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지식인 김시습


저항의 지식인 김시습

느 사회에나 바르지 않은 현실을 비판하는 지식인이 있게 마련이다. 오백여 년 역사의 조선왕조에서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우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 1435∼1493)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15세기는 태종이 권력을 잡은 후 왕권이 강화되고, 세종, 문종, 단종으로 적장자에게 왕위가 계승되어 가면서 봉건적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어가는 시기였다. 그런데 세조가 이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다. 당연히 여기에 대해 반발하는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시습이었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이름이 났다. 세 살 때 이미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지었다는 유명한 시가 있다.

비도 없이 천둥 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에 흩어지네.

그가 신동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서 세종은 어린 김시습을 대궐로 불러들여 그의 재주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으며, 뒷날을 기약할 정도였다. 그러던 그는 세조가 힘으로 왕위를 빼앗자, 격분하여 공부를 그만두고 머리를 깎고는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그 후 그는 현실의 불의와 타협에 줄곧 반발하면서 살았다. 과거를 보고 관리로 출세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선교 등 다양한 사상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어느 것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시와 소설로 울분을 달랬다.

그는 24세인 1458년(세조 4)에 관서지방을 유랑하며 지은 글을 모아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를 엮었는데, 그 후지(後識)에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금강산․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지은 글을 모아 1460년에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다. 이후는 주로 삼남지방을 유랑하여, 1463년에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이처럼 조선조에 사대부의 일원이었으면서도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안주하지 못한 지식인을 방외인(方外人)이라 불렀다. 김시습은 방외인의 문학을 처음으로 연 인물이었다.

그는 서른한 살 되는 봄에 10년 동안의 방랑 생활을 끝내고, 경주 남쪽 금오산에 매월당을 짓고 자리 잡았다. 여기서 국문학사에 빛나는 『금오신화(金鰲新話)』라는 산문 소설을 창작하였던 것이다. 『금오신화』는 귀신, 염라왕, 용왕, 용궁, 염부주 같은 비현실적인 것들을 소재로 삼았으므로 전기문학(傳奇文學)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김시습 자신의 모습과 생각을 비유적으로 담아 낸 자서전적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품에서 어려운 시대에 타협과 굴복을 거부했던 한 지식인이 현실의 비리와 자신의 이상을 이런 종류의 글에나마 담아서 저항하고자 했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김시습은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선교 등 다양한 사상을 섭렵하여 유, 불 관계의 다채로운 논문들을 남긴 사상가이자, 현재 그의 시문집에 전하는 것만 하더라도 2,200여수나 되는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과 같이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학문을 추구하는 것은 불교 자체를 엄격히 이단시하는 당시의 풍조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는 퇴계 이황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 : 궁벽한 것을 캐내고 괴상한 일을 행함)’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김시습전」(『율곡전서』권14∼16, 잡저)을 지은 율곡은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기를, “재주가 그릇[器]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리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경청(輕淸)은 지나치고 후중(厚重)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불의에 저항하는 기상에 대하여, “절의(節義)를 세우고 윤기(倫紀)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기풍을 접하면 나약한 사람도 감흥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되기에 남음이 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율곡은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이 한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애석해하였다.

김시습의 시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힘들이지 않고서도 천성(天成)으로 시작(詩作)이 가능했다는 것과, 둘째는 그 생각이 높고 멀어 초매(超邁)․오묘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 가운데 역대 시선집에 수록된 시만도 20여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