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을 삼척부사에 제수하다


 

김효원을 삼척부사에 제수하다

 

선조수정실록』1575년(선조8) 10월 1일의기록이다.

조가 경연(經筵: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하는 곳에 나아갔다.  이이(李珥)가 성묘를 마치고 돌아와 선조를 뵈었다.
이이는 강론한 내용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조에게 말하였다.

“옛날에는 학문이라는 명칭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행하는 떳떳한 도리 그 자체를 모두 사람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학문이라는 명목이 따로 없었고, 오직 군자(君子: 높은 학식과 덕행을 닦아 인격을 완성한 사람)만이 그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실천했을 뿐이었습니다.  후세에는 이 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사람으로서 실천해야 할 떳떳한 행실이 없어져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당연히 해야 할 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학문하는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런 명칭이 생기자 학자들은 세상 사람에게 지목을 받게 되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아무리 작은 허물이라도 찾아 내려하고,  걸핏하면 위선(僞善)이라 지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때문에 정말로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적을 감추고 여기저기 다니더라도 학문 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이 후세의 큰 병폐입니다.  임금은 모름지기 학문을 주장하여 속된 사람들이 비방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학문이란 어찌 별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날마다 행하는 사이에 옳은 도리를 구하여 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선조가 듣고 나서 말하였다.

“오늘 추위가 심한데 나는 넓은 궁궐의 고운 모피(毛皮) 위에 있으니 어찌 견디지 못할까마는,  염려되는 것은 국경의 변방에서 나라를 지키는 병사들이 밤을 지새우며 딱따기(야경꾼이나 군졸들이 도둑이나 적을침 입을 막기 위해 경계하면서 두드리는 나무막대기)를 치는 것이다.”

이이가말하기를,

“전하의 뜻이 여기에 미치니 백성들 의복 입니다.  병사들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백성들도 반드시 염려해 주셔야 합니다.”

라고 하니, 선조가 이이에게 성혼(成渾: 당시의 문신이자 학자)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병은 끝내 벼슬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가?  그에게 고을의 수령을 시켜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이이가 듣고 나서 말하였다.

“고을 수령자리도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이가 지난번 ‘김효원에게 병이 있으니 변방의 관리로 임명하는 것을 다른 지역으로 바꾸어 달라’는 자신의 의견에 대하여 사죄하자, 선조가 말하였다.

“나는 김효원이 병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여 먼변방의 고을에 제수했던 것이다.  부제학(副提學:홍문관에 둔정3품 관직.  당시 이이의 관직이름)이 내게 한 말은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그 렇게 말한 것이지,  부제학에게 사사로운  뜻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김효원을 마땅히 다른 고을로 바꾸어 제수(除授: 임금이 직접 관리를 임명함)할 것이니 그대는 그리 알라.”

라고 하였다.
이에 이이가 예를 갖추 고물러갔다.  그 뒤 선조는 김효원에게 실제로병이 있었고,  또 이이의 생각에도 당을 지어 편을 가르는 것이 없었음을 듣고,  김효원을 다시 삼척부사(三陟府使)에 제수하였다.

이날 실록의 기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율곡과 선조의 대화를 가만히 보면 약간 엇박자가 나는 듯 동문서답하는 것 같지만, 이 또한 이 글을 읽는 묘미가 된다. 여기서 크게 세가지 문제가 등장하는데,  학문의 의미와  민생(民生)과 김효원을 외직(外職)에 제수하는 일이 그것이다.
우선 율곡이 말한 학문(學問)이라는 말이 요즘 사용하는 말과 상당히거리가 있다.

“학문이란 어찌 별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날마다 행하는 사이에 옳은 도리를 구하여 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율곡이 학문을 이렇게 정의한 것은 다른 곳에도 있다.  그가 쓴 『격몽요결』 에보면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또한 이상하고 별다른 사물이 아니다. 다만 아비가 되어서는 마땅히 사랑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하고(중략) 날마다 생활하고 활동하는 사이에 일에 따라 각기 그 마땅함을 얻 을따름이요, 마음을 현묘(玄妙: 이치가 깊고 오묘함)한데로 달려 신기한 효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율곡이 이렇게 학문을 일상생활 윤리적 실천 문제로 좁혀 말한데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걸 암시하는 말이 학문하는 사람을 걸핏하면 위선이라 지목하여 학문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것은 학문하는 것을위 선자로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마도 성리학의 이론적인 부분을 탐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당시의 비난을 의식해서 한 발언으로 보인다 . 그러나 겉으로 그렇게 말해도『격몽요결』에 보면 과거 공부 못지 않게 이학(理學) 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끝나자 선조는 생뚱맞게도 추운 날씨에 변방에서 고생하는 군졸들의 일로 말꼬리를 돌린다.  율곡 또한 그런 마음을 놓치지 않고 민생을 돌보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말을 올리자,  선조는 할말이 없어 궁색해졌는지 엉뚱하게 성혼(成渾)의 안부를 묻는 말로 화제를 돌려 버린다.

이런 분위기는 아마 이 경연이 있기 전에 율곡이 선조에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 선조가 율곡을 탐탁지 않게 여겨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율곡이 김효원을 부령부사(富寧府使)로 보내는 것을 재고해 달라고 선조에게 주청(奏請: 아뢰어 청함)을 드렸기 때문이다.  이 보다 앞서 김효원과 심의겸(沈義謙) 사이에 대립이 있어 율곡의 제안을 받아들인 우의정 노수신의 건의로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심의겸을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보내기로 결정 했기 때문이다.  같은 외직이지만 개성과 부령(富寧)은 서울 근처와 함경도의 변방이니,  이 결정은 누가 보더라도 불공평하다.  그래서 동인(東人)들의 반발이 컸다.  더구나 율곡의 말에 따르면 김효원은 병까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앞서 율곡이 김효원의 임지를 변방이 아닌 곳으로 바꾸어 달라고 주청했던 것이다.

이런 일로 선조는 율곡이 혹 어떤당(黨)을 편들어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 김효원을 두둔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해가 풀리지 않아 두 사람의 말이 동문서답처럼 보였고,  선조는 자꾸 말꼬리를 돌린 것으 로읽어 낼 수 있다.

율곡 또한 총명한 분이라 선조가 이런식으로 나가니 스스로 뭔가 잘못 되었다는 눈치를 챈 뒤 앞서 김효원의 일로 주청한 것을 사과하니,  비로소 선조가 율곡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행간을 보면 두 사람 사이의 껄끄러움은 여전히 남고,  삼척 또한 변방은 아니지만 먼곳이다.  문제는 율곡의 이런 조정 안이 그의 의도와 별개로 김효원에게 더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동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또 당쟁이 격화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