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중시한 개혁가 율곡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23<

현실을 중시한 개혁가 율곡

 

약(鄕約)은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다. 송나라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이 그 시초다. 여씨 향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께 약속을 한 자는 덕업(德業)을 서로 권하고, 과실은 서로 바로 잡으며, 예속으로 서로 사귀고, 환난을 당할 때는 서로 도우며, 착한 일은 장부에 기록하고, 잘못이나 혹은 약속을 위반하는 일은 역시 장부에 기록한다. 잘못을 세 번 저지르면 벌을 주고 그래도 고치지 않을 경우에는 관계를 끊는다.”

이러한 내용은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형제들이 같은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든 자치 규약이었다. 북송시대에 활동하였던 여씨 형제들은 모두 여섯 형제 가운데 다섯 형제가 과거에 합격한 명문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관중지방에서 북송의 대유학자인 장재(張載)와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형제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들은 모두 북송의 고급관료로 외교, 국방, 경제 분야에 관여하고 예학자로서 사회의 교화(敎化)에 앞장섰다. 여씨 향약은 그러한 사회 교화 활동의 결과였다. 덕업을 서로 권장하고 예로서 서로 사귀며, 착한 일을 장부에 기록한다는 항목에서 그들이 지향한 유교적인 교화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주자는 이러한 여씨향약을 보완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고려시대 말에 주자학과 함께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이다.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은 여씨 향약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일부 주자가 추가한 부분도 사실은 여씨 향약을 만들었던 여씨 형제들의 자료를 참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향약은 향촌의 주민들 모두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는 향촌에 거주하는 사대부 혹은 사인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아울러 이들 향약은 국가 권력과는 상관없이 향촌 내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한 자치적인 규율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율성이 강하였기 때문에 향약에서 정한 약속을 어겼을 경우에 어떤 행위를 강제할 수 없는 문제점도 있었다.

“잘못을 세 번 저지르면 벌을 주고 그래도 고치지 않을 경우에는 관계를 끊는다.”

라는 규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최대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관계를 끊은 수단 밖에는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향약이 실지로 널리 시행된 것은 조선시대 중엽 이후부터이다. 중종때 사림파인 조광조, 김식 등이 건의하여 전국 각지에 향약 실시가 반포되었다. 이후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 등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마련하여 실시하였다.

퇴계는 여씨 향약 중에서 특히 과실이 있을 경우에는 서로 시정한다는 ‘과실상규(過失相規)’의 항목을 중심으로 향약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예안향약(禮安鄕約)>이다. 예안 향약은 가정생활의 기본 윤리에서부터 향촌 마을 생활의 기본 윤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규율을 정하였다.

퇴계는 향약의 제정에 임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옛날 향대부의 소임은 덕행과 도예(道藝)로서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을 규탄하는 것이었으며, 선비된 사람도 또한 반드시 집에서 몸을 바로잡고, 향중에서 이름이 들어난 뒤에야 나라에 나아가 등용되었다. 효제충신이라는 것은 인도(人道)의 대본(大本)이요, 집과 향당이라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향약 제정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사람을 잘 얻으면 한 마을이 조용하고, 사람을 못 만나면 한 마을이 해체되거늘, 하물며 향속(鄕俗) 중에는 임금님의 덕화(德化)가 못 미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서로 공박하고,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갈등하며,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도리가 허물어져 행해지지 아니하니, 예의를 버리고 염치에 등을 돌림이 날로 심해져 오랑캐나 금수와 같이 되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임금님의 정사(政事) 중에 큰 걱정꺼리이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잡을 책임이 바로 향소(鄕所)에 있으니 실로 그 책임이 또한 무겁도다.”

여기에서 퇴계가 말하는 ‘향소’란 유향소(留鄕所)를 말한다. 유향소는 조선시대 때 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이다. 지방의 유력자나 벼슬에서 은퇴한 자 중에서 뽑아 지방의 풍속을 지도하고 향리의 부정을 막도록 하였다. 퇴계의 향약은 이렇듯 지방 유향소의 역할이 크고 지방의 행정조직과 연계된 것이 특징이다.

퇴계는 이어서

“혹자는 먼저 가르칠 종목을 들지 않고 다만 벌칙만 든 것을 의심할 것이다. 이것도 진정 일리가 있다. 그러나 효제충신이란 마음속에 타고난 떳떳한 성품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국가에서도 학교를 세워 가르치는 것이 어느 하나 바르게 인도하지 않는바가 없으니, 하필 우리들이 따로 조목조목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면서 벌칙을 내릴 대상과 벌칙을 열거하여 향약을 마무리했다.

율곡은 36세 되던 1571년 6월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임명되었다. 그 때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었다. 그 다음해에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이 파주로 귀향함에 따라 향약이 지속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선조 6년, 1573년 9월 21일)에 조정에서 향약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는 향약의 실시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는 왜 반대하였을까?

“(지금 우리 사회에) 진실은 적고 허위가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혔다가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구제를 받았다 하더라도 꼭 죄가 없어서 구제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 고을의 수령으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은 자라고 해서 꼭 공적이 있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율곡이 판단한 당시 선조시대의 사회에는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진실은 적고 허위가 성행하고 있다.”

고 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당시 사회에는 술자리를 베풀어 선비들을 유혹하여 부정한 행위가 성행하고,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혼탁한 세류에 물든 자들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향약을 시행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더 열거하였다.

“아래 백성들의 경우는 굶주림과 헐벗음이 절박하여 본심을 모두 잃어 부자 형제 사이라도 서로 길가는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고 있으니, 그 밖의 일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형벌과 정치가 제대로 제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온 방식대로 따르고 우리의 관습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 윗자리에 앉아있다고 하더라도 교화를 펼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율곡은 사회가 혼탁하여져서 선조 임금이 설사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 할지도 향약은 시행될 수 없다 판단한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향약을 실시하는 것이 좋겠지만 현실의 조건이 그리 할 수 없으니 시행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은 현실을 중시한 개혁가 율곡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