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의 이이 비판과 송응개·허봉·박근원 등을 귀양 보낸 것은


사간원의 이이 비판과 송응개·허봉·박근원 등을 귀양 보낸 것은지나치다고 아룀

 

른바 계미삼찬(癸未三竄)은 일의 적합성 문제와 또 여러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어,  단지 세 사람을 귀양 보내는 일로 간단히 처리 될 문제는 못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율곡을 탄핵한데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고,  또 그들 중 대부분은 관리들의 조그만 혐의에 대해서도 탄핵을 해야하는 언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이 세 사람의 지나친 점이 많고 때로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발언을 했어도, 그렇게 먼 변방으로 귀양을 보낼 정도는 아니라는게 동인들의 생각이었고,  또 율곡 자신도 형벌이 무거우니 관대하게 해달라고 선조께 말한 적이 있다.

특히 김응남(金應南)의 경우는 송응개·허봉·박근원과 일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율곡을 존경했기 때문에 실제로 율곡을 탄핵하려는 삼사의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래의 기록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선조에게 글을 올리고 선조가 답한 내용이다.
물론 귀양간 사람들을 변호하면서 율곡을 비판한 것도 잊지 않았다. 모두 『선조실록』1583년(선조16) 9월 1일의 기록이다.
사간원이 말하였다.

“지난번 송응개·허봉·박근원등을 멀리 귀양보냈는데,  처분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들이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급하고 경망하며 지나쳤던 것에 불과 할 뿐인데 형벌을 죄에 걸맞게 적용하지 않은 것은 국가를 위하여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당초 이이가 나라의 중대한 소임을 맡고서도 재주가 못미치고 뜻이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말이나 일처리에 있어서 하는일 마다 물정(物情)에 거슬렸습니다.  그러니 언론을 담당하고 있는 신하로서는 그때 그때 논박하여 바로 잡는 것이 당연한 직무이기는 하지만,  송응개와 허봉 등은 이이의 옳지 못한 곳만 보았기 때문에 그를 탄핵한 내용이 너무 사실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또 송응개는 이미 지탄을 당하고서도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고 박순과 이이·성혼을 논하면서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유생(儒生)들의 상소에 있어서는 논의가 편파적일 수 있지만,  목구멍과 혀의 관계처럼 조정의 안에 가까이 있는 신하로서는 사실을 있는 대로열거하여 자세히 아뢰는 것이 바로 그 직분인데,  박근원 등은 사리를 분석하지 못하고 쓸데없고 거친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들 모두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뜻은 위로 밝으신 전하를 믿고서,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한다는 마음에서 저들도 모르게 너무 지나쳤던 것인데, 그것에 대해 큰 벌을 줄거야 있겠습니까?  만약 붕당을 지어 전하의 귀와 눈을 가렸다는 죄목으로 그들을 다스린다면 온 나라가 다 억울함을 알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왜 여러 대부(大夫)와 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뜻은 살피지 않으시고,  뜻을 잃고 불평 불만에 빠져 상대를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는 자의 말 한마디에 의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하십니까?

송응개 등을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제주목사 김응남은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전하를 모시고 있으면서 많은 충성스런 말을 올렸고, 승지가 되어서는 부지런히 있는 힘을 다했던 자로서, 전하께서도 일찍이 믿고 총애하였던 자인데,  죄명이 드러나지도 않은 것을 조금씩 오래 두고 말하는 참소(讒訴)만을 치우치게 믿으시고,  이매(魑魅: 도깨비)의 고장에다 던져버리셨습니다.  근래 빈번히 선비들을 몰아냄으로써 이름있는 선비들은 거의 다 없어지고 참소하는 입들이 그 틈을 타니 사헌부와 사간원도 텅 비어갑니다.  백관들이 겁에 질려 떨고있고 충직한 신하들의 기가 꺾여있는데,  이는 사직을 위하여 결코 복된 일이 아닙니다.   김응남을 제주로 보내라는 명도 거두어 주십시오.”

이에 선조가 답하였다.

“그대들은 그들을 구원 할 생각을 말라. 그들 신상에도 도움은 없고 도리어 피해를 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을 징계해야 한다.  나라가 저들 세 간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망할 수도 있으니 단연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두번 말하지 않겠다.
김응남의 사람됨에 있어서는 그가 비록 같은 곳에 있었으나 입시(入侍)의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사실 몰랐었다.  그가 승지가 되어 병무(兵務: 군사적인 업무)를 맡겼을 때 과연 부지런하고 조심성있고 진실하여 나는 그를 믿고 의심치 않았으며,  경안(慶安: 앞에서 이조전랑 제도의 후임자 추천 제도를 폐기하게 만들었다고 소개한 선조의 종친인 경안군 이요를 말함)이 면대했을 때 그를 배척하였지만 그때도 나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 후 조회에서 우연한 기회에 내가 말하기를 ‘김응남이 업무를 잘 살피고 있다.’고 하자 송응개가 즉석에서 그를 극구 칭찬하였는데,  지금와서 보니 송응개는 바로 간사한 자들의 우두머리인데 송응개가 김응남을 극구 칭찬하였으니 이는 그들끼리 붕당을 맺었음이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경안이 내게 면대를 청했던 것은 이이가 뒤에서 사주한 일이라고 떠들고 있는데,  이 말도 안되는 말은 아마 틀림없이 김응남의 무리가 자기들의 이름을 바로 들어 배척한데 대하여 분함을 느끼고 사악한 거짓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죄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나는 참으로 통분해 하고있다.  내 즉시 아울러 응분의 죄를 내리지 않고 제주목사를 제수한 것은 나라로서는 형벌을 제대로 내린 것이 아니지만,  그 자신에게는 다행인 것이다.  김응남은 제주도로 떠나고 사퇴하지 말라고 하라. 그가 만약 면모를 새롭게 고쳐 나간다면 후일 친히 총애할 때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어보면 선조의 의지는 단호하다.  마치 역모사건을 두고 한말처럼 거침없고 상기 된 어조이다.  더구나 송응개가 조회 석상에서 칭찬했던 일을 기억하여 바로 그와  붕당을 맺었다고 한말은 상당히 억지스럽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김응남은 평소 율곡을 존경하였고,  삼사의 논의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제주도에 갔어도 임지에 도착하자 성심껏 기민을 구휼하고 교육을 진흥시키며 민속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더구나 바로 2년뒤 1585년 우승지로 기용되고 이어 대사헌·대사간·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 할 정도로 성실한 신하였다.

그렇다면 선조는 왜 이렇게 화를 냈으며 훗날과 상반된 그의 태도는 무엇을 뜻할까?  필자가 보기에 그가 율곡을 매우 총애하는 군주도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이 당시 율곡을 두둔한 것은 단지 율곡이 억울해 보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바로 율곡이 죽은 1584년 뒤에는 그의 태도가 또 변하기 때문이다.  1585년 송응개·허봉·박근원 세 사람을 노수신의 상 로 풀어 주었다.  이것은 그가 왕권강화를 위하여 당쟁을 이용하였다는 오늘날 연구자들의 평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의 숙종처럼 한 쪽 당이 강해 보이면 억누르고 다른 쪽 당을 지원해 주어 세력의 균형을 맞춤으로서 자연히 왕권의 강화를 노렸다고 본다.  그러나 당대의 왕권은 강화되었는지 모르지만,  그에 비해 국력의 손실과 장차 백성들이 치러야  할 희생은 너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