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척기(兪拓基, 1691-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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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서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 1662년-1713)에게서 배웠다. 스승 김창즙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당시 형 김창집(昌集), 김창협(昌協), 김창흡(昌翕), 김창업(昌業)과 함께 문장대가로 평가를 받았으며, 막내 동생 김창립(金昌立)과 함께 육창(六昌)이라 불렸다.

김창즙은 168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였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00년 아버지의 유문인 『문곡집(文谷集)』을 간행했고, 1710년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지냈다. 문장과 훈고(訓詁)에 능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우(李㘾)는 유척기의 유교인 ⌈지수재집(知守齋集)⌋의 발문에서 유척기가 어렸을 적에 포음 김창즙에게서 배웠는데, 김창즙이 국기(國器)로서 칭찬하고 격려하였다고 적고 있다.

자는 전보(展甫)이고 호는 지수재(知守齋)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 유철(柳㯙)이고 아버지는 목사 유명악(柳命岳)이며, 어머니는 이두악(李斗岳)의 딸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후 정언(正言), 수찬, 이조정랑,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세제(世弟)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신임사화 때 소론의 언관 이거원(李巨源)의 탄핵을 받고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서 이조참의, 대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승지로 참찬관을 겸하다가 경상도관찰사, 양주목사, 함경도관찰사, 도승지,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1739년 우의정에 오르자, 신임사화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연좌되어 죽은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두 대신의 복관(復官)을 건의해 신원(伸寃)시켰다.

앞서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등극하는데,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면서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告變事件)이 발생한다. 고변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 옥사는 노소론간의 대립이 경종 즉위 후 왕에 대한 충역 시비의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는 경종대의 문제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 문제는 영조대에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었다.

한편 유척기는 신임사화의 중심인물인 유봉휘(柳鳳輝), 조태구(趙泰耉) 등의 죄를 공정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그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당시의 명류(名流) 조관빈(趙觀彬)·김진상(金鎭商)·이기진(李箕鎭) 등도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천보(李天輔)가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영조에 의해 중용되어 영상으로 임명되었다. 1760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국(器局)이 중후하고 고금의 일에 박통했으며, 대신의 기풍을 지닌 노론 중의 온건파에 속하였다. 당대의 명필가요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경주의 「신라시조왕비(新羅始祖王碑)」, 청주의 「만동묘비(萬東廟碑)」 등을 남겼다.

「영조실록」 43년에 유척기의 졸기가 실려 있다.

“봉조하 유척기(兪拓基)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연석(筵席)에서 애석해 한탄하고 꿈에서 보았다는 하교까지 하면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시호(諡號)를 의논하라고 하였다. 문익(文翼)이란 시호를 내렸다. 유척기는 너그럽고 후덕하여 대신다운 도량이 있었으므로, 위아래가 의지하며 중히 여겨 온 지 거의 수십 년이나 되었다.”

짧은 이 글에서도 유척기에 대한 영조의 신망과 동료들의 인망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저서로는 「지수재집(知守齋集)」이 전한다.

유숙기(兪肅基, 1696-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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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년-1722)의 문인이다. 김양행(金亮行, 1715-1779)은 유숙기의 겸산집(兼山集 서문에서, 유숙기가 일찍이 김창흡의 문하에서 배울 적에 경전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서 그 단서만을 알려주어도 단박에 깨달아서 본래 제자들을 쉽게 허여하지 않는 김창흡이지만 유독 유숙기에 대해서는 매우 흡족해하고 허여했다고 적고 있다.

김창흡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를 지낸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응시하여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장자』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으며,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하여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그는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형 김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형 창협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한 이이의 주장을 찬성하였다.

자는 자공(子恭)이고 호는 겸산(兼山)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의정부우참찬 명웅(柳命雄)이며, 어머니는 임천조씨(林川趙氏)로 인천부사 현기(趙顯期)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여 헛되이 말을 하지 아니하고 행동을 엄격히 자제하여 어른을 잘 섬겼으며, 스스로 학업에 힘써서 1715년(숙종 41)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한때 송산(松山)에서 성리서(性理書)에 전념하였으며, 교하(交河)의 매음(梅陰)으로 이거한 뒤 원근의 선비들을 가르쳤다.

1733년 명릉참봉(明陵參奉)으로 벼슬길에 들어가 효릉참봉(孝陵參奉)·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금구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뒤 임피현령(臨陂縣令)과 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김양행은 유숙기의 겸산집(兼山集 서문에서 유숙기의 학문적 성취를 이렇게 적고 있다.

“삼연 선생(김창흡)은 사람들의 질문에 따라 대략적으로 알려줄 뿐 극진하게 변론하지는 않았는데 겸산 선생(유숙기)이 호락논쟁에 대한 제가들의 변론이 극성할 적에, 저들의 글을 모두 읽어보고 취사선택하여 지당한 귀결을 내리고자 하였다. 올바른 관점에다가 표현이 정확한데, 가령 미발오상(未發五常)과 심기(心氣) 등의 변론은 매우 훌륭하다.”

유숙기는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에서 심과 성에 대해 김창흡의 이론을 지지하면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였고, 「심여기질부동설(心與氣質不同說)」은 심과 기질에 대하여 논술한 것으로 이기(理氣)에 있어서 역시 김창흡과 가까운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하였다. 「태극도설차의(太極圖說箚疑)」에서는 태극도설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고 주돈이(周敦頤)·주희(朱熹) 등 송유(宋儒)의 이론을 중심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학설을 광범위하게 인용,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밖에 한원진(韓元震)의 심자설을 논변한 「심자설변(心字說辨)」과 정언환(鄭彦煥)의 이기설에 대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이론을 인용하여 논변한 「이기설변(理氣說辨)」,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었을 때 그 입장을 변호한 「우암선생변무소(尤庵先生辨誣疏)」, 윤지술(尹志述)의 신원을 청한 「북정윤지술신원소(北汀尹志述伸寃疏)」가 있다. 「중용차의(中庸箚疑)」와 「서경차의(書經箚疑)」 등은 경서 연구에 도움이 된다.

후에 이 글들은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제자 金載順(1732년-미상)과 아들 유언부(柳彦傅) 가 상의하여 1775년(영조 51)에 간행한 겸산집(兼山集)에 수록되었다.

유기일(柳基一, 1845-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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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항로는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그의 이기론(理氣論)은 주리철학(主理哲學)의 입장을 고수하여 이(理)와 기(氣)는 대등한 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이(理)를 중요시하는 그의 주리설(主理說)은 객관적 입장에서 논리상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으나 도덕의식이 피폐된 당시의 상황에서 순선(純善)을 지향하고 대의(大義)를 실천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그는 영남의 이진상(李震相), 호남의 기정진(奇正鎭)과 더불어 한말 주리철학(主理哲學) 3대가로 일컬어졌다.

그는 주리철학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한말(韓末) 위정척사(衛正斥邪) 의리론(義理論)의 대표자로서 일본과 서양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의 선봉이 되었다. 그의 문하(門下)에서 척사위정(斥邪爲正)과 창의호국(倡義護國)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최익현(崔益鉉), 김평묵(金平黙), 유중교(柳重敎), 유인석(柳麟錫) 등이 그들이었다.

자는 성존(聖存)이고 호는 용계(龍溪) 또는 용서(龍西)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문녕군(文寧君) 유병철(柳秉喆)이다.

일찍이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1868년 이항로 사후에는 그 적전(嫡傳)을 계승한 김평묵을 사사함으로써 이 양현의 학문과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다. 또한 동문 선배로 동향이던 최익현(崔益鉉), 춘천의 동문 홍재구(洪在龜) 등과 일생토록 두터운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1876년 개항 문제를 두고 조야에서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날 때, 유인석(柳麟錫), 윤정구(尹貞求) 등 화서학파 48인과 함께 개항 반대상소인 「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잉청절화소(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請絶和疏)」를 올리는 등 화서학파 위정척사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점차 일제 침략으로 인해 시국이 혼탁해지자 향리의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여기서 『척양록(斥洋錄)』을 짓는 등의 저술활동과 도학 강명을 통한 문인 양성에 일생토록 진력하였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화서학파의 특징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 정신에 입각한 위정척사, 존화양이(尊華攘夷)에 철저하게 근저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주희(朱熹), 송시열(宋時烈), 이항로 등을 특히 존숭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국상황에서는 유인석, 이소응(李昭應) 등 유중교 계열의 화서학파 인물들이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전면에 투신했던 경향과는 처신의 방편을 달리하였다. 그리하여 홍재구(洪在龜) 등과 함께 자정수의(自靖守義)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총 114권의 방대한 수고본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중 그 대부분이 산일되고 일부를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이 외에 불분권(不分卷)의 문집 18책과 2책의 『능언(能言)』 등 총 20책의 미간행 수고본 문집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하성문고(霞城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오준선(吳駿善, 1851-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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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오준선은 유년기에는 족숙 오태규(吳泰圭, 1843~?)에게 수학하였다. 오준선이 18세 되던 해에 당시 71세의 기정진(奇正鎭)을 찾아가 예법과 경전 등을 탐구하게 되었으며 기정진의 기대를 받았다. 이때 기우만, 고광순과 동문수학하였다.

스승 기정진은 19세기 호남유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받는 유장으로서 정조 22년(1798) 6월 3일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조동(槽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금빛 얼굴을 가진 큰 사람이 남자아이를 안고 오는 꿈을 꾼 뒤 12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기정진은 어려서부터 영특함이 남달랐다. 네 살 때  「효경(孝經)」과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읽었고, 이때부터 5~6년 동안  「소학」,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비롯한 경서와  「강목」,  「춘추」 등의 역사서를 두루 공부했는데, 기억력이 매우 좋아 보는 것은 모두 외웠다. 판단력과 행실도 올발라 네 살 때는 이웃집 과일이 자기 집 마당에 떨어지자 모두 주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왼쪽 시력을 잃는 불행을 겪는다.

후일 학문이 대성하여 독창적이면서 탁월한 저작을 남긴다. 그의 주요 저작은 4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산출되어 노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기정진의 성리설은 이(理)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일원론(理一元論) 관점의 주리론이라고 요약된다. 특정한 사승(師承) 관계나 학맥에 의존하지 않고 성리학의 근원인 중국 송대의 학문을 직접 연구해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대표저작으로는 40대 중반에 저술한 「납량사의(納凉私議)」(1843, 46세 완성 이후 1874년 77세 수정)를 비롯해 50대 중반에 지은 「이통설(理通說)」(1853, 55세)과 81세의 노령에 발표한 「외필(猥筆)」(1878) 등이 꼽힌다.

오준선은 학문의 범위를 넓히기 위하여 이후 기호학파의 전통을 이은 전재(全齋) 임헌희(任憲晦, 1811-1876)와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1818-1903)를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임헌희는 이이와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당대의 석학이고, 송근수는 은진 송씨로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전승자로서 1882년 좌의정 재임 시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였다.

호는 후석(後石)이고 자는 덕행(德行)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그의 선대를 살펴보면, 고려 혜종(惠宗, 914~945)의 모친 장화왕후(莊和王后)는 나주오씨(羅州吳氏)의 역사 속에 크게 이름을 나타난 인물이다. 가장 오래된 오씨 족보(吳氏族譜)는 오희도(吳希道, 1583-1624)가 적은 필사본이 전하고 있다. 나주오씨는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오언(吳偃)을 1세로 하고, 5세손 오자치(吳自治)는 세조13년(1467)에게 영정을 하사 받은 인물이다. 오준선의 8대조 병조좌랑 오이익(吳以翼, 1618-1666)은 오희도(吳希道)의 아들이다. 부친은 오하규(吳夏圭, 1829-1872)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오항규(吳恒圭, 1824-1874)에게 입양되었다. 오준선은 평소 형제간의 깊은 우애가 깊었는데, 동생 오영선(吳泳善, 1854-1872)과 오유선(吳裕善, 1857-1886)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영선의 양아들 오동수(吳東洙, 1878-1945)와 유선의 아들 오남수(吳南洙, 1884-1933)를 친자식처럼 기르고 가르쳤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기정진이 지은 「납량사의(納凉私議)」를 두고 이 글은 당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모두 쓸어버릴 정도라고 격찬하였다. 이 글에서 기정진은 기를 중시하는 주기론과 기의 존재를 일정하게 인정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부정하고 이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리론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의 이 학설은 기호 학맥의 원류인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송병선(宋秉璿, 1836-1905)과 전우(田愚, 1841-1922)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때, 오준선은 기정진이 이이에게 심복하면서도 다만 이기설에서는 이견을 보인 것이며, 그것은 이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후현이 선현의 이론을 변론(辯論)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정진이 「외필(猥筆)」에서

‘이(理)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하고 변화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로서 기(氣)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理)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라고 했는데, 오준선은 스승의 학설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기호학파 중 이일원론을 전개한 스승 기정진의 주리론적 입장을 따른 오준선은, 기정진의 설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며 모든 행동의 근원은 명령을 내리는 자가 주인이고, 주인은 바로 이(理)요, 명령을 받은 자는 종이니 종은 바로 기(氣)다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오준선은 망국의 현실을 통곡하며 오백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금수의 오랑캐 나라가 되었으니 망국에서 살아남은 자가 몸을 던져 죽을 수 없다면, 뜻에 따르는 충의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입산하였다. 처음 석문산에 은거했으나, 용진산으로 문도들이 거처를 축성하여 용진산으로 옮겼다. 용진산으로 들어간 오준선은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들의 행적을 수집하여 「의병전」을 저술하였다. 그는 「의병장 기삼연전」, 「의병장 고녹천광순전」, 「의사 김준 전수용 합전」을 지었고 「의병장 심남일 행장」, 「의병장 고광순 행장」 등 5명의 의병장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문집으로 「後石遺稿」가 전한다.

오원(吳瑗, 1700-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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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스승 이재는 낙론의 거두인 김창협의 수제자로 1725년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 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그러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 서울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자는 백옥(伯玉)이고 호는 월곡(月谷)이다. 할아버지는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로 이재와는 처질(처조카) 간이다. 오태주(吳泰周)에게 입양되었다.

조부 오두인은 1648년(인조 26)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효종조에 지평(持平)을 거쳐 장령(掌令) 헌납(獻納), 사간이 되었다.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副校理),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조에는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고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 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 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는데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김창협이 쓴 비명에 이렇게 적혀있다.

“금상(今上) 15년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중궁(中宮,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이 손위(遜位)하니, 판서(判書) 양곡(陽谷) 오두인(吳斗寅)공이 참판(參判) 이세화(李世華)공과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공 등 80여 인과 더불어 대궐에 나아가 상서(上書)하여 극간(極諫)하였는데, 오공이 기실 수장이었다.”

김창협의 셋째 딸이 오원의 생부인 오진주에게 시집을 갔으니, 오두인과 김창협은 사돈 간이다.

부친 오진주는 1714년(숙종 40) 갑오(甲午) 증광시(增廣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급제하였으며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다. 진사(進士)로 나아가 관직이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형제로는 여흥 민씨 소생의 오관주(吳觀周), 원주 김씨 소생의 오정주(吳鼎周), 상주 황씨 소생인 오태주(吳泰周), 오이주(吳履周)가 있다. 오진주는 오태주의 동생이다.

오태주는 12세인 1679년(숙종 5)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명덕대부(明德大夫)의 위계를 받았다. 숙종은 누이동생인 명안공주를 지극히 사랑하여 청나라에서 고급 비단이 들어오면 후궁보다 명안공주에게 먼저 보냈고, 공주의 거처인 명안궁을 전례가 없는 1,826칸의 대규모로 지어주었다. 1687년(숙종 13)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는데, 공주가 갑자기 사망하자 숙종이 매우 슬퍼하여 소복 복장에 머리를 풀고 10일간이나 육식을 금하였다고 전한다. 오태주가 후사가 없게 되자 오원이 오태주에게 입양되었다. ⌈영조실록⌋에 오원에 관한 기사 중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아들이다’라는 내용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오태주는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사서(司書)로 있을 때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進言)하여 받아들이게 하였고 직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났다.

1729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탕평책을 적극 반대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1732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교리(校理), 검토관(檢討官), 이조좌랑, 응교(應敎)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6년 참찬관(參贊官)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신구(伸救)하려다가 또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1739년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승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실록⌋ 16년에 오원의 졸기가 실려 있다.

“공조 판서 오원(吳瑗)이 졸(卒)하였다. 오원은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의 손자인데, 일찍이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깨끗하여 욕심이 없고 소탈하였으므로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는데, 졸(卒)할 때 나이 41세였다. 임금이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이 있는데도 일찍 죽은 것을 애석히 여겨 차탄하고 애도하였으며,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성품은 정직하고 성실하면서 온후(溫厚)하였으며 총명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나고 문장 또한 깨끗한 절개를 지녔다 하여 진정한 유신(儒臣)이라는 평을 들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오국헌(1599-1672)


오국헌(1599-1672)                                                   PDF Download

 

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권상하의 ‘묘갈명’에 송준길(宋浚吉)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는데 송준길 또한 칭찬하고 허여하였다고 하는데, 송준길(1606-1672)과의 나이를 따져보았을 때 제자로 입문하여 배운 것은 아닌 것 같다.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의 ‘문인록’에 오국헌의 이름이 들어있다.

인조반정 후에 서인의 영수로 활약한 김장생은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고,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이후 학계와 정계를 주름잡은 제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자는 중현(仲賢)이고 호는 어은(漁隱)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산립(山立)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로 대사간 사귀(思貴)의 딸이다.

향시(鄕試)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정시(庭試)에 거듭 실패하였고, 병자호란의 치욕이 있은 뒤에는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성리학과 예학에 밝았으며, 나중에 단성(丹城)의 도천(道川)에 옮겨 살면서 마을 이름을 어은동(漁隱洞)이라 고치니 송시열(宋時烈)이 ‘어은(漁隱)’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고 한다.

권상하는 <묘갈명>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읍지(邑誌)>의 기록을 전재하길,

“공은 젊어서 문재(文才)가 뛰어났는데, 누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되지 않자 시골에 내려가 두문불출하고서 수석(水石)과 화조(花鳥)를 완상하며 스스로 즐겼고, 성현(聖賢)의 글을 열심히 읽으며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이 벼슬하기를 권하면 머리를 흔들며 대꾸하지 않았는데 우암 선생(尤菴先生), 송시열(宋時烈)이 ‘어은(漁隱)’이라는 두 글자를 써 주어 공을 가상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공은 또 일찍이 동춘(同春,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는데, 동춘 선생 역시 공을 퍽 칭찬하고 허여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72년 현종 13년) 동짓달 14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74세였다.”

라고 적고 있다.

음직으로 수차에 걸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12년(숙종 38)에 승훈랑(承訓郎)과 호조좌랑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사서해의(四書解義)』 2권, 『역계해의(易繫解義)』 1권, 『잡저(雜著)』 3권, 『유후귀감(遺後龜鑑)』 3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어은유고』 5권만이 전한다.

양응수(楊應秀, 1700-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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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이재(李縡, 1680-1746)의 적전(嫡傳)이다.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그의 문하에 미호 김원행, 역천 송명흠, 녹문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미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은 조선 후기의 집권 계층인 노론의 혁혁한 가문의 후손으로서 학통을 잇는 존재가 되어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의 지위에 있었다. 그는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역천 송명흠(1705-1768)은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인 스승 이재, 윤봉구(尹鳳九),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국 18현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의 현손으로,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녹문 임성주(任聖周, 1711-1788)는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정조 즉위 후 동궁을 보도(輔導)하고 지방관을 지내기도 했지만 평생을 재야에서 학문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철학은 일원론적 구조 위에서 정초되고 있으며, 이기를 기일원론적 관념으로 통일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결정(結晶)을 이루었다. 현상윤은 <조선유학사>에서 임성주를 조선 6대가의 한명으로 꼽고 있다.

김원행, 송명흠, 임성주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이재 문하에서 나왔지만 정작 이재 말년의 유훈을 받고, 그 의발을 온전히 지킨 수제자는 이들이 아니고 백수 양응수이다. 양석승(楊錫升)은 <白水集序>에서 이재의 적전[寒泉之嫡傳]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상영(李商永)은 <묘갈명>에서 ‘연원단적(淵源端的) 직접한천(直接寒泉)’이라 하였고, 유언집(兪彦鏶, 1714-1783)은 <행장>에서

‘주자 문하에서 성리에 대해서는 북계(北溪) 진순(陳淳)이 으뜸이라고 하는데 이재 문하에서 성리에 있어서는 양응수가 으뜸이다’

고 적고 있으며, 이상영은 <묘갈명>에서 이재 문하의

‘박성원(朴聖源, 1697- 1767), 유언집, 송명흠, 김원행 등도 성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을 적에 양응수의 정확하면서도 분명한 조예를 높이 평가했다’

고 적고 있다.

양응수는 스승이 죽자 심상(心喪) 중의 일들을 <축장일기(築場日記>로 자세하게 남기고 있는데 스승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잘 느낄 수 있다. 또한 백수(白水)라는 양응수의 호는 이재가 지어준 것인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재가 말년에 주연을 펼친 후에 제자들에게 시를 읊도록 했는데, 양응수의 시는 고준한 기상이 있었다. 이에 이재가 흥에 겨워 붓을 들어

‘얼큰한 취기에 경설을 논하고 센 수염(白鬚) 휘날리며 시를 읊는데 이것이 궁핍한 유자가 뜻을 얻은 것일세.’

라고 써서 양응수에게 주자, 동문들이 양응수를 백수(白鬚)라고 불렀다. 후에 양응수가 호를 부탁하자 이재가 백수(白水)라는 호를 주었는데, 이는 양응수가 백호(白湖)에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이재가 양응수를 허여한 당시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유언집이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자는 계달(季達)이고 호는 백수(白水)이다. 순창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승의랑(承議郞) 처기(處基)이며 어머니는 강화최씨(江華崔氏)로 휴지(休之)의 딸이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꿋꿋하게 학문을 연마하였다. 후에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이재가 한천에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이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사제지간으로서 이재와 양응수는 마치 부자지간과 같아서 다른 제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755년(영조 31)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익위사부수(翊衛司副수)로 옮겨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오로지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만 전념해 「사서강설(四書講說)」 등 성리에 관한 정통한 저작과 논설들을 남겼다.

유언집이 <행장> 말미에 성리설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양응수의 글이 좋은 길안내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의 문집에는 성리설에 대한 내용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문집 내 비중으로 보더라도 양응수의 <백수집>은 김원행의 <미호집>, 송명흠의 <역촌집>, 임성주의 <녹문집>에 비하여 성리에 관한 논설들이 더욱 많다.

양응수는 스승 이재와 마찬가지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낙론(洛論)을 지지하고, 호론(湖論)을 배척하였다. 그의 학설은 이재의 ‘일리이기(一理二氣)’설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양응수의 일리이기설에 기반 한 인물성동이론의 입장은 그가 스승의 심상 기간의 일들을 일기형식으로 남긴 <축창일기>의 정묘년 정월 17일의 기록에서 대강을 엿볼 수 있다.

이철하(李徹夏)가 이재의 영정에 조문한 후에 양응수를 방문하여, 근래에 심설에 대한 논의들이 벌어져서 호우(湖右, 한원진과 윤봉구) 쪽은 마음은 선악이 있으며 미발시에도 숙특(淑慝)의 종자가 있다고 하고, 호좌(湖左, 채지홍, 이간) 쪽은 마음은 본래 선하며 불선한 것은 구각혈기(軀殼血氣)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양응수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두 설이 모두 편중되었다. 이재 선사의 리일기이(理一氣二)의 설이 확실한 정론이다. 마음의 리는 하나이지만 기는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본연지기(本然之氣)는 명덕(明德)으로 주자의 “마음의 본체는 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다. 혈기지정영(血氣之精英)은 “정신이 발동하여 지각이 된다(神以發知)는 것”으로 진안경이 “모두가 선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발동하면 불선한 생각이 나오기 쉽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호좌(인물성동론)는 본연지기가 순선하다는 것은 보았지만 혈기정영은 반드시 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호우(인물성이론)는 혈기지정영을 마음의 본체로 여겨서 본연지기가 순일하고 부잡하다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리는 하나이고 기는 둘이다(理一氣二)라고 해야 마음의 체단이 원전하면서도 구분이 명확해진다. 이 입장은 성현의 말씀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이런 설명을 듣고 이철하가 “네, 네! 잘 알겠습니다.” 했다.

저서로는 <백수문집(白水文集)> 30권 17책이 전해온다.

심조(沈潮, 1694-1756)


 

심조(沈潮, 1694-1756)                                           PDF Download

 

상하의 만년 제자이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로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 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 숙종 연간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는데,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고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였다.

학술적으로 그는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애초에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권상하가 죽은 후에 남당 한원진에게 졸업하였다. 그의 족손(族孫)인 심기택(沈琦澤)이 쓴 <묘지명>에는

‘강문(江門, 한수재 문하)의 만학으로 남당에게 졸업했으며 한수재를 섬기듯이 한원진을 섬겼다’

라고 한다. 남당 문하의 고족이자 심조의 문인을 자처한 김근행(金謹行, 1712-?)이 쓴 <정좌와선생행장(靜坐窩先生行狀)>에는

‘계축년(1733)에 남당 문하에 수개월을 머물면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근원이나 왕패치란(王覇治亂) 근본에 대하여 논한 후에, 남당 선생은 금세에 둘도 없는 통유이시다. 내가 남당 선생에게 지극한 가르침을 받았다. 후에 거처하는 서실의 편액을 靜坐로 정하고 그 명문과 서액을 남당에게 요청하여 걸었다’

라고 적고 있다. 그의 자호인 정좌와는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권상하의 만년 제자로 한원진에게 졸업했다는 심기택의 <묘지명>은 김근행의 <정좌와선생행장(靜坐窩先生行狀)>과 수미로 연결된다 할 것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자는 신부(信夫)이고 호는 정좌와(靜坐窩)이다. 선조 조 최초의 동서분당 때에 서인의 영수로 지목받은 심의겸의 동생 집안으로, 아버지는 심수정(沈壽鼎)이고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도사(都事) 정전창(鄭展昌)의 딸이다.

오십을 넘긴 1747년에 조명리(趙明履, 1697-1756)가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추천하였는데, 한원진이 취임할 것을 적극 권유하여 힘써 나아가 맡은 소임을 다했다. 이어 가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오래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사직하고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근행이 <행장>에서

‘선생은 경세(經世)를 자부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백성을 보호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것(保民興學)이 다스리는 큰 법도이며 삼대의 다스림에서 본받을 것은 심범(心法)이니 묵은 자취들을 본받을 것이 없다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사문의 가르침을 받은 것인데 이런 것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

라고 적고 있다.

만년에 김포에 우거하면서 중봉 조헌을 모신 우저서원(牛渚書院)에서 신미년(1751)부터 강학을 시작했다. 당시 우저서원에서는 강학을 하지 않았다. 원근의 학자들이 모여 들여 성황을 이루었고 사풍이 진작되었다. 교육 내용은 <소학>과 <가례>를 배운 후에 사서를 학습하였다.

김근행이 <행장>에서 ‘오늘날 선생의 면모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생의 편지글을 읽어 보아라’고 하였는데, <정좌와집>에 수록된 편지들은 한원진, 윤봉구, 이재 등과 주고받은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논학서가 주종을 이룬다. 심조는 인물성동이론에서 호론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비록 인물성 이론으로 남당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한원진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이재와도 상당한 학문적 교유를 나누고 있었다. <묘지명>에 의하면, 심조의 현명함을 이재가 극찬했지만 남당 문화 제자들이 의심하지 않았는데 이는 심조의 공명정대한 심사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학술 변론이 점차 파당적 배타성을 갖게 되고, 이론적 변론에만 치우쳐 유학의 본질인 일상공부와 실천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조가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인물성동이론을 비롯한 유학에 대한 심도 깊은 사색의 성과들이 즐비하다. 이는 여느 문학지사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한편 김근행은 <행장>에서 심조가 또한 산수를 무척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그의 문집에 <도봉행일기(道峯行日記)>가 있다. ‘갑술년 8월 27일’로 시작하는 이 산행기는 그가 죽인 두 해 전인 1754년의 도봉산 일람기를 적은 글이다. 우저서원에서 강을 마친 후에 심조가 제생들에게 도봉서원은 도학의 정신이 남아 있는 곳이고 그곳의 산수가 아름다우니 강학도 하고 산수를 유람하자고 제안하여, 9월 12일에 출발하여 17일에 돌아오는 5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여행의 전 과정을 사진으로 찍듯이 기록한 글들은 당시 도봉서원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임과 동시에 심조의 소슬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본래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에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한 남언경(南彦經)이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는 뜻으로 도봉 서원을 건립하고 이듬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도봉 서원은 300여 년간 서울·경기 지역 선비들의 주요 교유처가 되었다. 특히 산수가 빼어나서 선비들이 즐겨 찾는 서원이었다.

문집으로 『정좌와집(靜坐窩集)』이 전한다. 특히 본 문집은 행장과 연보가 있어서 그의 삶과 사상의 내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편리하다.

심정진(沈定鎭, 1725-1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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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서는 박필주(朴弼周, 1665-1748)에게서 배웠다. 박필주는 서울 주변에 세거하면서 서울의 학계를 주도하며 영조의 완론 탕평 체제 속에서도 산림(山林)의 입장을 존중하며 노론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노론 낙론(洛論) 계열 산림이자 학자였다. 과거에 응하지 않고 스승인 김창흡(金昌翕) 아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조선 후기 인성과 물성에 대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의 이론가로서 활발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가 이길보(李吉甫)에게 쓴 편지에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내용으로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후에 이재(1680-1746)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이재는 김창협의 문인으로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며,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심정진은 <제미호선생문(祭渼湖金先生文)>에서 사도의 도통을 논하면서 중국에서는 맹자 이후로 이정과 주자를 들고 동방에서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을 이어서 도암 이재를 들 정도로 추숭의 일념과 스승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자는 일지(一志)이고 호는 제헌(霽軒)이다. 아버지는 사증(師曾)이며 박세채(朴世采)가 박태두의 작은아버지뻘 되는 종숙이다. 집안이 대대로 서인 노론계에 속하였다.

1753년(영조 2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758년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74년에 다시 부수(副率)로서 세손인 정조를 보살폈고, 특히 경학에 뛰어나 강설(講說)이 좋았다는 칭송을 받았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중부도사(中部都事), 호조좌랑을 거쳐 회덕현감에 부임하여 송준길(宋浚吉)이 만든 향약을 이곳 주민에게 시행하여 백성들의 교화에 노력하였다. 1781년(정조 5) 병으로 사직한 뒤에는 향약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송준길이 만든 향약을 다시 다듬어 전국적으로 실시할 것을 상소한 바 있다. 1783년에는 다시 복직하여 호조좌랑이 되고 이어 제용감판관·송화현감을 지낸 뒤, 1785년에는 사어(司禦)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심정진의 인물성동이론은 학계에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의 문집인 <제헌집>에 기록된 인물성동이에 대한 논설들을 통하여 낙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예리한 논리들을 만날 수 있다.

<天命之謂性說>에서

‘사람들이 대동(大同)의 성(性)이 리인데 이는 만물에 품부되기 이전으로서 같은 것이고, 본연의 성은 만물에 이치가 품부된 후로 다르다고 하는데 이는 내 생각과 갈리는 핵심 지점이다. 기질에 섞이지 않는 본연의 성이 어찌 대동의 성이 아니란 말인가? 이미 본연이라고 했으면 품수 받기 이전과 이후의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당시 호론에서 성삼층설에 기반하여 초형기의 대동지성과 인기질의 본연지성을 구분하는 논리에 대하여 낙론의 입장에서 반박하고 있다.

<미호선생언행록(渼湖金先生語錄)>에서는 호락논쟁에 대한 미호의 견해를 알 수 있는 문답이 들어있으며, 그 중에는 진정한 공부에 대한 사제 간의 대화도 들어있다.

‘어느 날 정진(심정진)이 혼자 있을 적에 선생(김원행)이 옛날의 학자들로 가령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스승과 주고받은 논의는 모두 위기지학의 학문으로 인애, 효제, 덕을 닦고 사특한 것을 제거하는 것에 관한 것들이었다. 후세에 문의의 의미를 강설하는 공부와는 차이가 있다. 문의를 따지지 않을 수는 없지만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무엇을 배우고자 했는지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

이는 호락논쟁이 단지 이론적인 지적 놀음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려준다고 할 것이다.

저서로는 <제헌집>이 있다.

신헌(申櫶, 1810-1884)


신헌(申櫶, 1810-1884)                                           PDF Download

 

산신씨는 조선에 상신 8명, 대제학 2명, 판서 20여 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는데, 대부분 문희공파, 정언공파, 사간공파에서 나왔다. 이 중에서도 정언공파는 영의정 신흠(申欽)을 중심으로 하는 문신집안이고, 문희공파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신립(申砬)을 중심으로 하는 무신집안이다.

신헌은 초명이 관호(觀浩)이고 자는 국빈(國賓)이며 호는 위당(威堂), 금당(琴堂), 우석(于石)이다. 할아버지는 훈련대장 신홍주(申鴻周)이며 아버지는 부사 신의직(申義直)으로 전형적인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신헌은 유장(儒將)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과 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다양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이면서도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또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姜瑋), 박규수(朴珪壽) 등과 폭넓게 교유하여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갖고 있었다.

1827년(순조 27) 할아버지 신홍주의 후광을 업고 별군직(別軍職)에 차출되었다가 이듬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헌종 때에는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봉산군수,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녹도(鹿島)에 유배되었는데, 철종의 배려로 1857년에 풀려났다.

철종 대에는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다음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그 뒤 어영대장, 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 진무사(鎭撫使)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해의 요해지인 광성(廣城), 덕진(德津), 초지(草芝) 3진(鎭)에 포대를 구축해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운양호(雲揚號)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는 판중추부사로 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개항 정책을 취하게 되어 점차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불평등조약이었기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조약은 위정척사 세력과 개화 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의 협상 전말을 신헌은 『심행일기(沈行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유장으로서의 신헌의 면모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정약용의 민간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켜 <민보집설(民堡輯說)>, <융서촬요(戎書撮要)> 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하여 자신의 국방론을 집대성시켰다. 또한 김정희로부터 금석학(金石學), 시도(詩道), 서예 등을 배워 현재에는 전하지는 않지만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이라는 금석학 관계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예서(隷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제작에 조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유산필기(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농법에도 관심을 가져  <농축회통(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843년(헌종 9) 전라도우수사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說)>, <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器械圖說)> 등을 지었고, 수뢰포, 마반포차, 쌍포합이 등 신무기 개발을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