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을 동부승지에 승진시키다.


정철을 동부승지에 승진시키다.

 

선조수정실록』 1578년(선조11) 5월 1일의 기록이다.

제학(直提學:  조선시대홍문관·예문관·규장각의정3품관직) 정철(鄭澈:1536~1593)을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선시대 승정원의 정3품 당상 관직)로 승진 시킴에 두번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파의 설이 더욱 무성하여, 심의겸의 무리들을 서인이라 지목하고 김효원의 무리들을 동인이라 지목하였다.  [심의겸의 집은 성(城)의 서쪽에 있고, 김효원의 집은 성의 동쪽에 가까웠다.  당초에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는 주관(主觀)이 뚜렷하고 행동이 독자적인 자이거나 줏대없이 남의 생각 만을 따르는 이름없는 사람이 아니면,  모두 동인 아니면 서인이라 지목하는 것에 들어 있었다.

정철은 서인으로 지목되 고있었는데 이이는 정철에게 권고하여 젊은 선비들과 교분을 두텁게 해서 동인·서인의 설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철이 처음에 는그 말을 따라서 임금의 명령을 널리 펴고 정책을 받들 때에는 꽤 사기(士氣)를 펼쳤다.

그런데 그때 지평(持平: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5품 관직) 홍가신(洪可臣)이 천거를 받아 대관(臺官: 조선시대 사헌부의 대사헌으로 부터 지평까지의 관리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서,  이조좌랑 조원(趙瑗)이 나랏일을 사사롭게 처리한 잘못이 있다고 탄핵하였다.  홍가신은 젊어서부터 조원과 친한 친구 였는데도 그를 논박하여 스스로 공론에 맞추니,  이이는 그를 사람을 굴복시키는 위력이 있다고 칭찬 하였으나정 철은 편하게 여기질 않았다.  이는 홍가신이 서인과 맞지 않아 옛 친구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 조원을 공격하는 것인가 하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이 처럼 이이와  정철 두 사람이 지향하는 생각이 동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만족하게 화합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훗날 역사에서 동서붕당으로 갈라진 때를1575년(선조8)으로 보며, 이것을 을해붕당(乙亥朋黨)이라 부른다.  이에 앞서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죽기 직전에 붕당의 조짐을 예고한 지 3년만의 일이다.  율곡은 처음에 이준경의 붕당 예고를 무시하고 비판했으나 그것이 현실화되자,  그는 큰 선비답게 자신의 통찰력이 그 보다 부족함을 솔직히 자인하고, 그 부끄러움을 동인과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는데 온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있다.
되었다는 점을 말해 주고있 다. 심의겸의 집이 성의 서쪽이라 함은 그의 집이 당시 도성 서쪽 인정릉방(貞陵坊: 서울의 옛 러시아 공사관 자리)를 말하고, 김효원의 집이 동쪽이라 함은 그의 집이 한양 동쪽의 건천방(乾川坊)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의겸의 무리들을 서인이라 불렀고,  서인은 박순(朴淳)을 영수로 해서 모였는데 그 가운데는 율곡과 성혼(成渾)의 제자들이 많았다.  정철·신응시(申應時)·정엽(鄭曄)·송익필(宋翼弼)·조헌(趙憲)·이귀(李貴)·황정욱(黃廷彧)·김계휘(金繼輝)·홍성민(洪聖民)·이해수(理海壽)·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이산보(李山甫)·구사맹(具思孟) 등이 서인의 주축 인물이었다.

반면 김효원의 무리들을 동인이라 불렀고, 동인은 선배 인허엽(許曄)을 영수로 추대하여 모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서,  나이가 젊고 절개가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물로는 유성룡(柳成龍)·우성전(禹性傳)·김성일(金誠一)·남이공(南以恭)·김우옹(金宇顒)·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이광정(李光庭)·이원익(李元翼)·홍가신(洪可臣)·이덕형(李德馨)·정유길(鄭惟吉)·정지연(鄭芝衍) 등이다.

구한 말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지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따르면 동인들은 명예와 절개를 즐겨 숭상하였고,  서인들은 경력이 많아 몸가짐이 신중히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양측의 장점만 지적하였는데,  굳이 행간에서 단점을 찾아 본다면 동인은 마치 투사들처럼 왕성한 혈기로 이념과 논리적인 주장만 앞세워 편협하고 극단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고,  서인은 좋게 말해 노련하게 나쁘게 말하면 교묘하게 시국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대처해 나간 것으로 추리 할 수 있다.  그러니까동 인이 공격적이라면 서인은 방어적 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흥미롭다고 할까 아니면 어처구니 없다고 할까,  동인과 서인의 영수인 허엽과 박순은 둘 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였다.  없는 것인가?  어디 그 뿐인가?
사촌 사이였던 이산해와  이산보도 있다. 하기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사례를 많이 본다. 이 점은 오늘날도 다르지않다.
젊은날 같 은목적을 위해 투쟁하던 동지 사이로 지내다가 나이가 들면서 현실 정치판에 발을 들여 놓 는순간 서로가 정적(政敵)이 되는것을 자 주목격한다.  한 술 더떠 스승이나 친구를 배반하는 경우도 있으니,  정치적 지향이 다른 정도야 탓할 수도 없겠다.

문제는 홍가신이 조원과 친한 친구 사이면서도 그를 탄핵 한 점이다. 앞에서 동인을 소개할 때 홍가신이 동인임을 밝혔지만,  그가 조원을 탄핵한 것이 당이 달라서그랬을까?

사실 조원은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훗날 대학자로 알려진 조성기(趙聖期,1638~1689)의 증조부이다.  그는 별시문과에 급제해서 1575년정언(正言: 조선시대 사간원의 정6품 관직)이 되어 이 해 당쟁이 시작되자,  그에 대한 탕평의 계책을 상소하여 당파의 수뇌를 파직 시킬 것을 주장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을 이조정랑에 적극 추천하기도 하였고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였다.  이런 행적에서 볼 때 동인의 입장에서는 그를 서인으로 지목하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그 점도 홍가신의 탄핵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율곡과 정철의 태도이다.  율곡은 조원을 탄핵한홍가신이 사람을 굴복시키는 위력이 있다고 칭찬한 반면 정철은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율곡은 동서붕당을 조정하려는 입장 이었으므로 어떤 당의 편을 들기보다는 조정의 공론을 중요시하였으나 , 정철은 동인인 홍가신이 심충겸과 가까운 조원을 탄핵한 것이 자기당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 못마땅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의 기록에 따르면 정철이 동부승지가 된 바로 이때 동인은 이발(李潑)이 후배들의 종주(宗主)가 되어있었는데,  율곡이 정철에게 이발과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권하였다고 한다.  바로 실록의 이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곧 율곡이 ‘젊은 선비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라’는 것에서 젊은 선비란 이발과 동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의 홍가신의 일과 또 윤근수(尹根壽)형제와 김계휘(金繼輝)가 동인의 탄핵을 입어 물러나자, 정철은 더욱 편안히 있을 수 없어서마침내 이발과 논쟁을 벌여 다시는 화합할 가망이 없게 되었다고 전한다.  당시는 탄핵을 받으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렇듯 대립하 는양 정치세력을 화해시키고 조정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정철 처럼 중도에 그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율곡처럼 개의치 않고 계속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도 여당과 야당이 극단적으로 정치상황을 이끌어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렇게 양측의 대립을 조정하는 정치가가 참으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