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가 윤승훈의 일을 아뢰다


이이가 윤승훈의 일을 아뢰다

 

1581년(선조14) 8월 1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앞서 정철을 두고 벌인 논쟁 때문에 율곡과 남언경 등이 체직 된 기록 외에 윤승훈의 대한 율곡과 선조의 대화,  그리고 정철이 관직을 버리고 정인홍이 해직되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간 것과 율곡이 체직되어 대사간으로 직책이 바뀐 것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선조실록』1581년(선조14) 8월 0일에는 윤승훈에 대한 선조와율곡의대화이외는기록이없다. 더구나 이마저도 날짜가 빠져있다. 그 다음 기록이 8월 10일이므로 좌우가 1일과 9일 사이에 있었으니, 수정 실록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보아 1일자의 기록으로 봐도 무방하다.
우선 윤승훈에 대한 『선조실록』속 대화의 요지는 이렇다.  율곡은 선조에게 간관(諫官: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관리.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을 총칭함)의 사기를 너무 지나치게 꺾어서는 안되는 것인데도 임금이 외직에 전보를 명하였고,  이러면 직언(直言)하는 선비가 말을 하려다가 하지 않는 일이 있을까 염려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사리(事理)에 따라 처리했고, 간관이라 하더라도 말이 옳지 않으면 배척 할 수 있다고 응수했다.  그리고 그렇게 안하면 같은 자가 또 나올  것이어서 사태를 진정시키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밝힌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지만 『선조수정실록』에는 기록이 추가되어 있는데, 율곡이 윤승훈과 화합하지 않고 배척한 것을 누군가 탓한데 대한 율곡의 말이 들어 있다.  그 발언의 요지는 윤승훈이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에 맞춰 말했는데 삼사(三司: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세기관 또는 그 기관의 관리들의 총칭)가 모두 한 통속이 되어 윤승훈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온 나라에 공론이 없어서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말을 듣고 이발과 김우옹이 모두 율곡에게 사과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왜 이런 말이 더 추가 되었을까?  이 글로만 본다면 율곡의 입장을 변호하 는성격이 짙다.  만약 이 기록을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왜 『선조실록』에서는 빠져 있고『선조수정실록』에는 들어있을까? 그것은 사건을 기록하거나 실록을 편찬하는데 관여한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은 물론 두 실록 모두에 적용되는 점으로,  역사란 기록 또는 서술자의 가치관이나 주관이 개입 될 수 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당쟁 시기의 그것은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대개 당시까지 선조 때의 조정은 젊은 관원들 다수가 동인이었고, 서인은 나이든 대신들과 율곡의 친구와 후학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앞에서 삼사의 관원들 마저도 윤승훈이 정철을 배척하는 문제에 비판하지 않고 입다물고 있었다는 율곡의 말이 그 점을 말해주고 있다.  율곡이 붕당을 조정하려는 것도 일면 동인의 세력이 컸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선조실록』이 편찬되던 광해군 때에도 동인의 후예들이 득세했다는 점에서,  인조반정 후 서인의 집권기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과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째든여기서는 어느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는 지는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두 실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다.  비록 수정했다 하더라도 이전 실록을 폐기하지 않고 보관했으니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은 후학들의 몫이다.

이참에 하나 더 지적한다면 김효원을 삼척부사에 제수한 것이 1575년(선조8) 10월 1일자 인『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보다 사건이 먼저 일어난 김효원과 심의겸이 부령부사와  개성유수로 삼은것이 같은 해 10월 24일자인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또 여기서『선조수정실록』10월 1일에서 김효원을 삼척에 재발령 내는 문제를 다룬것이 10월  25일자『선조실록』의 기록으로 24일의 간격이 생긴다.  어째든 둘 중하나는 분명 착오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율곡과 윤승훈의 문제로 귀결된 애당초 문제의 당사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심의겸은 탄핵될 번 하다가 다른 문제가 불거지는 관계로 또 율곡의 상소로 무사하여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여전히 외직이었다.  아마 율곡의 의도는 그를 중앙 정계에 둠으로써 생기는 조정의 분란을 예방하기 위해 그를 한직에 머물러 있게 함으로써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율곡은 심의겸에게 원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정인홍의 탄핵을 막은 은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1584년 율곡이 죽자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 등이 공박함으로써 파직을 당했으나,  다시 벼슬이 대사헌과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靑陽君)에 봉하여졌다.

한편 정인홍은 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사헌부에 있을 때 지나친 사치풍조를 억제하고 형벌을 준엄하게 하였으므로,  일반 백성이나 시정 잡배들이 두려워하여 숙연해 졌다고 전한다.  그가 심의겸 등을 탄핵하자마자 당시 세론(世論)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으나,  율곡의 제자인 안민학(安敏學)만이

“나는 인홍을 착한 선비라고 여겼는데 지금 그 행동을 보니 바로 괴이한 귀신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율곡도 그에 대해서

“그 사람은 강직하기만하고 식견이 밝지 못하다.  전투하는 군대에 비유하자면 돌격장수로 삼을 만한 자이다.”

라고 말한것으로 기록하였다.  훗날 그는 임진왜란 때의 병장으로 공으로세우고, 광해군 때 영의정에 오른 뒤 인조반정 때 실각하여 참수  당한다.
정철 또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는 그 즈음 어떤 옥사 사건을 계기로 마음속에 늘 불평을 품고 그것을 말로 자주 나타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는데 취하기만 하면 남들의 장 단점을 말하였는데,  어느 날 술김에 이발에게 욕을하고 꾸짖자 이발은 드디어 절교하였다고 전한다.  바로 이때에 심의겸과 관련하여 대간들의 탄핵을 심하게 당하였기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호남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며,  율곡과 이해수(李海壽)가 나루터가 있는 강가에까지 나아와  전송하면서 술을 끊고 지조를 지키라고 당부하자,  정철은 이발(李潑)의 마음씨를 믿을 수 없으니 그와 벗하면 반드시 농락 당할 것이라고 극언하였다.

언젠가 선조가 옆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정철에 대해 내가 그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지만,  전에 그가 승지(承旨: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는 관리)로 있을 적에 나는 그의 사람됨을 대략 살펴보았는데, 지조가 깨끗한 사람이고 나랏일에 충성을 다 바치는 자였다.”

라고하고, 또이와 상반되게이렇게말하였다.

“나는 그의 마음이 편협하여 틀림없이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과연 그러하다.  그러나 정철을 소인이라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정철은 우리 국문학사에서 많은 작품을 남긴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의 작품 내용에 걸맞지않게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그보다 훨씬 못하다.  더구나 수정실록에서 조차도 그에 대한 평가는 초년과 만년이 대비된다.

“그는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옥사(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을 가리킴)를 다스릴때 다른 당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이렇게적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