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벼락은 하늘의 경고이다


 

대전의 벼락은 하늘의 경고이다

 

인조실록』인조 11년(1633) 10월 19일의 일이다.

이 삼가 듣건대, 금년 7월 17일 밤에 벼락이 쳤는데 특히 대전 안이 혹심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 매우 놀라 직언을 구하는 성지를 내리시면서 ‘법궁의 정전은 바로 임금이 정치를 하는 막중한 곳인데 전에 없는 이변을 갑작스럽게 여기에다 내렸으니, 하늘의 깊은 뜻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중략)

전하께서 반정으로 보위에 오르신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 들으셨던 모유(謀猷:원대한 꿈)와 경연에서의 강론,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올렸던 상소 가운데 격언과 지극한 담론으로써 ‘약과 침’이 될 만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매양 듣고 답할 즈음에 반드시 ‘깊이 생각하겠다.’하셨고, 반드시 ‘가슴에 간직하여 잊지 않겠다.’하셨는데, 전하께서 과연 그 들었던 바를 깊이 생각하여 마음에 얻은 바가 있으며, 말씀드렸던 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여 실천하신 바가 있습니까? 흐르는 물처럼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공이 굴러가듯 이 말을 듣는 것은 바로 제왕의 아름다운 덕인데, 전하께서는 과연 실지로 이러한 덕이 있습니까? 전하께서는 본래 천성으로 타고난 훌륭한 자질이 있는데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사업에 대해 어떠한 뜻을 가지셨습니까. 도덕과 사업을 반드시 성현처럼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셨을 것입니다. 또 혼조(광해군 시대)의 어지러운 정국을 만나서 무릇 눈으로 보고 탄식하고 마음에 격분하여 강개하신 바가 필시 심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정 이후로 담당하고 파악하면서 처음부터 지극한 덕과 큰 공을 이루리라 스스로 격려하지 않으셨습니까. 옛날 사람은 하루를 공부하면 하루만큼 공부의 효과가 있고 1년을 공부하면 1년만큼 공부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10년 중에 성취하신 것과 힘써 얻으신 것을 되돌아볼 때 과연 새로 즉위하실 때 가졌던 마음과 부합되고 그전에 뜻하셨던 사업을 거의 다 달성하였다고 여기십니까. 요순의 마음을 본받지 않으면 다 격이 낮은 심법(心法)이며, 하․은․주 3대의 정치를 본받지 않으면 모두 구차한 정치입니다. (중략)

그러나 변괴를 당하여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을 어찌 임금만 가져야 하겠습니까. 무릇 천둥이 치면 초목과 금수까지도 진동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더구나 사람은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천지 사이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과 일이 있기 때문에 모두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닦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왕좌에 있으면서 하늘을 대신하여 일을 하는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특히 임금은 그 도를 맡아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반드시 몸소 먼저 수양하고 반성해야 아랫사람들이 누구나 분발하여 진작될 것입니다. 오늘날 만일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려고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날마다 큰 천둥소리를 듣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략)

1633년(인조 11)에 임금이 정사를 보는 궁궐 대전에 벼락이 치자, 인조가 이러한 기상이변을 당하여 신하들에게 직언(直言)을 구하는 분부를 내렸다. 조선시대에는 가뭄과 홍수, 지진과 이상기후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임금은 근신하고 반성하는 뜻에서 정전을 피하고, 음식을 줄이며, 죄수를 방면하고 신하들에게 구언(求言)을 하였다. 이때는 관료들이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이를 용납해야 했다.

이 구언교지에 응해서 당시 부호군(副護軍) 장현광(張顯光:1554~1637)이 상소를 올린 것이 위의 글이다. 장현광은 조선 중기 산림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이조참판 등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하는 등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학문적 연원은 퇴계 이황에 가까웠으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율곡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유성룡, 정경세 등과 더불어 영남의 수많은 남인 학자들을 길러 냈다.

장현광은 이 상소문에서

“궁궐의 대전에 벼락이 친 것은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여 경고를 보인 것

이라고 단정하고, 인조에게 반성하고 수양하는 한편 분발하고 떨쳐 일어나 올바른 정치를 펴도록 건의하였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보면 벼락 치는 일이 그다지 두려운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만 해도 이러한 기상이변을 하늘과 인간이 소통하는 매개체로 보았다. 따라서 벼락이 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인조는 장현광이 올린 상소를 읽고 답변하기를,

“상소를 읽고 전후 정성스러운 경의 뜻을 가상하게 여기었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스스로 채찍질해 가며 무언가 잘 해보려고 하였지만 재주와 학식이 미치지 못하여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밤이 깊도록 잠 못 이룬 채 탄식했을 뿐이다. 경이 말한 교훈적인 말은 하나도 격언과 지론이 아닌 것이 없으니 감히 자리의 오른편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사실 가뭄과 홍수는 거의 해마다 있는 일이고, 일식과 월식은 주기적인 현상이며, 그밖에 이상기후, 혜성, 태풍, 화재 등의 재변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 허다한 천재지변에 대해서 임금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불합리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임금이 천명을 받은 존재라는 천명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재이(災異)는 임금이 행하는 정치와 행실에 있어서 잘잘못을 반성하고 옳은 길로 나가도록 하는 하늘의 힐책 또는 경고라고 간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허구성을 잘 알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