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원·송응개·허봉을 귀양 보냄


박근원·송응개·허봉을 귀양 보냄

 

『선조실록』1583년(선조16) 8월 28일의 기록이다.

조가 정2품 이상의 신하들을 선정전(宣政殿)에 불러 모아 놓고 말하기를,

“근래 조정이 안정을 잃은 원인은 오로지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한 소치인데, 그 둘을 모두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다 대답하기를,

“애당초 동서로 당이 나누어 진 것이 비록 그 사람들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이 다 외직에 보직되어 있어 조정 일에는 간여를 못하니 죄까지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선조가 말하기를,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 이 세사람의 간특함은 나도 아는 사실이다.  이들을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들이 비록 지나친 말을 하였으나 혹은 언관(言官: 대사간이었던 송응개와 직제학이었던 허봉을 말함)이 요혹은 시종(侍從: 도승지로 있었던 박근원을 말함)이었는데,  그들을 말때문에 죄를 내린다면 이는 밝으신 전하의 치세 아래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라고하여, 애써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이때 정철(鄭澈)이 탑전에 나아가 말하였다.

“그들의 죄를 분명히 밝혀 시비를 가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자 선조는 송응개를 회령(會寧)으로,  박근원을 강계(江界)로,  허봉을 종성(鍾城)으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랬다가 곧장 종성은 현재 적병(여진족을 말함)의 침략을 받고 있는데 허봉이 가면 방어하고 수비하는데 도움은 안되고 도리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라 하여 갑산(甲山)으로 유배지를 옮길 것을 명하였다.

이 사건을 훗날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부르는데, 곧 계미년(1583)에 세 신하를 귀양보냈다는 뜻이다.  그 해당되는 주인공은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이 귀양을 가게되었는가?  대부분의 사건이 그렇듯이 사건들은 서로 꼬리를 물 고일어난다. 특히 당쟁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앞의 사건이 현재의 사건의 원인이 되고 현재의 사건은 앞의 사건의 결과 이자 뒤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 세 사람이 귀양을 가게 된 데에는 동인들의 율곡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반영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율곡의 동서붕당의 조정책이 실로 그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일부 동인들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의 양시론 양비론도 사태를 제대로 모르고 나온  말이라고 여겼다.  사실 선조는 속마음으로 심의겸을 미워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선조가1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심의겸이 그의 누이 인순황후에게 선조를 뒤에서 조종해 달라고 종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율곡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그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아무튼 동인의 눈으로 볼 때 그의 양시론 양비론에 입각한 조정책이 하나의 불만의 요소가 되었다.

더구나 그가 벌인 일의 결과가 동인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는 국면으로 귀결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바로 김효원과 심효원을 외직으로 보내거나, 또 윤승훈과의 시비에서 정철의 편을 들고 윤승훈을 외직으로 보낸 사건의 과정에서 동인의 피해가 더 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인들 가운데는 선조가 종친인 경안군(慶安君) 이요(李寥)의 말에 따라 이조전랑이 후임자를 추천하는 제도를 폐지한 것도 율곡이 뒤에서 조종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동인들이 율곡을 결정적으로 미워하게 된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지사(知事: 중앙의 주요관청에 설치된 정2품의 관직) 백인걸(白仁傑)이 율곡을 찾아와 동인과 서인을 화합시키려는 상소를 올리려고하는데 초안을 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율곡은 별 생각없이 자신의 평소 뜻에 맞아그렇게 해주었지만, 완성된 그의 상소문에는 동서의 화해를 요구하면서도 동인을 비난하는 글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인들은 이백인걸의 상소를 이이가 뒤에서 사주한 것으로 믿고,  율곡의 조정책에 호의적이던 동인들 마저도 완전히 율곡에게 등을 돌렸다고 한다.  이것은 율곡의 뜻과 상관없이 백인걸의 신중치 못한 일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사태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다.

이렇듯 계미삼찬은 율곡에 대한 이런 동인들의 평소 감정이 율곡이 나랏일을 맡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율곡을 비판한 결과로 생긴 일이었다.  바로 선조 16년(1583)에 북쪽 여진족 니탕개(泥湯介)가 국경을 침범했을 때 국방을 담당한 병조판서는 율곡이었다.  당시 율곡은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상황이 급박한 지라 어떤일은 자신의 임의대로 먼저 시행하고 나중에 결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전쟁에 쓸 말을 바치면 군사에 뽑힌 자라도 출전을 면제해 준다는 방책을 먼저 시행하고 임금의 사후 승인을 받은 일도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경 지대까지 양곡을 운반해 헌납하면 서자(庶子)출신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법을 쓰기도 했다.

게다가 동인들의 탄핵의 빌미가 되는 피치 못할 일이 또 생겼다.  하루는 율곡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했다고 갑자기 현기증이 생겨 병조의 사무실에 누워 몸을 돌보느라 나아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선조는 이 사실을 알고 어의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다.

이런 사실을 확인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율곡이 군사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탄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에 율곡은 사직하려고 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자, 이에 동인의 공격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 탄핵을 주도한 사람은 앞의 박근원·송응개·허봉이었는데, 특히 대사간이었던 송응개의 공격이 가장 맹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공격은 서인의 중진이었던 박순과 성혼에게 확산되고, 심지어 율곡이 어릴적 잠시 금강산의 절에 들어갔던 행적까지 들추어 비난하였다.

동인들이 이렇게 심하게 공격하자 조정에서는 동정론이 일게 되고, 성균관 유생을 비롯하여 전라도와 황해도 유생들도 율곡과 성혼을 위해 상소를 올려 이들을 변호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동인인 김우옹도 이들을 변호한 것을 보면, 이들의 공격이 매우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바로 앞의 실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선조는 이 세사람을 유배 시켰다.  이 과정에서 선조는 율곡을 공격한 사람들을 현직에서 해임하고 율곡을 변호한 사람에게는 칭찬하는 답을 내렸다.

그래서 율곡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한 허봉·송응개·박근원을 멀리 유배 시킨 반면에, 율곡을 이조판서, 정철을 대사헌, 성혼을 이조참판에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 가운데는 율곡이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으로 기울어졌다고 말한다. 이건창의『당의통략』에서는 율곡이 이조판서를 제수 받자 자신허물을 구실로 사양하고,  박근원과 허봉을 용서해 달라고 청했는데,  송응개만은 끝까지 용서해 달라고 청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의 지나친 인신공격 때문이었을까?

요즘도 그렇지만 정치투쟁이 격화되면 특히 당사자들은 마음의 평정을 얻기 어려운가 보다.  상대의 약점과 실수 심지어 과거사까지 들추어 내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니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로부터 10년 뒤의 전란을 생각한다면 오늘에 교훈되는 바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