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임금의 덕


야사(연려실기술)를 통한 스토리텔링 1

선조 임금의 덕

 

조(재위기간: 1567-1608)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임진왜란(1592-1598)이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평가는 무능함이라는 세 글자일 것이다. 더욱이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결행했을 때 선조에게는 백성을 버린 왕이라는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가 새겨진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岧)의 셋째아들로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선조의 치세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있었던 시기였고 정치적으로는 훈구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라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만약 선조가 국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제대로 재건했다면 위기를 기회로 극복한 위대한 군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은 위기를 잘 넘긴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엄정한 역사의 잣대로 평가했을 때 결코 성공한 왕은 아니지만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선조의 아름다운 덕’이라는 조목을 할애하여 선조의 아름다운 일화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선조의 근검절약 정신을 다룬 기사는 단연 눈에 띄는 대목이다.

 

임금의 검소한 덕행은 여러 제왕 중에 높이 뛰어났다. 만년에 병이 났을 적에 내의가 들어가 진찰하였는데, 푸른 무명요를 깔고 이불은 자주 명주였다. 입은 옷도 역시 극히 굵은 푸른 명주였으며, 약을 마시는 그릇도 백자기에 무늬 없는 것이었고, 흰 책상에 글씨 쓴 병풍이 있을 뿐, 휘장도 없었더라고 한다.《지소록

비단 어의(御衣)가 없고 수라에도 두 가지 고기가 없었다. 서교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아들일 때, 내시가 점심을 올렸다가 물릴 때 여러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을 불러 주시는데 보니, 차린 것은 물에 만 밥 한 그릇과 마른 생선 대여섯 조각, 생강 조린 것, 김치와 간장뿐이었다. 여러 의빈들이 먹고 나니, 임금이 그 남은 것을 싸가지고 가라 하며, “이것이 예이다.”하였다.《공사견문

입시한 대간이 근래에 복색이 사치해진다고 말하자 임금이 속옷을 헤쳐 보이며, “내 옷도 면포를 쓰는데, 신하들의 의복이 나보다도 나은 자가 있단 말이냐.” 하니, 여러 신하가 황송하고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왔는데, 그 후로는 사치한 습속이 없어졌다.
공사견문

정숙옹주(貞淑翁主)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가 그 뜰이 좁은 것을 싫어하여 임금에게,

“이웃집이 너무 가까워 말소리가 서로 들리고, 처마가 얕고 드러나서 막히는 것이 없으니, 값을 주시어 그 집을 사게 하여 주소서.”

하고 여쭈자 임금은,

“소리를 낮게 하면 들리지 아니할 것이고, 처마를 얕게 하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뜰이 굳이 넓어야 할 것이 있느냐. 사람의 거처는 무릎만 들여 놓으면 족한 것이니라.”

하고 굵은 발 두 벌을 주시며,

“이것으로 가리게 하여라.”

하였다.

공사견문

아마도 이 기사들은 임진왜란 이후의 내용일 것이다. 전국토를 유린한 7년간의 긴 전쟁, 그리고 연이어 찾아온 가뭄과 흉년. 이런 상황에서 왕이 근검절약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선조 치세기에만 국란이 있었고 흉년과 가뭄이 들었던가. “임금의 검소한 덕행은 여러 제왕 중에 높이 뛰어났다.”라는 기사를 보면 선조의 근검절약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어전에서 대간이 근래에 신하들의 복색이 사치하다고 진언하자 선조가 자신의 속옷을 헤쳐 보이면서,

“내 옷도 면포를 쓰는데 신하들의 의복이 나보다도 나은 자가 있단 말이냐.”

하는 대목은 선조 개인의 근검절약이라는 미덕을 넘어, 지도자의 몸가짐과 생활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어서

“여러 신하가 황송하고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왔는데, 그 후로는 사치한 습속이 없어졌다.”

라고 기사를 마무리 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한 습속이 이 한 가지 일로 일시에 없어질 수 있겠는가마는 선조의 궁행 실천이 당시 신료들로 하여금 근검절약에 더욱 매진하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틀림없을 것이다.

역린(逆鱗)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최초로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의 라이벌로 유명한 한비자가 쓴 <한비자(韓非子)> ‘설난(說難)’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용은 상냥한 짐승이다. 가까이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는 지름이 한 자나 되는 비늘이 거슬러서 난 것이 하나 있는데, 만일 이것을 건드리게 되면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만다. 군주에게도 또한 이런 역린이 있다.”

이 말에 연유하여 군주의 노여움을 ‘역린(逆麟)”이라 한다.

정사를 올바로 펼치기 위해서는 국정의 동반자인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고 국정의 책임자인 임금은 신하의 고언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역시 신하의 입장에서는 혹 역린을 범할까 조심하게 되고 임금의 입장에서는 혹 역정을 내서 충언을 막아버릴까 삼가야 한다.

재위 초년의 혈기왕성한 선조가 여색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이에 신하들이 경연의 자리를 빌어 간언한 기사가 <연려실기술>에 게재되어 있다.

 

그때에 여자를 총애함이 점점 성하였는데, 홍섬(洪暹)ㆍ박대립(朴大立) 등이 고시관이 되어, 왕소(王素)가 임금에게 왕덕용(王德用)이 진상한 여자를 받지 말기를 청하는 옛글로 시제(試題)를 내었더니, 그 후에 홍섬 등이 입시하였을 때 임금이 조용히 이르기를,

“전날 시제는 누가 냈는지 모르겠으나, 신하의 도리로 임금에게 간할 것이 있으면 간할 것이지 어찌 그렇게 자취를 남기게 한단 말이냐. 내가 유감스럽다.”

하니, 박대립이

“시제는 신이 낸 것입니다. 신하가 간하는 데는 그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니어서, 정당하게 간하는[正諫] 방법과, 풍자로 간하는[諷諫] 방법과 꾀로 간하는[譎諫] 방법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바가 아님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경의 말이 진실로 옳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당하게 간하는 것이 그 중 옳을 것이다.”

하였으니,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이것이 선조 초년 정치의 아름다움을 이룩한 것이다.

부계기문

 

경연관으로 참가한 박대립이 북송시대에 간관으로 유명한 왕소가 인종(仁宗)에게 왕덕용이 진상한 여자를 받지 말 것을 간하고 이에 인종이 왕소의 간언을 채납하여 출궁시킨 고사를 들어 선조에게 간언한 일화인데, 이 기록을 남긴 김시양(金時讓)이 <부계기문( 涪溪記聞)>에서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이것이 선조 초년 정치의 아름다움을 이룩한 것이다.”

라고 자평한 대목은 선초 초년 정치의 아름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마도 이런 기풍이 살아 있었기에 서둘러 을사사화에 화를 당한 신료들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명종 연간에 그리 불러도 오지 않던 퇴계 이황이 몸소 나오는 등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