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는 누구나 두드릴 수 있었을까


신문고는 누구나 두드릴 수 있었을까

 

선왕조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다는 ‘민본(民本)’과 덕으로 다스린다는 ‘덕치(德治)’의 유교 이념을 내건 국가였다. 또한 언론제도가 발달하여 왕권의 전횡을 견제하고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를 탄핵하여 공정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신문고를 두드려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던 신문고의 설치도 덕치와 민본이 합해진 백성을 위한 정치적 배려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신문고는 마치 오늘날 민주적인 제도의 상징물과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백성들은 정말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의 일반 백성들은 중앙 정부나 지방 수령, 그리고 지방의 토호들에 의해 경제적인 수탈과 피해를 자주 당하였다. 그러나 힘 있는 사람들의 불법이나 부정은 대개 은폐되고, 법을 집행하는 관원들의 오판으로 억울하게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부당하게 재산이나 처자를 빼앗기기도 하고, 양인이 천민으로 되기도 하였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힘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운명이거니 체념하고 이를 감수하거나 아예 자신의 억울함을 깨닫기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부 의식이 있거나 용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풀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도 안정된 지배의 유지를 위해서는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민심 획득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소원(訴冤)제도를 마련하였으니 신문고와 상언(上言) ․격쟁(擊錚)의 제도가 그것이었다.

신문고는 조선 3대 왕인 태종 1년(1401) 7월에 중국 송나라 등문고(登聞鼓)를 본받아 설치되었다. 그래서 그 이름도 등문고라 하였다가 곧 신문고라고 고쳤다. 신문고는 의금부 당직청에 있었고, 영사(令史) 1명과 나장(螺匠) 1명이 항상 지키고 있었다. 태종 4년의 다음과 같은 실록 기사는 신문고에 대한 조선 왕조의 의지를 잘 보여 준다.

 

“국가에서 백성의 의사가 왕에게 전달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백성들에게 와서 치도록 허락하여 왕의 귀와 눈이 막히고 가려지는 근심을 없애니,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요, 아름다운 뜻이다.”

태종실록』권8, 태종 4년 갑신 9월 19일

 

신문고는 귀천을 가릴 것 없이 호소할 데가 없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왕이 직접 해결해 준다고 표방하고 있다. 당시 글을 몰랐던 하층민이 말로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신문고를 설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혁신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신문고가 정말 얼마만큼이나 백성을 위한 역할을 하였을까?

신문고는 전국의 백성들이 언제 어디서나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서울에만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신문고를 치기 위해서는 일단 서울까지 올라와야 하였다. 그렇다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쉽게 신문고를 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문고를 치기 위해 지켜야 할 절차가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먼저 담당 관원에게 호소하여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게 하였다. 지방에서는 먼저 자기 고을의 수령에게, 그 다음 관찰사에게,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도록 하였다. 사헌부의 처리에도 만족하지 못하면 마지막으로 신문고를 치도록 하였다. 이 때 각 단계별로 전 단계의 관원에게서 그 사안을 처리했다는 확인서를 받아 제출해야만 다음 단계에 호소할 수 있었다. 신문고를 칠 때에도 억울한 내용을 진술하여 담당 관리가 글을 작성하고, 신청자가 사는 곳을 확인한 뒤에 북을 두드리게 하였다. 따라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신문고를 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고를 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지키던 영사가 먼저 의금부의 관리나 당직원에게 보고한 후에 사유를 확인해서 사안에 따라 신문고를 칠 수 있게 하였다. 신문고를 치면 의금부의 관원이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지시에 따라 해당 관청에서는 5일 안에 처리해야 하였다. 신문고를 친 사람의 억울함이 사실이면 이를 해결해 주었고, 거짓일 경우에는 엄한 벌을 내렸다. 또한 해당 관원이 잘못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신문고를 치기 어려운 점은 까다로운 절차 때문만은 아니었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경국대전』형전에 따르면, 국가 안위에 관련된 사건과 불법 살인 사건을 빼고는, 중앙 관청의 하급 관리나 노비들이 그의 상관을 고발하는 경우와 지방의 양반, 향리, 민들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는 오히려 벌을 받는다고 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비의 경우는 아예 북을 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힘없는 일반 백성들이 정해진 절차를 거쳐 신문고를 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수령이나 관찰사 또는 서울의 해당 관원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문제가 신문고를 통해 왕에게 알려지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유형 ․ 무형의 압력과 회유를 통해서 신문고를 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천신만고 끝에 신문고 앞에 이르러서도 이를 지키는 의금부 관원들의 방해에 부딪치게 된다. 세종 때에는 양반 집의 노비가 신문고를 치려고 하였다가 담당 관리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엉뚱하게 광화문에 걸려 있던 종을 쳐서 문제된 적도 있었다. 더구나 중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두려움은 신문고에의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이 있으면 왕에게 직접 호소하라고 만들어 놓은 신문고는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설령 신문고를 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왕에게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거의 그대로 지속되었다.

따라서 신문고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에 사는 전현직 관리들이거나 양반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당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신문고를 이용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 양반을 비롯한 지배 신분층으로 나타난다. 그나마 특권 지배층의 반발로 세조 때부터 폐지와 설치가 반복되었던 신문고는 결국 중종 때 아예 폐지되고 말았다.

신문고가 유명무실해지자 이제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길은 상언과 격쟁만이 남게 되었다. 상언은 대부분 왕의 행차가 있을 때 그 앞에 나아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고, 격쟁은 왕이 있는 곳 근처에서 시끄럽게 징을 울려 왕의 이목을 끈 다음 구두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상언은 신문고에 비해 절차가 간편하여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기 쉬운 제도였지만, 기본적으로 글을 알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격쟁도 별다른 제약은 없었지만 격쟁을 한 사람은 먼저 형조의 취조부터 감수해야 하였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반 백성들은 상언과 격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상언과 격쟁은 백성들의 병폐를 적극적으로 수렴하고자 하였던 조선 후기 영․정조 대에 더욱 활성화되었다. 한편 상언과 격쟁의 남발에 따른 폐단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영조 47년(1771) 11월에 창덕궁 진선문(進善門)과 경희궁 건명문(建明門) 앞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였다. 이때의 신문고는 궁궐 안에 설치되었고 그 이용에 대한 제약도 강화되어 겉으로 내세워진 명분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처럼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호소하려고 신문고를 치는 일은 어렵기 짝이 없었으나, 국가 변란을 고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제약 없이 직접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이 정치의 득실을 따지고, 민생의 안정을 주장하기 위해 신문고를 칠 경우도 일반 백성들의 경우보다는 수월하였다. 결국 두드리면 들어 준다던 신문고는 하층민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나 해결을 위한 제도였다기보다는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왕의 권위와 신성감을 드러내고, 양반 지배층의 언로를 열어 지배체제를 안정화시키려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조선왕조가 통치 이념으로 내건 ‘민본’과 ‘덕치’라는 것도 이처럼 왕권을 중심으로 한 민본과 덕치로서, 국민의 주권을 바탕으로 한 오늘날의 민주주의 이념과는 그 원리가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