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의 영수 김효원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2

동인의 영수 김효원

 

선 정치사를 비판적으로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용어가 ‘사색당파(四色黨派)’라는 말이다. 네 가지의 색깔을 들어 네 개의 붕당(朋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처음에는 동인(東人)•서인(西人)•남인(南人)•북인(北人)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어진 뒤에는 노론•소론•남인•북인의 4대 당파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붕당은 선조(宣祖) 8년(1575)에 동•서로 나뉘어졌는데, 바로 이 최초의 동서 분당의 중심인물이 심의겸과 김효원(1542-1590)이다. 심의겸을 편든 사람들을 심의겸이 살았던 건천동을 빗대어 도성 서쪽 파당이라는 의미의 서인이라 하고 김효원을 편든 사람들을 김효원이 살았던 정릉동(현재의 정동)을 빗대어 도성 동쪽의 동인이라고 하였으니 바로 여기서부터 조선의 봉당이이자 당파가 태동한 것이다.

선조 연간은 비록 전쟁의 상흔이 깊게 드리운 시절이기는 하지만 명유들이 속출한 시대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바로 이런 시기에 젊은 사류들의 중심에 우뚝 서있었던 김효원이라면 필시 그에 필적할 학행을 갖추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통상적으로 접하는 김효원에 대한 현대의 기록들은 주로 동서분당의 주역으로 당시 동인의 맹주였다는 정도로 멈추고 있어서 아쉬운 감이 있다.

<연려실기술>의 김효원에 대한 기사들은 그 학행의 대강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용모가 단정 엄숙하고 아름다운 수염은 길이가 1자에 이르렀으며, 술을 1말을 마셔도 어지러운 언동이 없었다. 공무에서 여가가 생기면 짚신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채 산수를 찾아 소요하였다. 매양 아름다운 산수와 그윽하고 한적한 곳을 만나면 종일 시를 읊고 즐기며 돌아갈 줄을 모르니, 사람들이 군수의 행색인 줄 알지 못하였다. 《동유사우록》

 

풍채가 엄연(儼然)하여 바라보면 존경심이 일어났다. 어느 날 창릉(昌陵)에 배제(陪祭)하였는데, 제사를 마치고 임금이 내시에게 묻기를,

“통례 한 사람이 주선(周旋)하고 진퇴(進退)하는 것이 조용하고 법도에 맞았는데 누구냐?”

하니, 내시가 김효원이라 대답하자, 임금이 탄식하기를,

“못 본지가 오래다.”

하고, 영흥부사로 승진시켰는데, 관아에서 죽었다.

동유사우록

 

이 기록은 박세채가 쓴 <동유사우록>에 기록된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박세채는 동국 18현의 한 명으로 송시열과 윤증 간에 회니(懷泥)논쟁 등을 통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적에 화해를 위해 각방으로 주선했던 인물로, 일방적으로 편당하거나 배척하는 심사가 없어 보인다. 이 두 기사는 비록 짧지만 김효원의 학문과 풍모를 추정하는 데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또한 인조반정 후에 광해군 당시 북인 주도록 간행한 <선조실록>을 문제 삼으면서 서인이 중심이 되어 기록한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김효원의 졸기에는 이런 내용들이 들어있다.

 

효원은 벼슬살이에 있어서 청렴결백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정결하고 민첩하게 하였으며 세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젊었을 때 날렵하여 일을 좋아하였고 논의가 과격하였으므로 동류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그의 밑에 있었는데 또한 이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사기도 하여 끝내 당파의 괴수라는 명목으로 죄를 얻어 외직에 보임되었다.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잘못을 반성하여 낮은 벼슬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시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친구에게 보내는 서찰 내용에도 조정의 득실에 대해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늘 탄식하면서 ‘당초 전조(銓曹)의 석상에서 발언한 한 마디 말은 단지 나라를 위해서였는데 어찌 이토록 분란이 생길 줄이야 생각했으랴. 나로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은 일찍이 그의 위인에 대해 논하기를 ‘인백(仁伯)은 강방정직(剛方正直)하니 의당 동류 중에서 제일인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수정선조실록> 개수에 주도적인 자리에 있던 서인들이 쓴 동인의 영수 김효원의 졸기이니 최소한 김효원을 일방적으로 편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효원은 성품이 강방정직하고 청렴결백하며 유능한 관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효원에게는 아우 김신원(金信元)과 김의원(金義元)이 있는데 모두 문과 급제한 영재들로 효원의 ‘졸기’에 이 두 동생들도 명성이 있는 인물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김효원은 당대에 명망이 높던 사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그에 대한 자료나 문헌이 거의 보이지 않는 데에는 다소 의아하다.

필시 서인들이 조선 후기 정치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생 김신원이 대북(大北)에 속하여 임해군(臨海君)을 사사하게 하고, 소북을 제거하기 위한 계축옥사를 잘 다스렸다 하여 익사공신(翼社功臣)에 책훈되고 숭양부원군(嵩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가 인조반정으로 훈작이 추탈되었고, 그의 사위가 대북파로 광해조에 참형에 처해진 허균이었다는 점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광해 치세 기간 북인들은 소북과 대북으로 나뉘어서 국정을 좌지우지 했지만 인조반정 후에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다시는 조선 정치사에 등장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