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의 죽음


이이의 죽음

 

곡은 선조 17년인 1584년 병사하였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吏曹判書李珥卒’의 단 7글자의 “이조판서 이이가 죽었다.” 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는가 싶어 조금 전 시대에 살았던 이황의 죽음에 대한 기록과 비교하기 위해 찾아보았다.  거기에도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율곡보다는 30글자가 많게 기록하였다.  그런데 당시 유명했던 또 다른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기록을 보니 앞의 두 사람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꽤 길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선조실록』편찬 당시 율곡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데,  율곡이나 퇴계의 제자들이 편찬 작업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과도 관계된 듯 싶다.  그래서 이런 것도『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는데 어떤 명분을 제공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그의 죽음을 매우 길게 기록하고 있다. 율곡만 그렇게 길게 기록했나 싶어 퇴계의 기록도 살펴보았는데,  율곡보다는 짧지만 그래도 『선조실록』보다는 훨씬 길게 기록하였다.
남명조식에 대해서도 분량면에서 본다면 이전의 기록과 크게 다르지않았다.

아래 글은 『선조수정실록』1584년(선조17) 1월  1일자의 율곡의 죽음에 관계된기록이다.
이조판서 이이가 죽었다.  이이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徐益) 이 순무어사(巡撫御史)로 함경도에 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해서는 안되니 만나지 말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나의 이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뿐이다.  만약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 하여 여섯가지 방략(方略: 일을 해 나갈 방법)을 불러 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죽었다.  향년49세 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3일 동안 소선(素膳: 채소만 나오는 간소한 반찬)을 들었고 위문하는 비용을 더 후하게 내렸다.  동료관리들과 성균관의 학생들,  병졸과 저잣거리 백성들,  모여 통곡했으며,  궁벽한 마을의 일반 백성들도 더러는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고하였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집결하여 전송하였는데,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 리에 끊이지 않았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우들이 수의(襚衣)와 부의(賻儀)를 거두어 염하여 장례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 갈 방도가 없었다.(중략)

이이의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다. 나면서부터 신기하고 남달랐으며 확연히 큰 뜻이 있었다.  총명하여 지혜가 숙성해 7세에 이미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2세 때 아버지가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내어 드렸고,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어도 일찍부터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잘못 불교에 물이 들어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生佛: 살아있는 부처)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잘못된 행동임을 깨닫고 돌아와 유학에 전념하였는데,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도 도의 큰 근본을 환하게 알고서 정밀하게 분석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였다.(중략)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기에 충성을 다하였으며 시골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애타는 심정으로 잊지 못하였다. 임금께 올린 글과면대하여 아뢴말 들을 보면 그 내용이 간절하고도 강직한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함에 있어 규모가 높고 원대하여 삼대(三代: 중국고대의 하·은·주)의 정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나라 형세가 쇠퇴해져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폐정을 고치고 백성들을 구제하고 군대를 잘 키우는 것을 급한 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반복해서 시종일관 한 뜻으로 논하여 알렸는데,  소인이나 속류의 배척을 당했어도 조금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임금도 처음에는 그를 견제하였으나 늦게나마 다시 뜻이 일치되어 은총과 신임이 바야흐로 두터워지고 있는 때에  갑자기 죽은 것이다.

이이는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한데다가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는데,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하였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이 정성스럽고 진실하고 믿음직하게 대하였으며,  은총과 사랑을 받거나 오해나 미움을 받거나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았으므로 어리석거나 지혜 있는 자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돌아오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물러났다가 다시 조정에 진출해서도 선비들을 화합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사심없이 할 말을 다 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꺼리는 대상이되었는데,  마침내 당파에 속한 사람들에게 원수처럼 취급되어 거의 큰 화를 면치 못할 뻔 하였다.  이이는 인물을 논하고 추천할 때 반드시 학문과 명망과 품행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진실하지 못하면서 빌붙으려는 자들은 나중에 그를 많이 배반하였다.

그래서 세속의 여론은 그를 너무도 현실에 어둡다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에 한 당파에 치우친 일이 크게 기세를 부려한쪽을 제거시키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 들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이 생겨 사분오열이 되어 마침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에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는데,  이이가 평소에 미리 염려하여 말했던 것이 훗날의 결과와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대책들이 다시 추후에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백성들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저서로 문집과『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소학집주(小學集注)』개정본이 세상에 전해온다.
이 기록은 율곡의 전 생애를 압축해서 잘 표현하고 있다.  아마 그의 사후로부터 시대적으로 상당한 시간적 거리가 있어서 그동안 정리된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붕당의 조정과 화합에 힘쓴 기록도 짧지만 잘 언급하고 있어 나름의 요약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은 『선조실록』과 대조적으로 율곡학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기에 편찬된 것이므로,  기록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면서 독해하는 것도 필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