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하(申靖夏, 1681-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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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협의 문인이다. 김상헌의 증손자로 숙종의 묘정에 배향된 김창협은 낙론의 거목으로 도학과 문장에 출중하였는데, 신정하의 문집은 적은 편수지만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글들이 빼곡하다. <제농암선생문(祭農巖先生文)>에서 신정하는 김창협이 범순부의 경학, 구양수의 문장, 주자의 의리(철학)를 한 몸에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였는데, 스승에 대한 존경과 긍지의 소회를 충분히 살필 수 있다.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자는 정보(正甫)이고 호는 서암(恕菴)이다. 증조부는 신준(申埈)이고 조부는 신여정(申汝挺)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신완(琓)이다. 어머니는 황해도관찰사 조원기(趙遠期)의 딸이며 신유(申瑜)에게 입양되었다.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설서(說書)·부교리 등을 역임한 뒤, 1715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적에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발간하면서 발문을 쓴 정호(鄭澔)가 윤증(尹拯)을 비난한 일 때문에 윤증·유계의 제자들 사이에 일어난 소송사건에 연루되었다.

일찍이 효종 때 유계(兪棨)가 주자의 <가례>에 단마다 해석을 붙여 <가례원류>를 편찬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1713년(숙종 39)에 당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또 저자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있으면서 간행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간행하지 못하고, 이 실정을 왕에게 고하여 마침내 1715년에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을 추가하여 출간되었다. 그런데 정호의 발문 가운데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등지고 당쟁을 조장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정계에 파문을 크게 일으켰다.

신정하의 부친 신완은 박세채와 윤증의 문도인 관계로 그도 애초에 비판의 입장에 섰다가, 후에 숙종 42년에 올린 상소문에서는 <가례원류>의 서론과 발문을 쓴 권상하와 정호를 벌 줄 것을 주장한 소론 이진유의 부당함을 누차 상신하고, 유상기의 귀양과 유봉오의 정거를 철회할 것을 청한 것으로 인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했다.

이전에 사헌부에서 관작 삭탈을 주청한 소장에

“전 헌납(獻納) 신정하(申靖夏)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외손으로서 전에 그 자손들과 함께 변명하는 상소에 참여하였는데, 저번에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한 소(疏)를 바친 것은 그 존앙(尊仰)하는 정성이 도리어 전에 원수로 여기던 곳에 있으므로, 마침내 스스로 도리에 어긋나는 지경에 빠졌으니,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하소서.”

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신성하의 입장이 전후로 변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관이 이를 두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고, 신정하(申靖夏)는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신정하(申靖夏)는 고(故) 상신(相臣) 신완(申琓)의 아들인데, 젊은 나이에 청요직(淸要職)에 올랐으며 평소에 뜻이 고요하고 소박하며 문장에 능하여 명망이 자자했는데, 한 번의 상소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파직당하고 배척당하여 얼마 안 되어 죽으니, 한때의 명류(名流)가 모두 매우 아까워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해동가요(海東歌謠)> 등에 시조 3수가 전하는데 그 중 박세당의 아들로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치는 것을 극간하다가 장살당한 박태보를 기린 시조가 있다.

“간사(諫死)  박파주(朴坡州) ㅣ 야 주그라 셜워마라, 삼백년(三百年) 강상(鋼常)을 네 혼자 붓들거다. 우리의 성군(聖君) 불원복(不遠復)이 네 죽긴가 노라.”

무슨 의미인가 하면, 충간하다 죽고만 전 파주부사 박태보여 서러워 마시게. 조선의 강상을 오직 그대만이 붙들고 지켰네. 어진 임금 오래지 않아 다시 왕후를 불러들인 것은 필시 그대의 죽음으로 그리된 것일세.

저서로는 <서암집(恕菴集)>이 있다.

신익전(申翊全, 1605-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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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4대 문장가의 한 명이요,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인조 묘정지신의 한 명인 상촌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자는 여만(汝萬)이고 호는 동강(東江)이다.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절도사 제신(濟臣)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국조인물고>에 박세채가 쓴 신익전의 <비명>이 실려 있는데 내용이 상세하다. 신익전은 어려서부터 이미 순박하고 성실하여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열 살 때에 시골에서 부친 신흠을 모시고 있을 적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방문하여 그가 어른처럼 응대(應對)하고 주선(周旋)한 것을 보고 누차 장려(獎勵)하였는데, 이때부터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송독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태극도(太極圖)의 부권(副圈)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요, 양 가운데 음이다.”

하니, 신흠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한다.

1628년(인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郎)이 되고, 이어 검열·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청나라 사신이 와서 “신익전과 그의 큰형인 신익성(申翊聖)이 명나라를 도울 뜻이 있었다.” 하여 몇몇 재신(宰臣)들과 함께 끌고 간 것이다. 큰형 신익성은 호란(胡亂)을 당했을 때 의리(義理)를 세움이 매우 컸고, 삼전도(三田渡)에 비(碑)를 세울 때에는 비에 전서(篆書) 글씨 쓰는 것을 힘써 거절하였다. 신익전은 최명길(崔嗚吉)과 함께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지낼 적에 매우 기휘할 만한 말을 주고받았는데, 당시 이계(李烓)가 청나라의 포로(捕虜)로 잡혀가서는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사람들까지 무함(誣陷)하였다. 신익전이 이계의 간악함을 말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와서는 부응교·사인(舍人)·사간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1639년에는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효종 때 호조·예조·병조의 참판 등을 지내면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한성부의 우윤과 좌윤을 거쳐 도승지에 이르렀다.

지방관으로 나가 선정을 많이 베풀었는데,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을 적에,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곳이 아마도 내가 신명을 바칠 곳이리라.”

하고 숨은 장정을 모두 찾아내어 여러 군대의 궐원(闕員)을 보충하고 경내(境內)를 독려하여 기한 내에 조적(糶糴, 환곡(還穀)을 꾸어 주고 받아들이는 일)의 환곡(還穀)을 수납케 한 것이 거의 수만 곡(斛)이었는데도 감히 뒤지는 자가 없었으며, 죽었거나 딴 곳으로 이사하여 절가(絶家)된 경우가 있으면 번번이 모곡(耗穀, 소모될 것을 감안해서 더 받는 곡식)으로써 상환케 하고, 학교를 세워서 제생(諸生)들을 모아 학업을 장려하여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으므로 돌아올 때에는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한다.

인조를 이어 즉위한 효종 2년에 김자점의 옥사에서 조귀인(趙貴人)과 김자점(金自點)이 사사되는 상황에서 신익전은 그의 형세가 혐의쩍고 처지가 가까워서 자칫하면 위험한 의심을 받을 뻔했지만 끝내 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논자들이

“이때에 능히 충신으로서 스스로를 보전한 이로는, 공이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다.”

하였다. 이시백은 그의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았다.

박세채가 이를 두고

“만일 쉬움과 어려움을 따진다면 또 분별할 바가 있으니, 이는 어찌 공이 평소에 겸공(謙恭)하고 근확(謹確)했던 증험이 아니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라고 평하면서 신익전의 평소 행실을 밝히길,

“염정(恬靜)을 숭상함에 뜻을 두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왕실(王室)과 인척 관계를 맺기에 미쳐서는 더욱 삼가하여, 비록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담담하기가 마치 초야(草野)에 거처하고 공허(空虛)한 데로 도피하는 것 같았으며, 기미(幾微)를 보고 간략함을 지켜 한결 같이 옛 전적(典籍)에 종사하였으므로, 무릇 속세의 현회(顯晦)ㆍ장부(藏否)는 족히 그의 마음을 얽매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

주역』을 애독하여 깊이 연찬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유집』 19권 3책이 있다.

신응구(申應榘, 1553-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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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특히 성혼을 위한 신원에 적극적이었다. 김상헌이 신응구 묘갈명에서

“성 문간공(成文簡公)이 가문에 전래된 정대한 학문으로 우계(牛溪) 위에서 학도들을 가르쳐 성취한 제자들을 쉽게 다 셀 수 없었는데, 공자(孔子)가 이른 것처럼 문인이 더 친근해졌다는 것에 접근한 자에 있어서는 고령(高靈) 신공(申公)이 가장 선배라고 하겠다.”

라는 평가는 여실하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자방(子方)이고 호는 만퇴헌(晩退軒)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벌(橃)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의형(義衡)의 딸이다.

1580년(선조 13)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천거로 장원(掌苑)이 되었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관계에 들어가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충주목사, 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고,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형조참의·동부승지·좌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신응구의 묘갈명은 김상헌이 만년에 쓴 내용인데, 글 중에

“나는 공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장년에 이를 때까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일찍부터 기풍을 사모하였는데, 3대 동안 서로 주선하며 백여 년을 지내왔으므로 공이 나를 알아준 것이 기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스스로 공을 안다고 여기었다.”

라는 대목을 보건대, 신응구를 잘 알려주는 글로 사료된다. <인조실록>에 실린 신응구의 <졸기>가 폄하의 뜻이 비취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김상헌은 명문에서 신응구의 삶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의 모습을 바라보니, 한 겨울의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고 공의 중심을 살펴보면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어 얼음이 녹듯이 화평했도다. 약관(弱冠)에 향양(向陽)의 마을에 찾아가 배워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니,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를 따른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세상에 어려움을 만나 조금만 시험해 보고 항상 곤궁하게 살았도다. 하늘에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결국 창생의 한을 남기었도다. 아! 매우 슬프도다!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었다는 것은, 앞서 최유원(崔有源) 등이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이 반역을 꾀하였다고 고변하였지만 실상이 매우 모호하였기 때문에 공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끌어넣어 후일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신응구를 빙자하여 말하고 공신록(功臣錄)에 기록하였다. 이는 신응구가 전에 두 번이나 광해군의 사부를 역임한 적이 있었음도 고려한 조치였다. 신응구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누차 상소를 올려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가 아들에게 유서(遺書)를 써서 주었는데, 그 유서에 ‘내가 죽은 뒤에 공신록에 나의 이름이 그대로 있을 경우에는, 장사를 치를 적에 곧바로 담당자에게 반드시 사양의 의사를 관철시켜 나의 뜻을 밝히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로 하여금 지하에서 거듭 죄를 짓게 할 것이다.’는 대목에서 여실히 보인다.

한 겨울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다는 그 기상은, 김상헌이

“공이 젊어서부터 중대한 명망을 지니어 자신감이 적지 않았다. 대체로 공의 재주와 견식이 과감하고 민첩하여 고상한 의논이 종횡으로 넘쳐흘렀으므로 필시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공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매우 뚜렷한 견해가 있다고 여기었으므로 세상에 행세할 적에 꺼리는 자와 인정하는 자가 얽히어 평소 쌓은 바를 펼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한 사람들이 너나없이 매우 애석해 하였다.”

라는 대목에서 밝히고 있으며, 글의 말미에 “아 슬프도다.”라고 왜 했는지도 대략을 가늠할 수 있겠다.

저서로는 『만퇴집』이 있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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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순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형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며 스스로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9세조인 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조선유학사에서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형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자결하였고 동생 송병순은 1910년 경술국치 후에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억누르다가 마침내 1912년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두 형제가 유학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국권을 빼앗김에 분연히 일어나 순국하였으니 가학이요 학통을 계승한 것이 이와 같았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동옥(東玉)이며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다. 형 송병선과 함께 큰아버지 송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으며, 송달수의 사후에는 작은아버지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이는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이다.

1865년(고종 2)에 서원 철훼령이 내려 만동묘가 헐리게 되자 춘추대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훼손하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만동묘는 송시열이 유명으로 수제자 권상하에게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낼 사당을 건립하라고 하여서 세워졌다. 1865년(고종 2년) 조정에서는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를 철폐했다가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이듬해 왕명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그러다 1907년에는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우고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폐철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킨다. 이런 상황에서도 1910년 송병순(1839∼1912) 등이 존화계를 조직하여 제사를 이어가는 등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이어졌으나,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으로 영영 끊기게 되었다. 여기서도 송병순의 존화양이의 춘추의리 정신을 잘 알 수 있다.

1888년(고종 25)에는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지 않는 등 칩거하였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향약을 보급하여 향인을 교화했으며,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정(自靖)의 생활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만 전념하였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영동군 학산면 활산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 해 9월 5일 강당 위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살하려고 하였다. 그 때 마침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실패하자, 그 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 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독서만집(讀書漫錄)』, 『학문삼요(學問三要)』, 『사례축식(四禮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 『주서선류(朱書選類)』 등이 있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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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며 스스로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이는 조상의 의리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화옥(華玉)이며 호는 연재(淵齋)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대전시 회덕(懷德)에서 출생하였으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고, 송병순(宋秉珣)은 그의 동생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그는 송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작은아버지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이는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이다. 송달수는 조선후기 성리학계를 이분하였던 호락논쟁에만 매몰되지 말고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본연의 연구에 매진할 것을 강조한 순수 학문적 입장을 강조했고, 송근수는 1882년 좌의정 재임 시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였다.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송병선이 ‘전통질서 중의 하나인 복제를 함부로 바꿀 수 없음’을 역설하면서 위정척사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이 또한 그가 계승한 가학 및 학통의 전통이다.
송병선은 국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선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세를 이루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자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이를 위하여 유림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탱해 온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전파하고,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면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었다. 1867년 옥천 이지당(二止堂)에서의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기국정, 고암서당 등지에서 강회를 개최하고, 성주의 노강 등지에서 향음례를 행하고, 무주 구천동의 서벽정을 중건하여 강학하기도 하였다.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이는 성리학의 정진, 언로의 개방, 국가정통성 확립, 국가기강 확립, 재정절약, 인사정책 일신, 조세경감, 왜세 척결 등 8가지 현안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1조와 8조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대의를 밝히고 있는데, 위정을 위해서는 성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여 국왕으로부터 철저히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전 국민이 사상적으로 절대 동요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척사의 대상으로는 왜(倭)와 사교(邪敎)를 꼽고 있는데,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시각에서 일제를 비롯한 서구사상 일체에 대한 척결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여기서 송병선은 각국 공사관에 우리정부의 입장을 표명할 것과 외국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봉사의 핵심은 무엇보다 일제에 맞설 수 있도록 내수를 급히 정비하고, 군사력을 양성하여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자는 것이었다.
그 후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당시 일제는 송병선의 서울 상경, 국왕 면담, 선생을 추종하는 제자그룹 등을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고 판단하였다. 12월 28일 대전으로 압송되어 온 다음날 송병선은 70세의 노구로 조국을 위하여, 후세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다가 끝내 유소(遺疏)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상소이자 제자들에 대한 행동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음독한 후, 후손과 제자들을 모아 ‘도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마지막 유지와 함께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과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다.

송문흠(宋文欽, 1710-1752)


문흠(宋文欽, 1710-1752)                                 PDF Download

 

국 18현의 한 명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의 4세손으로, 형 송명흠(宋明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자는사행(士行), 호는한정당 (閒靜堂)이다.  형과 마찬가지로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이재는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치  세연간노론벽파의중심인물로활동한문신이다.

조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한 송병원(宋炳遠)이고, 부친은 송요좌(宋堯佐)이다.   생조는원래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송병익(宋炳翼)인데,  금산 군수(錦山郡守)를 지낸 묵옹 송병원(宋炳遠)에게 출계하였다. 모친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2남2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1733년(영조9) 계축식년사마시(癸丑式年司馬試)에 진사2등으로합격하였으나,  관직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어, 형 송명흠과 함께 회덕(懷德)의 비래암(飛來庵)에 뜻 있은 선비들을 모아<대학(大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특별히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후에 장릉참봉(長陵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그뒤 익위사시직(翊 衛司侍直)에 임명되었을 때 조태구(趙泰耉)의 아들 조현빈(趙顯彬)이 마침 세마(洗馬)가 되었으므로 더불어 동료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

왜냐하면 조태구는 소론의 영수로서 경종치세 때 일어난 신임옥사에서 노론 4대신 주살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다시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이 되었으나조현빈이 그 자리에 계속 있자 역시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

1743년(영조19)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이 전랑(銓郞)이 되어 맨 먼저 그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발탁하여 일 년여 동안 재직하게 하였으나, 가르칠 어린아이들이 없어 곧 벼슬을 사양하였다.  1747년(영조23) 종부시주부(宗簿侍注簿)에 올랐다가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으며,  다시 문의현령(文義縣令)이 되었다.

1552년(영조28) 12월 15일, 향년43세의나이로갑자기사망하였다.
송문흠은 예서를 잘 써는데, 특히 이인상(李麟祥)과 의예술적 교분이도타웠다.  이인상은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낳은 명문 출신으로 1735년(영조11) 진사에 급제하였지만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자였기때문에 본과에 이르지는못하였다.  그는 서출이었지만 명문 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당시 문사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그의 전서체에 대하여기(奇)하다고 하고 혹은 허(虛)하다고도 하였는데, 김정희(金正
喜)는 그문자향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없다.”고 상찬하였다.

이런점에서 형인 송명흠이 유학하는 선비에 가깝다면 송문흠은 그예술적 역량이 출중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그가 남긴 ‘한정당기’에서도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정당집>은 양이 많지 않은데,  조카인송시연의 발문에 의하자면 상당량의 글이 유실되었을 것이다.
그가 당호를 한정당이라고 지은 것은 도연명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는‘한정당기’에서도 연명의 일생을 “민면사세우애한정(?勉辭世 偶愛閒靜)” 8자로 요약하였는바,  그뜻은‘세상에 매이지 않고자 몸부림치고, 한정한 삶을 사랑하네’라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부귀공명을 얻기위해 서로 다투고 서로 자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이를 좇지 않고도 연명이 그랬듯이 세상에 나아가 나를 드러내고 명예와 부귀를 얻고 세상에 큰 이름을 드리우는데 온 정신을 두기보다는 유유자적하며 천성을 다하는 인생을 살겠다.  그리하여 한정당 이라고 자호한 것이다.

송문흠을 후대에 서예가이자 문장가라고도 평하는 데는 아마 이와 같은그의 성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문집으로는 8권 4책의 『한정당집(閒靜堂集)』이 전한다.

송명흠(宋明欽, 1705-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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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18현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의 현손으로,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자는 회가요, 호는 역천(?泉)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 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동문수학한 미호 김원행과는 막역한 강학지우로 유명하다. 혈족 관계로 보면, 김원행의 생모가 송명흠의 조부인 송병원의 딸이기 때문에 송문흠은 김원행의 외가쪽 사촌 동생뻘이다. 대과에 응시하지는 않았고, 뒤에 학행으로 추천를 받아 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영조 30)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을 제수하여 별유(別諭)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역시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어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국역 영조실록>에 따르면, 송명흠은 1763년(영조39) 3월 5일의 상소에서 비유한‘적불(赤?)’이란 말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는데, 이에 대해 계속해서 초선(抄選)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1764년 5월 17일의 기사에서 영조는 “송명흠의 적불이란 말도 역시 산야(山野)의 당론”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후 박세채의 문묘 종향 문제로 당론이 이어 지자 11월 28일에는 신경(申暻)ㆍ송명흠ㆍ홍계능(洪啓能)ㆍ김양행(金亮行)을 모두 초선에서 빼라고 명하면서 당습(黨習)은 망국의 단서인데 그 원인은 산림의 선비에게서 말미암았다고 글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 11월 30일에 송명흠, 김양행, 홍계능을 서인으로 만들었다.

적불(赤?)은 붉은 무릎 가리개로, 대부(大夫)이상의 관원은 적불을 착용하고 초헌을 탔는데,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장(候人章)에 조(曹)나라 군주가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였으므로, 대부가 5인인 제후(諸侯)의 제도를 무시한 채 그 복색(服色)을 한 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어진 이는 도(道)를 지키느라고 도리어 빈천(貧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송명흠이 올린 상소에

“근습(近習)에 정(情)을 두거나 인척(姻戚)을 사사로이 좋아한다면 장차 덕망 있는 이를 임명하는 관작이 모두 사인(私人)에게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니, 사신이 비평한 바에 ‘저 소인들은 적불(赤?)을 한 자가 수백 명인 어리고 예쁜 소녀들이야 굶주리는 수밖에’라고 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나간다면 온갖 일이 그러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적불 두 글자를 쓰고 있다. 이 소에 대해 영조가 “내 비록 덕이 없지마는 어찌 조후(曹侯)와 같은 데 이르렀겠느냐?”

라고 역정을 내며, 대신·승지·옥당을 불러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 명하였는데, 영의정 신만(申晩)은 임금이 진정하기를 청하고,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이것은 문장을 끊어서 뜻을 취할 것이니, 반드시 무심코 인용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변론을 하였고, 승지와 여러 옥당이 대답한 것도 모두 대신의 말과 같았기 때문에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 이에 비답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 사지(辭旨)가 몹시 엄중하였다고 기록에 전한다.

애초에 영조가 송명흠을 불러들일 적 기사가 <영조실록>에 실려 있는데, 군신 간에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송명흠이

“격물(格物)·치지(致知)의 공부가 극진하지 못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공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을 광구(匡救)하는 자는 충(忠)이고 임금의 잘못에 아부하고 순종하는 자는 충이 아니니, 이것을 미루어 나가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저절로 공정해질 것입니다. 무릇 진언(進言)에 대해서는 말이 쓸 만하면 쓰고 쓸 수 없으면 쓰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갑작스레 벌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이에 임금이 회답하기를,

“천천히 강구(講究)해야 할 것이니 모름지기 말을 쓰지 않았다 하여 떠나지 말라. 내가 경연관(經筵官)을 얻은 것이 마치 밝은 촛불을 얻은 것과 같으니, 모름지기 상세히 문의(文義)를 진달하라.”

실상 앞의 상소문에서 직언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군신간의 후은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 직언의 내용은 주자가 효종에게 올린 <무신봉사>의 격물치지의 학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 군신간의 후은의 정 이 도타울 때에도 ‘격물치지’를 말하고 상소문에서도 마음을 비우고 ‘격물치지’의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내용으로 전후가 수미일관하다. 그러하기에 상소문에 대한 평에서 사관들이 이렇게 적고 있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정초(旌招)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 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저서에 《역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