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침략을 예견한 조정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5>

외국의 침략을 예견한 조정

 

1574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 정월은 조정 안팎으로 뒤숭숭했다. 그 전해 12월에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지나가는 이변이 있었는데, 새해 정월 5일에도 다시 그러한 불길한 흉조가 하늘에 나타났다. 그 다음날 6일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율곡이 지은 ⌈경연일기⌋에는

“경성(京城)에 지진이 있었다.”

고 하였다.

서울에 지진이 있었으니 임금이 사는 궁궐에도 그 흔들림이 전해졌을 것이다. 당시에는 지진도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흉조만큼이나 나쁜 조짐이었다. 연산군 시대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있었던 이세영(李世英) 등이 올린 상소를 보면 지진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다.(연산군 4년 7월 8일 기록)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거나, 임금이 포학하여 함부로 죽이면 지진이 있고, 대궐 안에서 정치를 어지럽히는 여자가 있으면 지진이 있고, 외척(外戚)이 멋대로 세도를 휘두르고, 내시가 권세를 부리면 지진이 있다. 그리고 형(刑)과 벌이 중용의 도를 잃으면 지진이 있고, 감옥에 원통한 죄수가 있으면 지진이 있고, 임금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거나, 안으로 여색(女色)에 빠지면 지진이 있고, 오랑캐가 침범하여 사방에 병란(兵亂)의 조짐이 있으면 지진이 있다.

또 성종 23년(1493) 당시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흔들리자, 당시 영의정 등 고위 관리들은

“무능하고 부덕한 사람이 너무 오래 재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변고가 생겼다”

면서 사직서를 내기도 하였다. 임금은 하늘이요 신하는 땅인데, 땅이 진동한 것은 신하들이 잘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나라 유학자 동중서는 이변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후대에 이르러 군주가 음란하고 태만하여 국가가 쇠약해져서 백성들을 다스릴 능력을 상실하게 되자, 제후들은 등을 돌리고 양민을 학대하여 토지를 강탈하는 등 덕에 의한 교화를 폐하고 형벌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형벌이 온당치 못하면 사악한 기운이 생긴다. 사악한 기운이 밑에서 쌓이면 원한이 위로 축적하게 된다. 위아래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곧 음양의 기운에 혼란이 일어나 이변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재이(災異)가 발생하는 원인이다.”
(⌈한서⌋「동중서전」)

기상이변이 생기는 것은 인간 사회의 부조리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또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춘추번로⌋에서 임금 왕(王)자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였다.

“ 옆으로 그은 3획은 천(天), 지(地), 인(人)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위에서아래로 이은 것은 그 의미를 통하게 한 것이다. 천지(天地)와 인간의 가운데를 취하여 그것을 이어 하나로 통하게 하는 것은 왕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인도(人道)만이 천(天)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천지와 군주는 동일한 존재다”

유학자들의 생각에 기상이변이 일어날 때 군주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군주는 행동과 마음가짐은 단정하게 하고 백성들과 잘 소통함으로써 다가올 재난에 대비해야한다.

경복궁의 사정전
경복궁의 사정전

 

선조 임금은 거듭된 흉조를 당하여 음악 듣는 것을 중지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다. 그리고 정전(正殿)의 사용을 피하였다. 정전은 궁궐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 사용하는 곳이다. 신하들과 조회할 때도 가끔 정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외국의 사신이 오거나 새로운 임금이 즉위할 때 사용한다.

선조는 경연의 자리를 옮겨 사정전(思政殿)의 처마 밑에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월에, 더구나 아침에 하는 조강(朝講)을 그곳에 하기는 날씨가 너무 추웠다. 그래서 신하들의 권유로 비현각(丕顯閤)에서 소규모로 강연을 하기로 했다. 비현각은 동궁에 있는 것으로 왕세자가 공부할 때 사용하는 조그만 전각이다.

이 비현각에 임금을 모시고 들어간 관료들은 대신, 대간, 강관뿐이었다.

율곡의 ⌈경연일기⌋에는 당일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이때 입시관(경연에 참석하는 관리)들이 모두 사정전 문 밖에 나아갔으나, 지사(知事) · 특진관(特進官)은 비현각이 협소하여 들어갈 수 없었다. (중략) 임금이 비현각에서 이탁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위로는 천변이 심상치 않고, 아래로는 민생이 곤궁하다. 나의 덕을 돌아보니 진취하는 바는 적고 퇴보는 많아 국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다행히 모면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자손에게는 반드시 근심이 있을 것이다. 이제 영의정에게 묻노니 장차 어떻게 하면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민생을 소생시키며 나라를 편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 선조 임금의 말은 마치 예언자의 말과도 같았다. 이탁(李鐸, 1508-1576)은 당시 67세로 영의정에 오른지 2년쯤 되었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정언, 지평, 이조정랑, 대간 등의 직책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덕이 많고 청렴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경복궁 동궁의 비현각
동궁의 비현각

 

선조가 자신의 덕을 돌아보니 퇴보가 많고, 국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았다고 한 것은 100% 진심으로 말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흉조를 맞이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는 자로서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또

“지금은 다행히 모면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자손에게는 반드시 근심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재앙은 바로 18년 뒤, 자신의 임기 중에 일어났다.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심기일전을 하였다면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사람들에게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당시 바야흐로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338년에 출범하였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멸망하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최고 수장인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 수도인 교토에서 1573년에 축출되었다.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서 차츰차츰 하나의 통일된 제국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그의 부하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 밑에서 더 큰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선조의 질문에 영의정 이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주상(임금)께서 마땅히 유념하실 것은 경천(敬天) · 근민(勤民) 두 가지 일입니다. 주상께서 하시는 일이 어찌 하늘의 뜻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변이 생기는 것은 실로 신과 같이 못난 자들이 중요한 자리를 더럽히는 까닭이오니, 보잘 것 없는 저를 파면하시고 현명한 재상을 다시 임명하시면, 치도(治道)를 이룰 수 있을 것이요, 천심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정사는 그리 어지럽지 아니하고 지방에서 뇌물을 주고받는 일도 드뭅니다. 또 의견을 구하는 교서를 내리어 겸손히 자책하심은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도 이보다 더 할 수 없습니다.

‘근민(勤民)’이란 백성들 다스리는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을 말한다. 부지런히 정치에 힘쓰라는 것이다. 이탁은 자신을 파면할 것을 제안하고, 또 교서를 내려 직언을 널리 구하도록 하였다. 이탁이 말한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이란 은(殷)나라의 첫 임금 성탕 때의 일을 말한 것으로 당시 7년간이나 가물어 스스로를 자책한 일을 말한다. 성탕 임금은 스스로 뽕나무 밭에 들어가 비가 내릴 것을 기원하면서

“정치가 알맞지 않은가? 백성이 일을 잃었는가? 궁실이 사치한가? 궁녀의 청탁이 성행하는가? 뇌물이 행해지는가? 참소하는 자가 설치는가?”

하고 자책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책 이후에 곧바로 사방 수 천리에 큰비가 내렸다.(십팔사략(十八史略)) 이탁은 이러한 자책보다 임금이 겸손히 자책하고 널리 지성으로 직언을 구하는 일이 더 절실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하늘의 노여움이 풀리고 백성들도 편안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옛 사람의 말에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 했고, 또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실질로써 해야지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능히 실질로써 하늘에 응대하면 하늘의 꾸지람은 풀리게 될 것입니다. 흰 무지개의 변은 고금으로 병난(兵難)의 상징이라 하니, 변방이 수비를 미리 조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탁의 말은 일본에서 준비되고 있는 조선 침략의 기미를 분명하게 파악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조선의 관리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염탐하고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늘의 불길한 이변을 통해서 외국의 침략을 사전에 예견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위기상황을 사전에 대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이 무엇을 해야 할지 멀리 물어볼 것도 없이 영의정인 이탁의 입에서 다 나왔다. 무지개의 변은 외국의 침략을 뜻하니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까지 해놓고 일본 침략을 대비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임금 한 사람에게만 그 책임이 있을까?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두 차례나 침략을 당했다. 침략해 올 것을 예견하면서도 침략을 당한 것은 20세기 초의 식민지 침략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세 번째 침략은 없을 것인가? 요즘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한 경험을 잊지 말고, 철저한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