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의 공부법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5>

전통시대의 공부법

 

조가 어느날 경연의 자리에서 갑자기 율곡에게 이렇게 물었다.

“항상 어떤 책을 읽고, 또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슨 책인가?”

율곡이 아홉 번이나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경연을 할 때마다 논리정연하게 자기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어떤 책으로 공부하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율곡이 이렇게 대답했다.

“과거 시험을 준비할 때 읽은 것은 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 때 읽은 책들은 제외합니다. 학문에 뜻을 둔 뒤로는 ⌈소학(小學)⌋에서 시작하여 ⌈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까지는 읽었으나, 아직 ⌈중용(中庸)⌋은 읽지 못하였습니다. 다 읽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아도 분명히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육경(六經)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조 8년, 즉 1575년 6월의 일이므로 당시 율곡은 40세 되던 해였다. 그는 그보다 3년 전에 친구인 우계 성혼과 더불어 성리학의 심오한 이론인 이기설(理氣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 그리고 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의 학설을 논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 후였다. 그러한 그가 솔직하게 맹자까지 읽고 중용은 자꾸 읽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육경은 아직 읽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율곡이 말한 책 중에 ⌈대학⌋이란 어떤 책일까?

대학⌋은 원래 오경 중 한권인 ⌈예기(禮記)⌋에 들어 있던 글이다. 제42편의 글인데 그것을 송나라 사마 광(司馬光)이 처음으로 뽑아내서 ⌈대학광의(大學廣義)⌋란 책으로 만들었다. 이 후 주자가 그것을 바탕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들었는데, 경(經) 1장(章), 전(傳) 10장으로 구성하고 주석(註釋)을 더하였다. 경에는 소위 3강령 8조목이 제시되어 있다. 3강령은 명명덕(明明德, 명덕을 밝히는 일),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어지선(至於至善, 지선에 머무르는 일)이며, 8조목은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이다.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입문서로 ⌈대학⌋이 중시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내용을 잘 읽음으로써 배움의 기초 토대가 굳건히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상황도 율곡과 같았다. 그들은 대개가 육경보다는 사서를 중시하였으며, 특히 주자학에 집중하여 성리학 관련 이론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학문적인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선조가 다시 물었다.

“사서(四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중에서 어떤 글을 가장 좋아하는가?”

율곡이 이렇게 답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하나만을 좋아하는 것도 없습니다. 여가에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 등의 글을 읽고 있으나 질병과 공무(公務) 때문에 전념(專念)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율곡은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병 때문에 자주 사직을 하고 고향인 파주로 내려가 그곳에서 책을 읽으면서 건강을 되찾았다. ⌈근사록⌋은 북송 시대의 사상가들인 주돈이와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그리고 정이천(程伊川)의 저술과 어록(語錄)을 발췌하여 편집한 책인데, 1175년경에 주희(朱憙)와 여동래(呂東萊)가 함께 만들었다. ⌈심경(心經)⌋은 남송의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사서와 삼경(三經), 악기(樂記) 등의 서적과 주돈이, 정호, 정이, 주자 등의 글에서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요컨대 율곡은 성리학의 사상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근사록⌋과 ⌈심경⌋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임금이 이렇게 물었다.

“어렸을 때 문장을 익힌 적이 있는가? 그대의 문사(文詞)를 보건대 매우 좋은데, 따로 배운 적이 있는가?”

율곡은 어려서부터 시문을 잘 지었다. 그가 과거에 아홉 번이나 급제한 것은 그러한 문장 실력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율곡은 임금의 칭찬을 듣고 이렇게 답하였다.

“저는 어려서부터 문사를 배운 적은 없습니다. 어려서는 불교의 선학(禪學)을 자못 좋아하여 여러 경(經)을 두루 보았으나 착실(着實)한 곳이 없음을 깨닫고 유학(儒學)으로 돌아와서 우리 유학의 글에서 그 착실한 이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문장을 위하여 읽은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 문장을 짓는데 대략 문리(文理)가 이루어진 것도 역시 별도로 공부를 한 일은 없고, 다만 일찍이 당나라 한유(韓愈)의 문장과, ⌈고문진보(古文眞寶)⌋, 그리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대문(大文)을 읽었을 뿐입니다.”

조선시대에 학자들은 대개 율곡이 말한 것과 같은 책들을 읽고 기초 교양을 쌓았다. 한문 문장도 그러한 글을 읽으면서 문장의 조리를 터득하였다.

명종 12년, 즉 1557년 8월 1일의 역사 기록을 보면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즉 유생들의 공부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학자는 몸가짐을 근본으로 삼고 문예를 말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친구사이는 서로 이것으로 책망하고, 스승과 웃어른은 먼저 아이들에게 ⌈소학⌋을 가르쳐 그 근본을 세우고 다음으로 ⌈대학⌋을 가르쳐 그 규모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논어⌋·⌈맹자⌋·⌈중용⌋을 모두 주자가 정한 차례대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차례를 뛰어넘는 버릇을 없앤 다음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섭렵하여 박학하게 한다면, 심지(心地)가 고명해져 문사(文詞)에 발하면 찬연히 문채가 있어 볼 만할 것입니다. 옛사람이 선비를 가르치는 방법은 여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율곡도 문장 공부를 별도로 한 적이 없다고 하였는데, 당시 학자들은 문장 잘 짓는 일을 말단으로 삼았다. 문장에 힘을 쏟기보다는 몸가짐, 즉 유교적인 수양 공부에 더 힘썼다. 그리고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의 순서로 배웠다. 이러한 순서는 주자가 정한 것이다. 이러한 공부를 마친 뒤에 비로소 각종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서적을 읽어나가는 것이다. 율곡은 ⌈중용⌋의 단계에서 머물며 주자의 성리학에 대한 이론 공부에 천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