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24>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다

 

곡이 38세 되던 1573년, 선조 6년 12월 28일(음력)에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한 일이 발생하였다. 율곡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임명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율곡이 임명된 우부승지란 승정원(承政院)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이다. 승정원은 왕명을 취급하는 기관으로서,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그리고 동부승지는 공조의 일을 분담하여 담당했다.
아울러 이들은 경연에 참석할 수 있는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하였으며, 해당 업무에 관해 국왕의 자문 역할도 하였다.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문서는 모두 이 승정원을 거치도록 되어있어서 그 역할이 매우 중대하였다.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는 그날의 기록에 이렇게 적혀있다.

“하얀 무지개(白虹)가 해를 관통했다. 영의정이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뵈니 선조임금이 비망기(備忘記)로 이렇게 일렀다. ‘요즘 어진 선비가 조정에 있어서 훌륭한 말을 앞 다투어 아뢰는 것은 전에 없이 기쁜 일인데,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고 도리어 이변이 발생하였구나. 이것으로 보면, 위에서 옛 도를 회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곧은 말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의정은 당시 관료 중에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책임자로 임금을 보좌하고 모든 관리들을 거느렸으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이러한 영의정이 급히 임금을 뵙고 임금의 교지(敎旨)가 담긴 비망기를 받아온 것이다.

비망기에는 하얀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일을 이변으로 표현하였다.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은 요즘 사람들의 지식으로는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흉조라 하여 전란이나 국가적인 재앙이 일어날 징조로 보았다. 하얀 무지개에 대해서 진서(晋書)(천문지)에는 온갖 재앙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정이 급히 임금을 찾아 교지를 받게 된 것이다.

임금의 교지에는 유감의 표명만 나와 있지만, 그 다음날 조정은 흉조에 대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임금에게 조정의 행사를 취소하도록 권한 것이다.

그러한 조치에 대해서 12월 29일자 선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이 태양의 이변을 이유로 정월 초하루의 망궐례(望闕禮)와 9일의 문소전(文昭殿) 대제(大祭)를 정지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임금이 그 의견에 따랐다.”

정월 초하루의 망궐례는 문무백관이 임금 앞에 모여 절을 하며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요즘의 신년 하례식과 같은 행사이다. 문소전 대제는 종묘와는 별도로 궁궐 내에 지은 원묘(原廟)인 문소전에서 지내는 큰 제사를 말한다. 이들 행사는 어느 것이나 일 년의 시작을 준비하는 중요한 행사였는데 그런 행사를 취소한 것이다. 그만큼 태양을 관통한 하얀 무지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지나간 일은 그 전 해인 1573년에도 있었다.

당시 1월 19일, 선조실록의 기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교시를 전했다. ‘근래 재난의 징조를 나타내는 이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제 또 이러하므로 아주 유감스럽다. 궁궐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겠다.’”

임금이 자신의 과실을 반성하고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정전(正殿)에 나아가 조의(朝儀)를 행하는 것을 삼가고, 반찬의 숫자를 줄이겠다고 한 것이다.

율곡은 ⌈경연일기⌋ 1574년 1월 기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조야에 직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렸다. 또 성운(成運) 과 이항(李恒)을 불러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다. 이는 장차 재앙을 방비할 계획을 묻기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운과 이항은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오지 아니하였다.”

1573년에도 무지개가 뜬 다음날인 30일에 임금은 정전(正殿)에서 피신하고, 반찬을 줄이고 음악 듣기를 중지하였다. 율곡의 경연일기(1574년 정월조)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임금이) 재변(災變, 재난이 일어날 이변)으로 인하여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을 줄였으며, 음악을 듣지 않았다.”

⌈경연일기⌋에는 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병으로 사퇴하자, 지체 없이 체직(遞職)을 명하니 뭇 사람들이 의혹하였다.”

고 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사퇴를 받아들이고 지체 없이 교체를 명한 것은 역시 무지개의 이변 때문이었다.

우의정 노수신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동인에 속한 인물인데 나중에 영의정(재임기간 1585-1588)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선조실록에는 그의 사퇴가 왜 문제가 되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나중에 다시 만들어진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병으로 사퇴를 청하자 임금이 즉시 허락하였다. 이는 임금이 무지개의 이변이 일어나는 것을 대신이 적격자가 아니라서 그럴 것이라고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이이(李珥)가 좌의정 박순(朴淳)에게 말하기를,

“재변이 이러하므로 임금의 마음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의혹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중략) 마침내 이탁(李鐸)과 박순이 노수신을 체직하지 말 것을 계청하니 성상이 따랐다.”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는 이변이 일어나니 임금은 자신이 신하들의 임명을 잘못한 것인지 의심한 것이다. 그래서 우의정의 교체를 선택하였다. 이러한 임금의 행동에 대해서 관료들은 몇 차례의 간언을 통해서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결국 우의정 노수신은 교체되지 않고 사표가 반려되었다.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사건은 1574년 1월 5일에 한번 더 일어났다. 선조실록의 기록에

“눈이 오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했다.”

고 하였다. 율곡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궁궐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았다.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이렇듯 자연의 이상 현상이 정치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해석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군주의 덕이 부족하고 사회 풍속이 타락해지면 하늘에서 경고를 내렸다. 자연의 이상 현상이나 자연 재해가 바로 그 경고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조짐이 있으면 임금은 자신의 부덕함을 반성하고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유교의 역사관 혹은 정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