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섭(金漢燮,1838-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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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섭(金漢燮)은 전라남도 장흥 출생으로 30세 때부터 이항로, 임헌해,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독자적인 성리학 세계를 구축하였다. 40세 이후 강진군의 대월리와 수양리 등지에 정자를 짓고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일어나 전라도 각지를 점거하자 당시 강진현 보암면의 도총장(都摠長) 직책으로 농민군의 강진 입성을 저지하다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838(1세, 헌종 4) 5월 23일에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흥룡동(현 내안리 내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선조인 문인 김광원(金光遠)이 을사사화 때(1519) 전라도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이곳에서 생을 마쳐 그 후손들이 여기에 정착한 것이다.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치용(致容), 호는 오남(吾南)이다. 아버지는 김노현(金魯鉉),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인 윤상열(尹商說)의 딸이다.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한섭은 어려서부터 집에서 가까운 수인산 필봉 아래의 서당 흥룡재(興龍齋)를 다니며 글공부를 하였다. 11세 때부터 문장에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855(18세, 철종 6)에 ⌈중용⌋에 관한 글을 지어 앞선 학자들의 주석을 비판하였다. 이후 십 수 년간 과거 시험에 도전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1862(25세, 철종 13)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1867(30세, 고종 4)에 이항로(화서, 1792-1868)의 문하에 들어갔다. 1년이 못되어 스승이 사망하자, 상례를 치룬 뒤 스승의 문집 등을 가지고 귀향하였다. 이후 임헌해(任憲晦, 1811-1876)의 문하에 들어가 그가 별세할 때까지 8년간 스승으로 모셨다. 그 뒤에 기정진(노사, 1798-1879)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이때 김평묵, 최익현, 전우 등 많은 유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그가 강진의 화수정(花樹亭)에서 지은 글(「화수정차제생운(花樹亭次諸生韻)」)에 다음과 같이 담겨있다.

士處憂虞時 선비의 처신은 어려울 때를 걱정하고,

須勤學禮詩 반드시 힘써 예와 시를 배워야한다.

寒後春生理 추워진 후에 봄이 오는 이치는,

試看庭樹枝 정원의 나뭇가지를 보면 안다.

1877(40세, 고종 14)에 월각산(月角山, 지금의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아래로 이사했다. 그곳의 골짜기를 대명동(大明洞)이라 부르고, 그곳에 서재와 서당을 짓고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서당의 이름을 한천정사(寒泉精舍)라고 하였다. 한천정사라는 이름은 주자가 그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지은 움막의 이름이다. 주자는 그곳을 찾아온 친구 여조겸과 그곳에서 근사록을 저술했다. 이러한 정자의 이름에서 주자를 본받고자 하는 그 마음이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사정을 김한섭은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관산의 흥룡동에 대대로 살면서 일찍 아버지를 여읜 불효 여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지난 정축년(1877)에 금릉의 북쪽 월각산 아래 대명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한천정사실기」)

당시 그는 주자의 영정을 한쪽에 모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규정을 정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독서의 순서는 마땅히 율곡 선생이 정한 바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어린 초학자는 소학을 배우기도 어려우니, 모름지기 먼저 주자가 지은 동몽수지(童蒙須知)를 읽어 자신을 단속할 대략을 알게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소학과 효경 등의 책을 읽어 그 기본을 세우고, 그 다음에 율곡선생이 지은 격몽요결을 읽어 뜻을 세우고 몸을 챙기는 학문의 대강을 알며, 그 다음에 사자서(四子書)․근사록․심경을 숙독하고 상세해 완미함으로써 옛 성인들이 학문을 논하고 인격을 닦으며 성명(性命)과 이기 체용의 현미(顯微)를 밝힌 이치를 살펴야할 것이다.”(한천정사寒泉精舍의 학규學規)

1882(45세, 고종 19)에 아들 봉식(鳳植)을 지도(智島)에 있는 김평묵(金平默)에게 보내 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는 이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나 24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외에도, 세 형이 요절하고 둘째 아들이 요절하는 등 가족적으로 불행한 일들이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항상 빈곤하였으나, 학문과 덕행을 닦은 일에 매진하였다. 그의 문집에 이런 글이 있다.

“성인의 학문을 배우면 비록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좋은 이름은 잃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속인의 학문을 배우면 비록 온갖 정교한 연구를 하더라도 단지 속인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몸으로 헛되이 살 수 없다. 이 날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부귀도 원하는 바가 아니요, 문장도 원하는 바가 아니며, 공명도 바라지 않고 장생도 바라지 않는다. 소원이라면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가정적으로나마 사회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한 현실을 초월하여 오로지 성인의 도를 찾아 추구하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1887(50세, 고종 24)에 가족을 수양리(首陽里, 지금의 강진군 도암면 수양리水良里)로 옮겼다. 자신은 계속 대명동에서 강학활동을 하였다.

1890(53세, 고종 27), 대명동을 떠나 가족이 있는 수양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 봉양동에 봉양정사(鳳陽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당시 제자들은 20~30명 정도였다.

이즈음 그의 생활을 잘 보여주는 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陋巷春風入 조그만 마을에 봄바람 불어오니

幽人樂未央 세상 피해 사는 즐거움은 끝이 없구나.

階梅白如玉 계단 아래 매화는 구슬처럼 하얗고

自爾動淸香 맑고 고은 향기가 저절로 풍겨오는구나.

1894(57세, 고종 31), 동학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월(음력)에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군은 4월에 전주성을 함락하고, 9월에는 전라도 일대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당시 강진현은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반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동학접주 이방언은 강진현을 1차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방언은 장흥의 묵촌 출신으로 일찍이 김한섭과 글을 같이 배운 동료였다. 김한섭은 그러한 이방언에게 「적도들에게 경고하는 글(警示賊徒文)」을 지어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동학군을 배척하였다. 아울러 의병을 모집하여 수성군을 조직하고 보암면(현 도암면) 도통장(都摠將)으로 동학군의 진입에 대비하였다.

12월 7일 오전에 농민군이 강진현에 들이닥쳤다. 당시 현감 이규하(李奎夏)는 곧바로 달아났고, 김한섭은 다른 의병들과 함께 성위에서 포를 쏘았지만 중과부적으로 당해낼 수 없었다. 인근지역의 병영에서 구원군도 오지 않는 상태에서 동문과 남문이 부서지고 농민군이 밀려들어오면서 김한섭은 사망하였다.

제자들이 나중에 스승의 글을 모아 유집 오남문집(吾南文集)을 발간하였다. 13권 7책으로 엮어져 있다. 그의 글은 성리학에 대해서 논한 것이 많은데, 「삼극도설(三極圖說)」·「유석심학부동변(儒釋心學不同辨)」·「일감문답(一鑑問答)」등이 있다. 이외에도 정치 문제를 다룬 「벽사설(闢邪說)」·「통화변답(通貨辨答)」·「농정신서서조변(農政新書序條辨)」 등 문장도 있다.

성리학자로서 그의 학문적 특색은 리(理)를 강조한 것이었다. 특히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성즉리심즉기설(性卽理心卽氣說)·성위심재설(性爲心宰說) 등에 반대하고, 명덕(明德, 밝은 덕)은 기(氣)가 아니라 리(理)가 주(主)이며, 심(心)은 리와 기가 합한 것으로 몸의 주재자라고 보았다.

<참고문헌>

권영대, 「김한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진일보, 「주자를 닮고자했던 한말 유학자 김한섭」(2015. 7. 30일 기사)

황신(黃愼, 1560-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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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黃愼, 1562-1617)의 초상화
황신(黃愼, 1562-1617)의 초상화
신(黃愼, 1560-161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진주부사(陳奏副使),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명나라를 왕래하면서 외교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계축옥사가 일어난 뒤에 황해도 옹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560년(1세, 명종 15)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공조판서 황형(黃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황원(黃瑗)이고, 아버지는 정랑 황대수(黃大受)이며, 어머니는 곽회영(郭懷英)의 딸이다.
황신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582년(23세, 선조 15)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다음해 성혼(成渾)의 문하에 들어갔다.

1588년(29세, 선조 21)에 알성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파직되었으나 바로 성균관 학관으로 차출되었으며, 이어서 호조 좌랑이 되었다.

1589년(30세, 선조 22), 임금에게 간하는 일을 담당한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에 대동계를 조직하여 반란을 꾀했다고 의심받은 정여립(鄭汝立)을 김제군수로 추천한 이산해(李山海)를 추궁하였다. 이산해는 동인이었다가 나중에 북인의 당수가 된 인물인데 황신은 서인 쪽에 가까웠다. 또 황신은 정여립의 옥사에 대해 직언하지 않는 대신을 논박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듬 해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32세, 선조 24)에 왕세자 책봉 문자가 일어나자 정철(鄭澈) 일파로 몰려 파직을 당하였다. 정철은 서인의 리더 중 한사람이었다. 강화도의 마을로 퇴거하였다.
1592년(33세, 선조 25), 여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다시 조정으로 불려와 사서, 병조좌랑, 정언 등을 지냈다. 그 다음 해 지평으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접대하였다. 당시 송응창이 임금에게 학문이 높은 선비들을 맞이하여 함께 강학(講學)하자고 요청하였는데, 황신이 선택되었다. 송응창은 육구연(陸九淵)과 양명학만을 주장하자 황신이 대학강어(大學講語)를 지어 정주학(程朱學)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세자였던 광해군이 군대를 위무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갈 때에 체찰사 종사관이 되어 광해군을 수행하였다. 뒤에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이 해에 명나라에서 일본과 화친하려고 작정하고 우리나라에 화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황신은 “왜놈들은 우리와는 하늘을 함께할 수 없는 원수이다. 차라리 나라와 함께 죽을지언정 의리상 화친을 말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한번은 왜군의 병영에서 잔치를 베풀어 명나라 사신을 초청하였다. 황신도 같이 갔었는데, 왜군 장수가 황신을 왜나라 승려의 아랫자리에 앉히려고 하자, 황신은 그대로 서서 앉지 않았다. 결국 왜나라 장수가 포기하였는데, 선조는 이 이야기를 듣고 특별한 포상을 내렸다.

1596년(37세, 선조 29)에 변방 백성들을 위무하는 방법을 제안하여 절충장군이 되었다. 통신사로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다녀와서 선조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이 일부 이렇게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선조 : 중국 사신과 우리나라 통신사를 일본의 관백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모두 죽이려고 하였다는데 과연 그랬는가?
황신 : 저희 일행을 죽일 뜻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역관 박대근이 저에게 와서 “관백이 우리 일행을 모조리 죽이고 책사까지도 쫓아내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세 봉행(奉行, 고급관료)이 “예로부터 사신을 죽이는 나라는 없었다.(중략)”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풍신수길이 조선과 명나라 사신을 모두 죽이려고 한 것은 강화협상에 나선 중국 측과 일본 측의 대표들이 거짓말을 하였다는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1597년(38세, 선조 30) 7월에 전라감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남원의 복구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해 8월에 일본군이 화친회담의 결렬을 핑계로 다시 조선을 침공하였다.(정유재란) 황신은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에서 왜군을 포위하였다가 그들이 퇴각하자 돌아왔다. 다음해 스승 성혼(成渾, 1535-1598)이 사망하였다.

1599년(40세, 선조 32)에 공조 참판, 호조 참판이 되었다. 모친상을 당했다. 이후 공조·호조의 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 등으로 승진하여 인재등용과 기강확립 등을 골자로 하는 12조의 시무차자(時務箚子)를 올렸다.
1601년(42세, 선조 34) 10월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스승인 성혼을 비난하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강화도로 돌아갔다. 이때 선조는 성혼과 정철에 대해서 “간사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싫어했기 때문에 성혼을 두둔한 황신을 파직한 것이다.

1602년(43세, 선조 35), 사은사(謝恩使)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도중에  대북파 정인홍에 의해 자신의 관직이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인홍은 황신이 파직한 대사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605년(46세, 선조 38)에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07년(48세, 선조 40)에 복관(復官, 관직에 복귀)이 되었으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시행하지 않아 부여로 내려가서 살았다. 다음해 선조가 사망하여 궁궐에 들어가 조문을 하고 곡을 하였다.

1609년(50세, 광해군 1)에 다음해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스승 성혼이 아직 죄인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다. 하지만 사신(陳奏副使)으로 차출되어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광해군의 책봉(策封)을 청하였다. 귀국하여 북쪽 오랑캐, 즉 여진족의 움직임이 걱정된다고 보고하고 방어책을 세울 것을 청원하였다. 이후 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상소하여 스승 성혼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1612년(53세, 광해군 4)에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모시고 따른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13년(54세, 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정협(鄭浹)의 무고로 쫓겨나 유배되었다. 계축옥사란, 대북파 관료들이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꾸민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서인 세력과 남인 세력이 대부분 몰락하고 대북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황신도 그 와중에 유배된 것이다.
광해군 일기 5년 10월 4일 기록에는 황신과 이이첨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황신은 본래 명망이 있었다. 임진년 난리 때 궁궐의 각료로 왕(광해군)이 감무(監撫)하는 것을 보좌하여 성실과 근면으로 왕의 인정을 받았다. 왕이 즉위한 뒤에는 또 주청사(奏請使)로 가서 책봉을 허락받은 공로로 지위가 상경(上卿)에 이르렀다. 호조판서가 되어서 5년 동안 청렴한 일처리로 공적이 있었으므로 상하가 모두 믿고 의지하였다. 황신이 이이첨과는 젊어서 서로 친했는데, 함께 조정에 선 뒤에 황신이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이조와 병조의 관원에게 사적으로 말하였다. 이이첨이 그 말을 듣고는 원망하고 노여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틈을 타 죄를 얽어 공격하고 탄핵하기를 매우 심하게 하였다. 또 친한 사람을 보내 황신을 꼬이기를 “그대는 비록 나를 저버렸지만, 나는 그대를 저버릴 수 없다. 상께서 자주 나에게 황신이 실제로 죄가 있느냐 없느냐 물으시니, 이것은 실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다. 그대가 지금부터라도 나와 일을 함께 할 것 같으면, 내가 마땅히 상께 아뢰어 해명해 주겠다. 이렇게 한다면 처벌도 면할 것이고, 관작도 그대로 지닐 것이다.”라고 하니, 황신이 사양하기를 “친구를 구해주려는 생각에 크게 신세를 졌네. 그러나 몸이 죽을 죄에 빠졌으니 어찌 감히 다시 세상일에 뜻을 두겠으며, 또 그것을 바라는 말을 하겠는가. 이익을 도모하여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친구인 자네도 역시 천하게 여길 것일세.”라고 하였다. 이이첨이 크게 노하여 드디어 절교하고 죄를 더욱 급하게 논박하였으나, 황신은 왕의 보호에 힘입어 멀리 귀양가는 것을 모면하였다.

1617년(58세, 광해군 9)에 황해도 옹진(翁津)의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양주(楊州)의 서산(西山)에 안장되었다. 후에 인조가 즉위하자 1623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가 1629년에 문민(文敏)의 시호를 받았다. 공주의 창강서원(滄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막부삼사수창록(幕府三使酬唱錄)⌋, ⌈추포집⌋, ⌈대학강어⌋ 등이 있다.
송시열은 황신의 비명에 이렇게 적었다.

공은 관직에 임하여 일을 처리할 때, 이해관계나 화복(禍福)에 일체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처음에 (대북세력의 지도자로 가짜 역모사건을 조작하여 계축옥사를 주도한) 이이첨(李爾瞻)의 명성이 자자하였을 때 공은 그의 속셈을 환히 짐작한 터라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또 그의 청선(淸選)을 저지시켰으므로 자제들이 위태롭게 여겨 공에게 그의 노여움을 어느 정도 풀어 주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았다. 계축년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이이첨이 친한 사람을 보내어 공을 달래고 위협하였으나 공은 “나는 죽고 사는 것 따위는 이미 도외시한 바이다.”라고 하였으므로, 흉악한 무리들이 모두 이를 갈아 가장 혹심한 화를 당하게 되었으나 공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최전(崔澱, 1567-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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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에 세워진 최전의 시비
경포대에 세워진 최전의 시비

 

전(崔澱, 1567-1588)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젊어서 요절하여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어려서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는데,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많은 시문과 그림을 남겼다. 그의 유집으로 ⌈양포유고(楊浦遺稿)⌋가 있으며, 그의 아들 최유해(崔有海)는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까지 올라 부친의 뜻을 이었다.

1567년(1세, 명종 22)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1868년 부친의 임지인 고성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언침(彦沈), 호는 양포(楊浦)다. 아버지는 군수 최여우(崔汝雨)이고, 어머니는 상주 이씨(尙州李氏)다.
선조시대의 청백리로 알려진 무신 최여림(崔汝林)은 아버지 최여우의 형이며, 최전에게는 큰아버지다. 최여림은 1583년(선조 16)에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재직하던 중에 서계를 잘못 올린 일로 파직당한 바 있다. 선조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은 최여림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최여림은 무인(武人)이었는데, 몸가짐에 근신하고 품행이 엄격하여 젊어서부터 늙어죽을 때까지 지키는 바가 한결같았다. 이는 문사(文士)도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의 청절(淸節)은 더욱 칭찬받기에 충분하였다.”

1572년(6세, 선조 5), 6월에 부친상을 당했다. 이에 따라 큰형에게서 글을 배웠다.
1575년(9세, 선조 8)에 해주로 가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한문과 유학 공부를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에 신동이라 불렸다. 배움의 진도가 빨라 스승 율곡으로부터도 총애를 받았다.
1578년(12세, 선조 11)에 「별해고수오음(別海皐倅梧陰)」를 지었다. 이 시는 율곡을 찾아가다가 황해도 연안에서 그 곳 수령 윤두수(尹斗壽)를 만나 지은 것이다. 이시는 이별의 마음을 격조 높게 표현하여 율곡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그의 시는 깊은 정회를 표현한 시가 많다.
그의 시비가 경포대에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蓬壺一入三千年 봉래산에 한번 들어가면 삼천년
銀海茫茫水淸淺 은빛 바다 망망한데 물은 맑고 얕구나.
驂鸞今日獨飛來 나는 듯이 말을 몰아 홀로 찾아오니
碧桃花下無人見 복숭아꽃 아래 보이는 사람 없구나.

그는 경포대에서 또 이러한 시를 지었다.

朝元何處去不歸 노자는 어디 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玉洞杳杳桃千樹 신선의 동굴은 아득한데 복숭아나무 가득하네.
瑤壇明月閒無眠 신선이 사는 곳에 밝은 달이 한가로우니 잠은 오지 않고
萬里天風香滿浦 만리에 부는 바람, 향기만 나루에 가득하네.

그의 시는 이렇게 관동지방의 결치를 읊은 서경시가 많다. 이런 그의 시들은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맹호연(孟澔然) 등 당나라 시인들의 수준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고, 소리가 맑으며 가락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장생은 “그의 시는 격조가 있으면서 법이 있으며 청아하면서도 빛나 세속의 바깥에서 휘날리는 듯하니, 참으로 ‘한 구절의 시구가 열 개의 옥으로도 값을 다 치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양포유고․발문⌋)
1580년(14세, 선조 13)에 사마시의 초시에 응시하였다. 이때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회시(會試)에 참여하였을 때는 마침 스승인 율곡이 시험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남의 오해를 살까 일부러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에서 석존(釋奠)을 주관하던 좨주(祭酒, 정3품 벼슬)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매일같이 학업 지도를 받았다.
이즈음의 모습을 사계 김장생은 ⌈양포유고(楊浦遺稿)⌋ 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 슬프다. 나는 최군(崔君)을 총각 때 그 형의 상차(喪次, 상주가 머무는 방)에서 보았는데,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용모가 단정하고 온화하였다. 상례를 집행할 적에 예법대로 하여 멀리서 바라보니 의젓하기가 큰 그릇으로 성취할 인물임을 알았다.”

1585년(19세, 선조 18), 진사시에 합격하여 사람들의 기대를 크게 모았다. 그는 시문에 뛰어났으며 매화와 조류(鳥類)를 잘 그렸다. 글씨도 잘 써서 예서(隷書)와 초서에 능했다.

1588년(21세, 선조 21), 윤 6월 아들 최유해가 태어났다. 문경(聞慶)의 양산사(陽山寺)에 가서 ⌈주역(周易)⌋을 읽다 병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해 12월 19일, 짧은 생을 마쳤다. 김장생은 최전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하여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슬픔을 이렇게 적었다.

일찍이 율곡 선생의 문하에서 바른 도로써 뜻을 세워 학문이 날로 발전하여 문장과 재기에만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동문들도 모두가 원대한 인물이 되리라고 기약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나는 그의 나아간 점만을 보았고 그가 멈춘 것을 보지 못하였다. 아, 슬프다. 하늘이 인재를 내릴 적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는 것인데, 또 어찌하여 갑자기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갔단 말인가? 천리(天理)란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양포유고․발문⌋)

유집으로 ⌈양포유고(楊浦遺稿)⌋가 있다. 그의 시문유집(詩文遺集)은 명나라에서 간행되어 절찬을 받았다. 최전의 친구 이정귀(李廷龜)는 유고집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 슬프다. 이는 나의 죽은 친구 최언침(최전)의 유고다. 언침은 스물두 해를 살았으니 그 원고는 원래 적은데 세상을 떠난 지 이제 25년이 지나서 망실된 것도 또한 정녕 많으리라. 아! 그 수가 적은 것도 괜찮다. 어찌 구태여 많은 것을 바라겠는가? 그의 시는 맑고 운치가 있으며 타고난 자질이 본래 높기를, 새끼 봉황의 소리가 겨우 목에서 나오자마자 어느새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과 같다. (중략) 곤산의 옥은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진귀하다. 어찌 구태여 많을 필요가 있겠는가!”(⌈양포유고․서문⌋ )

최전의 아들 최유해(崔有海, 1588-1641)가 1625년에 부친의 문집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최유해는 김현성(金玄成), 조수륜(趙守倫), 최립(崔岦)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1613년(광해군 5)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응교를 거쳐 훈련도감낭청이 되었으며, 그 뒤에 양주목사(楊州牧使), 홍문관교리를 거쳐 정주목사(定州牧使)·길주목사(吉州牧使) 등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젊어서 요절한 부친이 남긴 뜻을 잘 이어받고 여러 지방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최립(崔岦,1539-1612년)


 

최립(崔岦,1539-1612년)                                        PDF Download

 

최립 초상화
최립 초상화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선 중기의 문관이며 문인이다.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에 집안이 빈천하여 높은 벼슬까지는 못 올라갔지만,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서, 고풍스럽고 격조 있는 문장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을 위해 명나라와의 교섭에 큰 기여를 하였다.

1539년(1세, 중종 34)에 개성에서 진사 최자양(崔自陽)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 또는 동고(東皐)이다.

1555년(17세, 명종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61년(23세, 명종 16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당시 여러 관리들이 승정원에 있는 초목(草木)과 화석(花石) 40여 종으로 각각 1수의 율시(律詩)를 짓게 하자, 잠깐 동안에 완성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광해군일기․최립의 졸기⌋) 이후 그는 장연현감, 웅진현량, 재령 군수 등 궁벽한 고을을 맡으면서 더욱 문장에 힘을 쏟았는데, 반고의 ⌈한서(漢書)⌋를 수천 번 정독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1577년(39세, 선조 10),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직책은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이었다. 주청사란 현지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사신이다. 질정관은 임시 벼슬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과 함께 보냈는데, 중국의 문물, 제도, 사물 등에 관한 의문점을 물어서 알아 오는 관리였다. 사신으로 다녀온 뒤에 그는 재령 군수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해주에 은거하고 있던 율곡 이이와 교류하였다.
최립이 재령 군수로 있었을 때, 율곡에게 쌀 1말 정도를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 율곡은 점심을 먹지 않았다.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양식이 떨어져 하루 한 끼만 먹으려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최립이 쌀을 보내 주었는데 받지 않은 것이다. “양식이 없는데 왜 쌀을 거절하십니까?”라고 사람들이 물으니 “국법에 장죄(贓罪, 절도나 뇌물 등으로 남의 것을 훔친 죄)가 매우 엄하여 받은 자도 처벌이 동일하다. 우리나라 수령은 나라에서 주는 곡물이 아니고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대개 수령이 주는 것은 모두 받아서는 안 된다. 최입지(崔立之, 최립)는 어려서부터 나의 벗이니, 만일 자기 집의 물건으로 준다면 어찌 받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최립은 당시 율곡이 해주 석담에 은거하면서 은병정사를 지어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지도하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문장이 ⌈간이집⌋에 들어있다.

1581년(43세, 선조 14)에 굶주린 백성들 구제에 힘썼다. 그 공로로 선조 임금에게 옷감을 하사 받았다.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주청사는 명나라 사람들이 태조 이성계의 계보를 잘못 알고 성주(星州)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여 그것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율곡이 제안하였기 때문에 율곡이 주청사로 거론되었으나 박순(朴淳)과 이산해(李山海) 등이 “숙헌(叔獻, 율곡)은 조정을 하루라도 떠날 수 없으니 그 다음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라고 하여 김계휘가 주청사로 임명되고 최립은 그를 보좌하는 질정관(質正官)이 된 것이다.

1584년(46세, 선조 17). 이 해 1월 16일(음력)에 절친한 벗이자 동료였던 율곡 이이가 사망하였다. 2년 뒤, 호군(護軍)으로 전임하여 있다가 관리들의 시문과 학식을 시험했던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을 했다. 덕분에 첨지중추부사(정3품 당상)에 올랐다.

1592년(54세, 선조 25), 9월 9일에 공주목사로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갑자기 전주 부윤으로 전임되었다. 이해 4월 13일(음력)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 20여만 명이 침략해왔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순식간에 함락되자, 선조는 왕실 가족과 관리들을 거느리고 급히 의주로 피난을 갔다. 최립이 나중에 중국 사신으로 가 중국 조정에 올린 글을 보면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이라는 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땅을 마주 보고 있는 관계로, 마치 산속에 살 때에는 승냥이나 호랑이를 경계하고 들에 거처할 때에는 독사나 이무기를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그들에 대해서 대비를 해놓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자행하는 소규모의 도발을 막는 정도의 것일 뿐이었는데, 이번에 그들이 자기네 소굴을 텅 비워 둔 채 온 힘을 다하여 쳐들어올 줄은 일찍이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맞이한 이 사태야말로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졸지에 나라를 지탱하지 못한 채 팔도가 유린을 당하고 삼도(三都)가 함락되고 말았으며, 그들의 칼날이 휩쓸고 지나가는 곳마다 온통 잿더미가 된 가운데 나라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저희 군주가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묘와 사직을 위해 죽지도 못한 채 신주(神主)를 받들고 서쪽 지방으로 파월(播越)하여 중화(中華)의 경계 선상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것은, 천지 부모와 같은 황상(皇上)께서 분명히 아무 죄도 없는 나라가 멸망당하는 것을 차마 보고 계시지만은 않을 것이요, 난폭한 왜적이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에 대하여 크게 노하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간이집」 제4권 「四行文錄」)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도움을 청하는 다급한 마음이 절절이 드러나 있는 문장이다. 전쟁 중에 최립은 주로 평양과 의주의 임시 조정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명나라와 교섭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1593년(55세, 선조 26), 1월(음력)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송응창 등이 이끄는 4만여 대군이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최립은 이해에 전주부윤을 거쳐 승문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또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하였다.

1594년(56세, 선조 27)에 주청사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가서 외교활동을 하였다. 이후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종료된 뒤에도 그는 세 번이나 명나라에 가서 외교활동을 하였다. 최립은 당시 일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았는데, 특히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여 중국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한편 명나라의 고문사파(古文辭派) 문장가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을 만나 문장을 논하기도 하였다.

1599년(61세, 선조 32)에 여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다음해는 용산에 거처하며 당시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1601년에는 평양에 간이당을 지어 그곳에 거처하였다.

1603년(65세, 선조 36). 최립은 역학(易學)에 매우 심취하였다. 그 자신은 스스로 역학의 본지를 터득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조정에서⌈주역(周易)⌋ 교정의 책임을 맡기려고 하자 상소하여 외직을 얻어 그 일을 마칠 수 있게 해주기를 간청했다. 그 결과 간성(杆城)의 군수가 되었는데, 부임하자 ⌈주역⌋ 교정에 전념하고 관청의 사무는 외면하여 사람들의 원망이 잦았다. 그때마다 그는 ‘이곳에 온 것은 나의 책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책은 드디어 완성이 되었으나 통설과 다소 괴리되었기 때문에 널리 유통되지는 못하였다.(⌈광해군일기․최립의 졸기」)

1606년(68세, 선조 39)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강릉부사를 지내고 형조참판이 되어 사직했다. 그 뒤 평양에 은거했다. 1608년 이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한양 자택에서 지내다가 개성으로 거처를 옮겨 여생을 보냈다.

1612년(74세, 광해군 4)에 사망하였다. 문집으로는 ⌈간이집⌋이 있으며, 그 외에 시를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역학(易學)도 깊이 있게 연구하여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 2권의 저서가 있다.
최립은 시를 잘 지었는데, 그의 시는 억세고 날카롭고 다음과 같이 소리가 담겨있는 특징이 있었다.

풍경소리 잦아들자 돌구멍에 새벽 샘물이 똑똑 떨어지고(磬殘石竇晨泉滴)
등불이 솔바람에 꺼지자 밤 사슴이 울고 있다.(燈剪松風夜鹿啼)

당시 사람들은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차천로(車天輅)의 시와 한호(韓濩)의 글씨, 그리고 그의 문장을 들었다. 또 이이,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윤탁연, 송익필 등과 함께 조선시대 8대 문장가로 꼽히기도 한다. 우아하고 간결한 그의 문장은 당시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왕세정 일파의 고문사파의 문장을 따랐다. 특히 그 문장은 평이한 문장체를 거부하고 선진시대의 문장을 모방한 의고문체(擬古文體)였는데, 한유(韓愈)와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장은 처음에 반고(班固)와 한유(韓愈)를 본받아 따랐지만, 만년에는 구양순의 문장을 몹시 좋아하여 항상 그의 글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광해군일기․최립의 졸기」)

정엽(鄭曄, 1563-1625)


 

정엽(鄭曄, 1563-1625)                                            PDF Down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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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鄭曄, 1563-1625)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율곡 이이,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도승지,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는데, 맡은 바 일에 너무 충실하다 격무로 사망하였다.

1563년(1세, 명종 18)에 진사 정유성(鄭惟誠)과 증찬성 윤언태(尹彦台)의 딸 파평 윤씨(坡平尹氏)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혹은 설촌(雪村)이라 하였다. 그의 호가 ‘수몽(守夢)’인 것은 그가 어느 날 꿈속에서 주자(朱子)를 만난 것에 연유한 것이다. 주자는 그의 손을 잡고 ‘하늘에도 가득 차고 땅에도 가득 찼으니,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盈天盈地勿忘勿助)’라는 여덟 글자를 써보였다고 한다. 그 꿈을 잊지 않기 위해 여덟 글자를 벽에 써놓고 호를 ‘수몽(守夢)’이라고 지었다.(묘비명)
정엽의 집안은 대대로 문관을 지냈는데, 증조할아버지는 좌승지에 추증된 정희년(鄭熙年)이고, 할아버지는 대사헌에 추증된 정선(鄭璇)이다. 아버지 정유성은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65년(3세, 명종 20)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에 시를 지었는데, 율곡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578년(16세, 선조 11)에 학자 이산보(李山甫)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 결혼으로 북인 당수로 유명한 이산해의 당조카 사위가 되었다. 장인인 이산보는 정엽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 공부하라고 권유하였는데, 이에 따라 먼저 송익필(宋翼弼)을 찾아가 뵈었고, 이어서 성혼(成渾)·이이(李珥)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다. 토정비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토정선생(土亭先生)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장인 이산보의 숙부인데 그를 통해서 송익필 등을 소개받았다.

1581년(19세, 선조 14)에 집에서 책을 지고 나와 도봉서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2년 만인 1583년(21세, 선조 16)에 별시 문과에서 병과 12위에 올라 승문원에 선발되었다. 이후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삼년상을 치렀다.

1587년(25세, 선조 20)에 감찰·형조 좌랑이 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김포 현감(金浦縣監)을 자청하였다. 4년 뒤, 1591년에는 할머니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렀다.

1593년(31세, 선조 26)에 황주 판관으로 임명되어 왜군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중화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그 이듬해 홍문관 수찬과 장령을 거쳐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4년(32세, 선조 27년)에 상복을 벗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복귀하였다. 당시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조정에서 왜적에게 화친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는 드러내놓고 화친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명(明)나라 장수의 말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니, 정엽은 “화친을 하고 싶으면 화친을 하고, 불가하면 불가한 점을 개진해야 합니다.”라고 발언하여 “선비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조(宣祖)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1597년(35세, 선조 30),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요청하였다. 나중에 귀국 후 성균관 사성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당시 수원은 난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는 현지의 군민을 잘 다스려 오히려 서천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98년(36세, 선조 31)에 응교, 집의로 시강원 필선을 겸하였다. 이후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참의로 임명되었다. 형조 참의로 있을 때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귀국 후 나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지·대사간·예조참의를 역임했다.

1602년(40세, 선조 35)에 동인에 속한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였다. 성혼의 문인이었던 정엽도 함경북도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임지에서 그는 학교 교육을 크게 일으켰다.

1603년(41세, 선조 36)에 오랑캐의 기병 수만 명이 갑자기 함경북도의 종성 아래에 접근했다. 정엽은 성루로 올라가 성 안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군복을 입히고, 깃발을 많이 세워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자 적병이 7일 동안 성을 포위하다가 떠났다. 당시 한 사람이 잡혀갔는데, 그것을 이유로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기자헌(奇自獻)이 트집을 잡아 죄를 꾸며서 동래(東萊)로 귀양을 보냈다. 하지만 2년 뒤에 복귀하였다.

1606년(44세, 선조 39)에 외직인 성주(星州)와 홍주(洪州)의 목사를 차례로 맡았다. 2년 뒤에는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대사성에 임명되고, 충청도 관찰사·예조참의·승지·대사간·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12년(50세, 광해군 4), 도승지로 있을 때 왕의 경연에 자주 나갔다. 광해군이 경연을 소홀히 하는 것을 보고 직언을 하였다. 광해군은 간언을 듣고 그 다음날 경연에 나왔으나 정엽은 호조참의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곧 참판에 올랐다. 이후 대북이 집권하였을 때도 그는 관직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처당숙 이산해 덕분이었다.

1613년(51세, 광해군 5)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이해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정엽이 사실을 밝히고자 했으나, 어머니가 만류하여 상소를 포기하고 도승지를 사직하였다.

1617년(55세, 광해군 9)에 조정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해야 한다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반대하고, 자원해서 외직을 요청하여 양양부사로 나갔다.

1618년(56세, 광해군 10), 백관들이 대궐에 나가 모후 폐위를 청하였다. 이때 같이 따라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법망(法網)에 걸렸다. 정엽은 전 해에 이미 외직 벼슬로 옮겨 숨어살다가 화를 면했다. 하지만 그도 결국 파직되어 여강(驪江, 여주)으로 돌아갔다. 그 때 광해군이 엄하게 하교를 내려 “정 아무개는 일체 출사하지 않으니 그 의도를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책망하자, 정엽은 상소를 하여 처벌을 기다리면서 “신이 일찍이 임금의 측근에 있을 때에 정성을 쌓고 뜻을 다하여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어버이는 늙었는데, 형제가 없어서 어버이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사양하여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이후 서인들과 교류면서 인조반정을 지지하게 되었다.

1623년(61세, 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가 강화도로 유배되는 광해군을 위해, “폐주(廢主)가 비록 스스로 하늘과 관계를 끊기는 하였으나 신하들이 일찍이 섬기었으니 마땅히 곡하며 전송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였으나, 대신의 천거로 인조는 그를 대사성 임명하였다. 그는 대사성 외에도 동지경연(同知經筵), 원자사부(元子師傅) 등을 겸하는 중책을 맡았으며,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는 공적을 남겼다.
인조는 이러한 정엽을 존중하여 그의 의견에 잘 따랐다.인조반정 이후 그는 친명 정책을 표방하고 후금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계책을 제시하였는데 인조는 그 의견을 따랐다. 또,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공주로 파천하자는 제안을 하여 인조는 공주로 피신을 하였다. 그는 공주에 있을 때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고, 환도 후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또 우참찬이 되었다. 대사헌을 다섯 번이나 겸하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직책을 겸하는 등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하루는 정엽이 인조임금에게 말하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여염의 여자들이 궁중에 있고 폐위된 광해군 재임 때의 궁녀들이 다시 궁중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모두 다 축출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인조 임금은 그 의견을 가상히 받아들였다. 또 유배된 광해군이 병환에 고생하고 있을 때 정엽이, 중종(中宗)이 연산군(燕山君)을 대우한 사례를 인용하여 “신이 광해군을 10여 년간 섬겼으니 견마(犬馬)의 마음속에 어찌 옛정이 없겠습니까?”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인조 임금이 감동하여 담당 관리로 하여금 의복과 생활용품을 넉넉히 보내라고 명하였다고 한다.(⌈묘비명⌋)

1625년(63세, 인조 3)에 격무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부음을 들은 인조 임금은 매우 슬퍼하며 그에게 의정부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아울러 조회를 중지하고 채소 반찬을 들었으며 특별한 애도를 표하였다고 한다. 정엽의 저서로는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와 ⌈수몽집(守夢集)⌋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백진남(白振南, 1564-1618)


 

백진남(白振南, 1564-1618)

 

옥산서실
옥산서실

 

진남(白振南, 1564-1618)은 조선시대의 시인이자 서예가로, 그의 부친 백광훈과 함께 2대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백진남의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율곡 이이, 충무공 이순신, 그리고 명나라 사신들이 감탄하였다.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혼탁하게 변하자 스스로 초야에 묻혀 몸을 굽히고 살았다.

1564년(1세, 명종 19)에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으로 자는 선명(善鳴), 호는 송호(松湖)이다. 부친은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이다. 백광훈은 유명한 문장가로 조선의 8대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부친 백광훈의 유물이 해남의 옥산서실 내 옥봉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아들 백진남의 유물과 합하여 9종 113점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지정된 유물 중에는 백광훈 교첩, 옥봉집, 영여(靈輿) 등이 있다. 옥봉집은 아들 백진남이 부친의 시문을 모아 간행한 것이며, 영여는 나무로 만들어진 가마인데, 선조임금이 하사한 것으로 백광훈이 사망한 뒤 장례를 치르고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돌아올 때 사용한 것이다.

1578년(15세, 선조 11) 때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시험(課試)을 보았는데, 시부(詩賦)가 매우 뛰어나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당시 율곡 이이(李珥)도 백진남의 문장을 보고 칭찬하였으며 귀향할 때까지 특히 아꼈다. 그 뒤로 율곡은 매번 백진남을 만날 때 마다 언제 서울로 다시 올라오는지 물었다고 한다.(백진남의 <묘비명> 참조)
이 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을 가는데 남원 땅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남원 광한루에서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일 날 밝고 나면 다시 전주 땅을 향한 길일 터인데
두 마리 말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할 때 여러분들의 시를 홀로 읊겠지
(明朝又向全城路, 匹馬超超獨詠詩)

이 시를 읽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백진남이) 숨은 것을 찾는 재주가 있고 외모마저도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였다.(백진남의 묘비명)

1582년(19세, 선조 15)에 부친이 서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590년(27세, 선조 23)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597년(34세, 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통제사(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의 진중(陣中)으로 피난해 이순신을 도왔다. 이순신은 백진남을 중요하게 대우를 하였다.
당시 명나라 장군 계금(季金)과 승덕(承德) 등이 그의 시를 읽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2012년에 해군사관학교박물관 기획연구실장 이상훈 교수가 공개한 이순신 친필의 편지에는 명나라 장수가 백진남의 활약을 칭찬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저는 근래 더위 중에도 명나라 장수들이 머무는 곳의 일로 분주하고 아울러 배탈이 나서 몸이 편치 않아 고민스럽습니다. 어제 유격(遊擊, 명나라의 계금季金 장군을 말함)이 말하기를 “백진사(백진남)가 와서 정성스레 대해준 것에 감사한다. 이에 조선 유림의 믿음이 두텁고 정중한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에 아름답고 명예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감탄하여 마지못하겠으며 국가로서도 역시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조선의 유학자로서 정성스럽게 명나라 장수를 대한 백진남의 품성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사신들이 감탄한 백진남의 글씨

1606년(43세, 선조 39)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 민간인의 신분으로 사신을 영접했다. 필법(筆法)으로 이름이 높았던 주지번이 백진남의 필적을 보고 감탄하였다. 주지번과 서로 문장을 교환하며 교류가 두터웠다. 주지번은 백진남에게 필적이 기막히게 뛰어나다고 자주 말하였으며 백진남의 필법을 모방하여 크게 ‘玉峯書室(옥봉서실)’, ‘玉洞煙霞(옥동연하)’ 8글자를 써서 주었다. 또 친히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써주었다. 백진남의 문장은 ‘무엇엔가 바늘을 꽂은 듯하고, 글씨는 산새가 빠르게 나는듯 하였다.’고 한다.(묘지명)
정호(鄭澔, 1648-1736)가 지은 백진남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내 고조 할아버지의 이름은 진남(振南, 백진남)이고, 자(字)는 선명(善鳴), 호(號)는 송호(松湖)로, 대단하신 옥봉(玉峯) 공(公, 백광훈)의 아들입니다. 시(詩)로 이름 높았고 글씨가 아름다웠습니다. 세대를 뛰어넘는 그런 집인데, 그 두 세대가 관직도 없이 중국 사신들을 영접하였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영화로운 대단한 일이었지요. 그분들 이름이 그 당시에 그 정도로 무게가 있었습니다.

이후 친구들과 서울의 백악산 아래에 같이 살기로 하였는데, 세상 상황이 크게 변하여 출세를 단념하였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마땅치 않아서, 그는 옥봉(玉峰)의 옛 집을 수리하여 사용하고, 또 송호(松湖)에 별장(別莊)을 지어 그곳에 거처하였다.  송호는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 위치한 곳으로 소나무가 우거지고 멋진 호수가 있다. 그는 이곳을 왕래하며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면서 생을 마감하고자 하였다.(⌈묘지명⌋)

백진남이 가깝게 지낸 친구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현헌(玄軒) 신흠(申欽, 1566-1628)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참화를 당해 외진 땅으로 유배되었다. 백진남은 세상의 재난을 맛보기 전에 스스로 몸을 굽히며 살았다.

1618년(55세, 광해군 10) 12월 초5일(양력 1619년 1월 20일)에 사망하였다. 장지는 해남(海南) 장성산(長星山)이었다. 부인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며, 슬하에 2남과 여러 딸을 두었다. 저서로 송호시고(松湖詩稿) 1권이 있다. 1832년에 문집 ⌈송호집(松湖集)⌋이 간행되었다.

박여룡(朴汝龍, 1541-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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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애집(松崖集)
송애집
여룡(朴汝龍, 1541-1611)은 조선시대 선조 재임 시기의 문신으로 1573년에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실의 행차를 호위하는 등의 공을 세워,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율곡 이이의 제자로 율곡집(나중에 율곡전서에 통합됨)의 간행에 기여하였다.

1541년(1세, 중종 36)에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면천(沔川,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 자는 순경(舜卿), 호는 송애(松厓),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할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 문희(文喜)이고,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수의(守義)이며, 어머니는 증 호조참의 이윤화(李允華)의 딸이다. 박여룡의 집안은 5대조인 박담(湛) 때부터 해주 입암촌(立巖村)에서 살았다.

1557년(17세, 명종 12)에 연이어 부모님을 여의었다. 그는 갑자기 스스로 발분하여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어찌 사람일 수 있겠는가?”

하고 수 십리 떨어진 곳으로 다니면서 글을 배웠다.

1570년(30세, 선조 3)에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율곡은 이해에 교리직(校理職)을 그만두고 해주 야두촌(野頭村)에 내려와 있었다. 당시 율곡은 35세였는데 30살이나 된 박여룡이 공부에 열심인 것을 보고 성리학 서적을 주고 격려하였다. 이 격려에 힘입어 그는 3년 뒤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율곡의 밑에서 공부를 하던 당시 박여룡은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 묻고, 물은 것은 또 반드시 필기를 하였다. 율곡 선생과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 문답은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꼬박꼬박 기록을 하였는데 그가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松崖集卷之四․墓碣銘⌋)
율곡과 제자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여러 벗들이 각기 술병을 가지고 정사(精舍)에 모여 선생을 모시고 꽃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술이 반쯤 취하였을 때에 선생이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조금만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반드시 공부한 것이 많은지 적은지 물었다. 제군들은 요사이 무슨 공부를 하였는가?” 박여룡(朴汝龍)이 대답했다.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점검해 보면, 다만 한자만큼 퇴보한 것만은 알겠는데 한치만큼도 진보된 것은 모르겠습니다.” 율곡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조신(操身)하는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그 한 자만큼 퇴보한 것을 아는 것이다. 만약 전연 방심(放心)하고 지나갔다면, 어찌 공부가 진보하였는지 후퇴하였는지를 알겠느냐?”

(⌈율곡전서⌋)

1573년(33세, 선조 6)에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1577년(37세, 선조 10)에 관직을 사퇴하고 해주 석담으로 돌아왔다. 그 전해에 율곡 선생은 우부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전라감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모두 사직하고 해주 석담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있었다. 박여룡은 송애(松崖) 계곡 위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였다. 이 때문에 호를 송애(松崖)라 한 것이다. 그곳은 율곡 선생이 거처하던 청계당(淸溪堂)과 작은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매일 선생을 따라 배웠다.

1579년(39세, 선조 10), 율곡 선생과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석담어록(石潭語錄)을 완성하였다.
1581년(41세, 선조 14)에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

1592년(52세, 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박여룡은 국왕이 의주로 피신하는 소식을 듣고, 해주에서 의병 500명을 모아 선조의 행차를 호위하였는데, 이 덕분에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직장(直長)으로 특진되었다. 이후에 정원과 밭의 채소 등을 관리하는 사포서(司圃署)의 사포(司圃)에 임명되었다.

1594년(54세, 선조 27)에 해서(海西) 생곡사(生穀使)로 파견된 뒤, 청양현감에 올랐다가 이듬 해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597년(57세, 선조 30), 이 해 8월에 일본군이 다시 침략해왔다.(정유재란) 전쟁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때도 공을 세웠다. 당시 조정에서는 박여룡의 공적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선조실록 5월 15일 기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조 임금이 이르기를, “민간의 곡식도 점차 고갈되어 가는데, 왜 지난날 거두어들이지 않았는가?”하였다. 유성룡(柳成龍, 1542-1572)이 이렇게 대답했다. “박여룡(朴汝龍)이 만여 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그 포상으로 벼슬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조는 “그것이 분명하다면 상을 내릴 만하다.”고 하였다.

1598년(58세, 선조 31)에 임진왜란 이후의 논공행상(論功行賞, 공적을 논하여 상을 수여함)에서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다시 벼슬에 나가 호조좌랑, 평시서영(平市署令) 등을 거쳤다.

1601년(61세, 선조 34)에 공조정랑으로 사직하였다.
1605년(65세, 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임명되었다.

1610년(70세, 광해군 2)에 고향에서 동문계(同門契)를 만들어 스승 율곡 이이의 문집 간행을 준비하였다. 그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율곡집⌋의 간행은 그 이듬해에 이루어졌다. 당시 그가 율곡의 친구인 성혼(成渾)의 도움을 받아 편집, 간행한 율곡집은 시집 1권과 문집 9권으로 된 것이다. 시집 부분은 박지화(朴枝華) 등이 편집하고, 그는 문집 부분을 편집하였다. 이 책은 1611년에 해주에서 목판으로 발간되었다. 현재의 ⌈율곡전서⌋는 1742년에 시집, 문집, 속집, 외집, 별집 등을 합하고, ⌈성학집요⌋와⌈격몽요결⌋ 등을 포함시켜 1749년에 간행된 것이다.

1611년(71세, 광해군 3)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스승 율곡과 제자들 사이의 문답을 기록한 석담어록(石潭語錄)이 있는데, 그 외 저작물은 대부분 전쟁으로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1726년에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가까이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 나중에 이 사당이 방현서원(傍賢書院)으로 확대되었다. 1777년에 유고집(송애집(松崖集))이 간행되었다.
⌈송애집⌋은 2권, 부록 2권 합 2책의 활자본(活字本)이다. 1776년에 후손 박서동(朴瑞東)이 수집하여 편찬하였으며, 1805년에 박상준(朴相駿) 등이 증보하여 간행하였다.

박광옥(朴光玉,1526-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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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옥 초상
박광옥 초상

 

광옥(朴光玉, 1526~1593)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이다. 본관은 음성(陰城)으로 운봉현감, 영광군수, 영암군수, 밀양부사,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이조전랑(吏曹正郞), 승의부주부(承議部主簿), 성균관직강 등을 역임했다. 그의 성격은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며 마음은 항상 즐겁고 평안하였다고 한다. 학문으로는 특히 역학에 깊이가 있었다.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懷齋遺集)으로 전해지고 있다.

1526년(1세, 중종 21)에 박광옥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에 속한 광산군의 서창면(西倉面) 매월동(梅月洞) 회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박광옥의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司藝) 박곤(朴鯤)이다.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고조 할아버지(4대조) 박계양(朴繼陽)이 충청북도 음성(陰城)에서 전라도 광주(광산군)로 옮겨오면서 그곳에서 대대로 거주하였다. 박계양(朴繼陽)은 태학의 생원이었다.
음성 박씨는 대표적인 인물로 회재 박광옥을 꼽는다. 음성 박씨의 시조는 박서(朴犀)로 고려시대의 유명한 장군이다. 박서는 1231년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었는데, 그때 몽고의 장수 살리타이가 쳐들어왔다. 박서는 한 달간의 격전 끝에 몽고군을 물리쳤으나, 설리타이는 길을 우회하여 개성을 함락시키고 고려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몽고군은 철수하면서 다시 박서의 군대에 의해서 대파된 바 있다. 이러한 공으로 그는 문화시랑 평장사에 이르고 음성백에 봉해져 음성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러한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박광옥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분연히 궐기하여 집안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이었다.

1535년(10세, 중종 30)에 유헌(遊軒) 정황(丁熿)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정황(1512-1560)은 전북 장수군 출신으로 인종(仁宗)을 문소전(文昭殿)에서 제사하라고 청하다가 정미사화 때 거제도로 유배되어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성리학자로 조광조(趙光祖, 1482-1520)의 문인이며, 1536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지평(持平) 등을 거쳐 병조와 형조의 정랑이 되었다. 정황이 25살, 과거에 급제하기 직전 해에 박광옥은 그에게서 유학과 한문을 배운 것이다.

1546년(명종 1, 21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나주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짓고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부르고 제자들을 키우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560년(명종 15, 35세)에 광주목사 유경심(柳景深)을 도와 향교를 다시 짓고 학규(學規)를 제정하였다. 유경심은 1568년(선조 1)에 호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1571년에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565년(명종 20, 40세)에는 권신 윤원형의 죄상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1568년(선조 1, 43세)에 주위의 천거를 받아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다. 내시교관은 내시를 가르치는 벼슬이다. 이후 종부시(宗簿寺)의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종부시는 왕실 족보의 편찬과 종실(宗室)의 비위를 규찰(糾察)하는 곳이다. 이해에 광주에서 개산 방죽(지금의 전평제)을 막고 그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수월정(水月亭)을 지었다. 이곳에서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박순(朴淳, 1523~1589),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이이(李珥, 1537~1584)등과 교류하였다.

1574년(선조 7, 49세)에 운봉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78년(선조 11, 53세)에 전라도 도사, 충청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도사는 관찰사의 보좌관으로 관찰사 유고시에는 관찰사 임무를 대행할 정도로 지방에서는 중요한 위치의 관료였다. 관찰사와 소관 영역을 나누어 지역을 순방하고 규찰하는 권한도 가졌다.

1579년(선조 12, 54세)에는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임명되었다.

1580년(선조 13, 55세)에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581년(선조 14, 56세) 3월 7일(음력)에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 1535~1623)과 함께, 이조좌랑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하려고 하였으나 동료들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사의를 표했다.(⌈선조실록⌋14년) 선조는 이에 대해 사직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율곡은 이경중에 대해서

“본래 학식이 없었고 또 성질이 고집스러워서 착한 것 따르기를 잘 하지 못하였는데, 전랑(銓郞)으로 매우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자못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습성이 있었다.”

(⌈경연일기⌋)라고 하였다. 이경중 탄핵에 대해서는 율곡도 적극 지지하였다.
박광옥은 정인홍과 함께 대사헌 이식(李栻)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식에 대해서 율곡은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자제하고 단속함이 없어 남들이 천하게 여겼다.’(경연일기)라고 하였는데, 율곡 역시 박광옥과 정인홍의 탄핵 의견을 지지하였다. 당시 시중에는 율곡이 이러한 이식 탄핵운동을 율곡이 주동하였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경연일기⌋)

1589년(선조 22, 64세)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몄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정여립과 그와 연루된 많은 사람들, 특히 동인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 혹은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불린다. 박광옥은 이전(1581)에 정여립의 벼슬길 진출을 막은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한 바 있었는데 그 죄로 관직을 박탈당했다.

1592년(선조 25, 6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고향에 돌아와 있었는데,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무능을 탄핵하고, 새로 감사에 부임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을 도왔다.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적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의병을 보내고 수백석의 군량미를 보내기도 하였다.
⌈선조실록⌋(1604년 5월 20일자 광주의 진사進士 이한용李翰龍의 상소)을 보면

“박광옥은 지난 임진년에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서로 서찰(書札)을 통해 가며 군대를 돕고 군량을 저축하며, 무기(武器)를 수선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극진히 호소하여 군사 수천 명을 모집해 권율(權慄)에게 보냈다.”

고 하였다.
7월 19일자 ⌈선조실록⌋ 기록에 이조(吏曹)에서 “과거에 급제한 박광옥(朴光玉)이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모아 현지에 머물고 있으며, 또 앞으로 향병(鄕兵)을 규합하려 한다고 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하니 선조가 “관직을 제수하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박광옥은 그날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되었다.
의병활동의 공로로 8월에 나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12월에 사임하였다. 선조(宣祖)는 그의 활약을 듣고 호남(湖南)의 충의신(忠義臣)이라고 칭찬하였다.

1593년(선조 26, 68세)에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1602년(선조 35년)에 나주 벽진촌(碧津村)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는데, 의열사는 나중에 벽진서원으로 바뀌었다.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와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광주에는 그를 기려 남구 칠석동에서 백운동까지의 길을 회재로라 명명하였다. 영광과 밀양에 그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저서인 ⌈회재유집⌋ 목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유집은 임진왜란 이전과 전쟁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유집⌋은 1권은 시 299편, 2권은 잡서 2편, 서 2편 등 6편, 그리고 부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록의 상권은 연보, 하권은 행장이 수록되어 있다.

 

김필태(金必泰,1728-1792)


김필태(金必泰,1728-1792)                                  PDF Download

 

1728(영조 4)~1792(정조 16). 조선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관은 광산(光山), 자는 대래(大來), 호는 둔암(屯菴) 또는 문과당(聞過堂)이다. 아버지는 김천덕(金天德)이고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오산(鰲山) 용강(龍江)에서 태어났으며 김창협(金昌協) 형제로부터 크게 인정받았던 김극광(金克光)의 증손이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당시 학계가 일반적으로 성명이학의 사변론에 치우쳐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반궁실천(反窮實踐)에 힘썼다. 따라서 그는 심성이기(心性理氣)가 학자들의 급선무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깊이 탐구하는 일도 없었다. 이에 대하여 타인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으면, 그는 곧바로 아직은 너무 이르다는 말로써 대답을 대신하곤 하였는데, 이는 그가 세속의 학문적 폐단을 징계하고자 함이었다.

일찍이 그가 가식(家式)을 저술하였을 때에 스승인 윤봉구는 그것을 ⌈예기(禮記)⌋의 「내칙(內則)」과 표리가 될 만하고 칭찬하였다. 김원행이 처음으로 김필태를 만났을 때 기뻐하며 말하기를, ‘원광공(遠觀公)에게 이렇게 훌륭한 손자가 있었구나’라고 하고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에 들며 부지런히 힘써서 너를 낳아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말라(夙興夜寐 毋忝爾所生)’는 아홉 글자를 써주었다고 한다.

스물이 안되어 부친을 잃은 힘든 상황이었지만, 송시열과 이이의 학문을 거울삼고 김원행․김창협을 스승으로 삼아 ⌈대학(大學)⌋에 전념하였으며, 형이상학적 담론보다는 형이하적인 실천의 문제에 전념하였다. 1766(丙戌)년 이래 3년 동안 천등산(天登山) 기슭에 몇 칸 초옥을 마련하고 송시열의 화양(華陽)과 이이의 석담(石潭)에 비할 만한 서재를 마련하여 자신의 졸박한 품성을 길러나가기도 하였다. 평소 효심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상을 맞아 정성을 다하였다.

1754년 윤봉구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 뒤에, 고산현(高山縣) 옥계(玉溪)로 옮겨가 은거하던 중 1780년(정조 4)에 도백(道伯)이 조정에 천거하여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1782년에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승진하였으나 홀로된 모친에 대한 걱정이 병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1783년에는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으로, 이듬해인 1784년에는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다. 또 그 이듬해인 1785년에는 정월에 義禁府都事(義禁府都事)에, 3월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6월에 영릉령(永陵令)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9월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더 이상 세상에 대한 마음을 끊고 생을 마칠 때까지 은거하였다.

사후에 효암서원(孝岩書院)에 추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둔암집(屯菴集)이 있다.

둔암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필태(金必泰)의 시문집이다. 모두 6권 3책으로 활자본이다. 1811년(순조 11) 그의 문인인 황언진(黃彦鎭)․김준택(金濬澤) 등의 편집을 거쳐서 손자인 김광옥(金光鈺)에 의해 간행되었다. 김필태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793년에 장자 김시중(金時中)이 유교를 모아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나, 절반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손자인 김광옥이 이 일을 계속하였고 그의 문인들의 도움을 받아 1811년에 마침내 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권두에 심문영(沈文永)의 서문과 권말에 황언진․김준택(金濬澤) 등의 발문이 실려 있다. 이 책의 서문은 심문영이 김필태와 더불어 스승인 김원행을 사사한 인연 때문에 손자인 김광옥의 부탁으로 쓰게 된 것이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운문으로 부 2편, 시 79수가 있다. 권2·3에는 산문으로 서(書) 62편, 권4에는 잡저 13편, 권5에는 서(序) 6편, 기 7편, 제(題) 1편, 발 4편, 변 2편, 명 9편, 설 1편, 권6에는 제문 19편, 묘지 9편, 행장 5편, 부록으로 송환기(宋煥箕)의 찬(撰)으로 묘갈명, 김광옥의 찬으로 가장(家狀) 등이 실려 있다. 권2에 수록된 김원행(金元行)과 윤봉구(尹鳳九)에게 올린 편지는 대부분 스승에게 통례(通禮)․관혼례(冠昏禮)․상제례(喪祭禮) 등 예에 대한 내용과 의리(義理)․이기(理氣) 등에 대한 내용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문사가 평이하고 담박하며 꾸밈이 없어 도학적인 지취가 풍긴다. 시는 주로 서정시가 많고 소옹(邵雍)의 운을 차운한 것이 군데군데 보인다. 편지 글 가운데 스승인 윤봉구와 김원행에게 올린 글에서는 그가 젊은 시절 성인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는 것에 만족하고 지식에 있어서는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한번 깨달은 이후에는 중용과 대학에 담겨있는 의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절감한다고 하는 등 학문관의 변모과정을 살필 수 있다. 이들 간에 주고 받은 서한은 주로 예설과 이기설에 관한 문답인데, 주로 가례문목(家禮問目)·관혼례(冠婚禮)·상제례(喪祭禮)·이기설(理氣說)·예의문목(禮疑問目)·의리설(義理說) 등에 관한 내용이다.

잡저의 「거가범식(居家凡式)」은 제가(齊家)의 요체를 예법으로 파악하고 고금의 여러 서적들을 상고한 뒤에 자신의 견해를 참작하여 정리한 가정생활의 윤리법식으로서 인륜을 바로잡고 은혜와 의리를 도답게 하려는 의도에서 지은 글이다. 이는 실제에 부합되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그의 초기 학문관이 반영된 저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 「일가지정(一家之政)」은 전적으로 가장에게 매어 있다는 내용이다. 그의 대표적 잡저라고 할 수 있는 그 밖에 눈에 띄는 작품으로 「궁거수약법(窮居守約法)」은 사람은 누구나 궁핍한 생활을 싫어하지만 궁핍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이상, 궁핍을 벗어나기에 급급하여 본성을 잃기 보다는 천명을 깨닫고 도를 즐기는 태도가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는 인식 하에, 스스로 산거(山居)를 실천하면서 수약(守約)의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정리하여 주위 사람들과 자신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 글이다. 우리나라 양반의 폐습이 더욱 심해 의식에 치중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아 모두 자신의 본분을 잃는다는 내용이다.

「위인지방(爲人之方)」은 사람의 처신에 규모가 있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그 방법으로 효우부모(孝于父母)로부터 입신(立身)․망신(亡身)에까지 40여 항목을 열거하였다. 「유초당학자(諭草堂學者)」는 학자로서 지켜야 할 상목(常目)을 입지(立志)․지심(持心)․율신(律身)․역학(力學)으로부터 접인(接人)․발언(發言) 등에 이르기까지 12개 조항을 지목하여 제자들이 지킬 덕목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위학지요(爲學之要)」는 학문의 도리와 방법을 7개 조목으로 정리한 글로서, 자신의 성품의 실질이 성인과 차이가 나지 않으며 성인이 남긴 말이 실제의 생활 속에서 우러나온 것에 대한 깨달음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권한 글이다. 「군자소인변(君子小人辨)」은 군자와 소인에 대한 구분을 ‘군자는 천명을 두려워하고 소인은 천명을 소홀히 대한다’는 것을 포함하여 모두 32개 조목을 열거하여 변론한 글이다. 전체적으로 그의 학문관은 성리학적 담론이 주류를 이루는 분위기에 어느 정도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하나의 주류로 성장하기에는 역량 면에서 미흡함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잡설(雜說)」은 성리학의 대강을 말하고, 말미에서 이를 근거로 천주교가 유학과 어긋남을 비난하고 있는 내용이다. 권5의 기(記), 변(辨), 명(銘) 등도 대부분 수양과 의리에 대한 내용이 많다. 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奎章閣圖書韓國本綜合目錄)에는 김준택의 제(題)의 작성 연도를 ‘수정신미(崇禎辛未)’라는 말에 근거해 1631년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김준택은 제에서 자신이 김필태의 문인이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숭정후4신미(崇禎後四辛未)’로 읽고 1811년 표기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김태원(金泰元,1863-1932)


 

김태원(金泰元,1863-1932)                                  PDF Download

 

1863(철종 14)∼1932.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다.

관은 해풍(海豊). 자는 춘백(春伯). 호는 집의당(集義堂)으로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 성균관 진사를 지낸 김집(金鏶)과 어머니 재령 이씨(載寧李氏) 사이에서 1863년 9월 15일에 서울 주자동(朱子洞) 사저에서 태어났다. 1932년 3월 5일 정오에 원주(原州: 지금의 영월)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70세였다. 원주 공순원(公順院) 한남산(漢南山) 유좌(酉坐 :동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1863년(고종 원년)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무관직인 별군직과 선전관을 지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자 김하락(金河洛)․구연영(具然英)․조성학(趙性學)․신용희(申龍熙) 등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와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조직인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단발령이 공포되자, 이미 이천을 비롯한 경기도 지역에 의병봉기 기운이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광주․시흥․안산․죽산․음죽․지평․포천 등 여러 고을에서 의병이 모여들어 ‘이천수창의소’가 성립되었다. 1896년 1월 이천수창의소 선봉장으로 안성 일대의 의병을 모아 항일무장투쟁에 나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인 이천의 백현(魄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백현 전투’란 1896년 1월 경기도 이천의 백현에서 의병과 일본 수비대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백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천의 의병은 1896년 2월 13일 이천 서쪽의 이현(梨峴) 전투에서도 일본군과 돌격전을 벌였으나 패배로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에 흩어진 군사들이 2월 25일부터 다시 이현에 집결하여 부대를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광주 의병과 여주 의병이 이천 의병에 합세하였는데, 각 지역의 의병이 통합되어 병력이 2,000여명에 달하게 되자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이에 남한선성으로 본진이 옮긴 뒤에는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의병 진영의 내분으로 서울 진공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의병 진영의 활동이 대부분 각 지역에서 친일 개화파를 응징하여 일제 침략 세력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임에 비해, 이들은 서울로 직접 진공함으로써 국왕을 보호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왕정신을 보다 구체적으로 행동화했다고 하겠다.

남한산성 전투에서 패한 뒤에는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의진을 거쳐 예천의 서상렬(徐相烈) 부대에 합세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관군의 토벌작전에 밀리게 되어 낭천(狼川: 현재의 화천) 전투에서 서상렬을 잃고, 유인석을 따라 만주의 회인현(懷仁縣)까지 이동하였다.

1905년에는 원용팔(元容八) 의진에 가담하였으며, 1906년에는 최익현(崔益鉉) 의진의 소토장(召討將)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에는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이강년이 체포된 뒤 원주로 낙향하여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을 후학에게 펼치다가 생애를 마쳤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는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가 있다.

⌈집의당유고⌋ 행장의 내용에 따르면, 타고난 자질이 뜻과 기개가 크게 뛰어났고 위풍이 당당했으며, 목소리는 크고 맑았다. 관례를 올리고 나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별군직(別軍職)으로 첫 벼슬에 올랐으며 또한 승급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는데, 동료들이 기개와 절조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1898년 1월 요동(遼東)으로 들어가 유인석에게 대학(大學)과 맹자(孟子)를 배웠으며, 가을에 돌아와 지평(砥平) 금리(錦里)에서 이근원(李根元)을 스승으로 섬겼다. 이에 스승은 일찍이 김태원이 의지가 굳세고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한다고 칭찬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비록 쌀이 떨어진 때라 할지라도 편히 처하였으며, 선대의 묘소가 4백, 5백 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한 평생 봄가을로 빠지지 않고 반드시 가서 성묘하였다. 더러 여관에서 선대의 기일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옷과 갓을 차려입고 앉아 밤을 새웠다. 사문(師門)의 일로 군현(郡縣)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조금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나라 안에 덕망과 학문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원근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찾아가서 만났다. 젊어서는 일찍이 술을 좋아하여 몇 말의 술을 사양하지 않았으나 유인석에게 경계의 말씀을 듣고부터는 곧바로 술을 끊고 늙기까지 조금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의관을 매우 거룩하게 하여 아무리 심하게 병이 들어도 일찍이 두건과 버선, 행전을 벗은 적이 없었다.

서사(書社)에 유인석, 이근원 두 선생의 화상을 봉안하고 매달 초하루에 심의(深衣)와 대대(大帶) 차림으로 봉심(奉審)하고 참배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학문에 종사하지 않아 도리를 모른다면 곧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덕을 좋아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도량이 천성에서 나왔으므로,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높일만한 학업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무릎을 꿇었다. 겉을 꾸미는 일이 없었고 좋지 못한 풍속을 바로잡는 기풍은 있었는데, 고금에서 찾아봐도 그와 짝할만한 자가 아마 드물 것이다.”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는 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의병장 김태원의 문집이다. 1책의 필사본이다. 남아 있던 유문을 아들인 김성모(金性模)가 중심이 되어 편집하였으며, 성책된 문집은 한말의병자료집(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에 영인되었다. 내용은 서문, 시(詩), 서(書), 잡저(雜著), 제문(祭文), 통문(通文),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아들인 김성모의 청으로 1951년 유지혁(柳芝赫)이 썼다. 서문에는

“스승인 유인석의 문하에 의로운 선비가 많이 있었는데, 집의당(集義堂) 김태원(金泰元)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을미년에 국변(國變)을 당하게 되자 앞장서서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유인석을 따랐다. 대운(大運)이 전도(顚倒)되는 바람에 패하긴 하였으나, 의로운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어 전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삭발(削髮)의 화를 면하게 한 그 공을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잡저에 수록된 「을병사략(乙丙事略)」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이천에서 창의하게 된 경위부터 제천 의병과의 결합과 패퇴, 1896년 강원도 낭천(狼川)에서 함께한 서상열의 전사와 낙오, 요동에 스승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갔다가 돌아오기까지의 과정 등을 기록하였다. 유인석․이강년(李康秊)․이근원에 대한 제문(祭文)과 유중교(柳重敎), 이근원의 묘의(墓儀)에 대한 통문(通文)이 있다. 부록에는 유사(遺事), 이규현(李奎顯)이 쓴 행장, 유제함(柳濟咸)이 쓴 묘표가 수록되어 있다. 한말 의병장 김태원의 학문과 사상 및 이천․여주․제천 의병의 활동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김태원이 경기와 충청 의병에 모두 참가하였으므로 문집에 수록된 서간문과 비지문을 통해 경기 의병과 제천 의병과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