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녹휴(金祿休,1827-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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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순조 27)~1899.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관은 울산(蔚山), 자는 치경(穉敬), 호는 신호(莘湖)이다. 1827년(순조 27)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月坪里)에서 태어났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다. 조부는 김홍조(金弘祖)이고, 아버지는 김방묵(金邦默)이며,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정권(李貞權)의 딸이다. 연일 정씨(延日鄭氏) 정재영(鄭在瑩)의 딸과 결혼하였다.

1835년(헌종 1) 을미(乙未)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26위로 합격하였다. 어려서는 둘째 형인 김경휴(金景休)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세 되던 해부터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로는 이황(李滉)․이이(李珥)․이진상(李震相)․임성주(任聖周)․서경덕(徐敬德)․기정진을 꼽는다. 그때 기정진은 하사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곳과 가까이 가기 위해 황룡강 건너에 있는 황룡면 신호리(莘湖里)로 이주하였다. 그의 문집은 무슨 연유인지 1981년에야 간행되었으며, 1책의 분량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성리학에 대한 저술도 찾아보기 힘들고, 그의 누정활동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산천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명승지를 두루 여행하였으며, 몇 곳에는 정사(亭榭)를 지어두고 동지들과 함께 즐겼다고 행장에 나온다. 사실 그의 문집에는 상외정과 문향정 관련 시가 보인다. 상외정은 1882년에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상포(象浦)에 세웠고, 문향정은 1892년 무렵에 신호리와 가까운 곳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누정들은 사라지고 없다. 상외정에 대한 기문은 주인 김녹휴가 지은 것이 남아 있어서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용이하다. 그가 지은 기문에 의하면, 김녹휴가 변산에 거처한 것은 1878년부터인 것으로 나오는데, 과거에 대한 마음을 접고 난 뒤의 일로 추정된다. 상외정의 기둥에 달았을 법한 주련시가 그의 문집에 남아있는데 6언시 16구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가 지은 상외정의 원운시를 살펴보자.

만년의 정자를 바닷가에 지어놓으니(晩暮一亭隔海灣)

백년의 천석이 모두 서로 관여하네(百年泉石渾相關)

세속에선 도리어 물외의 경치 거둬들이고(象裏還收象外景)

바다 끝은 해중산을 함께 얻었네(海窮兼得海中山)

이것은 김녹휴가 지은 시로 바다가 굽어보이는 해안에 정자를 지어 놓으니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선경을 이루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먼 바다에 배들이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모습은 세속을 초탈한 한가로움이 묻어난다. 정자 주변의 경관과 작자 자신의 심경을 문학적으로 잘 승화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위 시와 같은 운을 가지고 차운한 시로는 조성가(趙性家)와 오계수(吳繼洙)의 작품이 각각 문집에 남아있는데 모두 뛰어난 시이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상외정은 강학의 공간보다는 다정한 벗들과 함께 경관을 감상하거나 소요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녹휴는 만년에 장성으로 돌아와 자신이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문향정을 경영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강학활동도 함께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가가 지은 「문향정기」가 남아 있는데, 1892년에 지은 것이다. 그 내용에서 ‘문향정’이라고 이름붙인 뜻과 세워진 위치를 알 수 있다. 조성가의 「문향정기」에 의하면, 집과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은 언덕에 새 정자를 짓고, 그 아래에는 연못을 팠으며, 연꽃도 가득히 심었음을 알 수 있다. 군자를 상징하는 연꽃은 주돈이의 애련설 이후 많은 선비들의 사랑을 받으며, 연못에 심어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김녹휴의 문향정의 시를 살펴보자.

새벽녘 샘물소리 현근(玄根)을 정화하고(五更泉響玄根淨)

반이랑 못 물은 거울처럼 고요하네(半畝潭心鏡水安)

연하(煙霞)가 가까우니 경영하기 족하고(煙霞密邇經營足)

때때로 읊조리는 소리 들리니 문득 마음이 곧추서네(時聽咿唔便做官)

문향정은 마음을 맑게 하고 내면을 관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상외정의 시가 선경과 같은 자연을 읊은 것이라면, 문향정의 시는 자신을 수양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자연과 경물을 통해 마음을 맑게 하고 곧추세우고 있다. 문향정 시에 대해서는 기홍연의 문집에 「문향정」 2수가 있고 조성가의 문집에 「문향정즉사(聞香亭卽事)」와 「문향정연화연구(聞香亭蓮花聯句)」가 있는데, 운이 각각 다른 시이다. 「문향정연화연구」는 5언절구 6수로 조성가․김녹휴․기홍연․이정서(李鼎緖) 네 사람이 문향정의 연꽃을 대상으로 번갈아가며 지은 시이다. 이들은 자주 주변의 정자를 찾아다니며 연구로 시를 짓곤 한 시우(詩友)들이다. 특히 조성가는 김녹휴 누정의 주요 작가로서 그 공간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김녹휴의 누정은 비록 많은 사람들의 왕래는 없었지만 다정한 벗들의 좋은 교유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77년(고종 14) 학행으로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성가(趙性家)․이응진(李應辰)․조의곤(曺毅坤)․김평묵(金平默)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신호집(莘湖集)이 있으며, 기정진․조성가 등과 함께 장성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고산서원은 198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호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인 김녹휴의 시문집이다. 모두 3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1981년 증손 정중(晶中)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는데, 권두에 김영한(金寗漢)의 서문과 권말에 안종선(安鍾宣)의 발문이 있다. 전라남도 장성의 변시연가(邊時淵家)에 있다.

권1에는 시(詩) 200여 수, 권2에는 서(書) 58편, 서(序) 1편, 기(記) 6편, 발(跋) 4편, 상량문 1편, 제문 4편, 묘지명 1편, 행장 3편, 권3에는 부록으로 제문(祭文)․만사(挽事)·가장(家狀)·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연작으로 된 「호상십영(湖上十詠)」․「석수암단오회(石水菴端午會)」 등과 서정시 「파초(芭蕉)」․「주망(蛛網)」․「현조(玄鳥)」 등을 비롯하여 황병중(黃炳中)․김류(金瀏) 등을 대상으로 지은 증여시가 있고, 그밖에 금강산과 내장산 등을 여행하면서 지은 다수의 유람시가 실려 있다.

서(書)는 심기택(沈琦澤)․조성가(趙性家)․채상필(蔡相弼)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그 가운데 「답이직지사(答李直指使)」는 1898년(광무 2) 직지사 이승욱(李承旭)에게 종사(宗事)에 관하여 협조를 요청한 편지이고, 조성가에게 보낸 「답조직교(答趙直敎)」․「여조직교(與趙直敎)」 등 10여 편의 편지는 2년 전에 일어난 동학란을 비롯하여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 등에 항거하여 일어난 의병운동의 단편적 상황 설명과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 「남원진씨족보서(南原晉氏族譜序)」와 1885년 이상규(李庠珪)가 강진현감에 재임하면서 수인산성 남문의 비각(碑閣)을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수인산성남문중수기(修仁山城南門重修記)」, 스승 기정진과 기양연(奇陽衍)을 대상으로 지은 제문 등이 실려 있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신호집⌋, ⌈유학사상-연보집성⌋, ⌈광주고전국역총서⌋, ⌈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등이 있다.

김교준(金敎俊,1883-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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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고종 20)~1944. 조선 말기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이다.

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로(敬魯), 호는 경암(敬菴)이다. 선조 때 형조참의 예문관을 지낸 만취(晩翠) 김위(金偉)의 후손이다.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1883년(고종 20) 태어나서 지리산 바래봉 아래에서 살았는데, 어릴 적부터 성격이 강경하면서도 순박하고 진실하였으며, 특히 인자함이 남들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어려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에게 글을 배웠다. 송병선이 순국하자, 다시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사사하면서 그의 성리학 이론인 ‘성사심제(性師心弟)’를 탐구하였다. ‘성사심제’란 성(性)을 스승으로 삼고 심(心)은 제자가 되어 열심히 성을 배우라는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이다. 여기서 ‘성’은 하늘이 사람마다 부여하여 준 것으로 순선(純善)하고 것이므로 나에게 부여된 순선한 성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다. ‘심’은 물질을 보면 발동하는 것으로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으로, 물질을 보면 욕심이 발동하여 사심이 생기는 원인이다. 비유하면 동네 길에서 우연히 일 만금을 주었는데, 갑자기 사심이 발생하여 자기 주머니에 숨겼다. 이때 성이 보고 심을 꾸짖고 꾸짖어 주인을 찾아주라고 한다. 이처럼 심이 성의 명령을 따르고 배우는 것이 ‘성사심제’의 이론이다. 성이 그러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하므로 성을 스승으로 삼고 심은 제자가 되어 열심히 성을 배우라고 하는 것이 ‘성사심제’의 철학이다. 다시 말하면 심은 성을 근본으로 삼아 선도 있고 악도 있는 심을 순선하게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성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하므로 성은 높고 심은 선도 있고 악도 있으므로 심은 낮으니 이로써 성존심비(性尊心卑)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성사심제’의 이론을 전우에게 질의한 내용들이 경암집에 들어있다.

전우 사후에는 문집 간행으로 빚어진 영․호남의 시비에 대의를 밝혀 논박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 판각과 스승의 묘소 석물에 대해 거금을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후 순창 남원 백전촌(栢田村)과 오산의 농세재(聾世齋)에서 강학하였다. 글을 잘 써 8세조와 증조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장(家狀)을 썼으며, 한말 의병장이었던 박윤식(朴潤植)의 행장을 쓰기도 하였다. 성인의 도를 받들고 지키면서 부정척사(扶正斥邪)로 일생을 마쳤다. 1944년 세상을 떠났으며,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신흥리에 위패를 모신 오산사(鰲山祠)가 있다. 저술로는 경암집이 있다.

또한 김교준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1909년 세웠던 농세재(聾世齋)를 1941년 중건하면서 오산서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김교준은 일찍이 송병선에게 수학한 이후, 1907년 오산에 경재(敬齋)를 신축하여 학문을 닦았다. 이듬해에는 전우에게 나아가 학문에 전념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1943년 김교준이 세상을 떠나자, 문인과 고향의 유생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972년 오산서원을 오산사(鰲山祠)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에 영정을 모셨다. 그 뒤 1984년 사당을 신축하여 경현사(景賢祠)로 이름하고 오산사에 있던 김교준을 이안하였다. 1994년 오산사 건물을 원래대로 오산서원으로 환원하고 오산서원지(鰲山書院誌)를 발간하였다.

1994년 김교준의 문인과 순창의 유림 및 후손이 중심이 된 오산서원지 편집위원회는 전우와 김교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오산서원지를 발간하여 운영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2권 1책으로 총 86장이다. 서문 앞에는 경현사와 내삼문 사진이 있고, 오산서원과 농세재 사진이 있으며, 전우와 김교준의 영정이 있다. 서문은 원종복(元鍾復)이 지은 것이다. 권1은 위치, 건물, 건사사실(建祠事實), 향사일(享祀日)을 비롯하여 봉안문(奉安文)과 축문(祝文), 주자백록동규(朱子白鹿洞規),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 향약절목(鄕約節目), 상읍례도(相揖禮圖), 강석도(講席圖), 토지목록(土地目錄) 등이 있다. 권2는 전우의 문집과 김교준의 문집에서 뽑았는데 전우의 주요 글로 「전재임선생신도비명(全齋任先生神道碑銘)」․「성사심제변변(性師心弟辨辨)」․「성존심비적거(性尊心卑的據)」․「성사심제독계어(性師心弟獨契語)」 등이 있고, 김교준의 글로는 「상연재송선생(上淵齋宋先生)」․「상간재전선생(上艮齋田先生)」․「농세재기(聾世齋記)」 등이 있다. 권2에 수록된 오산사기(鰲山祠記)」․원임안(院任案)․제관록(祭官錄)․부의계원좌목(扶義契員座目) 등은 오산사의 내역과 서원과 관계된 인물을 수록하고 있어 서원 운영을 알 수 있다.

⌈경암집⌋은 일제 강점기의 문인 김교준의 시문집이다. 모두 9권 6책으로 석인본이다. 1961년 오구영(吳龜泳)․이도형(李道衡)․황갑주(黃甲周)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김교준은 송병선과 전우의 문인으로 학문적 재능이 뛰어나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다. 경암집은 김교준이 죽고 20여 년 뒤인 1961년에 제자인 황갑주(黃甲周)․오구영(吳龜泳) 등이 계를 만들어 자금을 마련하여 비석도 세우고 문집도 간행하게 되었다. 권두에 이병은(李炳殷)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황갑주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전주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3에는 서(書) 160편, 권4에는 잡저 26편이 들어있다. 권5에는 서(序) 14편, 기 28편, 발 6편, 상량문 2편, 책(策) 1편, 잠(箴) 2편, 축문 2편, 제문 9편, 애사 2편이 있으며, 권6에는 행장 8편, 비기 6편, 묘갈명 1편, 묘표 2편이 있다. 권7에는 시 423수, 부(賦) 1편이 있고, 권8에는 만록 100편, 권9에는 부록으로 영(詠) 9편, 행장․묘갈명․묘지명․묘표 각 1편, 제문 2편, 만(挽) 14편, 문인록(門人錄)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는 대개 스승․동료․친척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안부 또는 학문적인 내용을 문답한 것이다. 송병순에게 보낸 서에서는 친영례(親迎禮)․상례․문상․복례(服禮)․의관․부녀복(婦女服) 등에 대해 문의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독율농간삼선생유서록(讀栗農艮三先生遺書錄)」에서는 주로 심성론에 관한 이이(李珥)와 김창협(金昌協)의 학설들을 비교해 기술하였다. 그밖에 고구려의 밀우(密友)와 세우(細友)의 충절, 백제의 도미(都彌) 아내의 정절, 신라 이차돈(異次頓)의 죽음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책 가운데 「삼강책(三綱策)」에서는 군신․부자․부부간의 자세를 고대의 사례를 인용해 자세히 논술하고 있는데, 특히 군신간의 충의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시는 뛰어난 시재를 선정해 맑고 순수한 생각을 고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 중에서 「화양동십경(華陽洞十景)」은 화양동의 명승을 노래한 것으로, 저자의 초일한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독서칠절(讀書七絶)」․「칠음(七吟)」 등은 학문과 사상에 관한 심경을 읊은 것으로 그 내용이 진지하다. 만록 가운데 「청수만록(淸水漫錄)」에서는 조선 태조의 왕위계승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났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정조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사건과 붕당의 발생동기․과정․폐단 등 역사적인 여러 사실들에 관해 기술하고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경암집⌋에는 서간문이 많이 수록되었는데, 대부분의 주제가 성리학적과 연관된 것으로, 특히 스승인 전우에게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이론에 대하여 질의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시의 걸출한 문인들과 토론하고 응답하고 설명하는 내용들이 많다. 경암집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의 도학과 문학의 사조를 이해하고, 아울러 전우의 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기우만(奇宇萬,1846-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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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헌종 12)∼1916.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관은 행주(幸州)로 지금의 경기도 고양이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며 또는 학정거사(學靜居士)라고도 부른다. 1846년 전라도 장성 탁곡(卓谷)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며, 아버지는 기만연(奇晩衍), 어머니는 이기성(李耆成)의 딸이다. 기씨가 장성에 들어와 산 것은 중종 연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이다. 기묘 사림의 한 사람이었던 기준(奇遵)의 둘째 형인 기원(奇遠)이 기묘사화를 피해 장성으로 옮겨 온 이후에 대대로 살았다.

기우만은 8세 때 할아버지인 기정진을 모시고 하사(下沙)로 이사했고, 이후 기정진이 죽을 때까지 줄곧 옆에서 모셨다. 기정진의 강학활동을 보좌하면서 집안일까지 챙겼다. 34세 때 기정진이 죽자 호남의 유림들은 기우만을 종장으로 추대했고 기우만을 기정진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기우만은 조선의 개국에서부터 격변기에 살면서 할아버지 기정진의 위정척사 사상을 현실대응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각 읍에 통고하여 규탄하기를 촉구했고, 1896년에는 51세의 나이로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가자 ‘호랑이를 풀어서 보호하고자 하는 꼴’이라면서 외세에 의탁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경고했고, ‘종묘사직에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조선의 멸망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기도 하였다. 의병을 일으켜 나주와 광주로 갔으나 신기선(申箕善)이 선유사로 내려왔으므로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은 빈자리에 앉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허공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오직 땅 위에서만 이루어지는데 그 땅이 견양(犬羊)의 차지가 되었다’고 분노했다. 을사 5적에 대해 ‘이 무리들은 선왕으로부터 받은 강토를 사사롭게 적에게 넘긴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6년 호남 사람들을 곡성에 모이게 하고 을사 5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추진하였다. 이후 을사 5적을 암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일본 경찰에 잡혀가 광주, 영광, 서울 등의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다.

1910년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서는 나라가 망한 신하는 편안하게 있을 수 없다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해진 옷으로 바꿔 입고 죽림 속에 칩거하였다. 1911년 일본인들이 각 지역의 명망 있는 유림들에게 은사금을 주었는데, 단호하게 거절하여 일본의 침략 야욕에 항거하는 뜻을 보였다. 기우만은 조선의 신하로 살기를 맹세했고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 방장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1916년 남원의 사촌에서 별세하였다.

기우만은 인생 후반기에 외세를 배격하고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하였다. 개화기 기간 동안 호남의 의병들은 두 차례에 걸쳐 크게 일어났다. 을미의병은 친일개화당 정권에 대한 비판이었고, 병신년 의병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친일 매국세력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두 번의 의병활동에서 기우만이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므로 그의 의병활동은 반개화, 반침략적 투쟁이며 조선 왕권과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근왕(勤王)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호남 의병활동에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기우만은 조선이 중화(中華)의 맥을 이었다고 하여 조선의 문화, 제도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사상, 문물에 대해서는 삿된 것, 오랑캐의 것으로 규정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서양의 책을 사서 읽고 천주교가 성행한다는 말을 듣고는 ‘신주(神州)가 무너져 없어진 이후로 한 줄기의 화맥(華脈)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동쪽의 중화가 된지 3백년인데 지금 모두 없어졌다’라고 한탄하였다. 화이(華夷)구분과 소중화 의식은 위정척사 운동의 이념적 기반이었다. 소중화 자부심은 갑오개혁 개화에 대한 비판 정신의 뿌리였다.

당시 개화파들은 조선의 전통을 구시대적인 폐습으로 간주하여 개혁할 대상으로 여겼다. 서양의 사상, 문화, 문물을 개화 기준으로 하여 정치부터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식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우만은 서양과 일본을 오랑캐로 보았고 그들의 문화, 문물을 오랑캐의 것으로 간주하였으므로 개화파의 개화란 중화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중화를 변질시켜 오랑캐로 만드는 일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정(正)-바름’이 아니라 ‘사(邪)-거짓’된 개화로 개화라는 이름만 훔쳐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는 일로 규정하였다. 삿되고 거짓스런 상황을 바름으로 돌리기 위해 도학의 맥을 강조하며 윤리도덕의 회복에 힘썼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석채(釋菜)와 향음주례를 실시하기도 했다.

기우만이 주장한 부정척사(扶正斥邪)는 기정진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바른 학문을 잡게 되면 거짓된 것들은 저절로 없어지게 되는데, 거짓이 세상에 번성한 것은 정학(正學)의 도가 밝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상에서 향음주례나 석채 등을 통해 윤리 도덕적 기강을 회복하고 성현의 도맥을 재확인하고자 하였다. 이는 곧 중화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 문화야 말로 올바르고 개화된 것이며 정학이 아직 건재함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학문적인 측면에 있어서 기우만은 호남 유림의 종장이라는 위치에 있었으나 따로 학설을 세우지 않았다. 스승인 기정진이 할아버지였으므로 집안 어른의 학설에 대해 부가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덧보태는 일이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정진의 강학활동을 돕느라 제대로 배우는 일도 어려웠다. 기정진이 제자들에게 강학하는 내용을 곁에서 듣고 사색하여 학설을 터득했을 뿐이고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거나 스승과 토론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승의 학설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었고 다른 학파와의 학문적 토론은 기정진 제자들에게 일임하였다. 또한 기정진의 제자나 친우들이 질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답변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성리학과 관련한 전문 저술이 없다. 평소 유교 윤리를 강조했던 만큼 삼강(三綱)에 가까운 행실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는데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도 그런 의도에서 저술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송사집과 송사선생문집습유가 있다. 정재규(鄭載圭)․조성가(趙性家)․정의림(鄭義林) 등과 교유하였으며,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송사선생문집⌋은 조선 말기 학자이며 의병장인 기우만의 문집이다. 문인인 양회갑(梁會甲)의 주도로 편찬하여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30년에 착수되어 1931년에 간행되었다. 현재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집은 목록(目錄) 2권, 원집(原集) 50권, 속(續) 2권 합 26책으로서, 목록의 뒤에 정오표(正誤表)가 수록되어 있고, 서문이나 발문은 없으며, 묘도문(墓道文)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권1에는 시(詩) 192제, 권2에는 소(疏) 5편, 권3~10에는 서(書) 1,025편, 권11~12에는 잡저 176편, 권13~16에는 서(序) 285편, 권17~21에는 기(記) 420편, 권22에는 발(跋) 116편, 권24에는 신도비문(神道碑銘) 16편, 권25에는 비(碑) 51편, 권26~38에는 묘갈명(墓碣銘) 583편, 권41~43에는 묘표(墓表) 162편, 권44~48에는 행장(行狀) 104편, 권49에는 유사(遺事) 34편, 권50에는 전(傳) 36편이 수록되어 있다.

구시경(具時經,1637-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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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인조 14)~1699(숙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관은 능성(綾城). 호는 독락재(獨樂齋), 자는 제백(濟伯)이다. 구시경의 아버지 구몽협(具夢恊)이 1636년 병자호란 때 겨울 해주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정월 그를 낳았다. 어려서부터 특이하여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다가도 문자를 보여주면 눈을 뜨고 좋은 기색을 보여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11세에 처음 학문을 시작하여 한시도 게으르지 않아 해가 갈수록 학문이 크게 나아졌으며‚ 스승 없이도 스스로 깨우친 바가 많아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부친의 친우인 한필구(韓必久)가 그의 자질을 보고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수업하도록 하였으며‚ 그가 안악(安岳)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 구시경과 동행하였다. 15세 되던 1651년 수년 동안 그를 지켜보던 한필구가 뛰어난 재주를 아껴 일가인 한여태(韓如泰)의 딸로 베필을 삼게 하였다. 이후 최유연(崔有淵)이라는 문장가에게 배우다가 16세에 당시 노론의 영수이자 주자학의 대가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스승으로 섬기며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30여 년간이나 송시열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로부터 구시경은 문인의 구습을 버리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 조근(趙根)‚ 송상민(宋尙敏)‚ 이담(李橝)‚ 윤명우(尹明遇) 등과 교유하였으며‚ 1675년 1월 송시열이 예송(禮訟) 문제로 덕원에 유배되자 따라가 모시었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에 대한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현종, 숙종대에 발생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이다.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의 승하 시와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전자가 기해예송(1차)이고 후자가 갑인예송(2차)이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당초 허목, 윤휴와 송시열의 예론대결로 흘러가던 중 윤선도가 송시열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고 지적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예송은 토론에서 이념 대립으로 격화된다.

이처럼 서인과 반대 세력인 남인 사이에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 그러다가 1679년(숙종 5) 예송 논쟁에 연루되어 강원도 이천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 산릉감동관(山陵監董官)‚ 홍성판관(洪城判官) 등의 여러 벼슬을 거쳐 1696년(숙종 22)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1699년(숙종 25) 임지인 연천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독락재유고(獨樂齋遺稿)가 있다.

구시경의 시문집 독락재유고는 5권 2책으로 신연활자본이다. 구시경이 사망한 후 200여년이 지난 1886년(고종 23)에 그의 7대손 구양서(具陽書) 등이 구시경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근수(宋近洙)의 서문과 권말에 구양서와 8세손 구완회(具完會)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의 일부를 필사한 독락재문집이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에 전하는 독락재문집은 1886년에 송근수가 쓴 서문이 권두에 실려 있어 1886년에 간행된 초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당시 간행된 문집의 전체는 아니며 필사 과정에서 일부만이 초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유는 구시경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였다는 서문의 문집 편간 경위와는 달리 저자 자신의 글은 본 문집에 단 한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고‚ 모두 친구나 후배들과 같은 남의 글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권두의 1886년(고종 23)에 송근수가 쓴 서문‚ 1715년에 완산(完山) 최방언(崔邦彦)이 쓴 독락재공행장(獨樂齋公行狀)‚ 1721년(경종 1)에 정호(鄭澔)가 쓴 「한성부판관구공묘갈명(漢城府判官具公墓碣銘)」을 제외하면 모두 만사(輓詞)‚ 제문(祭文)들 뿐이며 마지막에 청담첩(淸潭帖)을 부록하였다. 송시열이 청담동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의 시문과 송시열의 글씨를 받아 묶은 청담첩을 수록하였다. 본 필사본 문집에는 송시열의 글씨는 없이 제목뿐이며‚ 여러 사람들의 시문들과 함께 구시경의 집에 전하던 청담첩을 모사하게 된 경위를 적은 권섭(權燮)의 지문이 부록되어 있다.

권1에는 서(書) 2편, 기 1편, 설 3편, 어록 1편, 잡저 2편, 제문 2편, 권2∼5는 부록으로 세계(世系)․연보․행장․묘갈명․시장(諡狀) 각 1편, 서독(書牘) 80편, 현송당기(絃誦唐記) 1편, 만장 54편, 제문 5편, 시 46수, 제청담시첩후(題淸潭詩帖後) 4편, 가사서(家史序)․가사발(家史跋)․제독락재구공가장우암선생수서후(題獨樂齋具公家藏尤庵先生手書後)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현송당기’는 1697년에 구시경이 연천현감으로 있을 때 지은 현송당에 대하여 정상룡(鄭祥龍)이 사실을 정리하여 지은 글로써, 구시경이 연천에서 현송당을 세워 후생들을 교도한 공적을 찬양한 내용이다.

서(書)에는 한정기(韓挺箕)와 장례에 관하여 논설한 내용이 들어있고, 설의 「예설(禮說)」에는 당시 일어났던 예론논쟁에서 송시열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잡저 중 「기미화변사실(己未禍變事實)」에는 이천 땅으로 유배된 사건의 전말을 일기식으로 기술하였다. 이밖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계통의 사람들과 사우(師友)․문인관계를 나타내는 기록이 많다.

송시열이 직접 써주었다는 현판(懸板) 명과 시 1수, 송시열이 지은 「구제백서산정사차주손운(具濟伯西山精舍次疇孫韻)」, 이속(李涑)이 지은 「복차우재선생청담동운(伏次尤齋先生淸潭洞韻)」, 조정만(趙正萬)이 지은 「경제청담시첩(敬題淸潭詩帖)」․「우차우재운(又次尤齋韻)」, 이병연(李秉淵)이 지은 「차운 경제청담첩(次韻 敬題淸潭帖)」, 이병성(李秉成)․최방언(崔邦彦)․김시보(金時保)․김창집(金昌集)․신정하(申靖夏)․김상리(金相履)․서응순(徐應淳)․송근수(宋近洙) 등이 지은 시, 권말에 안동 권섭(權燮)이 1697년에 쓴 「제청담첩후(題淸潭帖後)」가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본집은 1909년에 구양서(具陽書) 등이 간행한 구시경의 독악재유고의 중간부분만 필사하여 놓은 것이라고 보겠다.

곽시징(郭始徵,1644-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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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인조 22)∼1713(숙종 39).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숙(敬叔) 또는 지숙(智叔)인데, 처음 경숙이었다가 스승인 송시열에 의해 지숙으로 고쳤다.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은 목천(木川)이며 호는 경한재(景寒齋)이다. 아버지는 사헌부집의(執義)와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한 곽지흠(郭之欽)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도사(都事) 김옥(金鋈)의 딸이다. 아버지는 강직하고 청백한 인물로 평판이 높았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44년 6월에 서울의 근동(芹洞)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말과 행동이 장중하고 머리가 총명하였다. 성인들보다 더 뛰어난 논리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른들이 질문하면 대답하는 말이 이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소학(小學)을 읽고는 모든 일을 그대로 따라 행하려 하였으며, 또한 과거공부는 선비의 뜻을 빼앗는다고 하여 한 차례 나아가 응시하고는 그만두었다. 이때 송준길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올라가 학문을 배웠으며, 중년 이후에는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을 데리고 다시 충청도 목천으로 내려갔다. 여기에서 송시열을 만나 그로부터 사사(師事)를 받고 평생토록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배우고 부지런히 하기를 몸이 야위는 데까지 이르렀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그만둘 것을 권유하였으나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송시열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배우기를 청하며 간혹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일까지 잊었기 때문에 송시열이 매번 그의 학문 좋아함을 칭찬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과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의 천거로 재릉참봉(齋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득세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기사환국은 1689년(숙종 15년) 장희빈(張禧嬪) 소생의 아들 윤(昀)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하던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 의하여 패배당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을 말한다. 숙종은 서인이 제기한 원자(元子) 문제를 빌미로 서인의 횡포를 억누르고자 서인을 실각시키는 한편, 남인들을 다시 중용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여러 문인들과 함께 그 무고함을 상소하였고, 송시열이 죽은 뒤에는 태안(泰安)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1694(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송시열이 신원되자, 고향인 목천으로 돌아와 송시열이 쓴 경한(景寒)으로 편액한 정자 경한정을 세워 도를 강론하는 등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에 학자들이 다투어 배우기를 청하였으며 한결 같이 스승이 이루어 놓은 학문에 따라 가르쳤다. 바닷가에 있는 후미진 지역에 비로소 학문이 있음을 알게 하였고 사나운 풍속이 따라서 교화되는 것이 많았다. 도를 강론하고 여가에 산수 좋은 데를 거닐며 스스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다. 때때로 자연을 음미하다가 즐거움이 지극하여 감흥이 일어나면 문득 시와 노래를 지어 그로써 자기의 뜻을 부치기도 하였다. 그가 시와 노래를 지은 까닭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는 단순히 자연을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교화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시에는 경한정시가(景寒亭詩歌)가 있다. 이것은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형식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시조의 효율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노래를 부르면 근심도 잊어버리고, 마음을 맑게 하기도 하며, 욕심도 적게 하기 때문에 ‘배움에 뜻을 둔 자’에게 보탬이 되었다. 즉 시조는 노래 부르는 자와 그것을 듣는 자에게 모두 유익하다는 것이다.

1703년(숙종 29년)에 목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며, 이어서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연잉군과의 각별한 관계가 형성된다. 연잉군이 등극 후에도 스승인 곽시징을 항상 염두해 두고 있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영조는 곽시징을 자신의 유일한 스승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승 곽시징에 대한 영조의 사랑이 그 후손에게까지 내려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뒤에 1708년(숙종 34)에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으며, 바로 이인도찰방(利仁道察訪)에 제수되었다. 이 시기 역원의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인도찰방으로 있을 때 임금에게 소학을 익숙하게 읽고 아울러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보도록 청하였다. 마음을 다하여 임금을 공경하기를 관직에서 떠났다고 하여 거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병이 났을 때도 근심하고 은혜를 다할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임금의 덕과 기질이 비록 타고난 것일지라도 근원에 물을 대고 깊게 한 것은 또한 곽시징에게서 힘을 얻은 것이 많았으니, 그 쌓은 정성과 권면하고 인도한 것은 실제로 사부들 가운데서 제일이라고 하겠다.

곽시징은 품성이 이미 어질고 후덕하며 학문은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일찍이 스스로 가르침에 따라 잠시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병이 들어 사사로이 있을 때에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잘난 체 뽐내는 것을 병으로 여겼으며, 자신의 몸가짐은 반드시 근신하여 아무리 이익과 손해가 번갈아 변하여도 본래의 뜻을 바꾸지 않았으며, 마음을 다스리기를 진실로 엄하게 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아침 문안과 잠자리 보살피기를 예에 맞게 하였고, 맏형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이 하였다. 어버이가 병이 들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먹이기도 하고, 변을 맛보기도 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소금이 없이 죽을 먹었으며, 비록 상을 마쳤어도 묘소를 지날 적이면 반드시 곡하였다. 특히 예서(禮書)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책을 읽다가 의심 가는 곳이 있으면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하여 의심나는 글이나 바뀐 예절은 세밀하게 분석하였다.

1710년(숙종 36) 이인도찰방의 임기를 마치고 신재(愼齋) 김집(金集)이 놀던 공주의 둔촌으로 옮겨 살던 중 1713(숙종 39) 정월 22일에 죽으니 향년이 70세다.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처음에는 공주에 장사지냈다가 목천(木川)의 선영 아래 곤향(坤向)의 산록으로 다시 장사지냈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숙종실록(肅宗實錄) 등이 있다.

고용즙(高用楫,1672-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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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2년(현종 13)∼1735년(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관은 미상(未詳)이며, 자는 제경(濟卿), 호는 죽봉(竹峯)이다. 임피(臨陂) 술산(戌山)의 죽봉에서 출생하였으므로 호를 죽봉이라고 하였다. 할아버지 고이원(高而遠)과 아버지 고필(高佖)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문하에 출입하였다.

고용즙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시를 잘 지어 신동으로 불렸으며 문장도 잘 했으나 과거에는 실패하였다. 이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김집과 송시열의 문하에서 오직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으니 성리학에 침잠하고 경서(經書)에 몰두하였다.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과 교의가 두터웠으며, 이관명(李觀命)․이휘지(李徽之)․민진원(閔鎭遠)․김진상(金鎭商) 등 당대의 명사들과도 교류하였다.

영조(英祖) 초에 상소를 올려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의 죄와 탕평책의 부당성을 논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 1721년부터 1722년에 걸쳐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신임사화(辛任士禍)와 관련된 일을 말한다. ‘신임사화’는 신축(辛丑)․임인(壬寅) 두 해에 걸쳐 일어난 옥사이다.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죽고 소론의 지지를 받은 경종(景宗)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후사가 없었으며 병이 많았다.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은 하루 빨리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당시의 노론 4대신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가 중심이 되었다. 물론 소론측의 반대가 있었지만, 경종은 1721년 8월에 대비 김씨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실현시켰다. 유봉휘 등 소론이 이에 반대했으나, 결국 노론세력의 주장이 관철되어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노론측은 더 나아가 10월에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를 통해 경종을 대신하여 세제의 대리 청정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발한 조태억, 이광좌, 유봉휘 등 소론 세력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러던 중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 등이 소를 올려 노론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여 세제 청정을 상소한 조성복과 이를 강행한 노론 4대신을 파직시켜 유배를 보냈다. 이외에도 다수의 노론측 인물들이 삭직되었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용즙은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고향의 유림들과 협의하여 스승인 김집이 배양되어 있는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사액하고, 정읍에 송시열이 배양되어 있는 고암서원(考巖書院)을 창건할 것을 소청하였다. 유고로 죽봉집을 남겼다. 고용즙은 고동옥(高東沃)의 할아버지이다.

고용집의 시문집인 죽봉집은 3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1938년 영모재(永慕齋)에서 간행되었다. 권두에 민병승(閔丙承)․이중명(李重明)․최병심(崔秉心)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후손인 고동화(高東華)․고도상(高道相)․고경동(高京東)․고명환(高明煥) 등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장서각 도서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상토역소환향시음(上討逆疏還鄕時吟)」․「반궁중정음(泮宮中丁吟)」․「서당즉사(書堂卽事)」․「서원회음(書院會吟)」․「취취당(就就堂)」 등 시 209수, 「팔덕선부(八德扇賦)」․「남정부(南征賦)」․「의기부(懿己賦)」․「민기부(悶己賦)」 등 부 4수가 들어있다. 「의기부」는 고용즙의 29세 때인 1700년 상중에 쓴 작품으로 장편이다. 또한 「민기부」에는 상제(喪制)가 된 고용즙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탐라국(耽羅國) 을나(乙那)의 후예로 45대를 군주, 16대를 신하로 내려온 명문가문으로, 부친은 특히 용모․언행․문장이 뛰어났고 가족이나 사회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과거에는 실패하였으나 전원에 뜻을 두어 정자를 짓고 못을 파며 국화와 버들을 심어 은자답게 살아가다가 고용즙이 28세 때인 1699년 9월에 병석에 눕게 되고, 온갖 약에도 효과가 없어 다음 달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슬픔이 극에 달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고 여러 풍수(風水)를 맞아 묘지를 정하여 다음 해 2월 14일에 안장하는 효자 고용즙의 심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 밖에 지은 년대를 알 수 없는 작품으로 부채의 팔덕(八德)을 읊은 「팔덕선부(八德扇賦)」가 있다.

권2에는 「흥학당서(興學堂序)」․「초당서(草堂序)」․「필묵계서(筆墨契書)」․「봉암서원서(鳳巖書院序)」 등 서 5편, 「취취당기(就就堂記)」의 기 1편, 「봉암서원개기제문(鳳巖書院開基祭文)」의 제문 1편, 「봉암서원중수상량문(鳳巖書院重修上樑文)」의 상량문 1편, 「사직축문(社稷祝文)」 등 축문 10편, 「포계조후경장(褒啓趙候景狀)」의 장 1편, 「토역소(討逆疏)」․「태학소(太學疏)」․「태학공재소회소(太學空齋所懷疏)」․「신독재선생봉암서원청액소(愼獨齋先生鳳巖書院請額疏)」 등 소 11편이 들어있다. 이 중에 「초당서」는 고용즙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쓴 말년의 작품인데, 여기서는 저자가 거처하는 초당의 주위환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그 밖에 봉암서원에 배향된 스승인 김집의 도학과 연원 등을 그린 「봉암서원개기제문」이 있다.

권3에 부록으로 행장․묘표․만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1887년(고종 24)에 경연관(經筵官)을 지낸 김락현(金洛鉉)이 행장을 지었다. 소는 스승인 송시열(宋時烈)과 김집(金集)을 사사한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의 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 등이 주장한 세제책봉 및 대리청정의 반대에서부터 신임사화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담고 있다. 또 소론 일파가 일으켰던 반란행위를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고 있어, 당쟁이 심화되었던 당시 노론․소론의 갈등과 대립상을 엿보는데 참고자료가 된다.

고예진(高禮鎭,1875-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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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고종 12)∼1952.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관은 장흥(長興). 자는 수문(秀文), 호는 송천(松川)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출신으로 1875년(고종 12) 11월 24일에 태어났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11월에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형제인 고용진(高龍鎭)․고석진(高石鎭)과 함께 의병에 투신하였다. 을사조약은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6년 4월에 최익현이 태인(泰仁)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학회를 열고, 호서․호남 일대의 유림 인사들을 규합하여 항일운동 단체인 면암의진(勉庵義陣)을 구성할 때 함께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의 독립의군부(獨立義軍部)에서 정훈(政訓)을 담당하여 전국 8도에 의병궐기의 격문을 전포하였다. ‘의진’이 순창에 이르렀을 때 관군에 포위되어 싸우려고 하였으나, 최익현이 민족끼리 더 이상 골육상잔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서 항전을 금지하였다. 그러다 순창(淳昌) 귀암사(龜巖寺)에서 크게 패하였는데, 그 때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전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석방되었다.

1914년 임병찬(林炳瓚)이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가담하여 서기관(書記官)으로 활약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임병찬이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만든 비밀결사단체 조직이다. 전국 의병장과 유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까지 그 활동영역을 넓혀갔었다. 이 단체는 대한제국 때의 왕정 복고주의를 추구하였으며,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벌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은 한때 조선총독부 관리에게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통고하고 ‘국권반환요구서’를 수차례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의군부는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면서 임병찬을 비롯한 지도부가 구속되는 사태로 일단락되었다.

1919년에는 김창숙(金昌淑) 등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호남 유림의 일원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파리장서는 한국의 유림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1919년 개최된 세계만국평화회의에 보낸 조선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이다. 파리장서 호소문은 일본의 방해와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정식안건으로 상정되지는 못했으나, 3.1운동과 함께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천명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뒤 부모의 상으로 귀가 중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후 귀향하였다. 대한제국에서는 고예진에게 공적이 많음을 알고 밀칙종삼품(密勅從三品) 통훈대부(通訓大夫)를 명하였다. 저서로는 송천집(松川集)이 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지금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358번지에는 애국지사 고순진․고예진선생 추모비(愛國志士高舜鎭高禮鎭先生追慕碑)가 있다. 이것은 한말의 애국지사 고순진(高舜鎭)과 고예진(高禮鎭) 형제의 애국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86년 5월 5일 건립하였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장흥 고씨 장령공파 송암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는 총 2기로 모두 거북모양의 기단 위에 오석 비신을 올리고 이수를 얹은 형태이다. 비 전면에는 각각 ‘만취고선생추모비(晩翠高先生追慕碑)’, ‘송천고선생추모비(松川高先生追慕碑)’라고 새겨져 있다.

참고로 고예진의 형인 고순진은 고예진과 함께 고시청의 장남과 4남으로 이곳 성암리 379번지에서 태어났다. 고순진은 호가 만취(晩翠)이며, 고예진과 마찬가지로 최익현의 문인이다. 1906년 최익현 의거 당시 항일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을 인쇄하여 전국으로 보냈다. 1914년에는 무기와 군량미, 거액의 군자금 등을 독립의군부에 헌납하였고, 1919년에는 대한독립청원서(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이후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고예진의 시문집 송천집은 모두 13권 4책으로 신활자본이다. 1963년 친척인 고만상(高萬相)․고좌상(高佐相)․고광은(高光殷)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최익현의 손자인 최용식(崔龍植)의 서문과 권말에 고만상․고좌상․고광은 등의 발문이 있다. 전라남도 장성의 변시연가(邊時淵家)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500여수, 부(賦) 2편, 표(表) 1편, 권2에는 서(書) 144편, 권3에는 잡저 15편, 권4에는 서(序) 39편, 권5에는 기(記) 44편, 권6에는 발(跋) 6편, 찬(贊) 1편, 축문 6편, 혼서(婚書) 4편, 권7에는 제문 23편, 권8에는 상량문 19편, 권9에는 비문 14편, 묘표 4편, 권10에는 묘갈명 15편, 권11에는 행장 10편, 사장(事狀) 5편, 가장 2편, 전(傳) 5편, 찬장(贊狀) 8편, 권12․13에는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근차면암선생일옥구호운(謹次勉菴先生日獄口呼韻)」․「탄시색(嘆時色)」․「척확(尺蠖)」 등 폭넓은 제재로 구성된 시가 고루 실려 있다. 서에는 그가 최익현에게 보낸 3편의 「상면암선생(上勉菴先生)」과 그의 아들 최영조(崔永祚)에게 보낸 12편의 「상운재최장(上雲齋崔丈)」을 비롯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참고자료가 되는 다수의 편지가 실려 있다. 잡저에는 독립운동사 연구에 참고가 되는 「면암선생병오거의시사실록(勉菴先生丙午擧義時事實錄)」과 그의 실천적 학문연마에 관한 탐구결과인 「경의문대(經義問對)」 등이 있다.

참고할 만한 문헌으로는 면암집(勉庵集), 흥성지(興城誌), 벽옹김창숙일대기(壁翁金昌淑一代記),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등이 있다.

고광선(高光善,1855-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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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철종 6)~1934. 근대의 학자이다.

관은 장택(長澤). 자는 원여(元汝), 호는 현와(弦窩)이다. 복헌(復軒) 고정헌(高廷憲)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고제열(高濟說)이다. 아버지는 호은(湖隱) 고박주(高璞柱)이며, 어머니는 행주 기씨(幸州奇氏) 기우진(奇禹鎭)의 딸이다.

1855(을묘)년 철종 6년 12월 23일에 광주 복촌(復村)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모습이 민첩하고 단정하였으며, 8세에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글 읽기를 잘하여 칭찬을 많이 받았다. 10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곡하고 슬퍼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세 살짜리 동생을 보살피고 계모 광산 김씨를 친어머니처럼 섬기니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어려서 한 고향 사람인 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 후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깊은 뜻과 예법의 본질을 배웠다. 일용의 예절에서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부지런히 질문하여 깨우쳤으니, 이 때문에 기정진이 기특하게 여기고 더욱 성실하게 지도하였다. 성격은 온순하였으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용감하게 고쳤으므로 스승이 이를 장하게 여겼다. 부친상을 당하고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도 상례를 오로지 원칙대로 지켰으며, 음식을 절제하고 슬픔을 다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로는 설진영(薛鎭永)을 들 수 있다.

학문에 전념하고 벼슬하지 않다가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숨어 지내면서 이듬해에 엄이재(掩耳齋)를 세웠다. ‘엄이’는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시끄러운 세상일에 대해 귀를 막고 살고자 했던 것으로, 스승인 나도규 역시 봉황산의 덕암에서 살았으므로 그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배우러 오는 학생들의 수를 감당하지 못하자, 문인들이 힘을 모아 1919년에 그 옆에 봉산정사(鳳山精舍)를 지어서 이곳에서 강학하였다. 고광선은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엄이재의 북쪽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이를 읍궁암(泣弓巖)이라고 부른다. 그가 죽자 1936년에 그 곁에 영당을 지었고, 이를 바탕으로 1964년에는 봉산사를 세웠으며, 1975년에는 엄이재를 중건하였다. 「봉산사지(鳳山祠誌)」의 문인록에 올라 있는 고광선의 문인 수는 650명에 이른다.「봉산사지」는 1978년에 간행된 봉산사의 기록이다.

고광선이 경영했던 엄이제나 봉산정사는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의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재봉산과 극락강, 송학산 등이 있으며, 마을과는 많이 떨어져 있어서 격리된 느낌을 받는다. 엄이재 현판은 현재 고직사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에 걸려 있는데, 이 현판에는 1916년 봄에 사촌인 고강은(高光殷)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왼쪽 뒤쪽에는 봉산정사가 세워져 있고, 엄이재 뒤쪽 오른편으로 고광선의 영당인 봉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엄이재 관련 시문으로는 주인 고광선의 기와 시, 동문인 송정묵의 기와 시, 그리고 김만식․정운오․윤경혁․양회갑․최윤환․나종우 등의 시가 각각 문집에 남아있다. 고광선의 「엄이재기」를 보면, 원래의 엄이재의 경관과 엄이재라는 이름의 의미 등을 알 수 있다. 봉산정사의 관련 시문으로는 고광선과 문인들인 이종택․양회갑․노종룡․빅병주․최윤환․여창현 등의 시가 각각 문집에 남아있다.

고광선의 학문세계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량에 비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편지글이나 잡저 등은 일상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어서 특별한 것을 추출해내기가 힘들다. 그러나 실천적 의리정신을 강조한 내용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군자는 세상이 어지럽다고 해서 그 행동을 바꾸지 않고, 할 만할 때에 할 만한 것을 하는 사람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리정신은 제자인 윤경혁(尹璟赫)이 쓴 「언행록(言行錄)」에 잘 나타나 있다. 「언행록」에 따르면,

“조정에서 녹을 먹는 자는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진 뒤에는 의리상 마땅히 죽어야 하나 죽지 않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된다. 그 죄 됨을 알면 마땅히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어서 바깥사람들과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물며 붓을 잡고 역사가의 일을 하는 사람임에랴”

라고 하여 나라의 녹을 먹은 공직자들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들의 처신을 특히 강조하였다.

1934년 80세에 이질에 걸려 현와정사에서 운명하였다. 이듬해인 1935년 1월 20일 정사의 남쪽 산록 사좌원(巳坐原)에 안장하였다. 저서로는 「현와유고(弦窩遺稿)」가 남아있다. 현와유고는 1956년 고광선의 문인들이 그를 흠모하여 간행한 것이다.

「현와유고」는 근대의 학자인 고광선의 시문집이다. 모두 16권 8책으로 석인본이다. 1962년 박하형(朴夏炯) 등 문인들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재직(宋在直)의 서문과 권말에 박하형의 발문이 있다. 현재 장서각 도서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165수, 권2~3에는 서(書) 442편, 권4에는 잡저 107편, 권5에는 서(序) 99편, 권6~7에는 기(記) 283편, 권8에는 발(跋) 37편, 명(銘) 4편, 찬(贊) 5편, 사(辭) 5편, 혼서(婚書) 1편, 상량문 22편, 축문 11편, 제문 6편, 권9에 비(碑) 57편, 권10~11에는 묘갈명 109편, 권12에는 묘지명 5편, 묘표 52편, 권13∼15에 행장 103편, 권16에는 실적(實蹟) 26편, 전(傳) 14편, 부록으로 언행록(言行錄)․가장(家狀)․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증시(贈詩)와 차운(次韻)한 것이 대다수이다. 성리설에 대한 견해를 표현한 것과 언행을 경계하는 교훈적인 시도 있다. 「차길시은성돈십영(次吉市隱聖敦十詠)」은 효(孝)․우(友)․목(睦)․노인(老人)․상(喪)․장(葬)․기구(飢口) 등 10수로 구성된 시로서, 길성돈의 우애와 청렴한 행위를 칭송하며 교훈으로 삼도록 권면한 것이다. 「무송정가인(撫松亭歌引)」은 오랑캐의 침입으로 세상의 도가 피폐해졌다는 중국의 고사에 빗대어, 일본의 침략과 그로 인한 유교적 기풍이 상실되고 있음을 개탄한 것이다. 그밖에 「여우과죽림사(與友過竹林寺)」 등의 기행시도 여러 수 있다.

서(書)의 「상노사기선생(上蘆沙奇先生)」은 스승인 기정진에게 보낸 편지로, 학문적 성취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지도를 바라는 글이다. 「상면암최선생(上勉菴崔先生)」은 1905년경 최익현(崔益鉉)에게 보낸 서신으로, 그의 학덕과 언행을 기리고 자신도 그와 뜻을 같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답노순오(答盧順五)」에서는 성리설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는데,

“「심경(心經)」의 「심학도(心學圖)」에는 본심(本心)이 왼쪽에 있고 양심(良心)은 오른쪽에 있다고 하는데, 양심은 곧 본심이므로 두 마음을 나누는 것은 반드시 정(靜)과 동(動)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같이 두는 것은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답이선경(答李宣景)」이나 「답하치구(答河致九)」 등에서도 경서나 사서(史書)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잡저도 서신이 대부분으로, 주로 자신의 제자나 친구에게 언행을 바르게 할 것을 바라는 교훈적 내용의 글이 많다. 서(序)는 문집과 계안(契案)의 서가 많다. 그 가운데 「소의계서(昭義契序)」는 기정진의 고제자인 나도규(羅燾圭)가 죽은 뒤 동문과 제자들이 그의 학행을 사모해 만든 계에 부친 글로서, 유가의 도리를 널리 밝히자고 하였다. 기․발문․비․묘갈명․행장 등을 통해 호남 유림의 동향을 엿볼 수 있고, 한말 기정진 문하생의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한계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강호부(姜浩溥,1690-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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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숙종 16)∼1778(정조 2).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관은 진주(晉州). 자는 양직(養直). 호는 사양재(四養齋)이다. 강진휘(姜晋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덕후(姜德後)이고, 아버지는 시정(寺正) 강석규(姜錫圭)이며, 어머니는 김성급(金成岌)의 딸이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1754년(영조 30) 통덕으로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같은 해 교리를 거쳐 현감으로 나가 크게 치적(治積)을 남겼다.

강호부는 1690년 9월 25일에 태어났다.  6세 때에 아버지 강석규가 별세하자 일가족이 연천(漣川)으로 이사하였다.   8세 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史書)를 질문하였다. 부친의 사망 이후 집안형편이 빈곤하였는데, 팽성(彭城)의 여자를 아내로 취하여 처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일찍이 노모의 봉양을 위한 목적으로 과거에 응시한 적이 있었다. 나이 13세 때 경기도 회시(會試)에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무적(無籍)’이라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무적’은 국적이나 학적 따위가 해당 문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호적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도 쓰인다. 20대 중반쯤 집안의 경제적 여유를 확보한 후에, 한원진을 배알하고 그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726년(영조 2)에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이후 경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한다. 그의 호가 사양재(四養齋)인 것도 이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강호부가 거처하던 방의 편액에서 유래하였는데, 성(性)․기(氣)․재(材)․량(量) 네 가지를 기르고자 하는 강호부의 학문적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 편액(扁額)은 종이, 비단, 널빤지 등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를 뜻한다.

강호부의 학문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마도 스승인 한원진이다. 강호부는 한원진이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를 통해 주자의 초년과 만년설의 동이(同異) 문제를 정리함으로써 500여 년 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주자언론동이고는 주자의 문집 속에 보이는 동일 개념에 대한 차이를 정리한 책으로, 시작한 사람은 송시열이었으나 실제 작업은 한원진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단순히 용어사용의 차이나 기록의 착오 또는 견해의 바뀜을 밝히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주자의 세계관, 고전 해석 방법 등을 깊이 있게 해명한 책이다.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학문적 성취도 한원진으로 말미암아 천명되었다고 보았다. 한원진이

“주자에게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를 빛내기도 하였다”

는 평가는 주자 이래로 이이를 거쳐 권상하에 이르는 도통(道統)의 적전(嫡傳)으로 한원진을 자리매김한 것이다.

강호부가 20대에 한원진에게 사사 받은 것은 어려서부터 그의 학설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강호부는 한원진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부터 당대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대해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이 옳고,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이간(李柬)의 논의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심(心)의 선악문제를 기질의 청탁(淸濁)과 관련시켜 이해하였다. 기질의 청탁이 반반인 사람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으며, 완전히 맑은 기질을 가진 사람은 성인(聖人), 완전히 탁한 기질을 가진 사람은 우인(愚人)이 된다고 하였다. 기질의 맑고 탁함, 순수하고 잡박함은 성인과 보통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며, 기질의 통하고 막힘, 온전하고 치우침은 사람과 사물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 강호부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사람은 인의예지의 성품을 부여받은 존재이고, 사물은 그렇지 못한 존재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만들 때 이 과정에서 오행의 이치가 오행의 수기(秀氣)에 들어가면 그것은 오상(五常)의 성품이 되고, 오행의 ‘수기’에 들어가지 못하면 오상의 성품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오행의 ‘수기’를 얻었느냐 얻지 못했느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강호부는 한원진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들과 고유하였다. 송능상(宋能相)․권진응(權震應)․김근행(金謹行) 등과 학문적인 토론을 하였고, 김용경(金龍慶)․정존겸(鄭存謙)․조엄(趙曮)․이석재(李碩載) 등의 관료들과도 교유관계를 가졌다.

저서로는 문집인 췌언(贅言)과 문장론인 불후방(不朽方) 3편, 역사서인 사유(史腴) 10편, 예서인 상례보유(喪禮補遺) 1권, 학자의 실천을 경계한 하학일과(下學日課) 3권, 연행록인 상연록(桑蓬錄) 4권 등이 있다. 강호부는 일찍이

“성인의 학문은 모두 춘추(春秋)에 있다”

라고 하여 춘추의 사상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그는 역대의 여러 주석들이 경전의 본뜻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춘추의 경문 아래에 역대의 주석을 기재하고 단락마다 정자와 주자의 논의를 적었으며, 정자와 주자의 해석이 없는 경우에는 자신의 해석을 붙여 춘추원류(春秋源流)라고 이름 하였다. 이 책은 100여 편 가까이 되었다고 하는데 탈고하지 못하고 강호부가 사망한 후 잃어버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소론에 속했던 인물로써 여러 차례 정치적 위기를 겪었으나 벼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정조 초에 벼슬길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주기론(主氣論)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 뒤 저술과 후학육성으로 여생을 보냈으며, 편저로는 주서분류(朱書分類)가 있다.

주서분류는 강호부가 주자의 서간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편집한 책이다. 필사본으로 54권 54책이다. 저작 시기는 미상이며,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의 글을 내용에 따라 분류한 책으로, 서문․발문․간기(刊記) 등이 없으며 저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에 강호보 편저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 필사본이 원본인지의 여부는 미상이나 편자의 이름이, 원래 기재되어 있었거나 그 후손이 보관했던 것을 수집할 때 확인했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주서(朱書)에 관한 체계적인 분류의 대작이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주자의 글을 편집한 저서 중에서도 가장 분량이 큰 것이다. 따라서 방대한 양을 내용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학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이 책은 이기(理氣)를 비롯하여 태극(太極)․이기선후(理氣先後)․이자훈의(理字訓義)․천지(天地)․천문(天文)․사시(四時)․혼천의(渾天儀)․역법(曆法)․기수(氣數)․도기(道器)․음양(陰陽)․체용(體用)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의 힘으로 그 방대한 양을 섭렵하여 이처럼 분류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며 그 노심초사의 정력이 집약된 결과이다. 주자서를 이용하는 학자들에게는 길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역사 이래 이런 분류가 드물었다는 데에도 이 책의 가치가 더해진다. 또 주자의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경서․문학 등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이용하기가 대단히 편리하게 되어있다. 한편 동일한 편자(編者)가 편한 24권 8책으로 된 활자본이 성대도서관, 국립도서관, 이대도서관 등에 전해진다. 이 활자본은 1928년 간행되었다. 이 주서분류 중에서 일부분만 뽑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서인-노론계의 주자 도통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일찍이 이 문제를 시도한 이는 송시열(宋時烈)이었고, 이것이 한원진을 거쳐 강호부에게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강호부의 40년에 걸친 노력의 결실이었다.

강정환(姜鼎煥,1741 – 1816)


 

강정환(姜鼎煥,1741 – 1816)                               PDF Download

 

1741(영조 17)∼1816(순조 16).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관은 진주(晉州). 자는 계승(季昇), 호는 전암(典庵)으로 칠원(漆原 :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출신이다. 아버지는 장릉참봉(章陵參奉) 강주제(姜柱齊)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최진망(崔震望)의 딸이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서 17-18세에 문예(文藝)를 겸비하고 식견에 해박하였는데, 스승 김원행이 ‘심시(尋是)’라는 두 글자를 써주고 격려하였다. 성리학에 밝아 이에 대한 저술이 여러 편 있으며, 이직보(李直輔)․김이안(金履安)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향시에 응시하였을 때에 시권(試券)을 보고

“이같이 훌륭한 문장이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유사(有司)의 과실이다”

라고 하고, 특별히 수선(首選)에 올려놓았다. 또한 응제(應製) 때에 정조가 그의 문사(文詞)를 칭찬하고 붉은 보자기로 시권을 싸서 집에 소장하게 하였다. 정조가 영남 선비 가운데 문장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규장각 강의(講義)를 교정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도신(道臣)이 그를 추천하였다. 이 일을 마치자 왕은 쌀과 종이 및 붓을 상으로 주었다.

그는 심경(心經)․근사록․주자대전 등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이황(李滉)의 「천명도(天命圖)」를 토대로 「심성도(心性圖)」와 「대학강령도(大學綱領圖)」 등 고금의 성리설에 관한 많은 도식과 차록(箚錄)을 만들어 성리학에도 이바지하였다. 저서로는 전암문집이 있다.

전암문집(典庵文集)은 8권 4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927년 5대손 강대우(姜大瑀)가 산일되고 남은 저자의 유고를 산정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승규(金昇圭)의 서문이, 권말에 김용진(金容鎭)의 발문이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3에는 시 399수, 권4에는 서(書) 41편, 권5에는 서(序) 10편, 기(記) 14편, 발(跋) 3편편 , 잠(箴) 1편, 명(銘) 2편, 권6은 제문 6편, 애사 2편, 축문 4편, 상량문 2편, 행장 4편, 행록 1편, 유사 1편, 묘지명 2편, 권7은 잡저 11편, 권8은 부록으로 행장․가장․묘갈명․사우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詩)에는 곤양(昆陽) 통영(統營) 진해(鎭海)의 정부(貞婦) 3인의 행적을 읊은 시, 1812년 4월 정주성(定州城) 화공(火攻)으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진압된 것을 기뻐하며 지은 시와, 명(明)나라가 후금(後金)을 칠 때 원병으로 나가 활동했던 강홍립(姜弘立)과 김응하(金應河)의 전기인 강로전(姜虜傳)과 김장군전(金將軍傳) 그리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기록인 강도록(江都錄)과 남한록(南漢錄)을 읽고 감상을 읊은 시 등이 있다. 시 가운데 강연에서 여러 문인에게 칠언시로써 성리설을 논한 것이 있다. 그 제목은 「중용천명지인물동(中庸天命之人物同)」․「맹자견우인성인물부동(孟子犬牛人性人物不同)」․「미발(未發)」․「이발(已發)」․「심(心)」․「성(性)」․「정(情)」․「의(意)」․「지(志)」․「청명기(淸明氣)」․「잡류기(雜類氣)」․「변화기(變化氣)」이다.

또한 오언시로써 13변(辨)을 지어 제생(諸生)들에게 보인 것이 있는데, 「본연기질변(本然氣質辨)」․「성유선악변(性有善惡辨)」․「신심일정이불부소식변(身心一定而不復消息辨)」․「기질형질변(氣質形質辨)」․「심여기질변(心與氣質辨)」․「인물성부동변(人物性不同辨)」․「성범심부동변(聖凡心不同辨)」․「일원이체변(一原異體辨)」․「미발이발본연기질변(未發已發本然氣質辨)」․「이기단지겸지변(理氣單指兼指辨)」․「본연편전변(本然偏全辨)」․「일원지분수변(一原之分殊辨)」․「분수지분수변(分殊之分殊辨)」 등이다.

서(書)에는 스승 김원행(金元行)에게 제례(祭禮)에 대해 17조목으로 문의한 것이 있다. 또한 이정인(李廷仁)과 성리설을 논한 것이 여러 편 있다. 잡저에는 「대학격치장강의(大學格致章講義)」․「미호선생어록(渼湖先生語錄)」․「성리차록(性理箚錄)」․「성리후설(性理後說)」․「대학강령도(大學綱領圖)」․「성범개구명덕도(聖凡皆具明德圖)」․「심성정도(心性情圖)」․「천명성부잡기품도(天命性不雜氣稟圖)」․「간서차록(看書箚錄)」이 있다. 특히 「성리차록」은 성리학의 여러 논제들에 대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 있다. 이와 같이 저자는 시나 그 밖의 글들에 있어서 경학 및 성리학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전암문집(典庵文集)이 있다.