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판서로서 인물등용 견해


이조판서로서 인물등용 견해

 

곡은 계미삼찬 직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언관들에 의하여 탄핵을 받는 입장에서 되레 승진을 하였으니 비록 일이 마땅하다 하더라도,  당시 분위기로 보자면 적지 않은 마음의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조판서를 제수 받자 자신의 허물을 구실로 사양하고,  박근원과 허봉을 용서해 달라고 청했는데 선조가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래 글은 계미삼찬 후 두 달 뒤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알현한 1583년(선조16) 10월 22일의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그가 병으로 사망하기 대략 석달 전의 일이다.  여기서는 계미삼찬 사건의 뒤 처리문제,  곧 관련된 인물에 대한 관대하고도 공정한 처분을 해달라는 율곡의 요청과 인물에 대한 평가가 거론되고 있다.

이조판서 이이가 서울에 들어와 경의를 표하니 선조가 보고 위로 한 후 말하기를,

“내가 마치 한원제(漢元帝: 전한의 10대 황제)가 임금 노릇 할 때와 같이 소인배를 물리쳐 멀리 하지 못하여 나라가 거의 망해가고 있다.”

라고 말하니, 이이가 대답하였다.

“박근원과 송응개는 본디 간사한 사람들이지만 허봉은 나이 젊어경망할 뿐 간사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재주가 아깝습니다.  그들 세 사람이 너무 중한 벌을 받았기 때문에 같은 죄를 범한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하고 있으니 관대하게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경(卿)은 말할 것이 없다.”

선조가 이렇게 말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비유해 보면 10명이 도둑질을 했는데 그 중 3명만이 중죄를 받고 나머지 7명은 버젓이 사모(紗帽: 관리들이 쓰던 모자)를 쓰고 공무에 종사한다면 이는 왕정(王政:왕의 정사 또는 왕도정치)으로 보아 편파적인 일입니다.  또 그 사람들을 향리에 내보낸다고 하여도 그들이 어떻게 다시 조정을 혼탁하게 어지럽히겠습니까?  그리고 죄목이 같은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지금 세 사람만이 죄를 받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그들과 함께 죄 받기를 원하는 자가 없으니 정의로운 기개가 없음을 알 만합니다.”

라고 하니, 선조가 말하였다.

“그때는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한 자가 없었는데 나는 이렇게 까지도 사리고 있을 줄 은몰랐다.  가령 북송(北宋)이 금나라에 의해 망할 때와 같은 화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한 사람도 의(義)를 위해 죽는 자가 없을 것이니 그게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자 이이가 말하였다.

“지금은 권력을 지닌 간신이 조정에 있을 때와는 달라서 만약 ‘도사린다.’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불가합니다.  한때 선비의 무리로 자처한 자들의 논의가 모두 같았던 것은 바로 식견(識見)이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저들 자신이 선비의 무리로 자처했기 때문에 성혼(成渾)까지도 대단찮게 여겼던 것이니,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간사하다고 한다면그 것은 아닙니다.  간사한 사람이란 반드시 임금의 의중을 헤아려 교묘하게 맞추는 것인데 저들은 전하께서 뜻을 돌리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자기들 주장을 고집하고 있으니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대체로 지금 서(西)를 옳다고 하는 자라고 하여 그가 다 군자(君子)인 것도 아니요,  동(東)을 옳다고 하는 자라고 하여 반드시  모두 소인(小人)인 것도 아니어서,  지금 구별하여 쓰기란 어려운  일입니다.”(중략)

선조가 말하기를,

“이제 경이 있으니 내 마땅히 모든 것을 맡기겠다.”

라고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지금 인재가 적고 문사(文士) 중에는 쓸만한 인물을 얻기가 더욱어렵습니다.  정여립(鄭汝立)이 많이 배웠고 재주가 있는데 남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비록있기는 하지만,  큰 현인 이하의 사람으로서는 전혀  병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가 실로 쓸만한 인물인데 매번 후보자로 추천하여도 낙점(落點)을 않으시니 혹시  그를 참소하여 이간질하 는말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선조가 말하기를,

“정여립은 그를 칭찬하는 자도 없지만 헐뜯는 자도 없으니 어디 쓸만한 자라고 하겠는가?  대체로 인재등용에 있어서는 그 명성만 듣고 쓰는 것은 옳지 않고 시험 삼아 써 본 뒤에야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이이가 또 정구(鄭逑)가 쓸만하다고 아뢰니,  선조가 말하기를,

“불러도 오지않는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천천히 다시 불러 보겠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가 말하였다.

“대체로 특별히 부르면 전하의 뜻을 받들어 감당하기가 벅차서오 지않는데 바로성 혼이 오지 않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없어 마치 서얼(庶孼: 정식 부인의 소생이 서자와 그자손)로 관직에 임명된 자처럼 한사코 직에 나아가지 않더니,  지금은 그전같이 그렇게 굳게 뜻이 정해져 있지는 않아 벼슬하고 싶은 뜻이 조금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성혼은 지병이 있어 비록 오더라도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보직이 없는 한가한 관직이나 경연(經筵)을 맡은 관리가 되어 입시하여 흉금을 털어 놓고 말하게 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관작을 어찌 아끼겠습니까.”

“김우옹(金宇顒)은 어떠한 인물인가?”

선조가 이렇게 물으니 이이가 말하였다.

“못한 사람입니다.”

이 기록은 율곡이 선조에게 관대하고도 공정한 법집행을 요청함과 아울러 인물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  중요한 독해 포인트는 율곡이 성혼을 좋게 평가함은 친구로서 당연하다 하겠으나, 훗날 모반의 사건으로 기축옥사(己丑獄死)의 핵심 인물인 정여립을 조정에 써달라고 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율곡은 사건의 결과만 두고 본다면 앞일을 내다 보지 못한 단견적 인물로 그려진다.

전에 이준경의 당쟁 예견에 반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율곡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는 일이다.  물론 역으로 정여립은 율곡의 이 평가대로 쓸만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훗날 기축옥사는 또 무고에 따른 조작일 수도있다.  율곡이 과오에서 자유로우려면 훗날 역사에서 기축옥사가 무고에 따른 조작임을 인정해야 한다.  진퇴양난이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 율곡이 정여립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에서 벗어난다.

필자의 생각에는 바로 이것도 훗날 『선조실록』을 수정해야 한다는 당위론의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점쳐 본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단지 “정여립(鄭汝立)은 박학하고 재주가 있으나 다듬어지지 못한 병폐가 있습니다.” 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역사기록이란 기록자의 주관이나 당파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면 어느 쪽의 기록도 완전히 믿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 된다.  그래서 역사 연구자의 세밀한 안목과 능력이 요구되며,  또 연구할 대상과 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