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한 외척 심의겸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3

유덕한 외척 심의겸

 

의겸이라 하면 조선 정치사에서 김효원과 함께 동서분당의 시발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동서분당의 시발자로서 거론되는 외에 심의겸에 대한 여타의 자세한 기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당시 동인의 영수로 활동하던 김효원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찌 절조와 학행이 없었다면 중진 사류들의 존망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연려실기술>에는 동서분당을 논한 최명길의 <지천집> 한 대목이 전재되어 있다.

동과 서의 틈은 심의겸과 김효원에서 시작되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권신(權臣)의 사위(윤원형(尹元衡)의 사위인 이조민(李肇敏))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본래 사실이었다. 김효원은 심의겸을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외척(外戚)으로서 정치에 간여한다.”

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사실이었다. 김효원이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후에는 절조를 닦았으니 옛사람도 이런 것을 허여한 바이며, 심의겸은 행적은 비록 척리(戚里)이지만 사류(士類)에게 공(功)이 있으니, 역시 군자가 막을 바가 아니다.

그런데 전배(前輩)는 심의겸의 편을 들면서 김효원을 가리켜 안으로 사사로운 유감을 품었다 하고, 후배는 김효원의 편을 들면서 심의겸을 가리켜 궁중의 세력에 의탁한다 하였으나 두 사람 모두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이의 ‘둘다 옳고 둘다 그르다.’는 의논이 나오게 된 근거이다.
지천집(遲川集)》

 

최명길은 여기서 동서 분당이 김효원과 심의겸의 알력에서 발단하였지만 결국에 동서 분당으로 굳어진 정황을 살펴보면, 선배 사류는 심의겸의 편을 들면서 김효원을 가리켜 안으로 사사로운 유감을 품었다고 비판하고 후배 사류는 김효원의 편을 들면서 심의겸을 가리켜 궁중의 세력에 의탁한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격화된 것으로 정작 심의겸과 김효원 당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아마도 최명길의 이 평이 가장 사실에 부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심의겸을 두고서

“행적은 비록 척리(戚里)이지만 사류(士類)에게 공(功)이 있으니, 역시 군자가 막을 바가 아니다.”

라는 말은 심의겸에 대한 배척과 옹호가 발생하는 지점을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한 편은 그가 외척이기 때문에 혹간 궁중의 세력에 의탁한 것이라는 혐의를 두는 데에서 배척한 것이고 한 편은 명종 연간에 외척으로 전횡을 부리던 자신의 외삼촌인 이량을 그가 탄핵하여 퇴출시킨 공적을 염두에 둔 것이다.

동인들이 심의겸에 혐의를 두는 데에는 저간의 사정도 있었으니, 바로 선조 초년에 을사년의 원통함을 풀고 을사년의 위훈(僞勳)을 삭제하는 과정이었다. 본래 을사사화에 연류되어 피해를 입은 사류들을 신원 하는 데에는 이론이 많지 않았지만 을사사화와 관련하여 훈작을 받은 사류들을 삭직하는 문제는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중론이 분분했는데, 당시 심의겸의 처신을 <연려실기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 임금이 공론을 굳이 거절하므로 온 조정이 흉흉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비의 동생 심의겸에게 권하여 대비에게 여쭈라고 하니 심의겸이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백인걸이 듣고 말하기를,

“이량(李樑)을 귀양 보낼 때에는 심의겸이 사실을 대비에게 내통하였으면서, 이번에는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 이것은 심의겸이 삭훈을 반대함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삭훈할 일로 심의겸에게 물은 사람이 있었는데, 심의겸이 말하기를,

“원종공신(原從功臣)이 천여 명이나 되는데 궁중과 연결된 자가 많아서, 그 사람들이 반드시 죽기로 기를 쓰고 방해하려 할 것이니, 만일 거사하였다가 성사하지 못하면 오히려 해가 있을 것이니 아직은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오.”

하니 식자들이 그 때문에 심의겸을 못마땅하게 여기었다.
석담유사

당시 삭훈에 관해서는 심의겸만이 소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준경 또한 선조가 재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현실 정치의 역관계를 고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외척이라 궁중과 관계를 고려한다는 혐의는 갖게 된 셈이다.

그러나 <연려실기술>에는 심의겸의 인품과 학행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는데 그가 선배 사류들의 존망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대강 알 수 있게 해준다.

○ 기개가 활달하고 용모가 장대하였으며, 스스로 몸을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효성과 우애와 공손함과 검소함이 천성에서 나왔으므로 비록 외척이었으나 사류 중에 추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명동 말년ㆍ선조 초년을 당하여 억울함을 씻어주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니 청명(淸明)한 정치가 후세가 미칠 바가 아니었는데, 이는 모두 의겸의 힘이었다. 퇴계가 일찍이 글을 보내 국사에 힘쓰기를 권하기를,

“외척 중에 어진이가 있는 것은 국가의 복이다.”

하였다. 율곡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의겸은 외척 중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였다. <묘비>

 

퇴계와 율곡은 선조의 묘정에 배향된 명신일 뿐 아니라 조선의 유자를 대표하는 명현들이다. 양현이 공히 심의겸을 허여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그의 인망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학행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