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과 심의겸이 부령부사와 개성유수로 삼다


김효원과 심의겸이 부령부사와 개성유수로 삼다

 

선조실록』1575년(선조8) 10월 24일의기록이다.

효원(金孝元)을 부령부사(富寧府使: 함경도 부령부의 수령)로, 심의겸(沈義謙)을 개성유수(開城留守: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성의 수령)로 삼았다.
이 당시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 다투고 각자의 생각을 굽히지 않아 요란한 논쟁이 그치지 않자, 이이(李珥)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보고 말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덕을 닦는 선비로서 흑백과 선악이 서로 대립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또 정말로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겨 서로 해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말세의 풍속이 시끄러워 약간의 틈이 벌어진 것 뿐인데,  근거없는 뜬 소문이 두 사람을 이간질해 조정이 조용하지 못합니다.  두 사람을 모두 외직(外職: 지방관리)으로 내보내어 근거 없는 논쟁을 진정 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감께서 경연(經筵: 임금과 여러 신하들 앞에서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 자리에서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내는 이유를 주상께 말씀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수신이 의문을 가지고 말하기를,

“만약 경연자리에서 아뢴다면 더욱 시끄러워 질지 어찌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사간원(司諫院: 임금의 잘못을 아뢰고 관리의 비리
등을 밝히고 탄핵하는 관청.  또는 거기에 속한 관리)에서 이조(吏曹:  조선시대 행정과 인사를 담당한 기관 또는 그 책임자)를 탄핵하자,  노수신은 심의겸의 세력이 일방적으로 강하다고 여겨서

“근래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말합니다.  이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워 사림(士林: 선비사회)이 편치 못할 조짐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모두 외직에 보내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라고 경연자리에서 말하니,  선조가 말하였다.

“두 사람의 어떤 일에 대한 말인가?”

노수신이 말하기를,

“평소 상대방의 잘못을 서로 말합니다.”

라고하니, 선조가말하였다.

“한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다같이 서로 공경하고 마음을 합쳐야 하는데도, 서로 헐뜯는다 하니 매우 옳지 못하다.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라.”

이에 이이가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사이가 크게 나쁜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나라 인심이 경박하고 조급하여 말세의 풍속이 더욱 시끄럽게 만들고,  두 사람의 친척과 친구들이 각각 들은 말을 전달하여 고자질 하였으므로 마침내 어지럽게 된 것입니다.

대신(노수신을 가리킴)은 그것을 진정시켜야 하므로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내어 소문의 출처를 끊으려는 것이니,  전하께서도 반드시 이 일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에 드러난 간인(奸人: 간사한 사람 곧 간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소인(小人: 덕이 없고 사적인 욕심만 챙기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소인들이 이 두 사람이 붕당(朋黨: 학문과 이념에 따라 모이는 정치 집단)을 한다고 지목하여 둘 다 벌을 줄 계획을 한다면 사림(士林)에 화(禍)가 일어날 것이니,  이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라고 하니, 선조가 말하였다.

“대신은 마땅히 진정시키도록 마음을 먹으라.”

이 기록에 는우리에게 이른바 당쟁(黨爭)으로 알려진 붕당 정치(朋黨政治)의 서막이 표현되어 있다.  붕당이란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집단을 말한다.  한 때 우리는 이런 붕당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그것은 조선 사람들은 당파심이 강해서 조선은 당파 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합리화한 식민사관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현장에는 언제나 대립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니 붕당의 존재 자체를 죄악시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얼마나 공정하게 행동 하느냐이다.  그러니 ‘페어 플레이’를 하지 않고 자기 당의 경제적 이익과 권력획득을 위해 권모술수를 써서 모함하거나 여론을 조작하여 상대를 비방하고,  자기 진영의 사람들만 등용시키고 상대를 배제하 는일이라면,  그런 붕당은 시정잡배의 모임과 무엇이 다르랴?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붕당의 출발은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고 추천하는 이조전랑(吏曹銓郞),  그것 도문신의 인사를 관리하 는이조정랑(吏曹正郞)의 자리를 두고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해묵은 원한에서 비롯하였다.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일의 형세를 보면 당연하다.  그 지위가 바로 정치세력을 확보하는 중요한 지렛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붕당이 자연적인 일이라면 어째서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을까?
사실 선조 이전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심하였는데,  대개 사화(士禍)를 통해 훈구파가 승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사실 사림파 와훈구파의 대립은 기득권 세력과 신진세력의 그것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양상이다.
심의겸은 명종의 정비(正妃)인 인순왕후의 동생으로서 왕실의 외척이니 기득권을 가진 기존 관료세력을 대표하고,  김효원은 젊은 관료로서 신진세력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관료사회의 요직을 놓고 두 사람이 대립하는 것은 당시 관료들에게는 대단히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더구나 심의겸은 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을 바로 그 인사를 담당한 요직인 이조정랑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니,  신진 관료들의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김효원은 신진관료들로부터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칭송 받지 않겠는가?
반면 기존의 관료들 가운데는 과거 심의겸의 덕을 본 자들도 있었다. 명종 때 권세가 인윤원형(尹元衡)을 견제하기 위해 심의겸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을 등용하였는데,  그는 지나친 권력욕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강직한 신하였던 이준경(李浚慶)을 몰아내기 위해 골몰하였다.  챈 젊은 관리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이량은 이들까지 숙청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것을 막고 나선 인물이 심의겸이다.

심의겸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아 이량을 탄핵하여 유배시키는데 앞장섰다.  외삼촌을 탄핵시켜 유배시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닌데,  그일로 심의겸은 곧은 선비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니 김효원 못지않게 심의겸을 따르는선비들도 많았다.
바로 여기서 율곡은 붕당이 생길 것을 경계하며 이렇게 갈등이 생긴 것은 두 사람의 인격때문이 아니라 ‘말세의 풍속’ 때문이라 말하는데,  말세의 풍속이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출신 배경이나 정치·경제적입장에 따라 상대의 태도나 주장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뜻한다.  심의겸이나 김효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의 사태가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기록을 읽노라면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사가 다 가진자와 없는자,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갈등이 있기마련이니, 흑백 논리나 윤리적 선악의 잣대로 그 갈등의 존재 자체를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문제 는한 쪽이 권력이나 이익을 독점하면서 유발하는 갈등의 수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