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겸과 김효원 시비의 발단


 

심의겸과 김효원 시비의 발단

 

다음의 글은『선조실록』1577년(선조10) 5월 27일의 기록을 근거로 재구성 해보았다.

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붕당이 생기게 된 일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생긴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에는 이 두 사람의 해묵은 감정과 함께 당시 정치계의 역학 관계도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앞의 1575년(선조8)에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말처럼 두 사람에게 어떤 인격적인 결함이 있어서 서로 원한을 갖는 사이가 아니라, ‘말세의 풍속’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잘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이 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말세의 풍속’을 도덕적 관점이 아닌 인간사에서 인간은 대개 자기가 속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향을 가지는 존재로 오늘날 관점에서 해석해서 볼때는 당연한 문제 이기도하다.  다만 두 사람의 개인적 문제가 역사적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고나 할까?

“평소 상대방의 잘못을 서로 말합니다.”

라고한 노수신의 말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있다.  그 잘못은 해묵은 감정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게 된 것이 두 사람의 사소한 감정에서 출발했다는게 참으로 놀랍다.  물론 그 감정은 동시대 사람들의 감정을 아울러 촉발했다는 점에서 계속해 훗날 역사 속으로 사건이 일파 만파 전개될 수 있는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해묵은 감정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애초 1572년(선조5) 오건(吳健)이 김효원을 이조전랑(吏曹銓郎)에 추천했으나, 심의겸이 반대하는 바람에 임명이 거부된 일이있었다. 이조전랑이란 이조에 속한 정5품인 정랑(正郞)과 정6품인 좌랑(佐郞)을 아울러 일컫는 말인데,  비록 관직은 높지 않았지만 언론기관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리임명, 당상관 이하의 관리추천, 재야 인사의 추천,  그리고 무엇보다 후임 전랑의 지명권을 가지고 있어서 인사상 요직에 속한 직책이었다.

그렇다면 심의겸이 김효원을 이조정랑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가 무엇일까?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데 심의겸이 반대한 이유는 과거 김효원의 행적과 관련이 있다.  바로 김효원이 명종 때의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자주 들락거렸다는 이유였다.  윤원형은 이른바 역사에서 소윤(小尹)으로 불리는 인물로,  중종의 계비 인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서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며,  역시 왕실의 외척이었고 대윤(大尹)으로 불리는 윤임(尹任)과 대립한 인물이다.  인종·명종 때에는 이런 외척들 간의 다툼으로 정치가 파행을 겪었다.

김효원이 이런 윤원형의 집에 들락거렸다는 점은 당시 피해를 입은 많은 선비들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1980년대 신군부에 가담했던 인물은 물론이고, 그 권력의 언저리에서 있었던 사람들도 훗날 국회의 인사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르는 일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심의겸의 반대는 요즘 말로 과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과도 관계가 있다. 심의겸은 당시 김효원이 어쩌면 과거의 끔찍했던 시절의 윤원형을 떠올리는 아이콘으로 만드는데 충분히 기여했을것이다.

애처롭게도 김효원에게 는그럴만한 사정,  곧 소싯적에 윤원형의 집에서 처가살이 하는 친구 이조민(李肇敏)이 있어서 그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지만, ‘오얏나무 밑에서 갓끝을 고쳐매지 않는다.’ 는 속담처럼 이렇게 오해를 사게 되어,  그 일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지 꿈에라도 생각해 보았겠는가?  억울한 감정 이야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쉽게 말해 비리를 저지른 인사의 친인척의 친구가 되어 그 집에 몇번 들락거렸다는 이유만으로 낙마를 한 꼴이라고 나할까?

그런데 따지고보면 김효원이 윤원형의 심복도 아니고 더구나 혜택을 받은 것도 없어서 그렇게 임명을 거부 할 정도로 큰 문제가 아닌데,  심의겸 한 사람이 반대한다고 해서 이조전랑에 임명되지 못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심의겸이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추리할 수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심의겸은 명종의 정비(正妃)인 인순왕후의 동생으로서 왕실의 외척이긴 해도 앞선 척신들과 다르게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을 숙청까지 하면서 당시 젊은 관원들을 보호해 준 인물이다.
훗날 송시열(宋時烈)의 기록에 따르면 심의겸은 명종·선조의 시기에 밝혀지지 않은 선비들의 억울함을 깨끗이 씻어 주었고,  또 뛰어난 인재는 끌어 올려서 맑고 밝은 정치를 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모두 심의겸의 공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당시까지 심의겸은 조정 안팎에서 일군의 선비들에게 칭송을 받고, 영향력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심의겸은 기존 관료사회의 인사들이 추앙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나할까?

이런 심의겸이 반대하는 이조정랑 자리에 김효원이 임명되기에는 여론상 불리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임명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 1574년(선조7), 김효원은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보란 듯이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임명된 것은 김효원 나름대로 선비 사회에서 인정받는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이전에 좋지 못한 여론으로 한번 낙마한 사람을 기어코 그 자리에 오게하는 것 또한 이전의 나쁜 여론을 잠재우고 거기에 걸맞은 지원세력과 평판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째든 그런일로 그도 인간인 이상 심의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한편 처음에 김효원이 정랑이 되는데 반대했던 심의겸은 물론이고 그를 따랐던 많은 지지자들도 김효원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반면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당연히 제자리로 돌아온 것으로 여겼을 터이니,  자연스럽게 붕당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을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바로 한 해 뒤1575년(선조8),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정랑으로 추천되자, 김효원은 정랑의 관직은 왕실 외척들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추천했다.  여기서 바로김 효원의 선택은 명분과 감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무리 묵은 감정에 충실해도 명분이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뜻대로 감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를 얻었더라도 상대방의 상한 감정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비록 자신과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볼 때 모두가 패배자이다.  바로 이 사건 뒤에 두 사람의 알력으로 인해 율곡이 의견을 내고 우의정이던 노수신이 선조의 허락을 받아,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낸 것을 두고 보면 그렇다.  더 나아가그 들로부터 당쟁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김효원이 심충겸이 이조정랑이 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면,  문제는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지만,  그 명분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기준이 되어 상대를 배척하는 근거가 되니,  김효원은 새로 진출한 신진관료들의 아이콘이 되었고 심의겸은 기존 관료들의그 것이 되어 붕당으로 치달을 여건이 성숙되었던것이다.

이렇게 일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처지에 따라 사회의 진보와 보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집단과 개혁을 주도하 는집단이 생기게 마련이어서,  붕당의 형성은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등장 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또 다른 형태의 정치지형이 형성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