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남언경·유용정을 체직하다


이이·남언경·유용정을 체직하다

 

1581년(선조14) 8월 1일『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매우 긴 장문이므로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체직(遞職)이란 관리들의 관직을 바꾸는 일인데 이 사건은 요즘말로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수장) 곧 검찰총장과 그 라인에 있는 중요 간부에 대한 문책성 인사이다.
이날의 기록에는 대사헌 이이, 집의(執義: 사헌부의 종3품 관직) 남언경(南彦經), 지평(持平: 사헌부의 정5품 관직) 유몽정(柳夢井)이 관련되어 체직되었다.
이 일은 앞에서 정인홍이 심의겸의 탄핵을 논의하는 가운데 우연히 튀어나온 정철(鄭澈)의 행동에 대한 심의겸과의 관계를 두고,  율곡과윤승훈(尹承勳)의 논쟁으로 이어지고 거기에 삼사(三司: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관리들이 가세하면서 체직이 된 사건이다.

애초 정인홍이 율곡에게 심의겸을 탄핵하자고 건의할 때,  율곡이 이발의 설득에 의해 탄핵문 초안을 작성하면서 정인홍에서 다른 말 하지 않기로 다짐시켰는데,  정인홍이 그 다짐을 깨고 그 내용에 ‘심의겸이 선비들을 끌어들여 명성과 세력을 키운다’ 는 말을 쓴 것이 문제였다.  원래 율곡의 말은‘[심의겸이] 조정의 논의를 주도해 오며 권세를 탐하고 즐겼으므로 선비들의 마음을 잃었다’ 는 것인데,  정인홍이 한 말과 율곡의 이 말은 뉘앙스가 달랐던 것이다. ‘권세를 탐하고 즐겨서 선비들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과  ‘선비들을 끌어들여 명성 과세력을 키운다’는 논리의 현실적 적용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 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수정실록은 정인홍이 이것을 계기로 한 무리의 선비들을 격퇴하려고 거짓으로 율곡에게 다짐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논리의 적용은 선조가 질문하면서 분명해졌다.  갑자기 선조가 정인홍에게 심의겸이 끌어들인 선비들이 누구냐고 묻는 바람에 그만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정철(鄭澈) 등 이라고 대답한 말로 일이 커지게 되었다.  정인홍은 이전에 누군가로부터 이 말을 들은것 같다.  이것은 그가 선조 앞에서 물러나 동료들과 의논해 보겠다는 대답이 그 단서이다. 이에 율곡은 정인홍에게

“정철은 심의겸의 무리가 아니네.  정철은 지조있는 선비인데 지금 그가 심의겸을 따른다고 하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네.  내가 지난번 상소에서 정철의 사람됨에 대해 극구 칭찬했는데,  지금 정철이 심의겸을 편들었다고 한다면 내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네.  이 문제는 그대에게 잘못이 있든지 아니면 내게 잘못이 있는 문제이네.”

라고 말하니 정인홍이 마지못해 인정하고 선조에게 말하였다.

“정철은 심의겸의 무리가 아닙니다.  제가 앞서 올린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저의 직책을 바꾸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에서 이런 정인홍의 일을 다룰 때 그 논의에 사헌부의 관리들이 참여했는데,  율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철이 심의겸과 사이가 매우 가깝다고는 하지만 기질이나 마음 가짐은 현저히 다릅니다.  정인홍이 전하의 물음에 급하게 대답하다 보니 사실과 다르게 말을 했을뿐, 사적인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이것을 근거로 내보낼 것을 청해야 합니다.”

그러자 여기서 또 정철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다.  이때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4품 관직) 권극지(權克智), 지평(持平: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5품 관직)홍여순(洪汝諄)·유몽정은 논의에 참여하였는데,  권극지와홍여순이 말하기를,

“정철이 심의겸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심의겸이 뜻을 상실한 이후  정철이 늘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현저히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임금께 말하였다.

“정철은 심의겸과 매우 가까운 사이입니다.  정인홍이 소문에 따라 곧바로 전하의 질문에 대답했을 뿐 실지로 실수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몽정은 율곡의 말에 동조하였고, 율곡은 그와 함께 임금께 말하였다.

“정철이 심의겸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지만 정철은 강직하고 절개가 있고 고결한 선비로 기질이나 마음가짐은 그와 아주 다릅니다.  정인홍은 정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소문만 믿고 전하의 갑작스런 질문에 답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정언(正言: 사간원의 정6품 관직) 윤승훈(尹承勳)이 율곡의이 말을 반박해 말하였다.

“대사헌 이이등은 정철이 비록 심의겸 과매우 가까운 사이이나 기질과 마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무릇 사람이 친구를 사귈 때는 마음과 기질이 맞아야 서로 친하게 되는데, 매우 가까운 사이이면서 마음이 다른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율곡이 말하기를

“윤승훈은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라면 생각도 반드시 같다고 주장 하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옛날 한유(韓愈: 당나라 때 문인)는 유종원(柳宗元: 당나라 때 문인)에게, 사마광(司馬光: 북송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은 왕안석(王安石: 북송의 정치가)에게, 소식(蘇軾: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은 장돈(章惇: 북송의 정치가)에게 있어서 그들의 생각을 논한다면 너무 다르지만 가까운 정도를 말하면 형제와 같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윤승훈은 계속 글을 올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않았다.  그러자 율곡은 또 선조에게 말하기를

“정철의 행위도 진실로 옳지 못했지만, 그가 심의겸과 한편이 되었다는 말도 공론이 될 수 없습니다.  저 윤승훈이 무슨 식견을 지녔겠습니까?  선비들의 취향을 관망하여 붙잡으려는 계책에 불과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선조는 윤승훈을 지방관리로 내보냈는데,  이번에는 삼사의 관리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상소를 올렸다.  그 요지는 율곡이 당시 사간원의 언관이었던 윤승훈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은 언관을 경시하는 일이고,  한 쪽은 현직을 유지하고 다른 쪽은 문책하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거였다.  이런 상소는 삼사를 중심으로 올라왔다.  이에 선조는 율곡 등의 체직을 허락하고 정지연(鄭芝衍)을 대신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때 신창현감(新昌縣監)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특별히 윤승훈을 신창현감에 제수하였다.

사실 이 문제는 애당초 심의겸을 탄핵하는 문제에서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된 것이다. 율 곡이 정인홍의 심의겸을 탄핵하는 의견에 동의한 의도 는심의겸에게 허물이 있어서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조정을 화합의 분위기로 이끌려는 의도 는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 일의 결과가 정철을 구하고 윤승훈을 배척하게 되었으니,   더욱 동인들의 반발과 미움을 당하는 쪽으로 사건이 전개되었다.
율곡 처럼 총명한분도 이렇게 휘말리니 정치란 속성이 그런 것인가? 아니면 사실이 분명치  못 할 때는 여론과 명분을 근거로 판단해야 하는 시스템의 문제인가? 오늘날도 사실이 호도되거나 은폐되고 여론과 추측만 난무할 때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튼 훗날 정철은  정여립 사건을 다루면서 천명이나 넘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사건에 간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