은 선비들이 알아 주는 사람이라고 두 사람의 장점을 말한다.  이 점은 나중에 ‘둘다 옳다’는 양시론(兩是論)이라 비판을 받는 부분이다.

그리고는 붕당이 일어나게 된 두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심의겸은 김효원의 젊을 때의 일로 이조정랑에 오르는 것을 방해했고,  김효원도 심의겸을 잘못을 들어 비난했는데,  둘 다 나쁜 감정 때문이 아니라 심의겸은 변통 할 줄 모르고 김효원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의 의견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 틈을 타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있어 분당의 조짐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이 점은 붕당이 더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과격하지 않게 에둘러 그들의 단점을 지적한 말이지만,  사실상 ‘둘 다 그르다’는 양비론(兩非論)의 논리이다.  이 또한 이상소를 쓰기 전에도 그가 선조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또 이어 율곡 자신과 노수신이 의논하여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낸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해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서 의설을 만들어 동인과 서인을 지목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되씹어 보면 율곡의 이런 좋은 의도로 시작된 제안이 오히려 안타깝게도 붕당 형성에 기름을 끼얹은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실 율곡은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내면 조정이 잠잠해 질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 예상을 뒤엎고 특히 동인쪽에서 김효원이 억울하다고 그를 두둔하는 여론이 형성되어 붕당이 악화되는 길로 전개되었다.  더구나 김효원이 심효원보다 멀리 외직으로 나간 원인 제공자를 율곡이라고 여겨 그를 비판하게 된다.

소인의 문제로 넘어간다.  군자는 덕을 밝혀 인격을 완성한 참된 인간의 모델이라면,  소인은 사적인 이익과 입신양명만을 추구하는 사악한 인물로 규정되는데,  이 군자와 소인의 문제는 공자가 자주 말했고,  소인이 합할 수 없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율곡은 당시 올라오는 상소 가운데 심의겸을 소인이라고 지목한데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그는 심의겸과 김효원 둘 가운데 한 사람은 군자요 한 사람은 소인이라고 한다면 그 말을 믿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말한다.  이어 두 사람의 잘못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의양시론·양비론에 대해

“모호하게 둘 다 옳다 하여 시비가 명백하지않으니,  천하에 어찌둘다 옳고 둘다 그른 것이 있겠는가.”

라는 비판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천하에 시비를 다룸에 있어 둘 다 옳은 것도 있는 것이니 무왕(武王)이 주(紂)를 토벌할 때 백이(伯夷)가 말을 잡고 간(諫: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것)한것은 둘 다 옳은 것이요,
또 둘 다그른 것도 있는 것이니 전국(戰國)시대에 제후(諸侯)들이 서로 싸운 것은 둘다 그른 것입니다.”

말인즉 무왕은 은나라를 토벌하러 간 사람이고 백이는 그것을 말린 사람으로,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무왕이나 은나라에 절개를 지킨 백이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죽은 것 둘다 옳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후들은 받들어야하는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무시하고 각자 제후들이 자기나라를 위해 싸웠기 때문에 둘 다 잘못이라는 견해이다.  유학자들이 믿고 있는 사실에 따라 양비·양시론이 논리상 하자가 전혀 없는 말이다.  그리고는

“만일 심의겸이 나라를 그르쳐서 동인이 공격한다면 시비는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정해질 것이니,  애써 말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면서,  국가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백성의 안락과 고난이 심의겸의 진퇴(進退)에 달린 것이 아닌데도,  눈을 부릅뜨고 대담하게 반드시 소인으로 떨어뜨리려 하는 것은 과연 무슨 소견이냐고 반문한다.  나아가

“만일 하나는 군자이고 하나는 소인이라 한다면 물과 불이 한 그릇에 있을 수  없고,  향기나는 풀과 냄새나는 풀이 한 떨기에서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군자와 소인이 함께 조절하여 나라를 보전한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하여, 소인으로 지목한 부당성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을해년(1575)의 서인은 참으로 그 전에 잘못하였지만 지금 동인의 잘못은 을해년 보다 거의 지나치니,  남의 잘못을 말하면서 그것을 본받는 것은 또한 너무 심하지 않는지 따졌다.  동인들의 태도를 보면 심의겸을 소인이라고 지목한 것에 는진정성이 없어서 임금을 속이고 있고,  이런식이라면 ‘수사(收司)의 율(律)(옛날 중국에서 10가정을 한 조로 하여,  그 중의 한가 정에 죄가 있을 경우,  다른아 홉 가정이 관청에 고발하던 제도)’ 이 착한 선비들에게도 미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공론(公論)과 국시(國是)에 대한 의견을 내세운다. 국시란 현대에 와서도 많은 논란이 있는 말이다.  5·16군사 정변때‘ 반공을 국시로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을 발표한 이래 로지금의 우리나라 국시가 무엇이냐는 논란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여기서 율곡은 인심이 함 께옳다하는 것을 공론이라하고,  공론이 있는 곳은 국시라고 하는데,  국시라는 것은 온 나라 사람이 의논하지 않고도 함께 옳다하는 것이니,  이익으로 유혹하는 것도 아니며,  위엄으로 무섭게 하는것도 아니면서 삼척동자도 그 옳은 것을 아는 것이 국시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 국가 구성원의 토론이 필요 없이 쉽게 공유하는 보편 타당한 이념이나 가치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러한 국시가 붕당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 상소를 조정 대신들에게 알려 상의 토록하여 동인과 서인의 구별을 없애고 착하고 재주있는 인재들을 등용하여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하게 할 수 있도록 하되, 혹시 분쟁을 일으키고 말을 만들려는 사람이 있으면 배척하고 멀리 하라는 말을 올린다.
상소의 말미에 과거 외척들의 횡포가 있었기 때문에 심의겸이 외척이된 것 만으로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다만 심의겸 같은 사람은 지위만 보전하게 하고 중요한 자리에 앉히지 않고서, 외척들에게 권세가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대강의 상소 내용이다.  여기서도 이전까지의 동서붕당을 조정해 보려는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  다만 심의겸을 소인으로 지목한 것에 대한 부당성을 밝히고 있는데,  그를 비판하는 자들이 어떻게 받아 들일지 궁금하다.
같은해 6월 1일자 실록의 기록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